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부는 동학(東學)의 바람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박맹수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2014.03.05-
1.머리말
1980년 5월 당시 육군 중위(中尉) 신분으로 ‘광주민중항쟁’을 겪은 뒤에 굴곡진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1983년부터 동학(東學)에 대해 연구한 지 올해로 만 30년을 맞이했다. (‘광주민중항쟁’과 필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졸고,「5월광주가 나에게 남긴 것」,『녹색평론』88호, 2006년 5-6월호, 40-51쪽 참조) 필자가 처음 동학 연구에 뜻을 두고 공부를 시작했을 때 취했던 연구 방법은 첫째 동학 의 유적지 및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일일이 발로 찾아 현장을 확인하는 일, 둘째 전국 각지에 흩어진 채 숨겨져 있는 갑오년 당시의 사료를 찾아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는 일, 셋째 동학교도 및 동학농민군 후손을 만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증언을 청취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일 등이었다. 이 같은 방법은 시간과 노력, 체력, 그리고 비용 등이 많이 드는 것이었으나 오랜 세월의 탄압 속에서 묻혀버리고 흩어져버린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 및 그와 관련된 원(原) 사료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업이었다.
연구자들 사이에 ‘노다공소(勞多功小),“ 노력은 많이 드나 성과는 크지 않다는 뜻)’로 치부되던 위와 같은 방법으로 연구를 계속하는 가운데, 동학사(東學史)는 물론이거니와, 한국근현대사(韓國近現代史)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에 대한 연구로 1996년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97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일본 측 사료를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논문을 써서 2001년에 다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필자가 동학공부를 시작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전(全) 세계적인 ‘한류(韓流)’ 붐과 함께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의 사상과 철학 등 이른바 ‘한국학(韓國學)’이 세계인의 높은 관심과 주목을 끌고 있다. 주지(周知)하듯이, 한국 김치가 세계인의 음식이 된지 이미 오래이며, 지난 해(2012년 12월 5일, 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 7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는 우리의 아리랑이 인류무형유산(세계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가 최종 확정됨으로써 세계 모든 사람들의 노래가 될 날도 머지않게 되었다.
2. 세계에 부는 동학의 바람
‘한국학'의 한 분야인 동학사상 및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세계적 관심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실례(實例)를 들어 보기로 한다.
먼저,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사회의 동학 연구 붐부터 보기로 하자. 일본에는 1989년 11월에 교토(京都)에서 출범한 세계적 학술 조직인 ‘교토포럼’이란 단체가 있다. 이 교토포럼은 창립 당초부터 노벨상을 수상한 세계적 석학(碩學)들을 모시고 21세기 인류가 지향해 가야 할 철학을 창조해 가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 같은 새로운 철학을 창조해 가는 학문운동을 ‘공공철학(公共哲學)’ 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교토포럼은 2009년 8월과 11월에 두 차례에 걸쳐 동학(東學) 사상 및 동학의 개벽(開闢)사상을 주제로 한국의 동학 연구자들을 대거 초청하여 포럼을 개최하고, 그 내용을 교토포럼 측의 학술저널인『공공적 양식인(公共的 良識人)』을 통해 세계 2천 여 명의 석학(碩學)들에게 소개했다. (『제 91회 공공철학교토포럼: ‘한’과 동학과 생명-그 공공철학적 의의를 묻는다』2009년 8월, 일본 교토 리가로얄호텔 및『제 92회 공공철학교토포럼: 새로운 다차원적 자타관계의 개벽과 그 주체로서의 志民의 형성』, 2009년 11월, 일본 고베 포토피아호텔) 교토포럼을 통해 동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소개되고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 불고 있는 동학 바람은 또 있다.