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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포섭한 이재복은 누구? | ||
박정희를 남로당에 가입시킨 이재복(李在福, 1948년 당시 46세)은 원래 목사였다. 평양 신학전문대학 졸업 후 일본 동지사대 신학부를 나와 경북지방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사회주의자가 된 그는 해방 뒤 경북 도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남로당에 입당했다. 박상희, 5.16후 박정희를 포섭하러 남파됐다가 체포돼 사형된 황태성 등과 동년배로 친구사이였다. 그는 이른바 '대구 10.1 사건'으로 박상희가 죽자 그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박정희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다. 군부의 세포들은 대개 그가 포섭했거나 아니면 그가 포섭한 중간책에게 다시 포섭당한 사람들이었다. 박정희와 처형된 최남근 중령 등은 그가 직접 포섭한 인물이다.
이제는 말할수 있다에서는 최남근 중령은 남로당이 아니었다는 말도 돌았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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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곤 장군 | |
8연대 시절 경비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정희 소위를 휘하에 소대장으로 데리고 있었던 김점곤
평화연구원장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춘천 시절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이 춘천까지 찾아와서 박정희를 만나곤 했습니다. 그 때 박정희는 나에게 이재복을 '숙부'라고 소개했습니다. 박정희가 체포된 후 그의 자술서를 봤더니 이재복을 통해 입당했다고 돼 있더군요."
이어진 김점곤 원장의 설명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김 원장은 "남로당에서 박정희에게 군 총책을 맡길 때 이미 그는 당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며 "박정희는 빈농 출신에다 형의 죽음 때문에 원한이 있었고, 특히 사범학교 때 조선공산당사건을 접했으며, 또
만주 군관학교 수석 졸업 등 이른바 '최고의 성분'을 가지고 있어 남로당 측에서 탐낼만한 인물이었다"고 평했습니다.
한편 그가 남로당에 가입한 시기는 흔히 '춘천 시절'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8연대(연대장 원용덕 대령)가 주둔하던 춘천은 그가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1946.12.14)한 후 첫 부임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9개월 정도 근무 후 다시 이듬해 9월 육사 중대장으로 전보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근무행적을 기록한 '장교자력표'에는 춘천시절이 빠져 있습니다. 아마 원본은 없어지고 이후 재작성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장교 자력표는 장교가 거쳐간 경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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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8연대 작전참모 대리로 근무하던 시절에 박정희가 작성한 망양리 인근 가상 작전도. 제작일자는 1947년 7월 22일. | |
그와 춘천 8연대에서 같이 근무했던 사람 가운데 생존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육사 3기생 출신으로 춘천 8연대 시절 박정희 밑에서 교범 번역 등을 도왔던 염정태(육군 대령 예편, 1997년 당시 74세)씨를 만나 박정희의 '춘천 시절'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회고담입니다.
"사관학교 시절부터 박 선배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연대본부 작전주임을 맡고 있었는데, 강릉 3대대(대대장 송요찬 중령)로 잠시 파견을 나와 3개 대대 신임장교(36명)들의 교육을 맡았습니다. 당시 철도관사를 장교숙소로 썼는데 파견돼 오는 날 보니 샤벨(칼날은 없고 크롬 도금한 지휘도)을 차고 오셨더군요."
그 무렵 두 사람은 죽이 맞아 바쁜 와중에도 일과가 끝나면 강릉에 있는 명월관, 봉래관으로 쏘다니며 자주 술을 마셨습니다. 술값은 보급품으로 지급되던 '씨레이션'(미군 야전용 휴대식품)을 팔아 충당했습니다. 1개월간의 파견 근무가 끝난 후 박정희는 춘천 연대본부로 복귀했죠. 박정희가 남로당 인맥과 연결된 것은 바로 그 이후라고 염씨는 확신했습니다.
"8연대에는 빨갱이가 수두룩했습니다. 우선 박정희와 신경군관학교 2기 동기생인 이상진(8연대 부연대장) 소령은 연대 내 총책이었습니다. 박 전대통령이 이들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당시 이들은 포섭대상자들을 가입시키기 이전에 ○, △, ×로 분류한 다음 검증을 거쳐 최종 '○'를 받은 자에 한해 가입을 시켰는데 박 전 대통령도 여기서 '○'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다음 육사 기수인 육사3기는 거의 속칭 빨갱이
천지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여수 14연대 반란을 일으킨 김지회 중위이죠..
(어제 예고편에서 여수 14연대 반란에 김지회 중위와 지창수 상사가 일으킨것 이야기한바 있습니다.)
