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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 6,1-6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상히 여겨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보는 눈’에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는, 그들은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는, 그들은 눈이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루카 18,11)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가 18,13),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상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잖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루카 18,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14)
주님!
낮추는 이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평가나 꾸짖음을 물리치지 않게 하시고, 인정할 줄을 알고 굽힐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을 차별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게 하시고, 존중하고 존경하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앞에 서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내세우지도, 숨기지도 않게 하시고,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게 하소서.
오,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잘 알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지금까지 저는 하느님을 잘 아는 것이 대수는 아니라고 많이 말해왔습니다.
복음의 악령들도 주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괴롭히려고 왔냐고, 그럴 것이면 제발 떠나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잘 알지만 거부하고, 하느님 뜻을 잘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그런 앎은 오히려 아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기에, 그 아는 것이 대수는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호세아서는 하느님을 알자고, 알려고 힘쓰자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은 하느님을 잘 알려고 힘쓰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면 하느님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잘못 알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잘못 알면 잘못 믿게 되고 시작부터 믿음이 잘못되겠지요.
복음을 보면 잘못 아는 것에 대한 예를 주님께서 몸소 들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잘못된 하느님 이해입니다.
하느님을 모질고 심지도 않고 거두시는 분으로 그는 이해하잖습니까?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고 두려워 피하기만 할 것입니다.
은총을 받기는커녕 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주님께서 또 드시는 예가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바리사이는 자기를 자랑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만, 더 큰 잘못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잘못입니다.
나쁜 짓은 하지 않고 교회 의무를 다하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더 큰 잘못은 하느님께서 그걸 좋아하실 거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것은 겸손과 사랑입니다.
단식과 십일조가 아닙니다.
단식과 십일조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 만족이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겸손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렇잖습니까?
자랑할 데가 없어서 하느님 앞에서 자랑합니까?
누가 자기 자랑이나 하러 제게 오면 저는 당장 쫓아낼 겁니다.
꼴불견이어서 쫓아내기도 하겠지만, 저를 사랑하거나 만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저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기 위해 온 것이기에 쫓아낼 것입니다.
이것을 하느님은 다 잘 아십니다.
하느님은 나를 샅샅이 다 아시고 내 속마음까지 아신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아심을 잘 알고 자기의 참모습도 아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겸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이 당신에게 바치는 십일조가 아니라 이웃 사랑이고, 그러므로 이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십일조는 하느님 사랑의 십분의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십분의 일을 되돌리는 사랑이지요.
이는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십분의 일만 되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로 하느님께서 미역국 끓여 드시겠습니까?
하느님께는 십일조가 필요치도 않고, 그러니 그 십일조를 이웃에게 돌려주는 것을 더 원하실 겁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선물하는 것보다 형제간에 우애 있는 것, 다시 말해서 형제간에 경쟁하며 싸우지 않고 사랑하는 것, 이것을 모든 부모가 더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드리는 것, 그 사랑을 알기에 이제 형제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하느님을 알라고 호소하는 호세아서의 가르침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밥맛 떨어지는 사람>
초등학생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 제일 싫은 사람일까요?
‘잘난 척 하는 사람, 자기 자랑하는 사람이 제일 밥 맛 없답니다.’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결코 현명한 사람이 아니며, 사람들은 자기 자랑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남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럼에도 자격지심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 중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과오요,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속마음을 보십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속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에 예수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 5,8)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과오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희망합니다.
‘자기를 높이면 남들이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들이 그를 또한 끌어내립니다.
자기를 낮추면 남들이 높아지고 높아진 사람들이 그를 더욱 높여 올립니다.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세상의 어김없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이현주)
마리아는 외쳤습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감사와 아첨을 구분하는 법>
1971년 12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동의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 사고가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 사고들 중 하나이며 총 사망자가 200여명에 이릅니다.
사건 당일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던 상태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고, 사망 자 중에는 주한 대만 대사관 위셴룽(余先榮) 공사와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 무관 파질 유즈바시오글루 대령도 있었습니다.
이 화재는 카페에서 사용하던 프로판가스 통에서 누출된 가스가 폭발하면서 발생했습니다.
