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 장흥군 '탐진강 ~ 천관산'
전라남도와 황해남도는
해안선 지형이 유사하다.
섬이 많은 것 또한.,공통점.
2017.9.12 ~ 9.14 2박3일.
'4인1조' 승용차.,답사여행.
서울(05:00)~장흥~제암산~천관산~
정남진(1박)~탐진강~장흥군청 앞(점심)~
목포항. 압해도 여객터미날~ 암태도~자은도~
안좌도~팔금도 여객선~목포항~목포(2박)~
영광 불갑산 상사화축제 ~서울(22:00).
섬 여행은 섬에 배타고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에 배표 매진, 출항시간 변경 등.
예상도 못한 문제로 애로사항을 겪게 된다.
그러나, 근래 섬마다 연육교로 이어져
요즘은 섬 여행을 하는데 한결 편해졌다.
예전에는 섬마다 1박2일 쯤 일정이었지만
요즘 연육교로 하루에 몇개 섬 여행도 가능.
원래, '무안~ 지도~증도 ~임자도'
신안군 섬들을 여행 할 계획이었으나
중도에 계획을 수정하여 장흥으로 간 것.
장흥삼합(표고 +소고기 + 키조개)
장흥군 소문난 육회를 맛보기 위함.
.
........................전라남도.........................
옛부터 찬란한 남도문화를 꽃피운 '예술의 고장'
예향(藝鄕)이라 많은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 중기에는 담양의 송강 정철(松江, 鄭澈) 문학,
해남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문학이 조선시대
단가(短歌)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고, 공재(恭齋, 尹斗緖),
의재(毅齋, 許百練)를 대표하는 남화, 소치(小痴, 許維),
소전(素筌, 孫在馨)으로 이어지는 서예의 대가들이 있다.
가창에는 동편제(東便制)의 송만갑(宋萬甲),
서편제(西便制)의 신재오(申在五)·임방울(林芳蔚)
남도창이 우리나라 가락을 대표해 맥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무형문화재의 보고로 진도의 진도아리랑·
진도봄놀이· 진도만가· 진도씻김굿·진도다시래기·
남도들노래· 강강술래 등 다양하며 이 외에 나주의
샛골나이, 곡성의 돌실나이, 함평의 농요, 구례의 향제
(鄕制)줄풍류, 거문도의 뱃노래 등 무형문화재가 많다.
화엄사의 각황전(覺皇殿) 등 국보 18점, 보물 156점,
사적 40개, 중요무형문화재 13개, 중요민속자료 35개,
사적 및 명승 3개, 명승 9개 등 국가지정문화재 330점,
도지정문화재 1,035점은 전국 문화재의 10.3%를 차지.
함평 나비 축제,
담양 대나무 축제,
보성의 다향제,
영광의 법성포 단오제와 굴비 축제,
진도의 영등제,
장성의 백양제,
영암의 왕인문화제,
구례의 지리산약수제,
여수의 거북선 축제,
완도의 장보고(張保皐)축제,
장성의 홍길동 축제,
제암산 철쭉제,
순천의 팔마문화제
목포권의 도자기축제 등
청정해역과 푸른 산악관광 지역이 있고,
풍부한 문화유산 우수한 관광자원이 많다.
관광지로는 노고단(老姑壇)·반야봉(盤若峰)·
피아골·화엄사·천은사 등이 있는 지리산국립공원
내장산국립공원· 한려해상국립공원·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월출산국립공원· 무등산국립공원 등의 국립공원
조계산도립공원·두륜산도립공원 등의 도립공원.
근년에는 화순군 화순·도곡온천
월출산·지리산 등에 온천이 개발.
해남군의 대흥사와 땅끝,
진도군의 운림산방(雲林山房)
모도(茅島) 썰물 때 육계도화(陸繫島化),
강진군 다산초당(茶山草堂),
순천시의 낙안읍성,
담양군의 식영정(息影亭),
소쇄원(蕭灑園) 등.
또한 서해안과 남해안에는 전라좌수영 겸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여수의 좌수영대첩비,
충민사(忠愍祠), 진남관(鎭南館), 선소(거북선 조선소)
영광군은 독특하게 민족종교로서
전국에 포교되고 있는 원불교(圓佛敎).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의 탄생지.
송광사·선암사·화엄사·백양사·대흥사 등은
31본산으로 수려한 산수와 아울러 찾는 사람이 많고
홍도(紅島), 완도, 여수 오동도 등은 전국적인 관광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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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옛 땅으로 후에는.,백제의 영토.
백제가 사비성(泗沘城)을 서울로 정한 다음
5부5방제(五部五方制)로 전국 행정구역을 삼을때
남방(南方), 즉 구지하성(久知下城)에 속하였다.
신라 병합뒤 685년(신문왕 5) 9주제로 정비때
무진주(武珍州)에 속해 15군 42현으로 나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14군 44현이 되었다.
892년(진성여왕 6) 견훤이 무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를 수도로 삼아 백제의
옛땅을 회복 중 고려가 통일하며 고려 영토가 되었다.
983년 고려(성종 2)에 전국을 12목으로 나눌 때
이곳은 나주목(羅州牧)· 승주목(昇州牧)의 관할.
995년 전국을 10도로 재편할 때에는 해양도(海陽道).
1018년(현종 9)에 전국을 5도양계(五道兩界)로 나눌 때
강남도(江南道: 지금의 전라북도)와 합해 전라도라 하고
전주에 감영을 두어 2목 2부 18군 82현으로 나누었다.
