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 무학사
포항 기계면 문성리 무학사, 불교에서 흔히들 하는 말로 ‘인연’이 닿지 않으면 오기 힘든 절집이다. 물어물어 찾아온 절집엔 서걱거리는 가을 햇살과 ‘소리’만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작은 절집엔 마당으로 쏟아지는 메마른 햇살과 간간이 댕댕거리는 풍경 소리, 뒤란 숲에서 뒤척이는 바람의 울음소리뿐이다. 주인도 나그네도 없이 그대로 선정에 든 무학사는 쓸쓸하고 적막하게 숨어있다.
홀로 가을 햇살과 희롱하다가 싫증이 난 나그네는 하늘과 구름, 푸른 산을 내려다본다. 무학사는 높은 곳에 자리하지는 않아도 앞이 트여 바라보는 눈맛이 좋다. 무학사와 함께 이대로 선정에 들어도 좋으리...
무학사를 오르는 산길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다투어 피어나 땀에 젖어 지친 나그네의 마음을 조금은 위로해 준다. 무더기로 깔려있는 꿀풀이며, 향기가 유난한 찔레꽃, 금꽃, 은꽃, 인동초, 순결의 꽃 으아리가 한껏 향기를 자랑하는 이곳은 꽃향기, 풀향기가 진동하는 산길이다. 봄 벚꽃이 피는 날은 그야말로 꽃눈이 내려 절이 보이질 않을 정도이다. 아름다운 벚꽃 향기에 취한 벌들의 날개짓 소리와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봄빛이 더욱 눈부신 곳이다.
임허사는 최근 중건된 것으로 보이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요사가 있는 비교적 단출한 사찰이다. 100년 전 창건 당시 지어졌다는 요사는 흙벽을 벗고 아담한 한옥 건물로 변하였고 절집 주위에 둘러진 대나무 담장과 산자락에 같이 자리한 향교만이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는 듯하다.
불교는 6년 동안 고행하신 부처님이 어느 날 아침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별을 보고 홀연히 깨달으신 후, 그 깨달음을 사랑으로 보이신 것이 불교의 시작으로,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목적을 향해 노력하는 종교이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깨달음만을 위해 중생구제를 소홀히 한다면 이는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리라. 그런 면에서 임허사는 도심 속 대중 사이에서 수행과 포교의 양쪽 수레바퀴를 열심히 돌리며 부처님 말씀을 실현하고 있는 사찰이다.
깨끗하고 너르게 조성된 대웅보전에선 영가의 극락왕생을 위한 스님의 독경소리가 은은히 들리고 주변의 소란함을 누르려는 듯 맑고 향기로운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다. 임허사는 도심 속 사찰로 대중들이 쉽게 편하게 드나들며 기도할 수 있게 24시간 개방된다고 한다.
경북 포항시 천곡사
선덕여왕이 평소 원인을 모르는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다가 지금의 천곡사가 자리한 천곡령(泉谷嶺)을 찾아가 약수로 며칠 간 목욕하였더니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감동한 선덕여왕은 경주로 돌아가자마자 자장 율사에게 명하여 천곡령에 사찰을 짓게 하였고, 자장 율사는 창건 불사를 마치고 천곡사라 했다고 전한다.
이때의 약수가 지금 경내의 우물로 <석정(石井)>, 혹은 <소천(素泉)>으로 부르는 샘물이라고 하는데, 이 우물은 신기하게도 정월 대보름이면 물이 용솟음을 쳤으며 가뭄이 아무리 극심해도 물이 마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또한 우물물은 스스로 자정력(自淨力)을 보이고 있는데, 날씨가 차가워지면 뿌얘졌다가 따뜻해지면 2.2m 우물 밑바닥의 모래알 하나하나를 셀 수 있을 만큼 수정같이 맑아진다고 한다. 지관(地官)들 말에 의하면 이 물은 음과 양을 함께 겸비한 음양수(陰陽水)라고.