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자대학(奈良女子大學) 명예교수는 ‘동학농민군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이란 답사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매년 일본의 시민운동가들과 함께 한국 각지의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답사를 해 오고 있다. 7회째인 지난 해(2012년) 10월말까지 ‘동학농민군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에 참여한 일본인이 이미 150명을 넘었으며, 이 답사 여행에 참여한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다양한 형태로 동학의 핵심사상은 물론이거니와 동학농민혁명의 참된 역사와 그 진정한 의미를 일본사회에 널리 확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답사여행에 참여했던 일본인들에 의한 학술적 성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고베시(神戶市)에 있는 한국연구 시민단체인 ‘무궁화모임’에서는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 기념 저서로 한국에서 간행된 바 있는『동학농민혁명 100년』(도서출판 나남, 1996)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2007년에 간행하였는데, 이 책은 그 해 일본도서관협회 추천 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또 교토부(京都府) 마이즈루시(舞鶴市)의 시민단체인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순난자를 추모하는 모임’에서는『만화로 보는 동학농민혁명』일본어판을 지난 2012년 6월에 간행한 바 있다. 2009년의 ‘제 4회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에 참가했던 일본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가운데 1인인 카와다 히로시(河田 宏) 씨는 한국의 동학농민혁명(1894년)과 일본의 치치부농민봉기(秩父農民蜂起, 1884)를 함께 다룬 『민란의 시대(民乱の時代)』(2011년)라는 저서를 펴내어 일본 지식인사회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올해 들어와서는 일본의 초중고 역사교사와 지리교사 수만 명이 애독하는 학술지『역사지리교육』800호(2013년 2월호)에는 작년 10월에 시행한 ‘제 7회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에 참가한 일본인 역사교사가 ‘무장 동학농민군 기포 기념비’ 사진을 포함한 기행문을 연재한 바 있다.( 첨부 자료사진-1 참조)
다음으로 중국(中國)의 경우를 보기로 하자. 필자는 2005년 가을에 중국 산동성 위해시(威海市)에 있는 ‘국립 갑오중일전쟁 박물관’ 초청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 11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여 <제 1차 동학농민혁명과 농민군의 동향>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한 적이 있으며, 2006년 여름에는 북경(北京)에서 중국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 학자들과 동학사상을 주제로 학술교류를 한 적이 있다. 북경에 있는 민족대학 김경진 교수, 북경대의 김훈 교수 등 조선족(朝鮮族) 출신 학자들은 물론이려니와 중국인 학자들의 동학사상 및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으며, 또 2009년 여름 상해(上海) 복단대학에서 있었던 국제고려학회 주최 ‘제 9차 코리아학 국제학술토론회’ 때도 그 열기는 계속 이어졌다. 상해에서 열린 코리아학 국제학술토론회에서 필자는 한국 근대 민중종교의 선구(先驅)를 이룬 동학 및 그 동학으로부터 지대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원불교(圓佛敎)에 대해 소개했는데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코리아학(=한국학)’ 연구자들로부터 질문 공세를 받았다. 참고로, 전북 정읍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에서는 한국의 동학농민혁명 기념관과 중국의 태평천국혁명(太平天國革命) 기념관 사이의 정기학술교류를 통해 중국에 동학사상 및 동학농민혁명 바람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첨언(添言)해 둔다.
그렇다면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권 바깥에 있는 나라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영어권에서는 일찍이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을 지낸 벤자민 윔스(Benjamin Weems) 씨가 1955년에 미국 애리조나대학에서 <<Reform, Rebellion, and Heavenly Ways; 개혁, 반란, 그리고 天道>>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통해 동학을 소개한 이래, 재미동포 학자인 김용준 박사에 의해 한국의 동학사상이 미국 지성사회에 널리 소개된 바 있다. 이 덕분에 최근 미국 또는 캐나다 등지에서는 한국 고유 종교를 대표하는 동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가 그의 최근 저서에서 동학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미국에서도 지난 2009년에 폴 베린(Paul Beirne)에 의해 <<Su-un and His World of Symbols: 수운과 그의 상징 세계>>라는 저서가 출판되어 동학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증폭시킨 바 있다.
