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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 7,4-5ㄴ.12-14ㄱ.16
그 무렵
4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4,13.16-18.22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자 비오 9세께서는 요셉 성인을 “보편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셨고(1870년), 가경자 비오 12께서는 “노동자들의 수호자”로,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구세주의 보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요셉 성인에게 “죽음을 앞둔 이의 수호자”로 간구합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요셉 성인의 보편교회의 수호자 선포 15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하신 교황교서 <아버지 마음으로>(2020.12.8.)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목받지 않고 날마다 신중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요셉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 곤경에 놓일 때의 주재자, 지원자,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숨겨져 있거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이 구원역사에서 비할 데 없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곧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19)는 것과,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라고 할 만큼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다는 것과,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 하는 순명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중 세 번째 것인 “순명하하는 사람 요셉”에 관해서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위의 교서에서는 “순종하는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보여주셨을 때 하신 것처럼, 요셉에게도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이용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을 때) 첫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 (라고 하였고) ...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요셉은 순종함으로써 ... 마리아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마태 2,13) (하자,) 요셉은 자기가 직면하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주저하지 않고 천사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 (그는 다시) 천사의 말이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세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그 아기를 죽이려는 자들이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도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마태 2,19-20 참조).
요셉은 이번에도 바로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마태 2,21).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길에 “...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마태 2,22-23).
이것이 네 번째 꿈이었습니다.
... 요셉은 모든 상황에서, 주님 탄생 예고 때의 마리아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처럼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역할인 가장으로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탈출 20,12 참조) 부모에게 순종하도록(루카 2,51 참조) 가르쳤습니다.
... 나자렛에서 지낸 감추어진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법을 요셉에게서 배웠습니다.
...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성 요셉은 직접 자기 부성의 실현을 통하여 예수의 인격과 사명에 봉사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과, 이렇게 하여 ‘충만한 때에 위대한 구원신비에 협력하였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참으로 행동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실행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 위에 굳건한 사람>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 “의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 3,5 2코린 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 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 9,30. 필리 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우거나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는데 무조건 참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 22장을 보면 간음에 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 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이고 존중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받은 만큼 되갚아 주려는 인간의 연약함을 일깨워주는 스승입니다.
요셉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로움을 간직한 믿음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더 큰 사랑으로 그리고 더 큰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얼토당토않은 불의한 현실 앞에 침묵함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입니다>
마리아의 배필이자 예수님의 양부(養父)셨던 요셉이었습니다.
비록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요셉은 이 세상 그 어떤 친부(親父) 못지않게 예수님을 양육하는 데 있어 지극정성이었습니다.
마리아와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혼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닌 기묘한 동거였지만, 요셉은 이 세상 그 어떤 남편보다도 마리아에게 자상하고 충실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더불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크게 기여한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복음 사가들은 예수님 탄생 전후, 아주 제한적으로 요셉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과월절을 맞이하여 소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것을 끝으로, 요셉은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요셉에 대한 복음 사가들의 제한적인 기록,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요셉은 과묵하고 진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의로운 사람, 주님의 뜻에 충실했던, 주님의 명령과 초대에 절대 순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이 어떤 유명 인사의 부모처럼 말이 많은 사람이어서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면서 이러쿵저러쿵 인터뷰를 하고 이 방송사 저 방송사 다 출연하고 다녔다면, 예수님께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을까요?
다행히 성모님과 더불어 성 요셉은 침묵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벌이기보다 조용히 기도하고 관조하며, 작게나마 주님의 구원 사업에 작은 도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침묵의 사도 요셉 성인 축일에 침묵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침묵할 때와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거듭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얼토당토않은 불의한 현실 앞에 침묵함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입니다.
무죄한 이웃이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 앞에 침묵함은 죄악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성숙과 나약함, 위선과 이중성에 대한 신랄한 지적 앞에 침묵과 숙고, 성찰과 회개의 여정은 우리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미덕이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하는 사람>
“사랑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강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히브 2,16-18)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사람으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같아지는 과정에서 아기 예수님의 부모로 요셉과 마리아가 선택되었습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를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지시를 받아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1,27),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만’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 1장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요셉이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요셉은 그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극복했고, 응답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1) 요셉은 마리아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마리아는 요셉에게 그 일을 곧바로 알렸을 것입니다.
요셉은 ‘성령 잉태’ 자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었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마리아에게 일어났음을 믿었습니다.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을 보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못해서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경우를 볼 때가 많습니다.
사랑한다면 믿어야 합니다.
2) 요셉이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한 일도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나타냅니다.