도음산 자락의 천곡사 계곡은 천혜의 자연 보고로 알려져 있다. 천곡사 계곡에서는 2001년 고란초 군락지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고란초는 약수가 흐르는 벼랑에 청초한 자태를 드러낸다.
천곡사 아래 1.2km 거리에 이르는 계곡에서 발견된 수백 포기의 대규모 고란초 군락지는 95년 환경부가 고란초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거제시 하청면 자생지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된다. 고란초는 해마다 그 수가 줄어들어 멸종 위기 식물 제9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충남 부여읍에 있는 고란사(皐蘭寺) 뒤의 절벽에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경북 포황시 죽림사
지금의 죽림사는 신라시대 창건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1809년(순조9년)에 중창되었다. 한때 신라시대에는 봉비산(鳳飛山)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그 아래 한 구역에 빈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 당시의 죽림사 자리로 추정한다.
1929년 기록된 죽림사 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때 원앙부인이 수도(修道)를 닦던 도량으로 그 아들 안락국이 대도를 깨달은 자리이기도 하다. 이에 하늘이 이 자리를 비추니 운이 크게 통하여 이르렀다. 19세기초에 다시한번 중창한 후 120년만인 1929년에 다시 중수하기에 이르렀다.
정묘년(1927년) 팔월에 주지 김노성 법명 용연 스님과 당시 면장 권전근이 뜻을 세워 신도 여섯이 불교 기성회를 조직하여 선남선녀 다수가 모금함으로써 초옥 다섯 칸을 사들였다. 이에 불교협회를 성립하고 당시 본사였던 기림사의 칠성각 재목을 양도받아 동해선으로 운반한 후 신도들이 모금하여 법당을 중수하였다. 1929년 1월 12일에는 중수공사를 시작 그해 6월 12일 상량(上梁)하였다.
이상화 주지스님이 다시 중수 불사하였으나 포교당으로써 너무 협소하여 1980년 중창불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도로(道路)로 편입된 사답(寺畓)을 보상받아 대웅전과 유치원 건물을 새로 건립하였다. 1996년 삼성각을 신축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북 포항시 고석사
창건 설화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어느 날 세 줄기 서광이 3일 동안 궁전을 비추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어 즉시 서광이 발하는 곳을 찾기 위해 국사인 혜능 스님에게 부탁하였다. 혜능 스님이 그 곳에 가보니 지금의 고석사 자리에서 땅 속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바위가 솟아 서기를 발하고 있어 돌아가 왕에게 그대로 알렸다.
왕은 이를 상서로운 기운이라고 신이하게 여겨 왕명으로 보광전을 지어 고석사를 창건하게 했다. 그리고 오래된 바위에서 서광이 발하였다하여 절의 이름을 고석사라 칭하고, 석불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였으니 약사여래불이며 법당은 보광전이라 하였다. 또한 뒷산 기암괴석이 동해를 바라보며 솟아 있어 망해산이라 불렀다. 고석사와 같은 시대에 있던 석남사터와 남파 대사의 비석이 서쪽으로 약 2㎞ 위치에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의 연혁은 전하는 바가 없고, 단지 한 때 고석암(古石庵)이라 불렀다는 말이 전할뿐이다. 최근에는 1992년부터 성대(惺大) 스님이 주지로 주석 중인데, 2000년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에 맞배지붕을 한 지장전을 지으며 오늘에 이른다.
공사중이라 차량은 출입금지 급경사 거리는 약 700m 포기
백률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절의 대비관음상은 중국 장인(匠人)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 소상(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관음상에 얽힌 영험이 693년(효소왕의 일로써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어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률사는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528년(법흥왕 15) 창건되었고, 신문왕대에 중창되었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 1378년(우왕 4) 경주 부윤(府尹) 윤승순(尹承順, ?~1392)이 서루(西樓)를 중수하고 요사 2동과 회랑 및 문 등을 중건했다. 윤승순은 고려의 무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377년 계림 부윤으로 있을 때 왜구를 무찔러 이 지역을 안정시켰고, 뒤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이르렀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하여졌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410년(태종 10) 일선(一宣)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으나 이후 1604년(선조 7) 부윤 이시언(李時彦)으로 도움으로 법장(法莊)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고 그 북쪽에 요사를 지었다.