화재 발생 당시 호텔 내부에서는 안전 규정을 위반하여 화재 경보기나 스프링쿨러 등의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화재 발생 직후 호텔 내부로 연기와 불길이 빠르게 번져, 숙박 고객들은 탈출이 어렵게 되었고 옥상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어 문 앞에서만 2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일의 문제는 불 자체라기보다는 부실 공사 등으로 속이려 하는 자들의 아첨과 아부에 속아 넘어간 호텔 책임자들에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칭찬과 접대에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아첨이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자신과 이웃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감사이지 아첨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도 예배가 아닌 아첨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아첨이었고 세리의 기도는 감사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보기에는 바리사이가 훨씬 감사의 기도를 많이 드리는 듯 합니다.
세리처럼 죄를 짓지 않는 것에 감사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기도도 주님 때문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아서 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무언가 되는 존재처럼 여기며 자신을 들어 높이는 기도도 있습니다.
나를 죽여주었기 때문에 드리는 찬미가 진정한 감사요 예배입니다.
‘시간을 달리는 남자’란 TV 프로그램에 나와 정형돈 씨에게 젊은 시절 엄마를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한 마디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의외로 덤덤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거 진짜 잘 들어야 돼요. 길어!
마흔에 고혈압으로 크게 한 번 쓰러지십니다.
그리고 3년마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거든요?
그 중간 중간에 쓸개, 자궁, 맹장을 떼 냅니다.
이거 잘 생각을 하셔야 해요.
50대부터는 당뇨, 고혈압으로 고생하시고 60대에는 심근 경색으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하십니다.
60 중반부터는 인공 관절이라든지 관절쪽으로 수술을 많이 하시고. 70대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십니다.
이것을 다 견디실 수 있으시다면 ... 또 ... 저를 낳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 안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감사요 예배요 찬양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신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분 아니면 구원은 물론이요, 지금 존재할 수도 없음을 아는 것이 감사입니다.
내 뱀 같은 자아를 당신 피로 죽여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이렇게 나의 압제로부터 나를 이기시고 구해주신 분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모세로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당신 피 흘리심으로 구해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당신께 도움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주님을 예배합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기도와 회개의 은총 - 겸손, 신의, 예지>
역사는 반복되는 듯 합니다.
나라 안팎의 현실을 대하노라면 블랙홀과도 같고 카오스와도 같이 아주 어지롭고 혼란스럽습니다.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견해니 참 분별하기 힘듭니다.
마치 무지의 블랙홀, 무지의 카오스같습니다.
오늘만의 현실이 아니라 예전에도 동서방 어느 나라나 늘 그랬습니다.
늘 위기였고 그때마다 통과해 왔습니다.
너무 비관적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해마다 특별 영적 훈련기간이자 회개와 정화의 시기인 교회의 사순시기가 참 고맙습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고 온전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단 하나 참된 회개뿐입니다.
참된 기도에서 참된 회개요 참된 겸손입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바리사이는 무지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참으로 무지한 사람으로 참된 회개와 겸손이 절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들입니다.
의로움은 자기의 행동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하느님만이 부여하시는 은혜입니다.
다음 바리사이의 기도를 통해 그의 삶과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했다니 이것은 대화의 기도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실감나는 바리사이 기도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기도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교만한 삶입니다.
순전히 자화자찬 자기자랑의 유치한 기도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마나한 기도입니다.
기도하며 비교하며 판단하며 무시하니 판단의 죄, 무시의 죄를 짓습니다.
자기를 전혀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참된 회개와 겸손의 정신이 전무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열린 기도가 아니라 완전히 자기 안에 닫힌 기도입니다.
과연 나의 기도는 바리사이를 닮지는 않았는지요.
다음 호세아서의 말씀이 그대로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다.”
아침 구름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은 신의라 하니 전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는 완벽해 보여도 겸손과 회개의 정신이 전무한 바리사이의 기도와 삶입니다.
반면 바리사이와 너무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완전히 자기를 비운 세리의 가난하고 겸손한 기도입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합니다.
짧으니 진정성 가득한, 세리의 주님 자비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바로 우리가 바치는 자비송은 여기 근거합니다.
진정 가난하고 겸손한 영혼들이 마지막으로 바칠 수 있는 기도는 이 자비송 하나뿐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여기 근거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로 호세아서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 바로 세리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가난하고 겸손한 세리가 되어 주님의 회개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호세아서의 주님께 돌아가자는 회개의 촉구가 참 다정하고 위로가 됩니다.