‘사람들 모르게’ 파혼하려고 한 것은 겉으로는 법적인 부부로 살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에게 그 어떤 불행한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즉 요셉은 사랑하는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고, 아기의 진짜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라면 자기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서 파혼하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3) 요셉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작정만 하고 실행하지는 못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고민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난 일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꿈에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 자신의 증언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에 응답과 확신을 얻은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천사가 나타난 일이 많은데, 그 일들도 요셉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요셉은 하느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 일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과 ‘사랑’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었기 때문에 응답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느님이 두려워서 복종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해서 순종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두려워서 복종하는 것은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순종하는 것은 끝까지 갑니다.
5) 요셉의 사랑과 믿음과 기도와 순종은 ‘인내’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도, 또 태어나신 뒤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요셉은 하느님과 마리아와 예수님을 사랑했고, 믿었고, 기도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만일에 사랑도 믿음도 없고 기도하지도 않는다면, 인내하지도 못합니다.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는 사람일수록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믿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말수가 적은(또는 말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은 그의 사랑과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요셉의 그 사랑과 믿음과 기도와 인내를 본받아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한결같은 배경의 의인 - 성요셉 예찬>
어제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의 강론을 요약한 제목의 말마디에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는 듯 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의인 요셉을 기리는 대축일에 걸맞습니다.
“여러분의 눈을 여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선물들에 놀라십시오.”
선물 중의 선물이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 요셉 수도원의 주보 성인인 의인 성요셉입니다.
아니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선물에 감동한 삶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역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선물같은 시편 성구였습니다.
오늘 하루 끊임없는 기도 노래로 바쳐도 좋겠습니다.
“주여,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아주 오래 전 어느 수녀님이 넋두리처럼 던진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노인은 많은데 어른이 없고, 선생은 많은데 스승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른 없다, 스승 없다, 성인 없다 탄식할 일이 아니라 내 먼저 어른이, 스승이, 성인이 되기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감사하게도 시공을 초월하여 참 어른이자 스승이요 성인이신 성요셉을 만납니다.
어제 점심식사 시 한 수사님이 제 강론에 인용했던 만세 삼창의 기도를 언제 하느냐 묻기에 얼버무렸습니다만 지금 밝힙니다.
밤에 기상하자마자 방에서 소리내지 않고 하는데 평소 삼창에다 오늘은 성요셉을 넣어 만세 사창을 하였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수도원 만세!”
“성요셉 만세!”
이렇게 가슴을, 마음을, 활짝 열고 양손을 활짝 펼쳐 푸른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부르는 기도 역시 영육의 건강에 참 유익한 수행이겠습니다.
오늘은 한결같은 배경의 의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임종자의 수호자이자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신 성요셉은 말그대로 위대한 배경의 의인이자 성인입니다.
오래 전에 불암산을 보며 써놨던 자작 “산처럼! 이란 자작 애송시 역시 산같은 배경의 하느님 아버지를, 또 예수님의 양부 요셉을 상징합니다.
성가정의 한결같은 배경의 수호자 의인 성요셉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
넉넉한 품의 배경이 되어 살라고 유난히 산들이 많은 우리나라 같습니다.
산이 붙은 지명은 얼마나 많은지요.
제 경우 고향만 해도 예산군禮山郡에 봉산면鳳山面에, 아홉 개 바위를 품은 산동네라 하여 구암리九巖里입니다.
이제 도시 아파트촌에서 태어난 이들은 이런 추억과 꿈이 가득한 고향의 주소도 못지닐 것이니 얼마나 정서적으로 궁핍하겠는지요.
한결같은 산같은 배경의 의인 요셉의 성덕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미사 후 부를 퇴장 성가 280장 “성요셉 찬양하세” 역시 의인 요셉의 성덕에 대한 찬양입니다.
요셉의 성덕은 끝이 없지만 셋으로 요약하여 나눕니다.
첫째, 성요셉은 의로운 사람, 의인이었습니다.
성경의 의로움은 또는 정의는 근본적으로 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충실함을 뜻합니다.
요셉은 마리아와의 관계에서 참으로 마리아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니 바로 이것이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다음 구절이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관대하고 고결한 의인 요셉의 인품을 요약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말그대로 산의 배경, 산의 품같은 의인 요셉이었습니다.
존재는 관계입니다.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이요 인간의 될 수도 없습니다.
마리아의 처지를 배려하는 요셉의 자비로운 연민의 사랑은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얼마나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았는지 그대로 오늘 요셉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처신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래서 의로운 사람, 의인 요셉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요셉은 침묵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없는 무겁고 어두운 침묵이 아니라 깨어 있는 밝고 맑은 경청의 침묵, 사랑의 침묵입니다.
이런 침묵은 그대로 하느님의 언어가 됩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이런 경청에서 겸손의 덕이, 순종이 덕이, 무죄한 삶이 자연스럽게 뒤따릅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이런 침묵의 덕입니다.