그 뒤 1786년(정조 10) 부윤 김이용(金履容)의 도움으로 선감(善鑑) 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였는데, 이 대웅전은 현재 경상북도문화재자료 등록 되어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886년(신라 헌강왕 12)에 창건했으며, 경주시 남산에 있는 여러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삼국사기》에 ‘헌강왕과 정강왕의 능이 보리사의 동남쪽에 위치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왕릉의 위치를 정하는 기준이 될 정도로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이후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911년 보경사(寶鏡寺) 비구니 박덕념(朴德念)이 중창하고, 1932년 비구니 남법명(南法明)이 중수하였다. 1977년에는 비구니 추묘운(秋妙雲)이 불사를 시작하여, 1980년 대웅전과 선원·요사채 등을 세우고 비구니 사찰로 만들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신각·선원·종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보리사석불좌상과 마애불이 유명하다.
그 중 보리사석불좌상은 경주 남산에 있는 불상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총 높이 4m, 불상 높이 2.35m, 광배 2.7m로 앞에는 당초문과 보상문·화불 등의 무늬를 새겼고, 뒷면에는 약사불을 좌상으로 조각하였다. 주존불의 수인이 항마촉지인이라 석가모니불로 볼 수도 있으나, 뒷면에 동쪽의 부처인 약사불을 배치한 것으로 보아 앞쪽은 서쪽의 부처인 아미타불로 보는 것이 옳다. 보물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절 남쪽 산허리로 난 오솔길을 따라 35m쯤 가면 바위에 새긴 마애석불이 있다. 1.5m의 좁은 감실 안에 90cm 크기로 새겨진 이 불상은 조각이 거칠고 아래 부분이 생략되어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 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경북 경주시 연지암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뻗은 7번 국도를 타고 가면 경주 괘릉이 나온다. 괘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괘릉은 『우리 문화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씨가 “한 마디로 경주에 있는 1백55개 고분 중 능묘 정원이 가장 아름답고, 그 능묘 조각은 통일신라 리얼리즘 조각의 진수”라고 해서 더욱 알려진 곳이다. 그리고 무덤 주변의 세워진 석상들 가운데 무인석(武人石)은 신라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서역 사람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더욱 유명하다.
이 괘릉 안쪽에는 활성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고, 마을 초입에는 오랜 세월 산이 깎여 언덕이 된 자리에 단아한 모습을 한 연지암이 나그네의 발길을 반갑게 맞이해 준다.
연지암 대웅전에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6호로 지정이 된 석조 약사여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일제 말엽 이 절의 창건주 김연지화 보살의 꿈에 현몽을 하고 노천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내어 연지암으로 모시고 왔다. 이를 안 일본군이 어디서 훔쳐왔느냐며 연지화 보살을 고문하기 시작했는데, 보살을 고문한 그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약사여래 부처님은 얼마나 영험한지 사업 성취, 학업 성취, 아픈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나 와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동네는 150여 가구가 모여 사는데 유일하게 교회가 하나도 없으며 당연히 기독교인도 한 사람 없는 모두가 불자 마을이라고 한다.
경북 경주시 보덕암
보덕암은 신라 경순왕(927~935) 대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관음전 옆 동굴에서 경순왕이 적을 피해 목숨을 구하였다고 해서 구국암(救國庵)으로 불렸다고 구전으로 전한다. 지금도 동네 노인분들은 구국암이라고 해야 알아듣는다고 한다.
보덕암의 보덕(報德)은 관세음보살의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로 한량없는 중생들이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당할 때 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케 하신다는 구세보살(救世菩薩)이시다.
대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의 좌우 협시보살로 머리에 아미타불의 화신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이나 보병을 들고 중생의 근기에 따라 나타나시는 보살로 무소불위의 위신력과 한량없는 자비심을 신뢰하여 다양한 모양의 형상과 조각상을 만들어 경배한다.
