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달로 가는 남자
저-박방희
출-청동거울독정-2021.7.18.일
<머슴과 참꽃>
멀리서 보면 나뭇짐에 파묻혀 지고 오는 사람은 안 보이고 나뭇짐들만 동동 떠오는 것 같가. 그래서 그런지 나뭇짐들은 동긋한 초가지붕 같ㄴ기도 하고 눈물방울 같기도 하다. 그걿게 고개를 넘어오며 비끼는 저녁 해에 물 들면 애잔하게까지 비친다.
나뭇짐들은 봉긋봉긋 산봉우리들을 닮았다. 발간 갈비에 삭정이와 푸른 솔가리를 덧대어 묶은 나뭇짐 위에 참꽃 한 다발이 꽂혀 있다. 꽃다발은 걸음을 떼놓을 때마다 너풀너풀 나뭇짐 위에서 춤을 춘다. 참꽃 다발에 묻혀 아른아른 따라오는 나비도 있다. 꽃 위에 앉았다 날아올랐다 하며 춤추듯 따라온다. 나비는 참꽃 향기 때문에 따라오는 것일까? 꽃 꺾어 오는 머습의 마음이 예뻐 따라오는 것일까? 어쩌면 나비는 꽃잎 속에 비치는 머슴의 눈물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참꽃 다발은 주인집 딸도 아닌 호롱불 밝혀진 과부댁 골목을 지나 머슴의 오두막에 불이 켜져 있다.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가 오도카니 앉아 있다.
“오매.”
“늦었구나.”
어머니에겐 아들이란 언제나 늦는 법이다.
“달이 떴어요.”
오늘은 그믐인데 달이라니! 어머니가 웃으며 농을 받는다. 아들은 어머니에겐 언제나 환한 보름달이니까
“그래.” 그가 참꽃 다발을 어머니 손에 쥐어준다. 갑자기 방안에 달이 뜬 듯 밝아진다. 꽃을 받아 든 어머니가 가만히 코에 갖다 대며 환하게 웃는다. 불그레 물든 그 웃음에는 처녀 적의 수줍음이 베어있다. 바로 그의 눈먼 어머니를 위해 꺽어 온 꽃이었다.
<손님>
남자가 바깥의 달빛을 묻혀 온 듯했다. 그의 머리카락과 목덜미, 겨드랑이 사이사이로 달빛이 묻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도 없고 도깨비 같은 남자도 없었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부지는 어데 갔노?”
“야가 무슨 소리 하노? 빨랑 일어나 세수나 해라.”
한 남자가 벽을 등지고 있었다. 남자는 매우 어둡게 느껴졌다. 그가 어둠을 묻혀 온 듯했다.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풀풀 어둠이 풀려나와 방안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서도 어둠이 풀려 나오며 호롱불이 흔들렸다. 누가 왔었다고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는 그 사람이 바로 어둠에 쫓기고 있는 아버지라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상 집에 오지 않는다>
오늘쯤은 아버지가 오는 날이기도 하고 지금쯤은 기다리고 있어야 할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붙잡혀 갔다지 않는가? 어머니의 처진 어깨 너머로 나방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려고 파닥이는 것이 보인다. 은빛 가루가 유리창에 묻어난다. 그 너머로 아버지의 모습이 어둡게 떠오른다. 갑자기 소년의 눈이 뜨거워지며 목이 메어온다, 소년도 이제 어머니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아버지는 지금쯤 차갑고 어두운 방에 홀로 갇혀 있을 것이다. 국은 이미 오래 전에 식어 있었다. 뚜껑을 열지 않는 밥도 어느새 식었는지 손을 대어 봐도 따뜻하지가 않다. 어둠은 창 너머로 켜켜이 쌓이고 어머니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어둠을 지켜보고 있다.