그러나 2020년부터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하다 오늘부터 마스크를 벗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마스크를 하며 그동안 침묵을 배웠음이 큰 소득일 것입니다.
새삼 침묵 역시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요셉의 경청의 침묵 중에 수호천사도 항상 함께 했음을 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밤새 침묵의 기도중에 고뇌하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결정적 조언을 주는 수호천사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마도 이 결정적 말씀을 성요셉은 평생 마음에 새기고 살면서 배경의 품이, 사랑의 품이, 침묵의 품이 되어 예수님을, 마리아 성모님을 성심성의껏 돌봤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원대한 꿈, 사무엘의 예언입니다.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은 이미 그 아득한 옛날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하느님의 나라 교회의 출현을 암시하는 예언입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셋째, 성요셉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순종, 믿음의 인내, 믿음의 정주, 믿음의 뿌리입니다.
믿음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동케 합니다.
믿음이 인간을 품위있게 합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은 믿음의 잣대이자 영성의 잣대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지체없이 순종하니 하느님은 얼마나 요셉의 믿음에 감동하고 기뻐하셨겠는지요!
자비하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은 절대로 일방적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발적 협력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니 침묵의 경청중에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사순시기 참으로 자주 나오는 시편 성구를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성 요셉의 믿음의 족보는 아브라함, 다윗에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전인자 DNA가 의인 요셉에게 그대로 전수되었음을 봅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순교영성의 유전인자 DNA가 전수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다음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아브라함에 대한 고백은 그대로 성요셉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대로 닮은 성요셉입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이라면 신약의 성요셉입니다.
역대 교황님들은 물론 신자들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았던 성요셉입니다.
지금 3월은 은총의 사순시기이자 성요셉 성월입니다.
한결같은 배경의 의인, 침묵과 믿음의 성요셉의 성덕을 닮을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21년도 요셉 성인에 대한 교리교육을 마치면서 바친 요셉 성인께 드리는 기도로 강론을 끝냅니다.
“침묵의 사람 성 요셉이시여,
당신께서는 복음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으니,
헛된 말을 금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올바르게 이끌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지지하는 말의 가치를 다시금 발견하게 하소서.
비방이나 중상모략과 같이 상처주는 말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고,
항상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게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구약의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엘리야라고도 하였고, 예레미야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도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칭찬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이끄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호칭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하느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였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앙인은 모두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저도 가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신문사 직원들은 저를 ‘사장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동북부 ME 부부들은 저를 ‘동북부 엠이 대표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부르클린 공동체에서 교우들은 저를 ‘본당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저의 직책은 다양하지만 저의 정체성은 ‘사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제가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말을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마귀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재물, 명예,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병자를 고쳐주기 위해서는 병자들의 아픔을 공감해야 합니다.
사제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던 요셉 성인은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법대로 하면 요셉은 마리아를 상대로 고소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은 무척 엄격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기분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면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셉 성인이 법대로 했다고 해도, 기분대로 했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명백히 마리아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말할 수 없었던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였고, 조용히 파혼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커다란 배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또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의로운 삶’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유명한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사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은총을 주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때가 많습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기준이 되곤 합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 세상입니다.
돈이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을 팔고, 사람을 속이고, 소중한 것들을 멀리합니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신학생 때로 기억됩니다.
당시에 선 묵상이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특히 수도자들이 이 묵상을 위해 절에 가서 선 묵상을 했습니다.
불교의 참선을 통해 마음을 정화시켜 하느님께 향한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깊이 하느님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아예 개종하는 수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소중한 가치를 간직하지 못했기에 개종한 것입니다.
종종 개신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다는 분을 만납니다.
가톨릭 안에는 그런 프로그램이 없어서 영적 갈증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안에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2,0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 안에 그런 프로그램이 왜 없겠습니까?
그보다 쉽게 영적 갈증을 채우려는 욕심으로 다른 종파의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분명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 금송아지가 자기들을 구원으로 이끈 하느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역시 하느님을 쉽게 만나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진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미사와 묵상 그리고 각종 피정 프로그램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것이 마치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뜻인 양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너무 쉽게 하느님을 만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좀 더 우리의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것에 집중할수록 일상 안에서도 쉽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말처럼, 남의 것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머무는 어리석음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을 지냅니다.
요셉 성인께서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기르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복음에서는 요셉 성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법대로 사는 사람,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대로 살기가 더 쉽습니다.
원칙대로만 살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대로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셉 성인이 대단한 것은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것인 ‘사랑’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따를 수가 있었고, 끝까지 가정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는 길은 쉬운 길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의미 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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