조선시대 1471년(성종 2) 경국대전 완성됨에 따라
전라도 명칭이 사용, 인조 영조 때 전광도(全光道).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일시
전주부·남원부·나주부 등으로 분할.
이듬해 23부제를 13도제로 바꿈에 따라
노령 이남의 땅을 전라남도, 광주에 도청.
1897년 좌수영에 여수군 신설
무안군이 부로 승격되었으며,
흥덕·고창·무장 3군 전북 편입.
전라북도 구례군이 전라남도로 이관.
1944년에 전라남도는 제주도를 포함해
2부(광주·목포) 1도(제주도에 島司) 21군.
광복 후 1946년 제주군이 제주도로 분리 승격.
1949년 부가 시로 개편되고 여수·순천이 시로 승격.
1969년 무안군의 도서부가 분리되어 신안군이 신설.
1973년에 광주에 구제가 실시되어 동구와 서구가 설치.
1976년에는 군에 준하는 여천지구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2년에는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합해 금성시가 되었다.
1986년 1월 여천지구출장소를 여천시로 승격했고,
금성시는 나주시로 개칭했으며, 광양지구출장소 설치.
같은 해 11월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되고 송정시가 신설.
1988년 1월 송정시. 광산군 폐지
광주직할시 광산구에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광양지구출장소가
동광양시(東光陽市)로 개칭되고,
1995년 도농통합으로
순천시와 승주군이 순천시,
나주군과 나주시가 나주시,
광양군과 동광양시가 광양시.
2005년 11월 도 청사를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현재, 무안군 삼향읍 오룡길1(남악리)]로 이전.
담양호.,운해
광주.,무등산국립공원
고흥반도
전라남도.,섬 여행.
전라남도 진도.,모세의 기적.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
보길도.,윤선도 유배지
.
2017.08.11. 전남 완도군.,
'노화도~소안면 구도'
연도교 완공., 개통.
연도교는 2007년 제3차 도서종합개발
시범사업(2011년 착공, 6년 만에 완공).
.
전라남도 여수
전라남도 여수
전라남도 완도
전라남도 장흥군
탐진호
탐진강
탐진강 수중 줄다리기.
...........................탐진강..............................
장흥군 유치면. 장동면에서 시작되는., 56㎞ 강줄기.
부산면을 거쳐 장흥읍의 중심부를 가로질러 흐흔다.
전남 3대강(영산강, 섬진강, 탐진강)의 하나.,탐진강.
원래, "예양강" "수녕천"인데, 탐라도 사람이
육지에 처음 배를 대어 올라왔다하여 탐진강.
아직까지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백옥같은 물줄기.
굽이마다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의 절경이 함께 어우러져
이곳 강줄기마다 풍류를 즐기고 시국을 논하던 10 개 정자.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머무르게 한다.
탐진강 하천명은 탐라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
배가 이 강 하구의 구십포에 머물렀다고 해서 탐라국의
탐자와 강진 진(津)자를 따서 탐진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강유역에는 용반평야를 비롯하여
부산평야· 장흥평야· 강진평야가 분포.
'탐진강 하구' 구십포는 수심·수온 등이 장어가 살기에 알맞아
장어 서식지며. 은어도 서식하나 하천오염으로 인해 줄고 있다.
유역 내에는 보림사를 비롯한 고성사·금곡사·무위사 등의 사찰.
궁성·수인산성·수암서원·연곡서원·사인정·부춘정 등의 유물· 유적.
이 강의 지류인 금강(또는 금강천)의 상류지역은 월출산국립공원.
영암 월출산도립공원.
월출산
장흥댐(탐진댐)
2005.5.25 장흥댐에 담수 직전의 풍경.
2005.6.18 / 점점 불어나는 장흥댐 담수
수몰 아픔 안고 태어난., 탐진호
댐에 담긴., 단산(丹山)의 집성촌
장흥댐 건설로 탐진호에 수몰된 고향산천
옛집들과 조상들의 산소가 물속에 잠기어
옛 흔적조차 볼수 없어 세운.,갈두마을 망향비.
.
장흥군 유치면, 부산면, 강진군 옴천면
총 691세대 2100명이 장흥댐공사로 이주.
..................장흥댐......................
장흥군,영암군 해남 ,진도 ,목포 ,신안 ,
완도,강진 등 식수공급원 역활을 하고 ,
홍수 조절,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다목적댐.
..........................................................
정남진 회타운
장흥.,정남진 물축제
정남진(正南津)
정남진(正南津)은
한양 광화문에서.,
정남쪽 끝 나루터.
...................................................
"12~13세기 경에 타이 왕조가 다스렸고
'타이 황제' 여름 별장이 있었다."는.,장흥.
........................................................
시기적으로 보면
원나라가 2차례나
일본 정벌을 시도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장흥은
사실 여부를
알고 싶어서.,
2번째 답사여행.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묻혀져가는 전설 수집을 위하여
전국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면서
'1박2일 답사여행' 다닌지 어연 10년.
전국을 1박2일 일정으로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지만
장흥은 68세에야 처음 가봤다.
장흥은 서울에서 거리가 멀어
2박3일 일정으로.,2 차례 답사.
매우 흥미롭고 신비로운.,여행지.
태국
...................태국 국왕의 외교.....................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국가는 태국(당시 국호 '시암')뿐.