얼마나 좋으시고 아름다운 주님이신지 회개를 통해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역시 아름다운 전문을 인용합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사흘째 되는 날에 일으켜 살려 주신다니 회개한 이들에게 파스카의 삶을 선사하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된 회개와 더불어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주님을 닮아가고 알게 됩니다.
회개할 때 봄비처럼 오시어 우리의 무딘 마음을 적시어 부드럽게 하시는 주님 사랑의 은총입니다.
그대로 회개의 기도를 바친 겸손한 세리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 것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이니, 세리만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말씀과 제1독서 호세아서 말씀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참된 회개를 통한 은총이 겸손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교만으로 낮아지고 겸손으로 높아진다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참된 회개의 은총의 열매가 이런 겸손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바로 호세아의 메시지를 집약하는 말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겸손해질수록 하느님께서 바라시는바 신의요 당신을 아는 예지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의 사람은 바로 주님을 닮아 겸손한 사람이요, 신의와 예지의 사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겸손의 사람, 신의의 사람, 예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루카 18,10)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앞에 선 두 유형의 사람을 만납니다.
당시 열심하고 의로운 이의 대명사격인 바리사이와 죄인의 대명사격인 세리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루카 18,11)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루카 18,13)
하느님 앞에서 바리사이는 자기의 공로로 당당하고, 세리는 자기의 부족함에 움츠러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의 결백과 의로움에 자신감이 넘치고, 세리는 자기 죄로 눈도 못 들 만큼 하느님께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오 하느님 ... 제가 ... 와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 바칩니다."
(루카 18,11-12)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자기의 공을 일일이 설명하며 여타의 죄인들과 같지 않음을 알아주시길 은근히 요구하고, 세리는 그저 자비만을 간청할 뿐입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루카 18,14)
예수님께서 누가 봐도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바리사이가 아닌, 명백히 죄인인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선언하시지요.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말씀 안에 그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초에 바리사이의 기도를 "혼잣말"(루카 18,11)이라고 표현하셨으니까요.
기도하는 사람마다 나름 기도에 대해 정의를 합니니다만, 가장 보편적으로 보면 하느님과의 대화,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과 마음 나눔, 하느님과의 일치, 하느님과의 사랑 등으로 이야기하지요.
기도에 무수한 형식이 있고 기도 안에도 다양한 내용이 담길 수 있지만, 꼭 필요한 건 기도를 드리는 이와 대상 되시는 분의 관계성, 즉 상호관계성이 아닐까 합니다.
이것이 빠지면, 글쎄요, 그건 자기 외에 듣는 이 없는 독백, 즉 혼잣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혼잣말은 자기 암시와 자기 위로, 자기 영광으로 흐릅니다.
자기의 공적을 기억하고 자기 확신을 공고히 하며 스스로를 높일 뿐, 굳이 상대가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느님 앞의 나"에서 시작됩니다.
지고의 선, 지고의 진리, 지고의 아름다움이신 분 앞에 서면 상대적으로 악하고 거짓이며 추한 부분이 없을 수 없는 자기의 실존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완전무결한 분이시면서도 초라한 자기에게 몸을 굽히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상대를 향해 자연스레 일어나는 참회, 간청, 두려움, 감사, 사랑이 기도랄 수 있습니다.
자비를 간청하는 기도를 통해 세리와 하느님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필요가 생겨납니다.
그의 기도가 하느님을 움직인 것이지요.
이 상호 관계성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십니다.
그 의로움의 증거는 차츰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성은 이웃에게로 흘러넘치게 마련이니까요.
벗님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편이세요? 아니면 냉담하고 계시나요?
교회 안에 냉담한 신자가 열심한 신자보다 훨씬 많아서 걱정이라네요.
하지만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일미사 잘 나오고 열심히 기도생활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사람이 주일미사 빠지기를 밥먹듯 하고 기도생활도 거의하지 않는 냉담신자보다 꼭 더 훌륭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열심한 신자라 하더라도 자신은 "이만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냉담신자가 "하느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라고 고백하는 것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더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벗님, 사정상 냉담하고 계십니까?
큰 죄중에 있어 교회에 못나가고 계십니까?