<밝고 따스한 곳>
남자는 익숙한 자세로 캔 속의 음료를 쿨렁쿨렁 비웠다. 여자도 캔을 뽕 소리 나게 뜯고는 한 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우아하게 서서 마셨다. 캔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늘은 캄캄했다. 아내의 목소리가 공중전화 북스에서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내의 목소리는 귓가에서 속삭이듯 들려왔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의 집 전화는 도청당하고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기대감과 불안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저녁 눈>
바람에 흩날리던 눈이 외양간 안으로도 뿌려졌다. 사내가 추운 듯 또다시 목을 움츠리며 소의 옆구리에 바짝 몸을 갖다 붙엿다. 소의 등과 옆구리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모처럼의 아늑함과 편안함에 피곤이 한꺼번에 풀어지며 사내는 어느새 몽롱한 잠 속으로 떨어졌다. 소도둑이었던 사내는 고삐를 기둥에 도로 매어놓고 빈손을 마주 들어 탁, 탁, 털었다. 그리고는 희붐한 새벽빛에 한없이 다정스런 눈으로 소를 흝어 보았다. 사내는 조용히 외양간을 나와 소리 없이 담을 넘ㅁ어 한길로 나섰다. 그가 몇 발자국 떼놓았을 때 짤랑, 쇠 요령 소리가 담을 넘어왔다. 그 소리는 마치 그를 배웅이라도 하듯 뒤 따라왔다.
<등>
가마솥에 물을 붓고 소깝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아이 둘을 깨워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씻기고 머리를 감긴다. 깨끗한 옷들로 갈아 입혀 내놓으니 꾀죄죄하던 꼬락서니들이 제법 환하다.
등불이 비추는 마당과 삽짝께만 환할 뿐 깜깜하다. 컹 컹 뉘집 개 짖는 소리만 들린다. 남산댁은 솥 안에 넣어둔 팥죽 그릇 중 어둠 속에 서 있던 이수 집 자실댁이 목에 걸려 한 그릇 들고 가서 건넨다.
“형님!~”
“아무 말 말게 추운데 그만 들어가 먹게나.”
자실댁의 눈에 그렁한 눈물이 곧장 쏟아질 것 같다. 이념이 다른 남편을 가진 남산댁은 얼른 돌아서 부엌으로 가 팥죽을 마저 먹기 시작한다. 뚜껑을 열어 놓은 탓인지 팥죽은 식어 있다. 그러나 꿀꺽, 꿀꺽, 잘도 넘어간다. (남한테 한 그릇 갖다줘서 마음이 편해서)
<얼룩>
“아부지는 그 환한 달 속으로 들어갔지.”
“달 속에 들어가 달이 되었나?”
“그래.”
아이가 주봉 위를 바라본다. 어두워진 하늘에 달은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오매는?”
할미가 잠시 흔들일다. 앙다문 입이 고집스럽다.
“오매는 너 낳고 난 뒤에 아부지가 달빛 타고 집으로 내려왔지 그때 따라갔지.”
“할매는 왜 안 따라갔노?”
“할매는 너 키운다고 안 갔지 너가 너무 어려서 같이 따라 수 없었지.”
“내가 크마 아부지한테 갈 수 있나?”
“그래. 네가 줍1ᅟᅩᆼ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크마.”
“조금만 기다려. 할매. 내가 째맨만 더 크마 아부지한테 가자. 그땐 할메 업고 제일봉에 올라 갈 수 있다.”
할미가 손자를 꼭 껴안는다. 하늘을 본다. 주봉 위에 높다랗게 떠오른 달이 두 사람을 싸고 있던 어둠을 지우며 환하게 빛나고 있다.
<다락 속의 아버지>
아버지가 다락 속에 있다가 잡혀 갔어도 어머니는 아버지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아버지가 다락 속에 살고 있다는 환상으로 산다. 그때 중학생이 된 내게 큰 아버지가 말씀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야 한다. 장수 네가 해야 한다.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너만 할 수 있고 반드시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저녁을 짓고 계실 것이다. 나는 뛰어가지 않았다. 이제 나는 의젓해야 할 중학생인 것이다. 어머니를 보호하고 지켜 주리라고 맹세했다. 달려가고 싶은 알 수 없는 흥분을 누르며, 나는 내가 더 이상 어머니의 귀염만 받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며 스스로 시험했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한 발, 한 발, 뚜벅뚜벅 힘 주어 걸으며 큰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장부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다락에서 현실로 내려오는 길목에 내가, 중학생이 된 내가 사다리로 서 있은 셈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나를 딛고 다락 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고 이제 의젓하게 자란 당신 아들에게서 아버지 모습을 찾고 거기에 의지하신다.`
<신작로>
노인은 서산으로 기우는 해를 이마 위에 손바닥을 펴대고는 멀리 신작로를 바라본다. 눈가가 짓물러 주름 사이로 물기가 번져난다. 오래 보면 볼수록, 잘 보려고 애쓰면 쓸수록 눈앞은 더욱 흐릿해진다. 흐릿한 가운데서도 신작로를 따라 마을로 다가오는 물체들은 점점 더 크게 보인다. 왜정 때 닦은 신작로는 왜놈 순사들이 징용 갈 사람을 데려가거나 공출 가마를 실어 나르던 길이었다. 해방 되고 전쟁 터지자 그 길은 군인을 태운 도락꾸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닫는 길이 되었다. 노인의 경험으로는 신작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오는 쪽은 언제든 이긴 쪽이었다. 산 쪽을 본다. 어두컴컴한 봉우리들이 무슨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먹물 같은 어둠이 번지며 노인의 장작개비 같은 몸을 감싼다.