이는 영국, 프랑스 두 강대국이 태국을 둘러싸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 태국을 완충 지대로 두었기 때문
아울러, 탁월한 외교와 국왕을 정점으로 한 노력도 요인.
타이는 13세기에 발달한 수코타이 왕조 때 영토를 넓히고,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였다.
16세기 후반 일시 미얀마에 지배당하였으나 곧 물리치고 독립.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초기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1917년 연합국 편으로 참전하여 승전국이 되어 국위를 높였다.
1932년 무혈 군사혁명이 일어나 지금의 입헌국주제가 되었으며,
타이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군사혁명으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군부와 민간정치세력 간의 균형위에서 정치안정을 도모.
군부의 이익 보호와 지지를 배경으로 민주주의 정치 집행.
국왕은 국민적 단결과 화합의 구심점으로, 국가위기 조정자.
국민들은 오랫동안 독립국가 유지에 긍지.
국왕에 대해 높은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불교의 영향력이 매우 커 2만 7000여 개의 사찰이 있으며,
건축·회화·조각품·고전문학 등에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난다.
현 푸미폰 국왕은 1946년 6월 즉위한 이래 국가를 대표하면서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 아래 실권자 아피시트 웨차치와
총리가 2008년 12월 18일 취임해 내각을 이끌며 2007년신헙법 제정.
태국은 대외적으로는 자유를 표방하며,
1946년 유엔에, 1993년 비동맹회의.,가입.
........................................................
태국 왕궁
장흥군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적으로 탐라국과 밀접.
이웃 강진군 역시 탐라와 밀접.
아울러, '고려~조선'시대
무역 또는 한반도에 입항한
외국 선박들을 통해 문화교류.
외국 선박 표류인들과의 접촉 또한
잦았으므로 외국 선진문명 유입 통로.
강진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저술한
500 여권 서적 대부분을 집필한 곳으로
그중 절반은 외국서적을 번역한듯 보인다.
.........다산초당(정면 5칸, 측면 2칸)............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
동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이 해 사적 제107호 지정.
건물은 도리단층기와집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
경내에는 정석(丁石)·약천(藥泉)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竈)
등 다산(茶山)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
필자는 다산초원을 두 차례.,답사여행.
만덕산.,다산서원에서부터 백련사까지.
..........................백련사................................
백련사는 '1211년~1232년(고종 19)' 21년 만에 완공.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
송광사 중심으로 수선사(修禪社)와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
그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
고려 말, 강진이 3번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폐허화.
조선 세종 때 효령대군 보호를 받아 불탄 가람을 복원.
그뒤 효종 때 3차 중수 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
강진군 곁에
위치한.,장흥군.
...............장흥군 연혁.................
1265년(원종 6)에 다시 회주목으로 승격
1310년(충선왕 2)에 장흥부로 강등되었다.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내륙으로 이전.
1392년(태조 1) 수령현 중령산에 성을 쌓고 중심지로 했으며,
1413년(태종 13)에 장흥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
16세기 중엽 명종대에 치소가 좁다 하여 옛 수령현 땅으로 옮겼다.
장흥의 별호는
정주·관산이었다.
.......................
삼한시대 마한의 건마국으로.,비정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마차현이었다.
신라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오아현으로 개칭,
보성군 영현이 되었으며, 통일신라말 이곳 보림사에서
선종 9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이 개창되었는데 고려 초
정안현으로 이름 바꿨다가 11세기 초 현종대 장흥부 승격.
이때 수령현· 회령현· 장택현· 탐진현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 타이(태국: 泰國).......
2만년간 거의 계속 사람이 거주
타이어를 쓰는 민족이 10세기 무렵
중국에서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해왔다.
13세기 크메르 왕국에 대한 반란이 성공한 후
1220년경 세워진 수코타이 왕국과 하리푼자야
몬 왕국을 물리친 후 1296년경 일어난 치앙마이
왕국 등 2개의 타이 민족국가가 세워졌던.,태국.
1350년 수코타이 왕국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아유타야 왕국은 15세기초에 수코타이 지역을
완전 흡수하고 크메르 왕국을 폐허로 만들었다.
...............................................................
1569년 아유타야 왕국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미얀마인들이 아유타야군을 물리치고 수도를 점령
15년 동안 아유타야 왕국을 지배. 1767년 미얀마인들이
다시 한번 타이 수도를 점령한 이후, 아유타야 왕조 마감.
......................타이족(Thai)..............................
타이족(Thai)으로도 불리는 시암족(타이 중부와 남부),
라오족(라오스와 타이 북부), 샨족(미얀마 북동부), 루족
[潞族 : 중국 윈난 성에 살지만 미얀마, 라오스, 타이 북부,
베트남 등지에도 거주], 윈난 타이족, 북베트남 타이족 포함.
타이 인구 4,506만 명,
라오스 302만 명, 미얀마 371만 명,
중국 2,118만 명, 베트남 약 279만 명을
포함하여 합계 7,576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타이족은 소승불교도이지만
집단에 따라 신앙형식에 상당한 차이
대다수 젊은이들은 일정기간., 승려생활.
주요경제활동은 벼농사로
고지대 밭벼, 계곡에서 논벼.
여자들의 지위는 높은 편이며
카스트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락의 수장이나 수도승,
연장자들이 부락을 다스린다.