너무 걱정마시고 오늘 세리처럼 고백하십시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따뜻하게 안아주실 겁니다.
바리사이는 어떻게 하면 율법을 잘 지켜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열심히 산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세리는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 동족들에겐 매국노로 취급받던 사람입니다.
윤리적인 기준에서 보면 누가 뭐라 해도 세리보다는 바리사이가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똑같은 죄인일 따름이니까요.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그래서 바리사이같이 아무리 훌륭하게 보여도 자신은 죄인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겸손하게 죄인으로 고백하고 있는 세리라는 말씀이지요.
벗님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바리사이인가요?
자신은 그래도 잘 사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바리사이인가요?
아니면 세리같은 사람인데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세리인가요?
아니면 그것도 모르는 세리인가요?
저는 여러분이 1번일 거라고 믿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3번이시길 축원합니다.
잘 살든 못 살든 제 꼬라지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나의 보잘것 없는 수고와 공로를 자랑하기보다 겸손하게 나의 부당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국에 있을 때는 건강검진을 2년에 한번 받았습니다.
교구에서 사제들의 건강을 위해서 배려해 주었습니다.
혈액검사, 위 내시경, 안압검사, 치과검사, 청력검사, 체지방검사, 심전도검사, 소변검사, 장내시경검사가 있었습니다.
검사 결과는 1달 정도 있으면 나옵니다.
검사 결과를 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병원에 내방하여서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편으로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귀찮다는 핑계로 우편으로 결과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상담하는 것도 좋지만 어김없이 찾아 오는 계절처럼 제 몸에도 그다지 좋지 않은 곳들이 있기 때문에 상담하러 가지 않곤 합니다.
‘지방간, 콜레스트롤, 요산, 혈압’은 약방의 감초처럼 위험의 경계에 있습니다.
뉴욕에 와서도 몇 번 혈액검사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크게 더 나빠지지는 않았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100점짜리 건강검진 성적표를 받는 것은 ‘희망사항’인 것 같습니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 건강검진을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 건강검진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겉으로는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고 자부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정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겉은 하려한 옷으로 단장했지만,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윤기가 나지만, 그들의 마음은 교만으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고 떠들었지만, 자신들은 손끝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단식을 하면서 단식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안식일의 계명을 지키면서 안식일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제물을 봉헌하면서 제물 봉헌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정신을 가졌던 사람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굳이 찾아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갈망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그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과부의 헌금도 칭찬하셨습니다.
헌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헌금을 하는 정성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자캐오의 나눔도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가진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눈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되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는 자캐오와 그 가족은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죄인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였습니다.
세리는 겸손되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1년에 2번 판공성사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대림판공성사를 마련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을 가지고 예수님을 방문했던 것처럼 나눔, 희생, 자선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 드리기를 권면합니다.
성모님이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 지소서.’라고 말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거룩함이 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사순판공성사를 마련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감사 드립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수 있도록 결심합니다.
베로니카처럼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도록 결심합니다.
1년에 두 번 대림과 사순의 판공성사를 잘 준비하는 사람은 건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부모님께서 친한 친구로부터 자녀에 대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 때 스케이팅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1년이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겨우 스케이트 날로 서 있을 뿐입니다.
결국 다른 운동을 시켰습니다.
이번에는 축구입니다.
그런데 공만 보면 피하기만 할 뿐, 신나게 달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를 본다면 어떤 아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운동신경이 부족한 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성장해서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단지 스케이트와 축구만 못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운동 종목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운동 중에서 두 종류의 운동을 잘하지 못한다고 운동신경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몇 가지의 모습만 보고서 ‘그가 틀렸다, 맞았다’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단 하나의 모습만 보고서 ‘그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서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고, 또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외향적인 성격만 있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침묵 속에서 묵상하는 것을 너무나 즐깁니다.
이 모습을 보면 제게는 내향적인 성격도 분명히 있습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몇 개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세리를 향해 ‘죄인’이라면서 손가락질했습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징수해서 당시에 점령국이었던 로마에 전해주던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 세리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 세리를 도급제로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일정액의 세금만 바치면 자기 멋대로 금액을 정해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도 묵인했습니다.
그래서 더 뭇 백성의 원성을 샀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면서 이상한 감사 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보다 자신을 낮추면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짓는 사람이 바로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모습은 자신을 낮추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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