<수래 끄는 노인>
장으로 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대개들 아침 일찍 떠났을 것이다. 나뭇짐이며 약병아리, 흔한 목은 곡식 자루라도 하나씩 지거나 이거나 메고 걸어서 자박자박....... 일찌감치 임자를 만난 사람들은 물건을 서로 바꾸거나 돈을 쳐주고 받으며 셈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이 전 저 전 기웃거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 해가 한 뼘만 더 나가면, 볼일을 다 보고 돌아오는 장꾼들과 도중에 만날지도 모르리라.
<고모>
어차피 해봐야 혼잣말, 들을 사람도 없다. 어미의 뇌리에 찍히고 인화된 모든 사건과 순간들.......
어미가 바라보는 멀건 창호지문 앉은 키 높이에는 손바닥만 한 유리가 붙어 있다. 그건 문살 사이로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다. 조금 고쳐 앉으며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눈을 댄다. 아직고 바늘귀가 보이는 눈빛은 형형하다. 거기 바로 뵈는 곳에 사십여 년 전 삽짝이 있고 삽짝 안은 황토 마당이다. 참나무 잔가지를 엮어 만든 삽짝은 낮에는 활짝 열려 토담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세워지고, 밤에는 안과 밖을 가르며 닫힌다. 삽짝에는 요령이 달려 여닫을 때마다 딸랑딸랑 소리를 낸다. 간간 지나는 바람이 요령을 흔들고 갈 때도 있다.
저녁 답이다. 새댁은 황토 마당을 가로질러 지분지분 정지로 들어간다.
남편이 마을 불량배에게 맞아 죽고 유복자 아들을 키우는 여인은 빨치산 흉내 낸 미군 흰둥이의 겁탈 앞에서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도망가 남아 아들을 키웠는데 아이가 중 3때 할미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고등고시에 합격해 서울 살자 아들 편지 기다리며 살고 가끔 전화 오고 생활비 보내고 그렇게 혼자 살다가 어미는 식사 양을 줄이며 죽음을 준비해갔다. 어미를 돌보는 여자가 곡기를 끊고 있다고 전화해 아들이 돌아와 어미를 안으니 어미 몸이 비로소 풀렸다. 세월 지난 지금, 아들에게는 어미가 앉아 계시는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벽을 등지고 안자 벽에 기대지 않고 몸을 수그린 채 앉아 계셔 언뜻 보면 앞으로 기우느 듯해 보이던 모습
-외로운 노인의 삶. 임종 –참 쓸쓸한 우리 노인네들의 모습이다.
<낮은 세상>
신천은 처연한 구석이 없지도 않지만, 비 오고 난 뒤의 신천은 전혀 다른 얼굴로 아름답다. 새뜻한 둔치의 풀들은 한마디로 눈부시다. 루른 물줄기란 그건 도시 한가운데를 지나는 동맥과 같은 느낌을 준다. 신천을 두고 양쪽 둔치에 조성된 잔디밭은 마치 푸른 천을 깔아놓은 것처러 보였다. 운동회 때 백군의 머리띠 같은 시멘트 포장길이 뽀얗게 누워 있어 색다른 정위가 느껴졌다. 비닐조각과 마른 개똥 부수러기들이 여기저기 널렸는가 하면 마르지 않은 똥 무더기 근처는 몸집 큰 똥파리들이 윙윙 날아다녔다.