타이족은 1세기에 양쯔 강 유역
그후 중국인에게 밀려 각지로 이주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타이족으로는
윈난 성의 바이이족·루족·누족[怒族],
구이저우 성[貴州省]의 부이족[布依族],
'광시좡족 자치구' 좡족[壯族] 등이 있다.
타이 문화의 독자성은 미얀마의 샨족,
타이의 시암족, 라오족 중 가장 강하다.
전통적으로 신적인 군주의 통치를 받지만
군주들은 예전의 독립성을 모두 잃은 상태.
시암족은 타이 인구의 대부분.
강이나 충적평야 지대에서 산다.
부락은 300~3,000명 주민들로 구성.
시암족은 대부분이 농촌에 거주하는 하층민
그 위에는 장인·상인·정부관리·승려 등이 있다.
라오족은 메콩강 주변에 살며 라오스 인구 2/3.
북베트남 타이족은 흑타이·백타이·적타이 포함
루족은 윈난성 & 미얀마·타이·라오스 인접지역.
가옥은 2~2.5m 높이의 말뚝 위에 지어져 있다.
이들은 중국의 다른 지방에 사는 타이족보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덜 받았으며, 미얀마·타이·
라오스 타이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장흥군(長興郡)....
동쪽은 보성군·고흥군,
서쪽은 강진군·영암군,
남쪽은 완도군,
북쪽은 화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47∼127°02’, 북위 34°25∼34°52’.
면적 622.41㎢, 인구 4만 3513명(2015년 현재)
3개 읍, 7개 면, 280개 행정리(136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장흥로 21(건산리 715-11).
노령산맥 소백산맥 여맥이 이어져
노년기 잔구성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북부는 비교적 고지대로 산지를 이루며,
남부는 해안지대 간척사업으로 비옥한 평야.
지질은 화감암·편마암 및 제4기 충적층으로 구성.
........동쪽.........
금성산(錦城山, 401m)·
제암산(帝巖山, 807m)·
골치산(骨峙山, 664m)·
사자산(獅子山, 666m),
.........서쪽............
국사봉(國師峰, 613m)·
부용산(芙蓉山, 609m)·
수인산(修仁山, 561m) 등
...........남쪽............
양암봉(陽巖峰, 465m)·
천관산(天冠山, 723m),
..............북쪽...................
국사봉·봉미산(鳳尾山, 506m)·
가지산(迦智山, 510m),
.............중앙..........
억불산(億佛山, 518m)·
용두산(龍頭山, 551m)·
광춘산 등이 있다.
.......................제암산..................................
장동면과 보성군 웅치면 경계선으로 일명 곰재산.
남동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하지만, 북서쪽 사면은 급경사.
남으로 사자산·억불산·천관산, 북으로 금장산·용두산·봉미산
동으로는 보성을 지나 고흥반도까지 그 여맥이 이어지고 있다.
남성적 형태며, 커다란 계곡과 개울이 많다.
산 정상부는 넓은 풀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에 3층바위가 있어 100여 명은 앉을 수 있다.
.................................................................
정상의 바위를 향해 주위의 바위들이 엎드린 형상을 하여
임금바위(제암)산은 남해를 바라보며 등산할 수 있는 등산로,
소나무와 철쭉, 다양한 산야초가 자생하는 기암괴석 호남의 명산.
산속에는 가난한 형제가 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떨어져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형제바위가 있고,
형제바위 50m 아래 좌우에 의상암자와 원효암자.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제암단이 있으며,
무등산·월출산·천관산·존제산, 남해가 보인다.
봄이면 곰재산을 거처 사자산에 이르는 능선은
철쭉군락지 붉은 기운이 다도해를 향해 뻗칠 정도.
5월 중순이면 남해의 훈풍을 받아 화려하게 피어 만개.
제암산의 산철쭉은 흰꽃이 없고
오직 붉은색만 있어 더욱 화려하다.
제암산 철쭉평원에서 매년 철쭉제 개최.
.................천관산 설화...................
하늘을 바다 삼아 항해하던.,관세음보살.
'천관산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고 전한다.
하늘 배에 가득 실려 있었던건.,불경(佛經).
관세음보살은 배와 경전을
천관산에 그냥 놔둔채 승천.
돛이 우뚝 선 '돌로 만든 돌배.
일만(一萬) 경전이 쌓여있는듯 하여
대장봉(大臟峰)이라 불리우는.,봉우리.
그 어디쯤에 돌배 한척이 정박해 있을까?
천관산(天冠山)은 ‘하늘 관’을 쓰고 있는 산.
산봉오리들이 연꽃처럼 둥글게 피어 있는데
산 능선에만 기암괴석이 불쑥불쑥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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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서 보면, 왕관 형태니 ‘천관’이라 불릴 만하다.
조선의 김여중(金汝重)도 ‘유천관산기(遊天冠山記)’에서
“산정에 천자의 면류관을 드리운 듯해 천관산이라 이름했다”
조선 시문선집 ‘동문선’에 실려 있는 ‘천관산기'
天冠山記(천인 스님 著書)’에 이런 기록이 있다.
“… 남쪽 바닷가 옛적
오아현(烏兒縣)에 천관산이 있다.
… 이 산을 지제산(支提山)이라고도 한다.
‘화엄경’에도 있듯이 ‘보살이 머물렀던 곳을
지제산이라 이름하고, 현재 보살이 있는 곳을
천관이라 이름한다’는 설도 이와 같다.” -천관사기-
전남 장흥군을 통일신라 때., ‘오아현’.