영국 셰필드대학 한국학과 과장으로 있는 제임스 헌틀리 그레이슨(James Huntley Grayson)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쓴 <<Korea A Religious History: 한국종교사>>(1989)도 동학 및 천도교를 서구사회에 널리 알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과 영국 등 구미 여러 나라에서 일고 있는 동학에 대한 폭넓은 관심은 구미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유학생들을 통해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면, 필자가 소속하고 있는 원광대학교 대학원에서 캐나다에서 유학을 온 폴 루이스 맥도날드(Paul Louis MacDonald)라는 유학생이 <<Human Equality Movement of Tonghak in Late Joseon Dynasty; 조선후기 동학의 인간평등운동 연구>>라는 제목으로 학위를 받은 것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동학사상 및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높은 관심은 사실 국내에서도 지난 30년 간 소리 소문 없이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현재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구체적 사례에 대해 주목해 보기로 하자. 한국사회 전체가 ‘정치적(政治的) 민주화’ 운동에만 관심을 쏟고 있을 때인 1986년에 생명(生命) 살림을 화두로 내걸고 출범한 ‘한살림’이란 시민운동 단체가 있다. 바로 이 ‘한살림’ 운동의 이념이 동학의 핵심 사상인 ‘시(侍; 모심)’에 대한 현대적 해석에 기초하고 있음은 이제 국민적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 한살림선언 다시 읽기』, 도서출판 한살림, 2010년 7월) ‘한살림’ 운동의 제창자요 그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위당 장일순(1928-1994) 선생 외에도 동학의 사상적 탁월성 및 세계적 보편성에 남 먼저 주목했던 분들로는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던 윤노빈(1941-?) 선생과 윤 노빈 선생의 친구인 시인 김지하(1941-현재) 가 있다.
또 동학의 후신(後身)인 천도교(天道敎) 원로 삼암 표영삼(1925-2008) 선생을 비롯하여, 도올 김용옥(1948-현재) 선생, 조동일(1939-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역시 동학에 담긴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사상에 남 먼저 주목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강연 모음집 『나락 한 알 속의 우주(1997)』; 윤노빈 『신생철학(1974년 초판, 2003년 학민사에서 재판)』표영삼 선생의『동학 1,2(2004-2005)』; 김지하 시인의『밥(1984)』,『남녘땅 뱃노래(1985)』,『살림(1987)』,『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김용옥 선생의『도올심득 동경대전(2004)』, 조동일 교수의『동학 성립과 이야기(1981)』등 참조)
동학사상과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내에서의 평가는 특히 시민운동(市民運動)과 한국사(韓國史)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수준의 진전을 이루었다. 그 이유는 ‘우리 학문’, ‘우리 종교’로 등장한 동학사상 속에 ‘영성(靈性)과 혁명(革命)’이라는 두 가지 핵심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과 사상에 기반을 두면서도 세계적 보편성을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일본 학계에서 나온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 관련 연구 중에서 가장 탁월한 업적으로 꼽히는『이단의 민중반란- 동학과 갑오농민전쟁 』(1998, 동경, 이와나미서점; 이 책의 한글 번역판은 필자의 번역으로 2008년에 역사비평사에서 나왔다)의 저자이자 재일(在日) 사학자인 조경달(趙景達) 교수가 강조했던 것처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세계 역사 속에서 동학사상과 동학의 접포(接包) 조직에 기반을 두고 일어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만큼 '정치(精緻)한 이념'과 '준비된 조직'을 가지고 '대규모적이며 장기적인' 항쟁을 벌인 변혁운동의 사례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은 그만큼 위대한 혁명이자 세계사적으로 가장 최고이자 최대 규모의 민중혁명으로써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끝으로 동학사상 및 동학농민혁명의 세계사적 의미에 대해 남 먼저 주목한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에 대해 소개하기로 한다. 1998년 10월, 필자는 일본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일본근대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때마침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 방문하였다. 김 대통령은 중의원(衆議院)과 참의원(參議院) 의원을 비롯하여 현대일본의 정치가들이 모두 출석한 국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당시 김 대통령의 연설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던 필자는 김 대통령의 연설에 일본 열도 전체가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왜냐하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뛰어넘고, 그리고 마침내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달성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실현한 김 대통령 같은 인물이 일본의 정치 풍토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다고 일본 언론이 이구동성으로 탄식할 정도로 김 대통령의 방일은 일본사회에 강력한 인상과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의 방일을 전후한 일본사회의 너무나 ‘뜨거운’ 반응에 놀란 필자는 그 무렵에 발행된 일본의 3대 일간지인『아사히신문(朝日新聞)』,『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을 비롯하여『홋카이도신문(北海道新聞)』등을 일부러 사서 지금껏 소장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 김 대통령의 일본 국회 연설 도중에 일어났다. 