벤치 주변에는 여기저기 버려진 못들이 눈에 띄었다. 박혀 있지 않은 못들은 녹만 슬었다 뿐이지 멀쩡한 놈도 있고 대가리가 날아거거나 새우처럼 등이 구부러진 놈도 있었다. 흙 속에 대가리를 쳐박고 모로 누운 놈들도 보였다. 녹슨 채 오슬오슬 소름을 돋우며 다만 한줌 햇볕이 그리운 듯했다. 못들은 어딘가 박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못들은 의자 속에 스스로를 못 박고 있는 못과는 달리, 내놓고 자기를 편안하게 버려두었다. 세상 속에 자기를 풀어놓은 셈인데, 실제 그 단단한 무기질의 몸이 풀리면서 발간 녹들이 실업의 한 세상을 꽃 피우고 있었다. 목수들이 벤치를 만들다가 버리거나 빠트린 것이 분명한 그 놈들은, 나무속에 묻혀 어금니를 질끈 물고 사역 중이거나 납작하게 대가리만 내놓고 취업중인 못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는 빠져나온 못이지만, 나는 세상에 어떤 못으로 박여 있었는지 궁금했다. 또 언제 어떤 못으로 다시 박힐 것인지도.
폭우 다음에 흐르는 갈물은 검붉은 황톳물이었다. 거대한 바퀴가 구르듯, 쿵쿵 소리로 흐르고 울림으로 흐르며 모든 것을 삼킬 쌓여 있는지 온갖 것들이 둥둥 떠내려 왔다. 합성수지로 된 크고 작은 병들, 스티롶폼 조각들, 나무토막과 운동화 짝, 비닐 제품과 플라스틱 용기들, 거기다 황톳물에 휩쓸려 내려오는 각종 쓰레기 더미들. 물 구경 하던 사람들이 끌끌 혀를 찼다.
고무줄 위에서 아이들이 팔랑팔랑 뛰었다. 몸을 뒤채며 흐르는 산천은 상한 뱃가죽을 드러내며 악취를 풍기건만 아이들은 아랑곳 없다. 오로지 고무줄 위에서 놀고 햇살 위에서 놀았다. 한 아이가 검은 줄에 적려 죽으면 다른 아이가 와서 뛰었다. 죽은 아이는 검은 죽음의 줄끝을 잡고 다른 아이들이 걸려 죽기를 기다렸다.
수습사원 신분인 정희를 구제하기로 하고 경력 7년차 내가 사표를 냈다. 스스로 검은 고무줄에 걸려 죽은 것이다.
<나도씨의 마지막 휴일>
햇살이 입새를 적시며 조금씩 안으로 기어든다. 오랫동안 여물을 담지 못한 통들은 허기져 보인다. 무엇이든 삼킬 듯 속이 깊고 어둡다. 경주, 포항,강릉, 속초, 울산 등 줄 서 있는 그들은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서 있다. 저마다 울긋불긋한 옷차림에 배낭을 들거나 메고 있다. 대체로 무리지어 떠나거나 끼리끼리 짝지어 떠난다. 집단으로 떠나 집단으로 놀고 집단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즐겁고 들뜬 표정이다. 일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개들도 즐거운 일이니까. 나도 씨도 그 중 어느 한 줄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모두들 휴일 속으로 들기 위해, 공일을 공치지 않고 즐겁고 신나게 보내기 위해, 저마다 전국의 산과 들과 바다를 찾아 아침부터 서두른다. 몇 사람의 여자들이 역사의 유리창을 닦고 있다. 전부 나이 든 아줌마들이다. 그냥 할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느 놀 일이 없어서인 것 같다. 역무원은 금테 모자를 쓰고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다. 봄, 봄 새봄이다 .나이든 그네들에게도 봄이 온다고 먼먼 하늘을 향해 손 흔드는 것 같다. 사람들만 붑미는 것이 아니다. 가지런한 의자들도 붐빈다. 의자들은 우선 울긋불긋핟. 나들이 인파들의 옷 색깔과 닮았다. 언뜻 보면 플라스틱 의자들도 단체로 소풍 나온 것처럼 비친다. 금형으로 찍어낸 의자들은 둘씩 넷씩 짝을 이루어 좌석을 만들고 있다. 