정명국사가 인용한 ‘화엄경’ 속 지제산은
‘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 나와 있다.
“… 동남방에 지제산(支提山) 있으니
천관보살이 그의 권속 일천보살과
함께 있으며 법을 설하고 있느니라. …”
............천관산(天冠山)............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로 옛지명은
천풍산(天風山)·지제산(支提山)이다.
가끔 흰연기 이상한 기운이 서려 신산(神山).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소년 시절에 사랑한
천관녀(天官女)가 숨어 살았던 산이라는.,전설.
장천재의 깊은 계곡과 치솟아 있는
산정 일대의 봉우리는 정말 아름답다.
억불산은 장흥읍과 안량면·용산면 경계,
남사면은 비교적 완만, 북사면은 급경사.
정상에는 옛 봉수대, 능선 끝에는 덕림재.
탐진강(耽津江)이 북서부를 남류하다가,
유치면에서 옴천천(唵川川), 장흥읍에서
금강 등 합류, 강진군 지나서 남해로 유입,
그밖에 홍거천(洪巨川)·남상천(南上川)·
고읍천(古邑川) 등. 해안은 간척지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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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도·장재도·장관도 등 대부분 섬이
인공 제방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동한 난류가 흘러., 온화한 해양성기후.
연평균기온 12.9℃, 1월 평균기온 -0.1℃,
8월 평균기온 23.8℃, 연강수량은 1,963.3㎜.
특히, 여름철 태풍 집중 호우일때 2,000㎜이상.
산간지대는 해안지대에 비해
기온 체감으로 2℃ 정도 낮다.
대개 첫서리는 10월 말경 시작
늦서리는 4월 중순경까지 내린다.
구석기·신석기 유물·유적 발견은 없었으나
2002년 8월 국도2호선 공사 때 드러난 문화층
조선대학교 박물관에서 2003년부터 7개월 동안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유물 3만여 점을 발굴했다.
장흥 신북 구석기유적은 2008년 4월 11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238호로 지정되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장흥읍·관산읍·대덕읍·안량면 등 고인돌군과
장흥읍 건산리 유물 산포지 등지에서 발견된
민무늬토기편· 어망추· 홍도편· 반달돌칼 등.
마한시대 건마국(乾馬國)이 있었던듯.
백제 영역에 편입된 뒤로 이 지역에는
오차현(烏次縣)·마사량현(馬斯良縣)·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계천현(季川縣)·
두힐현(豆肸縣) 등이 있었다.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오차현은 오아현(烏兒縣),
마사량현은 대로현(代勞縣), 고마미지현은 마읍현(馬邑縣),
계천현은 계수현(季水縣)으로 개칭되어., 모두 보성군의 영현.
두힐현은 강원현(薑原縣)으로
개칭되어 분령군(分嶺郡)의 영현.
신라 말 경문왕 때 도의(道義)와 체징(體澄)에 의해
선종의 가지산문(迦智山門)이 보림사(寶林寺)에서
개창되어 선종구산문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초 오아현이 정안현(定安縣)으로,
마읍현이 수령현(遂寧縣)으로 고쳐져서
영암에 예속되었고 대로현은 회령현(會寧縣)으로,
계수현은 장택현(長澤縣)으로 고쳐져 계속 보성군의 속현.
.
그뒤 정안현은 인종 때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장흥부로 승격되었다.
이 무렵 장흥부는 회령현·수령현·장택현과
영암군의 속현이었던 탐진현(耽津縣)
등 4현을 이속시켜 거느리게 되었다.
1265년(원종 6)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
1310년(충선왕 2) 다시 장흥부로 강등되었다.
1274년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정벌 때
선박 제조임무 부과로
천관산 부근의 목재로
전함을 만들었다.
또한 동정군(東征軍)이 회주성에서 출발.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침입 때문에
수인산성·상잠성 등 많은 성을 쌓았다.
1379년(우왕 5)에는 철야현으로,
1389년(공양왕 1)에는 보성군으로
주민들이 옮겨 이곳은 공지가 되었다.
1392년(태조 1) 부사 황보 덕(皇甫德)이
수령현의 중녕산(中寧山)에 성을 쌓고,
부의 치소로 정하였다.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되었고,
다음해 중녕산의 성이 좁기 때문에
치소를 다시 수령현의 옛 터로 옮겼다.
세조 때 진을 두고, 진도·강진·해남 등을 관할.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왜구에 의해 부사
한온(韓蘊)이 전사하고, 부민이 큰 피해를 입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위대기(魏大器)·선세신(宣世臣) 등은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리고 김헌(金憲)·김응생(金膺生) 등은
조헌(趙憲)의 의병군에 가담해 금산싸움에서 순국.
1599년권율(權慄)의 청에 의해 병영을 강진에서 장흥으로
이설했다가 1604년 다시 강진 구영(舊營)으로 옮겼다.
1652년(효종 3)장흥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9년 복구.
1666년(현종 7) 감사 민유중(閔維重)의 건의로 진을 따로 두어
부사가 겸임하게 하다가 1683년(숙종 9) 진을 순천으로 옮겼다.
조선 중기 백광훈(白光勳)이 문장과 명필로 유명,
정조 때 위백규(魏伯珪)는 호남의 실학자로서 저명.
1862년(철종 13)고제환·정방현 등이 주동해 민란 발생.
.