김 대통령은 연설 도중에 아시아의 3대 민주주의 사상에 대해 언급하면서 불교(佛敎)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사상과 유교(儒敎)의 민본주의(民本主義) 사상에 이어 동학(東學)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에 대해 언급했다. 제국주의일본(帝國主義日本)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지키고자 봉기했던 동학농민군을 다수 학살하고, 이어서 봉기한 의병(義兵)들마저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라는 이름으로 대량 학살한 뒤인 1910년 8월에 마침내 강제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권을 강탈하고, 그 뒤를 이어 36년간에 걸친 가혹한 식민통치를 했던 ‘우리 민족의 원수’의 나라 국회에서, 현대일본을 이끄는 정치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아시아의 3대 민주주의 사상의 하나로 ‘사람이 하늘이라’ 선포했던 우리의 동학사상을 열거했던 것이다. 참으로 가슴 떨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 기간 숨죽이며 동학에 대해 연구를 해 온 필자는 “동학이 아시아 3대 민주주의 사상의 하나”라는 김 대통령의 말씀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3. 동학 다시 하기
왜냐하면 1983년부터 동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필자는 그동안 그 누구로부터도 동학이 적어도 ‘아시아 3대 민주주의 사상의 하나’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공부하던 때는 경주(慶州) 출신 범부 김정설(1897-1966)선생의 선구적인 연구를 필두로 , 시인 김지하, 조동일 교수, 김용옥 선생, 표영삼 선생, 정창렬 교수(현 한양대 명예교수), 신용하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 이이화 선생 등이 고군분투하여 동학사상 및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뛰어난 연구를 통해 세간의 오해를 많이 불식(拂拭)시키기는 했어도 동학사상 및 동학농민혁명을 우리 민족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적 보편사상 및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혁명으로 인식하거나 강조하는 연구자들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김 대통령의 연설을 들은 이후 필자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연구 방법, 지금까지의 문제의식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우리는 과연 1860년에 수운 최제우 선생(1824-1864, 첨부 자료사진-2 참조)에 의 해 확립된 동학(東學)사상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그리고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에 의해 재건된 동학의 접포(接包) 조직에 기반하고, 동학의 ‘시천주’와 ‘다시 개벽’ 그리고 ‘보국안민’ 사상 등에 기반하여 일어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너무나 오랜 기간 잘못 이 해하여 왔고,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 않은가?
우리 역사와 전통 안에 이미 세계적인 사상이 있는 데도, 더 나아가 우리 안에 프랑스 혁명 이상으로 더 위대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훌륭한 혁명의 역사가 있는 데도 우리는 너무나 오랜 기간 그것을 죽이고, 탄압하고, 비틀어왔던 것이 아닐까.
라는 통절(痛切)한 자기반성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후, 필자의 동학 공부의 방향,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하(以下)의 글에서는 우선 지난 30년간의 동학 공부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 동학사상에 대한 세간의 오해가 어떤 것이었으며, 그 오해를 씻어내기 위해서는 동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동학사상의 진면목(眞面目)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지금까지 동학사상을 잘못 이해해 온 내용 가운데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동학은 서학(西學)에 대항하기 위하여 성립한 ‘일종의 대항이데올로기’라는 식의 이해이다. 동학이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대표적으로 현행(現行)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동학」항목 설명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19세기의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에 동학이 서학(西學)을 ‘ 아주 깊이’ 의식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선생은 동학과 서학에 대해 “운즉일(運則一), 도즉동(道則同), 이즉비(理則非)”(『동경대전(東經大全)』,「논학문(論學文)」---> 첨부 자료사진-3 참조)라 하여 동학과 서학은 하나의 시운(時運)이며 추구하는 길(道)도 같지만, 다만 그 ‘이(理)’만 즉 이치만 다르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理)란 도(道)를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운 선생의 서학 이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수운 선생이 서학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서학이 지닌 근대성(近代性)과 보편성(普遍性)을 널리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요즘 언어로 바꾸면 수운 선생은 종교다원주의자(宗敎多元主義者), 즉 이웃종교에 대한 개방적 이해를 지닌 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학을 그저 서학에 대한 대항이데올로기로 성립된 사상으로 보는 편협한 견해는 동학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동학은 서학을 무조건 배척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서학이 지녔던 근대성(=運)과 보편성(=道)을 두루 인정하면서도, 다만 그것이 지닌 제국주의적이며 침략주의적인 성격을 극복하여 우리 역사와 전통에 어울리는 가장 ‘주체적(主體的)’이며 가장 ‘자주적(自主的)’인 사상을 정립해 내신 것이다. 이른바, 세계적 보편성(또는 개방성)을 지니면서도 제 나라와 제 땅 사람들에게 가장 알맞은 주체적 사상을 동학으로 집대성하신 것이다. 이러한 동학은 또한 당시 민초(民草)들의 열화와 같은 새 시대 새 사회에 대한 소망을 집대성한 사상적 창조물이라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하겠다.