동축사 계단을 오르다 힘들어 포기 계단에서 거리 약 700m
울산광역시 동축사
동축사는 울산지역의 고찰로서 신라의 불국토사상이 반영된 성지이다. 신라 진흥왕과 인도(西竺) 아육왕의 정신적 만남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아육왕이 배에 실어 보낸 석가삼존불의 모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라는 연기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동축’이라는 이름에서도 이곳이 범상치 않은 불국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불국토의 고향인 인도가 서쪽의 나라이기에 서축(西竺)이라 하였듯이 이와 대비되는 이름으로써 동축(東竺)이라 칭하였던 당시 신라 불국토사상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신라에 석가모니 과거불 시절부터 7처(處)의 절터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불연국토라는 사상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인도 아육왕을 이상으로 삼아 그의 족적을 쫒으려는 진흥왕시대 신라 불교문화의 부흥과도 연결된다. 이곳 동축사에 올라 섬암 주변의 해묵은 송뢰(松籟)를 들으면, 멀리 불국토의 이상을 구도하던 진흥왕과 아육왕의 만남이 느껴진다.
또한 해안지역의 지리적인 위치와 마골산(麻骨山)이라는 산이름은 관음이 사는 백화산이 연상되듯, 동축사는 관음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도심에서 벗어나 심신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 이곳에 올라 해뜨는 동해를 바라보면 아름다운 경관을 맛 볼 수 있다.
일찍이 동축사가 자리한 이곳은 울산 동면8경 중 축암효종(竺岩曉鐘)ㆍ섬암상풍(蟾岩霜楓)이라 하여 시인묵객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다. 특히 동축사 정상의 관일대(觀日臺)는 섬암이라 하여 동축사의 종소리와 함께 해뜨는 동해바다를 조망할 수 곳으로 유명하다.
울산광역시 월봉사
월봉사는 930년(경순왕 4) 전국의 승려들에게 계율을 가르치고 법도를 시행했던 성도(聖道) 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연혁은 전하는 기록이 없어 살펴볼 수 없으며, 병화(兵火)와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중창을 거듭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700년(숙종 20)에 중창을 했으며, 이어 1773년(영조 49)에도 중창이 있었다. 근래에는 1919년 조완해(曺玩海) 스님이 화주가 되어 신중탱을 조성하고 1936년에는 석가모니후불탱을 조성하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석가모니후불탱에 일본인 기무라(木村友治朗)를 비롯하여 일본인이 주체가 된 단체로서 임겸상점(林兼商店) 사원 일동이 시주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상운(象雲)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1991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삼성각ㆍ범종각ㆍ요사 등 현존 당우(堂宇)들을 모두 재건하였으며, 1992년에는 유치원을 건립하는 등 대중포교의 선봉으로 사격(寺格)을 일신하였다.
울산광역시 백양사
울산의 진산(鎭山) 함월산에 자리한 백양사는 932년(신라 경순왕 6) 백양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천년의 고찰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산 속에 자리하고 있어 고찰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으나, 도시의 확장으로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풍상을 거듭한 고찰은 도심 속으로 이끌려 나오게 되었다. 이로써 고졸한 맛은 사라졌지만 대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
특히 1920년대에 비구니 보현(普賢) 스님은 퇴락한 백양사를 일으켜 세운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며, 1929년에는 근현대의 고승인 경봉(鏡峰) 스님이 사찰의 주지로 주석하기도 하였다.
현재 가람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칠성각, 산신각, 범종각, 응향각, 감로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창건주 백양조사의 부도가 사역의 서쪽에서 백양사를 지키고 있다.
울산광역시 도솔암
도솔암이 자리한 이곳은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월성이씨인 이종준 일가의 민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다. 그러던 것을 당시 울산 병영에 살던 김복선(金福善)ㆍ 김수화(金守化) 두 자매가 집을 인수하여 수행을 시작한 것이 도솔암의 시초가 된다.