그 위에 앉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짝으로 나란히 앉아야 한다. 조금 다르게 생긴 사람은 조금 다른 생각과 함께 나란히 앉는다.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은 전혀 다른 생각과 함께 나란히 앉는다. 그런데 나란히 앉아 있는 것들은 모두 나란하여 제법 비스비슷하게 보인다.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인가? 가만히 바라보면 의자들은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는듯하다 가지런히 다리를 모으고 눈썹을 모은 채 눈을 감거나 턱을 고이고 있다. 깍지 낀 놈도 있고 등을 기댄 채 생각의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놈도 있다. 의자 위엔 아무도 앉지 않았으나 실제 비어 있지는 않다. 저처럼 의자 자신이 여러 모양으로 꽉 차게 앉아 있는 한 말이다. 아무도 없이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의자는 아주 편안해 보인다. 모든 것을 비우고 무료히 앉아 있는 의자는 스스로 넋을 놓고 있어 자신이 의자인 것도 잊은 것 같다. 붑빔은 잠시 텅 빔으로 바뀌고 그 순환은 한참동안 계속된다. 갓바위 등 팔공산 쪽으로 가는 버스는 승객들이 통조림처럼 꽉 찼다. 그들이 표정도 사뭇 다르다. 교외로 빠지는 차 속 사람들의 표정은 그들의 복장처럼 울긋불긋하다. 웃고 떠들고 의기양양한 가운데 붕 떠서 간다. 시내로 달리는 차 속의 사람들은 웃지 않고 떠들지 않고 붕 떠 있지도 않다. 아무도 서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낮게 물밑처럼 가라앉아 보인다. 기막힌 봄날이라서 인파에 끼이지 못하여 좀은 주눅 든 표정이다. 복잡한 것은 싫어, 시내에 긴한 볼일이 있어. 저마다 합당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구멍 바로 위 썬팅한 유리에는 붉은 글씨로 성인 500원. 아동 200원이라고 씌어 있다. 백 원짜리 주화 다섯 개를 밀어 넣는다. 초록색 탑 하나가 앉은 표가 나온다. 그걸 들고 조선시대 무시무시한 경상감영 문을 들어선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수문장이 손을 내민다. 들고 있던 초록 탑읋 내려놓고 몸만 들어간다. 여기가지 걸어온 사람들은 말을 타고 드시오! 그러자. 비석이 이마가 벗겨지도록 크게 웃는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도 웃는다 비석 옆에 말없이 서 있던 제주 하루방도 웃는다. 나도 씨의 마음도 하늘을 향해 웃는다. 배가 쿨렁거리고 가슴이 따뜻해 온다.
벤치 위에 데이트가 있고 속삭이는 밀어가 았다. 벤치 아래로는 가지런한 다리가 드리워져 있도 다리와 다리 사이에는 햇살과 적막도 흐르고 있다. 고원에는 시원하게 뿜어 올리는 분수가 있고 부서지는 분수에 반짝이는 햇빛도 있다. 햇볕과 함께 햇볕이 만드는 그늘이 있고 그늘이 멱 감는 연못도 있다. 살작 살짝 불어오는 봄바람이 있고 봄바람에 피는 꽃도 있고 지는 꽃도 있다. 그 중에 발갛게 피어로는 복사꽃이 있고 복사꽃은 연못 속으로 그림자를 붉게 드리운다. 물에 비치는 하늘에는 한가로이 구름 떠가고 그리로 희고 붉은 비단잉어와 금붕어들이 헤엄쳐 돈다. 바람이 물살 지으며 연못 위로 미끄러지듯 스쳐가고 그 바람에 복사꽃 꽃잎 몇 개 물살 위로 떨어진다. 나도 씨는 이 든 것들을 연못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보고 있다. 하염없이 물끄러미 또는 물끄러미 하염없이, 공원에는 그렇게 또 꽃피는 세월도 있다.