둘째, 동학은 유불선(儒佛仙) 삼교사상을 혼합한 사상으로써 그 안에 독창적인 요소가 전혀 없거나, 있다고 해도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사이비(似而非) 사상이라는 견해이다. 이 같은 견해는 유교, 불교, 도교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 속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 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학은 유불도(儒佛道) 삼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포함삼교(包含三敎)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유불도 외에도 서학(西學)까지도 포함했다. 서학(西學) 뿐만 아니라『정감록(鄭鑑錄)』을 비롯한 민간신앙까지도 두루 포함했다. 요컨대, 동학은 19세기 중엽 우리 땅에서 유행하던 모든 사상을 다 포함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19세기 이 땅에서 새롭게 정립된 ‘신풍류도(新風流道)’라 할 수 있다. 동학은 기존 사상을 다 포함하면서도 그저 포함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나쁜 병들이 가득 차 민초들이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던(我國 惡疾滿世 民無四時之安--『동경대전』,「포덕문」)” 시대에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즉 ‘접화군생(接化群生)’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포함했다. 바로 이것이 동학의 독창적 측면이다.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인한 가혹한 수탈과 신분제(身分制) 의 질곡 등 전근대적 굴레와 ‘서세동점’으로 일컬어지고 있던 외세(外勢)의 침탈, 그리고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자연재해 등으로 죽어가는 뭇 생명들을 살리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유불도 삼교뿐만 아니라 서학, 더 나아가 민간신앙마저 두루 포함하여 이 땅의 자생적 생명사상으로 새롭게 정립해 낸 것이 바로 동학이었다. 동학이 새롭게 창조해 낸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첫째 ’시천주(侍天主; 모든 사람은 제 안에 하늘님이라는 거룩한 존재를 모시고 있다는 뜻)’ 사상, 둘째 ‘보국안민(輔國安民;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에서 헤매는 민초들을 건져 편안하게 만든다는 뜻)’ 사상, 셋째 ‘다시 개벽(開闢;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고 하는 뜻)’ 사상, 넷째 유무상자(有無相資;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서로 돕는 공통체적 사고) 사상 등이다.
여기서 동학사상이 지닌 독창적 측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1960년, 즉 동학 창도 100돌이 되던 해에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이 지닌 우주적 의미에 대해 탁월한 해설을 한 범부 김정설 선생의 <최제우론>의 일부를 소개한다.
시자(侍字)를 시자 내유신령 외유기화(侍字 內有神靈 外有氣化)라 하니, 이 내(內)는 ‘신 의 안(神의 內)’인 동시에 곧 ‘인의 안(人의 內)’인 것이고, 이 외(外)는 ‘인의 밖(人의 外)’ 인 동시에 ‘신의 밖(神의 外)’인 것이다. 말하자면 천주(天主)가 안인데 인간이 밖이거나, 인간이 안인데 천주가 밖이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아(我)의 내(內)가 곧 천의 내이며, 천의 외(外)가 곧 아의 외에 삼라(森羅)한 만상(萬象)이 곧 천주의 기화(氣化)라는 것이다.
(『풍류정신』, 정음사, 1986, 93쪽)
위의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 뜻은 모든 사람은 저마다 제 안에 하늘=우주생명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안에 하늘=우주생명이 이미 모셔져 있다는 것으로써, 이를 바꿔 말하면 나는 저 무한(無限)하고 호대(浩大)하기 그지없는 우주생명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어 내가 곧 우주생명 그 자체요, 우주생명 그 자체가 곧 나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동학이 당시의 기존사상을 포함한 것만 주목하고, 그 기존사상을 넘어서 새롭게 창조해 낸 독창적 요소에 주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동학을 이해하는 온당한 태도가 아니다.