두 자매는 당시 금강산 건봉사에 머물고 있던 김상생(金上生) 스님을 모시고 와서 출가하여 김복선은 아일다(阿逸多), 김수화는 성련(性蓮)이라는 법명을 받고 본격인 포교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 두 비구니는 울산 병영에 있던 민가를 옮겨와 대웅전으로 고쳐 지었는데, 1980년대 대웅전을 신축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정축년(丁丑年)’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정각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그 시기는 1937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 볼 때 1937년을 도솔암이 처음 설립된 연대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 후 1977년 10월에 정각(正覺) 스님이 아일다ㆍ성연 스님으로부터 사찰을 인수하여 1985년부터 1991년까지 퇴락한 사찰을 중수하였다. 이 시기에 대웅전 과 무량수각ㆍ요사를 비롯하여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삼층석탑 등을 건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울산광역시 옥천암
옥천암에 대한 연혁은 절 입구에 세워져 있는 사적비와, 사중에 전해오는 중수기 및 법당 중수 시에 발견되었던 법당상량문 등을 통해 비교적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창건은 931년(신라 경순왕 5)에 이루어졌는데, 창건주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창건 당시에는 산 아래에 다섯 봉우리가 있어 오봉사(五峰寺)라 불렀는데, 그 후 무룡산 준령의 심층에서 석간수(石澗水)가 용출하여 옥천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중수기에 의하면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1375년(고려 우왕1) 원음(圓音) 화상의 중창이 있었고, 1688년(숙종 14) 덕찬(德贊)ㆍ덕오(德悟) 두 선사가 중건한 바 있으며,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인근 내상면의 단월(檀越)들이 계를 조직하여 사중의 불량답(佛糧畓)을 마련하고 노전 및 응향각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연혁은 최근 법당을 중건할 때 1792년(정조 16)에 쓴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상량문의 기록에 따르면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도병마우후(慶尙左道兵馬虞候) 김공(金公)이 초암(草庵)을 지어 전란을 피했으며, 그 후 운수납승들이 초암을 지키다가 1696년(숙종 22)에 신환(愼環) 스님이 중창하고 이어 1718년에 행림(幸林) 스님이 다시 중창하였다.
이후 1737년(영조 13)에 원회(元晦)ㆍ찬민(贊敏)ㆍ수맹(守孟) 스님 등이 안세도(安世道)의 시주로 중수하였으며, 1792년에는 초연(楚演)ㆍ지성(志性) 스님이 문성덕(文聖德)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고 적혀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주지 김종순(金鐘淳) 스님이 1925년에 중수하였고, 1977년 주지 포암(泡庵) 스님이 법당을 중수하고 삼성각을 중건하였으며, 1990년에 지금의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울산광역시 해남사
구하천보(九河天輔, 1872~1965) 스님은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까지 거의 한 세기를 사신 통도사의 고승이다. 시호는 취산(鷲山)이며, 경북 울주군 두동면 봉계 출신으로 어려서 유교 경전과 사서(史書)를 통달하였다. 13세가 되던 1884년 양산 내원사 주관(主管)스님에게 출가하여, 경월(慶月)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예천 용문사를 비롯한 여러 절을 돌며 교와 선을 참구하였고, 다시 통도사로 돌아가 명진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으며, 이후 통도사 주지와 중앙학림 교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도제 양성에 힘썼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고 대한승려연합회 대표자 12인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유교와 한시ㆍ서예에 조예가 깊어 유학자들과도 교류를 나누면서 많은 한시와 유묵 등을 남기고 있다.
자재(自在)한 운필(運筆)을 특징으로 하는 구하스님의 글씨는 세수 94세, 법랍 81세로 입멸에 들기까지 오랜 기간을 주석하며 수행에 전념했던 통도사 <적멸보궁>, <명부전>ㆍ<개산조당>ㆍ<삼성각>ㆍ<전향실> 편액을 비롯하여, 하동 쌍계사 <화엄전>ㆍ<삼성각>ㆍ<영모각>, 양산 내원사 <선해일륜>ㆍ<심우당>, 남해 용문사 <대웅전>ㆍ<명부전>ㆍ<적묵당>ㆍ<용화전>, 의성 고운사 <삼성각>, 경주 불국사 <극락전>, 청도 운문사 <오백전>ㆍ<전향각>, 장성 백양사 <칠성전> 편액 등 주로 경상도 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울산광역시 관음사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 스님이 당나라 유학길에서 돌아와 발길이 닿은 불국토 태화동에는 태화사(太和寺)의 후신인 관음사가 있다. 태화사(太和寺)는 자장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백 여분의 불사리를 분산하여 봉안한 세 사찰 중 하나로, 황룡사ㆍ통도사ㆍ태화사로 이어지는 신라의 대찰로 알려져 있다.