연못 건너편에는 누가 지나간다. 그 뒤를 이어 한 떼의 노인들이 유령처럼 ㅈ나간다. 노인들은 대개 흰옷 차림이고 머리에는 중절모를 쓰고 있다. 그들을 뒤따르는 글미자가 물 위에 비친다. 죽음의 그림자 행진 같기도 하고 무슨 허깨비들의 외출 같기도 하다. 모두들 경로증을 지니고 무료장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에겐 매일 매일이 휴일이고 만년 공일이다. 어찌보몀ㄴ 저들은 멈춰버린 자동차 같다. 더 나아가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멈춘 시간 속에 고여 있다. 그들에겐 내일이 없다. 오늘만 있다. 지금은 목화송이 같이 형형하게 피어 있으나 내일은 알 수 없다. 홀연히 하나, 둘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노인들은 햇살 소복한 분두새 근처 소남누 그늘 속에 자리 잡고 앉는다. 그들이 머리 위로 하얀 부누사가 물보라를 만들여 솟아오른다. 분수대 바닥에 갈린 조약돌들이 발가벗은 채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젖었다 말랐다 한다. 그 주위에 키 낮은 꽆꽃들이 형형색색으로 피어 분수대에서 흩ㅊ어지는 물방울에 젖는다. 노랑나비 두 마리가 물보라 사이를 위험스레 날아다닌다. 물보라는 속에다 작고 둥근 무지개를 가두어 놓는다. 비둘기들이 분수대 근처 젖은 풀밭 위에 내려앉는다. 비둘기의 발간 발목이 물기에 젖으며 붉게 드러난다. 노인 하나가 앉은걸음으로 비둘기들에게 다가간다. 주머니에서 무얼 끄집어내어 비둘기 앞에 내민다. 비둘기들이 기우뚱기우뚱 다가와 그걸 쪼아 먹는다. 먹이를 주던 노인과 그걸 지켜보고 있던 노인이 비둘기를 구워먹고 싶은지 입을 오물거린다. 문득 아침에 본 골동품 가게의 여물통들이 생각난다. 속이 빈 여물통과 껍데기만 남은 노인들은 잘 어울린다. 벤치에서 낮잠 자며 거친 숨을 뿜을 때마다 얼굴을 덮은른 신문지가 들썩거린다. 개미처럼 작은 활자들이 스멀스멀 자고 있는 남자의 코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13번 버스를 탔다. 나도 씨 내외는 버스 승강장이 있는 큰길까지 걸어 나와 13번 버스를 탔다. 승객들이 수숫대처럼 빽빽했다. 배들은 거의 흐르기를 잊은 듯한 강물 위를 한가롭게 떠다녔다. ‘타는 목마름, 오직 그것 뿐! 언제 어디서나 코카콜라!’ 우리는 그 음료광고의 카피처럼 살아온 것이다. 그들은 광고에서 한 번도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오로지 땀 흘리며 즐기는 스포츠나 레저 속에서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음료로만 각인되었다.
엷은 봄하늘이 각진 빌딩들 사이에 걸려 있다. 하늘은 마치 찢어진 커다란 스카프처럼 보인다. 좀 있으면 그 하늘을 재단할 밝은 가위 하나가 초승달로 떠오를 것이다. 오후가 되어 그런지 시내에는 사람들로 넘친다. 극장 안은 자루 속처럼 컴컴하고 눈이 어둠에 익을 때까지 입구 벽 쪽에 가만히 붙어 섰다가 빈자리를 찾아가 앉는다. 좌석이 듬성듬성 비어 있다. 골목을 걸어 갈 때마다 골목들은 조금씩 내부를 열어 속을 보인다. 그것은 그에게 유혹이 되었다. 오늘은 기꺼이 그 유혹에 따른다. 골목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풀숲을 가르며 가는 뱀처럼 꼬불꼬불 낮은 지붕들 사이로 가고 있다. 골목은 골목을 만들며 또 다른 골목을 열면서 간다. 골목은 골목에서 자요, 골목에서 해방, 골목에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닿지 못하는 데가 없다. 골목은 골목으로 살아 있어 기관지이고 혈관이고 신경조직이다. 골목은 큰길로 척후도 내보내며 첩보도 한다 한 번도 대로로 나가지 않으나 대로를 꿰차고 앉아 있다. 골목은 골목에서 막힌 데 없이 골목의 나라를 만들며 골목으로 완성된다. 골목은 없는 것이 없다. 장대 끝에 헝겊 메어놓고 둥둥 북 치고 징 치며 점괘 고르는 귀신도 살고 있다. 비끼는 저녁햇살에 온통 유리창뿐인 7층 높이의 현대빌딩은 번쩍거리는 불기둥 같다. 바로 그 불기둥 앞에 한 무리의 청년들이 서 있다. 그들은 무언가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줄지어 서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팔을 들었다 놓았다 하거나 내뻗었다가 거두어들였다 하며 외치고 있다. 그들은 보험회사의 새로 뽑힌 영업 사원들 같다.