셋째, 동학을 단순히 서양의 Religion으로 이해하는 견해다. 결론부터 말하면, 동학은 결코 Religion이 아니다. Religion의 번역어로써 종교(宗敎)가 아니라는 뜻이다. 동학은 Religion이라는 용어, 즉 그것의 번역어인 종교라는 용어가 이 땅에 대중화되기 전에 성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 Religion의 번역어로써 ‘종교’라는 용어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로 알려지고 있다.『독립신문』과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등과 같은 근대적 신문과 대한자강회, 대한학회, 기호흥학회 등과 같이 신문화운동을 펼치던 학회의 학회지가 속속 등장하면서 비로소 ‘종교’라는 말이 널리 쓰여 지기 시작했다. 철학(哲學)이란 용어와 마찬가지로 종교라는 용어 역시 일본을 통해서 수입되었다. 동학은 서양의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종교’가 결코 아니다. 동학이 ‘종교’, 즉 Religion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수운 선생에 의하면, 동학은 “도(道)라는 측면(=보편성의 측면)에서 말하면 하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천도(天道)요, 학(學)이라는 측면(특수성의 측면)에서 말하면 동쪽 즉 조선 땅에서 받았기 때문에 동학(東學)”(『동경대전』, 「논학문」)이라 했다. 요컨대, 동학은 서양식 종교가 아니라, 이 땅의 오랜 전통이었던 도학(道學)을 계승하여 나온, “천도(天道), 즉 하늘의 길을 닦아가는 우리 학문(東學)”이다.
수운 선생이 말한 ‘천도(天道)’와 ‘동학(東學)’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일까? 도란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마땅히 밟아가야 할 ‘보편적인 길’이요, 학이란 그 ‘보편적인 길’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론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동학 공부를 계속해 오면서 동학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천도교 교단의 원로(元老)들로부터 필자가 귀에 따갑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동학의 선배들은 일찍이 동학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동학이 Religion이 아닌 까닭이 숨어 있다. “동학을 한다”는 말은 동학이야말로 어디까지나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 할 보편적 길을 지향하는 학문이요, 누구나 마땅히 제 처지에 맞게 실천해야 할 학문이라는 뜻이다. 동학은 유일신(唯一神)을 전제로 일방적 믿음만을 강요하는 ‘종교’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은 그저 믿기만 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배우고 실천해 가야 할 도(道)이자 학(學), 즉 도학(道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서학의 장점을 두루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극복하여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우리 학문, 우리 사상을 지향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동학이다. 또한 포함삼교(包含三敎)했을 뿐 아니라 서학과 민간신앙마저 포함(包含)하여 뭇 생명을 살리기 위한 생명사상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동학이다. 그리고 서양식 종교가 아닌 이 땅 도학(道學)의 ‘오래된 새길’로써 경상도 경주 땅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것이 바로 동학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동학을 온당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다.
4.「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에 나타난 동학농민혁명의 대의
다음으로 동학의 시천주(侍天主)와 보국안민(輔國安民) 사상 등에 기반하고, 동학의 접포(接包) 조직을 봉기의 조직적 기반으로 삼아 일어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대의(大義)가 무엇이었던가를 혁명 당시에 포고된「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첨부 자료사진- 4 참조)의 내용을 중심으로 알아보자.「무장포고문」은 1894년 음력 3월 20일 경에 전라도 무장현(茂長縣)에서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조선왕조의 폐정(弊政) 개혁을 위하여 전국적 차원의 봉기를 단행하기 직전에 포고(布告)한 격문이다. 동학농민군이 3월 21일에 전면 봉기를 단행하고 있으므로 이 포고문은 적어도 3월 20일경, 또는 그 이전에 포고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무장포고문」은 전봉준 장군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설에는 전봉준 장군의 참모가 썼다는 주장도 있다. 작성자가 누구였든 간에「무장포고문」속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이끄는 최고지도부의 당면한 시국인식(時局認識)과 함께, 무장봉기(武裝蜂起)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 이유, 민중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는 조선왕조 지배체제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는 강력한 개혁의지, 그리고 그 같은 취지에 공감하는 양반과 향리, 일반 민중들의 적극적인 연대와 협조를 촉구하는 내용이 대단히 사실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서술되어 있다.「무장포고문」이 지적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는 특히 오늘의 시대 상황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118년이라는 세월의 벽을 넘어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중요 부분을 번역 소개한다.