1894년 동학운동 때 읍내의 석대에서
이곳 출신의 접주 이방언(李芳彦)이 이끄는
동학군이 관군·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패함으로써
호남 지방의 동학운동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895년 나주부 장흥군으로,
1896년 전남 장흥군으로 개편.
이때 대덕면 등에 딸린 섬은 모두 완도군에 이속.
1908년심남일(沈南一)의 의병군이 유치면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웅치면·회천면이 보성군에 편입,
보성군 옥암면 일부를 편입시켰다.
1940년장흥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3개월간 적 치하,
잔존 공비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1951년 7월 토벌작전으로 공비 소탕.
그러나 이 때 보림사가 소실되었다.
1974년 대홍수로 많은 이재민 발생.
1980년 12월 1일관산면과 대덕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5년 11월 1일대덕읍에 회진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6년 4월 1일회진출장소가 회진면으로 승격되었다.
천관산과 억불산 주변에 고인돌이 수백 기 있으며,
관산읍 방촌리에는 한곳에 100여기가 무리 지어 있다.
장흥읍 건산리에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석기 등이 출토.
.
산성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에 중녕산고성,
용산면 계산리와 안량면 수양리에 걸쳐 있는 학성,
관산읍의 성산리에 석남산성,
방촌리와 외동리에 회주산성과 천관산성 등.
이외에 장흥읍 기양리·남동리·남외리에 장흥성지,
회진면 진목리에 고장성,
회진리에 장흥회령진성(長興會寧鎭城, 전남 기념물 제144호)·
맹산산성, 유치면 대리에 장흥수인산성(長興修仁山城, 전남 기념물 제59호) 등
불교문화재로는 유치면 봉덕리에., 보림사,
경내에 보림사삼층석탑 및 석등(국보 제44호)·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
보림사동부도(寶林寺東浮屠, 보물 제155호)·
보림사서부도(寶林寺西浮屠, 보물 제156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157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보물 제158호)·
보림사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
대적광전(大寂光殿) 및 최근에 복원된 대웅전 등이 있다.
관산읍 농안리 천관사에는 천관사오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천관사석등(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4호)·천관사삼층석탑(보물 제795호) 등.
또한 대덕읍 연지리에 장흥탑산사지석등(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6호),
장동면 북교리에 용화사약사여래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안량면 기산리에 미륵사석불(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1호) 등.
장흥읍에 향양리석탑(向陽里石塔),
장평면에 용강리석탑·등촌리석탑·옥룡사여래좌상,
용산면 운주리에 부용사, 관산읍 방촌리에 장안사,
장흥읍 동동리에 신흥사,
장평면 용강리에 고산사석불입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유교문화재로는 장흥읍 교촌리의 장흥향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원도리의 장흥연곡서원(長興淵谷書院, 전라남도 기념물 제18호),
유치면 늑룡리의 강성서원(江城書院,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0호)
예양서원(일명 오현사) 등이 있다.
또한 위백규가 수학했다고 하는 관산면 옥당리의
장흥장천재(長興長川齋,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안유(安裕)와 조선시대 6공신, 그리고 안중근(安重根)을 배향한
장동면 만년리의 만수사(萬壽祠,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1호),
용산면 어산리의 영석재(永錫齋,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9호),
용산면 모산리의 월산재(月山齋,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3호).
장동면 반산리에 이순신 등을 배향한 반계사.
반계사유물일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4호),
장흥읍 행원리에 행강사·석천사, 용산면 계산리에
충렬사, 부산면 용반리에 용호정(龍湖亭),
장흥읍 기양리에 창랑정(滄浪亭),
덕제리에 독취정(獨醉亭),
예양리에 영회단(永懷壇)
등이 있다.
고가옥으로는 관산읍 방촌리에 장흥위계환가옥
(長興魏桂煥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61호)·
장흥위성룡가옥(長興魏聖龍家屋,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6호)·
장흥위성가옥(長興魏聖家屋,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7호),
장흥읍 평화리에 장흥고영환가옥(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1호).
정자와 정원으로는 장흥읍 송암리의 장흥사인정
(長興舍人亭,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5호),
장동면 만년리의 동백정(冬柏亭,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9호),
부산면 부춘리 부춘정(富春亭)과 부춘정원림(전라남도 기념물 제67호),
용반리의 용호정원림(龍湖亭園林, 전라남도 기념물 제68호)이 있다.
문헌으로는 관산면 옥당리에 당포앞바다승첩지도
(唐浦──勝捷地圖,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와
지리지인 『환영지(寰瀛誌)』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안량면 모령리 한형준(韓亨俊)이
제와장(製瓦匠, 중요무형문화재 제91호)으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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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요지로서
용산면 월송리에 장흥이씨백자도요지
(長興李氏白磁陶窯地, 전라남도 기념물 제30호)가 있으며,
원간섭기에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일본정벌 때
무운장구를 위해 세웠다는 장승인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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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398년(태조 7)장흥읍 교촌리
장흥향교가 최초 교육기관이었다.
1698년(숙종 24)장흥읍 원도리 연곡서원 설립.
민정중(閔鼎重)·민유중 형제를 배향, 1726년(영조 2) 사액.
어필각(御筆閣)이 있어 민정중이 1669년(현종 10)
중국의 예종으로부터 받은 친필 비례부동
(非禮不動) 및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1688년에 죽천서원이 설립되었다.
1702년유치면 늑룡리에 강성서원이 설립
문익점(文益漸)을 배향, 1785년(정조 9) 사액.