어제 예고편 참조 바랍니다.
[분석] 동창회 명부 중 '유고자 명단'
▲ 지난 1996년 육사 개교 50주년을 맞아 육사 총동창회에서 펴낸 회원명부. 사진은 3기생 사망자 명단 가운데 포함된 '유고자 명단'. 이들은 대개 숙군 때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다.
ⓒ육사 총동창회 회원 명부
지난 1996년 육군사관학교 개교 50주년을 맞아 육사 총동창회(회장 김점곤, 1기)는 <육사 총동창회 회원명부>를 발간했다. 이 명부에는 1기에서부터 52기까지의 졸업생 명부가 실려 있다. 앞 기수로 갈수록 사망자 명부가 각 기수별 명단 말미에 별도로 첨부돼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3기생의 경우 전사자, 순직자, 사망자에 이어 '유고자 명단'이라는 항목이 별도로 있는데 그 숫자가 무려 56명이나 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숙군 때 처형된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여순사건의 주모자 김지회, 홍순석을 비롯해 동해안 일대의 좌익 총책 강문영, 박정희와 함께 군사재판을 받은 김종모(대위, 급료몰수 및 징역 15년, 최종 징역 5년 감형), 홍순오(중위, 급료몰수 및 징역 15년, 최종 징역 10년 감형), 한상순(중위, 급료몰수 및 징역 15년, 최종 징역 10년 감형), 한동석(중위, 급료몰수 및 징역 15년, 최종 징역형에 한하여 집행정지), 김형식(중위, 급료몰수 및 징역 10년, 최종 징역 1년 감형) 등이 그들이다.
또 제주 주둔 9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주모자 문상길도 이 명단에 포함돼 있다. 특히 군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김창룡(1연대 정보주임, 나중에 특무대장 역임)도 바로 3기생 출신이다. 한마디로 쫓고 쫓기는 사이가 서로 동기생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대해 3기생 출신 염정태씨는 "3기생 300명 가운데 50% 정도가 좌익에 포섭됐다는 얘기도 있었다"며 "이는 생도시절 생도대장 오일균(당시 소령, 일본 육사 61기)과 중대장 조병건(당시 소령, 일본 육사 60기) 등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등 남로당 군사조직을 탐지한것이 그 유명한 김창룡 특무부대장이었습니다..당시는 특무부대장은 아니었고
정보주임이었지만 특유의 일본군 헌병 병과 답게 냄새를 맡은거죠..
* 오늘은 바쁘고 피곤해서..내일 예고로 일단 마감을 해야겠네요..
내일은 드디어 여수 순천 14연대 반란입니다.. 사실 국가보안법이 생기게 된 원인도 여수 순천 14연대 반란입니다.
내일 등장 인물 소개입니다.
저희 외가댁에도 1950년대 초반에 놀러왔다는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1950년대 전후반 좌익 및 양민 학살에 이사람이
대부분 개입되어 있습니다. ) : 김종원은 뉴기니아 전선에서 싸워서 악만 남았습니다..그러나 다른사람은 몰라도
이종찬 장군에게는 쩔쩔 맸죠.. ( 이종찬 장군은 뉴기니아 전선에서 일본군 소좌. 김종원은 흔히 말하는 군조-하사관-였죠..)
당시 김종원이 나타났다..하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5연대 1대대 대대장일때 여수 순천 진압군 지휘관으로 등장해서..반란 가담자들을 당시 국민학교에서 즉결참수형을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에서 악명을 떨친 김창룡.
김지회,지창수 (여수 순천 반란 지휘자)
김점곤, 백선엽.
최남길 중령.
이승만 고문인 하우스만 고문.
그외 여수 순천 사건 관련 이야기...내일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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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한문을 잘 몰라요..ㅠㅠ 왕무식해염 ㅠㅠ
근데.. 라마님은 이이제이에서 누가 젤로 좋으셈?? O_O
괜찮습니다..한문세대가 아니시죠?
그리고 우리에게는 좋은 한글이 있잔아요..그리고 최대한 FACT(사실)에 입각해 쓰려고 자료등을 찾아서
올렸는데..(남로당이 사실이지만...민감한 상황이니까요,뭐..글말고도 이제는 말할수 있다에 많이 나온거니까)
저는 이이제이에서 다 좋아요...여기 댓글에 쓰기에는 너무 길고 오늘 아침을 열면서..쓰겠슴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해 주신 라마님께 감솨~~^^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