<무장 포고문(한글 번역문)>
이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인륜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윤리는 인륜 가운데서도 가장 큰 것이다. 임금은 어질고 신하는 정직하며,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를 다한 후에라야 비로소 한 가정과 한 나라가 성립되는 것이며, 한없는 복을 누릴 수 있는 법이다.
(중략)
지금의 형세는 그 옛날보다도 더 심하기 그지없으니, 예를 들면 지금 이 나라는 위로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 방백수령(方伯守令)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나라의 위태로움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 몸 살찌우고 제 집 윤택하게 할 계책에만 몰두하 고 있으며, 벼슬길에 나아가는 문을 마치 재화가 생기는 길처럼 생각하고 과거시험 보는 장소를 마치 돈을 주고 물건을 바꾸는 장터로 여기며, 나라 안의 허다한 재화(財貨) 와 물건들은 나라의 창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창고만 채우고 있다. 또한 나라의 빚은 쌓여만 가는데 아무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한 짓을 하는 것이 도무지 거리낌이 없어 팔도(八道)는 모두 어육(魚肉)이 되고 만 백 성은 모두 도탄에 빠졌는데도 지방 수령들의 가혹한 탐학(貪虐)은 더욱 더하니 어찌 백성들이 곤궁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이 깎이면 나라 역시 쇠잔해 지는 법이다. 그러니 잘 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방책을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 집 이나 지어 그저 오직 저 혼자만 온전할 방책만 도모하고 한갓 벼슬자리나 도둑질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어찌 올바른 도리라 하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 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앉아서 볼 수 없어 팔도가 마음을 함께 하고 억조(億兆) 창생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은 비록 크게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여 다 함께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님의 덕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겠노라.(고딕은 필자)
이「무장포고문」에는 당시 동학농민군들의 정확한 시국인식, 혁명을 일으키는 목적과 대의, 혁명의 뜻에 공감하는 모든 이들과 폭넓게 연대하려는 열린 자세 등이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무시하고, 죽이고, 비틀고, 폄하할 것인가? 이래도 동학은 오늘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상이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우리와 아무 관계없는 먼 나라 역사요 먼 나라 혁명이라고 할 것인가?
5. ‘4대 명의’ 및 ‘12개조 기율’에 보이는 동학농민군의 도덕성
끝으로 그간 일반 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동학 연구자들 대부분이 간과해온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동학농민군의 행동강령(行動綱領)에 나타난 도덕성(道德性)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894년 음력 3월 21일에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전면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3월 25일을 전후하여 오늘날의 전북 부안 백산성(白山城)에 결진(結陣)하여 진영을 확대 개편하고, 행동강령과 함께 12개조 기율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첨부 자료사진-5 참조)
동도대장(東道大將; 동학농민군 대장; 번역자 주)이 각 부대장에게 명령을 내려 약속하 기를, “1) 매번 적을 상대할 때 우리 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가장 으뜸의 공으로 삼을 것이며, 2) 비록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의 목 숨만은 해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3) 또한 매번 행진하며 지나갈 때에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해치지 말 것이며(또는 민폐를 끼쳐서는 아니 될 것이 며), 4)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들 사이에 신망 이 두터운 사람이 사는 동네 십리 안에는 절대로 주둔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大將 下令於各部隊長 約束曰 每於對敵之時 兵不血刃而勝者爲首功 雖不得已戰 切勿傷命爲貴 每於行陣所過之時 切物害人之物 孝悌忠信人所居村十里內 勿爲屯住)라 고 하였습니다.