1610년(광해군 2)장흥읍 예양리에 예양서원(汭陽書院) 설립.
신잠(申潛)을 배향, 그뒤 김광원(金光遠)·유호인(劉好仁)·
남효온(南孝溫)·이색(李穡)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 밖에 충렬사·죽천사·양강사·포충사·기양사 등
많은 사우(祠宇)가 있어서 유생 교육을 담당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5년사립명진학교가 처음 개교.
창명보통학교로 개칭, 1911년공립장흥보통학교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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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지역에서는 전통문화예술제인 보림문화제
이 외에도 제암산철쭉제와 천관억세제도 하고 있다.
이 고장의 대표적 민속놀이로는 고싸움과 줄다리기.
고싸움놀이는 줄다리기에 쓰이는 줄의 머리부분의
둥근 고를 서로 맞대고 하는 줄다리기의 전초전으로,
싸움의 승패는 고의 머리가 상대방 고의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덮치면 결정된다.
이 놀이는 줄 위에 탄 장정들과 열목을 멘 장정들과
뒷줄을 멘 사람들이 전후좌우로 들어주면서
호흡을 맞추어야 하므로 여간 힘든 시합이 아니다.
고싸움이 끝나면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보통 탐진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편으로 나뉘어
승부를 겨루는데 빨리 승부가 나지 않을 때는
하루가 걸릴 때도 있다고 한다.
지금의 장흥읍이 부동면과 부내면으로 분리되어 있었을 때,
양 면의 소년들은 정월 보름이 되면 돌싸움놀이를 벌였다.
소년들은 낮부터 논두렁에 불지르기를 하다가 달이 떠오르면
마을의 청년들과 합세해 예양강(汭陽江)을 사이에 두고
돌을 던지는 상투적 놀이를 펼쳤다. 이 때 돌을 던지되
절대 강을 건너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 밖에도 성밟기·물길어붓기·중로보기
등의 민속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용산면 상발리 남포마을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소등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음력 정월 보름이면 이곳에서 당제와 갯제가 행해진다.
10일이 되면 제주를 선출,
이 때부터 왼새끼줄을 꼬아
동구 밖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뿌려 부정을 막는다.
제물은 제주와 화주가 장만하고,
음식을 만들 때 검식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제를 지내는 방식은 일반 제사와 같으나
제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은 제주와 화주뿐이므로
삼헌을 제주가 행하며, 화주는 집사를 겸한다.
따로 마련된 축문은 없고
제주가 구전해 오는 말로
마을의 풍농과 풍어, 무사고를 빈다.
당제가 끝나고 신호를 하면 밖에서 기다리던 주민들은
농악을 치면서 섬에 들어가, 섬 주위를 돌면서 제물을 뿌리며
당할머니에게 소원을 비는데 이 과정을 갯제라고 한다.
저녁 무렵 제가 모두 끝나면 주민들은
동네에 돌아와서 농악을 치며 밤새 즐긴다.
이 고장에는 「보림사(寶林寺)와 용소전설」·
「며느리바위전설」·「형제바위전설」·
「고동바위전설」 등 지명전설이 전해진다.
유치면의 보림사터는 원래 못이었다는데,
신라의 명승 지눌(知訥)이 절을 짓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이곳 가지산에 도달해 보니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터였으나 불행히도 못이었다.
지눌은 이곳을 메우기 위해 사람들에게
눈병을 앓게 한 뒤 그 치료방법으로 누구든지
눈에 병이 있는 사람은 장흥 가지산의 못에 돌 한 덩이와
숯 한 덩이를 던져 넣으면 눈병이 낫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렇게 해서 못이 메워지자 이 안에
살고 있던 뱀·이무기들이 모두 나갔다.
그러나 청룡과 황룡만은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으므로
지눌이 지팡이로 쳐서 쫓아냈다. 못에서 쫓겨난 두 용은
현재의 용소(龍沼)에 이르러 서로 승천싸움을 벌이다가
백룡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산기슭이 도막나면서 패어 용소가 생겨났다.
결국 백룡은 승천했으나 청룡은
피를 흘리며 돌아다니다가 죽고 말았는데,
이때 넘은 고개가 현재의 피재이고
죽은 자리가 장평면 청룡리라 한다.
그리고 용소가 위치한
마을 이름도 용문동(龍門洞)이라 하며,
늑룡(勒龍)이라는 마을이 그 이웃에 있고,
부산면과 장평면의 경계에는 용두봉(龍頭峰)이 있다.
장흥읍 우목리
한돌 뒤에 솟은
억불산의 며느리바위에는
장자못계의 유래담이 전해 온다.
어떤 인색한 부자영감이 벌을 받아 홍수가 났는데,
물을 피해 산으로 가던 착한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애절한 비명소리에 금기를 잊고 뒤돌아 보다 그만
돌로 굳어져 며느리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암산에 있는 형제바위에도 늙고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산나물을 캐러 갔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효성이
지극한 형제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용산면 운주리 봉황마을에는 부용산이 있고
그 산봉우리 중에 고동바위가 있다. 그 내용은,
옛날 이 바위에 신령스러운 고동이 살아
마을에 일이 생길 때마다 황소울음소리처럼
큰 고동소리를 내어 마을사람들에게
좋고 궂은 일을 알렸다 한다.
이 밖에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처녀의 원혼이 복수를 하고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천폭포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의 민요로는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김매는 소리(들노래)」·
「달구질소리」·「바느질소리」·「새쫓는 소리」
와 같은 노동요들이 전승되고 있다.