먼 옛날 뱃길을 따라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고 도착한 자장스님은 이곳 태화사에서 국민의 안락을 위해 끊임없이 무릎을 조아렸을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은덕이 이곳 신라의 영원하기를 기원하며…. 현재 그 터는 폐허가 되어 자취를 알 수 없으나, 태화사 십이지상 부도가 출현한 부도골에는 관음사라는 기도처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도심에 있지만 때 묻지 않아 정갈한 멋 풍기는 관음사에오늘도 자장의 염원 속에 불은(佛恩)을 바라는 이들이 찾아오누나 관음보살 관음보살 부르며 부처님께 머리 조아리는 보살들그들은 먼 옛날 신라의 자장처럼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리라
울산광역시 문수사
문수사는 646년(신라 선덕왕 15) 자장(慈藏)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상세한 기록은 알 수 없다. 다만 문수사에 관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내용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피은(避隱)’편에 「연회도명문수점(緣會逃名文殊岾)」이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하여, 사찰의 창건을 짐작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신라 원성왕 때 영취산 주위 토굴에 연회(緣會) 스님이 은거하면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 지는 날이 없었다. 원성왕이 이 사연을 듣고 스님을 국사로 봉하려 하자, 스님은 이를 거절한 채 암자를 등지고 길을 떠나다가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변재천녀(辨財天女)를 만나게 되었다. 이에 인연을 어길 수 없음을 깨닫고 국사가 되었으며, 그 후 문수보살을 만났던 곳에 암자를 지어 문수암(文殊庵)이라 하고 변재천녀를 만났던 곳에 보현암(普賢庵)을 지어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문수사의 연혁을 전하는 기록을 살필 수 없으나, 조선시대 들어 1799년(조선 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으로 이안되어 있는 칠성탱이 1855년(철종 6)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불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작은 암자로 이어져 오던 문수사는 근래 들어 1984년 청하(淸霞) 스님의 중창으로 새로운 변모를 하였는데, 롯데그룹 신격호(辛格浩) 회장과 신도들의 시주로 대웅전과 보현대ㆍ범종루 등을 신축하여 오늘날의 모습으로 일신한 것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극락전, 보현대를 비롯하여 범종루ㆍ삼성각ㆍ종무소ㆍ요사 등이 있다. 특히 이 사찰에 불공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불공을 드리는 신도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울산광역시 내원암
내원암은 신라중기에 대원사(大原寺)의 부속암자로 고봉선사(高峰禪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대원사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나 『범우고(梵宇攷)』 등에 “울산군 불광산에 있다”고 적고 있어 17세기까지도 법등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원사의 부속암자로 창건된 후 신라불교가 융성했던 시절, 온양읍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사사구암(四寺九庵)’의 하나로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밖에 내원암과 관련된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어 조선시대까지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칠성계를 조직하여 1919년에 칠성각을 새로 짓는 불사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내원암에 현존하는 자료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칠성각창건기(七星閣創建記)」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16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칠성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당시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25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사찰의 일부분이 불에 타고 말아, 덕봉(德峰) 스님이 이 무렵을 전후하여 30여 년간 사찰에 머물면서 복원불사에 힘썼다. 근래에는 1993년에 대웅전, 1994년에 수세전(壽世殿)을 새로 지었으며, 2002년에는 종선(宗船)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지장전을 건립하였고 2003년에 삼층석탑 건립과 2004년에 2동의 요사 신축 등으로 현재의 가람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첫댓글 _()_()_()_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좋은날만 되십시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