< 12개조 군호(기율)>
항복하는 자는 사랑으로 대한다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탐관은 쫒아낸다 따르는 자는 공경하며 복종한다
굶주린 자는 먹여준다 간교하고 교활한 자는 (못된 짓)을 그치게 한다
도망가는 자는 쫒지 않는다 가난한 자는 진휼(賑恤)한다
충성스럽지 못한 자는 제거한다 거스르는 자는 타일러 깨우친다
아픈 자에게는 약을 준다 불효하는 자는 벌을 준다
“이 조항은 우리의 근본이니, 만약 이 조항을 어기는 자는 지옥에 가둘 것이라”고 하였 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1894년 음력 3월 21일의 제 1차 동학농민혁명(=茂長起包)으로부터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무혈(無血) 점령하는 음력 4월 27일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봉기하여 고부(古阜), 정읍(井邑), 흥덕(興德), 고창(高敞), 영광(靈光), 함평(咸平), 무안(務安), 장성(長城) 등 전라도 서남해 연안의 여러 고을을 파죽지세로 점령하였고, 황토재 전투(음력 4월 7일)와 황룡촌 전투(음력 4월 23일)에서 각각 전라감영군과 경군(京軍; 서울에서 파견된 군대--주)마저 연달아 격파하여 승리하였으며, 4월 27일에는 마침내 전라도의 수부(首府) 전주성마저 무혈점령하기에 이른다.
이 같이 동학농민군이 제 1차 봉기과정에서 대승리를 거두는 배경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승리를 거두는 가장 중요한 배경의 하나는 바로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내건 ‘보국안민(輔國安民;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에서 헤매는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이라는 혁명의 기치(旗幟)가 일반 백성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왜 봉기했는가? 그들은 안으로는 부패한 조선왕조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고 있던 일반 민중들을 도탄으로부터 살려내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탈로부터 일반 백성들의 목숨과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봉기했다. 요컨대,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때 동학농민군은 자신들의 목숨과 생활을 지켜주는 이른바 ‘백성의 군대’ 또는 ‘살림의 군대’였기 때문에, 그들은 동학농민군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것이다. 동학농민군 역시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은 엄격한 행동강령과 기율(紀律)을 통해 백성들의 목숨과 생활,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고자 애썼다.
이처럼, 제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파죽지세로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백성의 군대’로서 농민군이 발휘했던 높은 도덕성(道德性)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농민군이 각 고을을 지날 때마다 해당 고을의 수령을 비롯하여 뜻있는 지식인과 부자들은 다투어 식량을 제공하였고, 잠자리를 제공하였다. 하급 관리들은 자진하여 성문을 개방하여 동학농민군을 맞이했다. 그 덕분에 동학농민군은 40일이 넘도록 계속된 제 1차 동학농민혁명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이 지니고 있던 높은 도덕성의 사상적 배경에 바로 동학사상이 있었고, 그 동학사상의 핵심이 바로 ‘시천주(侍天主)’였으며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이었다.
6. 맺음말
세계적 차원의 복합위기 상황을 극복하여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한 인류 문명의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한 새로운 철학 운동, 즉 ‘공공철학(公共哲學)’ 운동을 이끌고 있는 일본의 ‘교토포럼’ 산하 공공철학공동연구소(公共哲學共働硏究所) 소장으로 있는 김태창(金泰昌) 선생은 한국에서 자생(自生)한 사상 가운데 가장 세계적이면서 가장 보편적이고, 그리고 가장 미래지향적인 사상을 꼽는다면 두 가지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가 바로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도한 동학(東學)이요, 다른 하나가 혜강 최한기 선생이 확립한 기학(氣學)이라고 말하고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영성사상가인 루돌프 슈타이너의 제자이자 일본 신지학회(神智學會)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다카하시 이와오(高橋巖) 역시 21세기 인류를 구원할 사상으로 동학을 꼽고 있다.
또한 동학사상과 동학조직에 기반을 둔 가운데 동학교단의 지도자인 접주(接主) 전봉준에 의해 주도된 1894년 동학농민혁명 역시 당대 최고 수준의 민중혁명이었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증명되고 있다. 바야흐로 ‘동학의 바람’이 거세게 부는 가운데, ‘동학의 시대’가 도래할 상서로운 조짐이 세계 도처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을 앞장서서 주도하기 위해서는 동학의 탄생지이자 동학농민혁명의 본산지인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남 먼저 동학에 관심을 갖고, ‘동학의 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실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 글이 ‘동학의 시대’를 예비(豫備)하려는 한국 사람들, 특히 전라북도 도민, 그 중에서도 고창 군민 여러분들께 일조(一助)가 되길 간절히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