예레미야 19:14~20:6절/담대한 선포, 위태한 목숨(179/290)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정직하고 바르게 선포가 되어야 할 곳이 성전이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고 바르게 선포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선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타락한 시대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정직하고 바르게 선포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사역하는 자들이 아닌 성전 밖에서 사람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였다. 그러면 성전의 권력자들은 언제나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성전 밖에서 말씀을 받은 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괴롭히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1.예레미야는 힌놈의 골짜기에서 저주의 말씀을 선포했다. 힌놈으 골짜기가 축제하는 장소가 아니라 살육의 골짜기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힌놈으 골짜기가 살육의 골짜기가 되는 것은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었기 때문에 살육의 골짜기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힌놈의 골짜기에서 선포한 그 말씀을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선포를 하였다(14,15).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가장 안전한 장소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성전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만 해도 안전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것인가를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전 뜰에서 재앙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면서 깨닫게 하신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한 말씀을 힌놈의 골짜기에서 선포했던 그 말씀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실 때 힌놈의 아들 골짜기나 예루살렘 성전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집을 버렸다. 쓰레기와 악취가 풍기는 그 집에서 더 이상 경배를 받을 수 없기에 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시대, 교회는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교회는 이 시대의 마지막 희망의 장소다. 그런데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가 되지 않고 있다면 교회는 더 이상 희망의 공동체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심판이 임한다면 가장 먼저 교회에서부터 임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대가를 먼저 치르게 될 거이다. 과연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긍휼이 살아있는가?]
2.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재앙의 말씀을 선포하자 그 말씀을 가장 불쾌하게 생각한 사람이 성전 관리자인 제사장 바스훌이었다(1).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제사장에게 최고의 권세와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러기에 예레미야도 성전에서 재앙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고, 두려움이었다. 과연 지금 내가 성전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께서 왜 성전의 지도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시지 않고, 나와 같이 변방에 있는 자에게 말씀을 주셔서 성전에서 선포하게 하신 것일까? 이러한 영적인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전에서 말씀을 전했다. 사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전한 것이다.
성전의 지도자인 바스훌은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신 재앙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불코해하게 생각을 했다. 성전의 권력자들은 굴러 들어온 예레미야를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세상 권력자들에게 두들겨 맞고 투옥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와 같은 동료 제사장인 바스훌에게 냉혹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사람 중에 가장 못된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될 때에는 두려워 떨 것인데, 바스훌은 재앙이 임박했다는 예레미야의 선언을 듣고 더 악해졌다. 바스훌은 자신의 불신앙의 가면을 가리운 채 예레미야 선지자를 때리가 감금해 버렸다(2). [하나님의 입을 막으려고 한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막으려고 했던 많은 시도들이 이었지만 언제나 하나님은 자신의 일꾼들을 보호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용감하게 끝까지 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소리가 듣기 싫거든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다. 듣기 싫다고 내 귀를 막으면 그 소리는 내가 막은 귀를 뚫고 더 강력하게 들어올 것이다.]
3.바스훌의 군력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살아지게 될 것이다.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금했다고 풀어주었다. 이렇게 위협을 함으로 더 이상은 이 성전에서 내 뜻을 거스르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입을 막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3.4). 하나님께서는 바스훌의 이름을 마골밋사빕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 이름의 뜻은 ‘사방의 두려움, 사방에서 오는 공포’라는 뜻으로, 두려움이 그를 둘러싼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그를 둘러싸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는 두려운 일로 인하여 도망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만 두려운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를 둘러싼 두려움이 그를 심판할 때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자들도 함께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스훌의 가족들, 그리고 그와 함께 한 거짓 예언자들, 그리고 그를 통해서 평안하다는 말에만 귀를 기울였던 자들도 모두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복’의 대명사였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며 복의 통로가 되어야 했던 바스훌은 ‘두려움’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악한 시대에 선지자의 고난은 그 메시지의 참되다는 것을 입증한다. 반대로 악한 자들의 평강은 그 메시지가 거짓되다는 것을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