버스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붐빈다. 시외로 나갔다가 시내로 들어오는 사람과 시내에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뒤섞여 있다. 이제 그들 사이엔 구분이 없다. 서로서로 친밀감을 느끼며 하나가 되어 귀가한다. 나도 씨도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흔들리며 가고 있다. 버스 천장에서 내려온 손잡이들이 두 줄로 나란히 드리워져 있다. 어찌 보면 공중에서 내려온 교수대의 올가미 같기도 하고 수갑 같기도 하다. 서 있는 사람들은 다리는 버스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그것들 속에 손을 넣고 있다. 나도 씨의 손목에도 수갑이 채워져 있다. 교수대의 올가미나 수갑 같은 속박이 때로는 사람들의 흔들리는 중심을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서 버스를 내린 나도 씨는 땅거미 진 길을 걷는다. 나도 씨의 옆과 앞뒤에도 사람들이 걷는다. 휴일 나들이에서 일상의 삶으로 서둘러 돌아오고 있다. 어둑할 때 사람들은 돌아온다. 저마다의 둥지로. 그러나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더러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오기도 하고 그 담 날 돌아오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어둠 속에 오래 남아 일하는 사람도 있다. 어둠 속에 섞인 희끄무레한 낮에 기대어 어둠을 묶어내는 사람들이다. 하루의 안식으로 귀가하기 위해 남은 짐바리를 챙기는 사람도 있다. 식구득 속으로 허허롭게 갈 수 없어 마지막 땀방울을 거두고 있다. 나도씨는 늦도록 희끄무레하게 남아 있는 사람들 곁은 쉽게 지나칠 수 없다. 그의 마음이 잠시 거기에 묶인다. 모든 하루의 끝은 저녁이다. 모든 존재들이 저녁을 기다리는 것은 저녁의 잠과 휴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씨는 언젠가부터 외우고 있는 휴식이라는 시 한 편을 암송해본다.
날이 저물고 있다
여자들은 나가 빨래를 걷고
돌아오는 아이들
발자국 소리 힘차다.
이제는 유예의 시간
지구도 정해진 동안
그 운행을 멈추고
세상의 가장 못난 한 사람에게도
삶이여, 휴식을 주라!
어두운 하늘이 바로 머리 위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가 본 별은 그 속에서 더욱 밝고 크게 반짝였다. 손을 뻗으면 아득히 잡힐 듯했다. 옥상 가장자리고 가 내려다보였다. 모든 것들이 눈 아래로 들어왔다. 도시의 크고 작은 집들이 눈을 뜨듯 불을 켜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건너편 쪽의 어둠 속을 응시하였다. 어둠 속 골목 끝자락에 그이 집이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지금쯤 전등불을 켜고 돌아올 시간이 지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집에 갈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출근해야 할 월요일이 업어졌기에 결코 내일로 갈 수가 없었다. 나도 씨는 고개를 돌려 다시 별을 바라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저 밟고 따스한 벌뿐이었다. 이제 여기서 날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나비처럼. 새처럼. 그래. 날 수 있다. 이곳은 하늘 속이니까. 난간 위로 올라가 새가 날개 펴듯 두 팔을 좍 옆으로 벌리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별로 가겠다는 열망으로 빛났다. 아슬아슬 난간 위로 올라가 잠자리날개를 펴듯 두 팔을 벌렸다. 잠시 뒤 나도 씨는 난간을 박차며 어둠 저편으로 날아갔다.
<평- 김호운 소설가
박방희 소설을 관통하는 제재는 다양한 형테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굴곡진 애환드이다. 때로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때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 삶들을 꿰둟으며. 그 속에 녹아 있는 사랑과 아픔을 꺼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일관된 것은 부드럽고 아을다눈 문장이가. 그러면서도 서사를 이끄는 힘이 넘핀다. 시와 동시 여러 장르를 함께 활동한 박방희 소설가의 장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