「모찌는 소리」는 선소리꾼이 일어서서
못단을 던지며 앞소리를 메기면, 여럿이 “모∼모∼모∼
에헤라 아하 모이히리요”라는 뒷소리를 받는다.
「모심는 소리」는
중중모리장단에 맞추어 부르는데
‘에헤루 상사디여’라는 뒷소리가 따른다.
「김매는 소리」는 낮에 김을 맬 때,
선소리꾼이 모를 추면서 긴소리로 앞소리를 메기면
여럿이 “아리시구나 하아아 허어 마뒤어”라는 뒷소리를 받는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 일을 재촉해 하루 일을 매듭짓고자 할 때,
선소리꾼이 굿거리장단의 자진모리로 앞소리를 메기면
역시 자진모리로 “뒤야허리 허날로”하는 뒷소리를 받는다.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다지며 부르는 「달구질소리」는
중중모리장단에 맞추어 씩씩하고 흥겹게 부른다.
부녀자들이 바느질하면서 부르는
「바느질소리」를 들어보면 “짚이둥둥 모시베는
얕이나둥둥 맹지베는/오색물을 짙게디레 홍신둑을 마주놓고/
동백나무 큰방맹이로 눈빛나게 다듬어내어
/피중침시 침추레내어 마치잡어 옷을비어/
……재간스럽게 지어왔다/
구연좋은 우리벗은 맵시좋게 입으시고/
동락서재 댕기신다……”처럼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다니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청춘과부의 신세를 비둘기와
대비시켜 부른 「청상요 靑孀謠」를 보면
“……노들강변에 비들기한쌍 불콩한낱을 물어다놓고
/숫놈이물어서 암놈을주면 암숫놈이 어르는 소리
/청춘과부가 기둥만잡고 뱅뱅돈다.”와 같다.
그 밖에 「산타령」·「담배씨노래」·
「시집살이노래」「도리깨타작소리」,
고싸움하면서 부르는 「고노래」·
「파랑새노래」 등이 불리고 있다.
대부분이 구릉지대 및 평야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2008년 현재 경지면적 12,906㏊ 중 논 1만 328㏊ 밭 2,578㏊로
논농사 위주의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탐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용반평야·부산평야·한들·석대들·영전들 등이 있다.
이외에 보성강·홍거천·남상천·연청천 등의 하천 연안에도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해안지대에는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금촌농장·덕촌농장·관덕농장 등의 평야
식량 증산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주요 수자원으로 저산저수지·목단저수지·
금산저수지·수동제일저수지 등을 비롯한
여러 저수지가 있어서 이 지역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콩·감자·고구마·참깨·땅콩 등
특산물은 인삼·잎담배·양송이·표고버섯·유채 등이다.
장흥읍 행원리 잣두들에서는
잔털이 없고 달고 연한 잣두무 생산
건산리에서는 농가 부업으로 건산 모시 생산.
건산모시의 생산은 장흥읍·관산읍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농가부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산모시가 올이 가늘고 여성적인데 비해,
건산모시는 올이 튼튼하고 남성적이며,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다.
판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건산리에
모시베 직조공장이 설립되었으며,
건산모시라 하여 전국에 알려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새벽의
모시장은 거래가 활발하였다.
기온이 온화해 모시풀을 세 번까지
벨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는 인조 섬유의 보급으로 점점 쇠퇴.
부산면 유양리에서는 장흥유기(長興鍮器)가,
호계리에서는 호계죽석(虎溪竹席)이 생산
현재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장흥유기는 약 250여년 전
나조대(羅朝大)가 유기를 만든 것이 효시,
그 뒤 여씨(呂氏) 문중에서 제조 기술이 전승되었다.
양질의 풍부한 찰흙과 제조 기술의 끊임없는 전승 및
장흥읍에 소재한 유기전이 있어 명산지로 알려졌다.
호계죽석은
농한기에 농가 부업으로 시작된
죽제품의 한 종류로 오늘날의 장판이다.
생산 과정은 대나무를 알맞게 잘라
일정한 너비로 쪼개고 얇게 떠서,
가로와 세로가 일정한 직각이 되게
맞추어 격자모양으로 짠다.
완성된 죽석은 잘 문지른 다음
물을 부어도 밑으로 새어
나오지 않아야 한다.
특히, 대나무의 매듭을 잘라 없애 버리고
한자 안팎의 대로 잘게 쪼개어 만든 것은
특품이라 하여 고가로 거래되었다.
연근해에서는 조개류와
김양식이 이루어지며,
특히 장흥김은 맛과 향이 독톡하다.
장흥의 동남해안 일대에서 생산되는 장흥김은
관산·대덕·회진 등지의 해안이 김의 주산지이며,
이곳 주민의 약 50%는 김생산에 참여하고 있다.
김생산량은 완도가 으뜸이지만,
장흥김도 맛과 향이 독특하고 품질우수.
연안 바다에 전어·멸치·숭어 등 각종 어류 서식
탐진강의 은어는 여름철 이 지역의 명물이다.
한편, 시장은 상설시장 1개소,
정기시장 7개소가 열리고 있다.
상설시장은 보통 정기시장과 함께 서며,
장흥시장의 규모가 가장 크다. 정기시장은
5일장으로 장흥읍 장흥장이 2·7일, 관산읍 관산장이 3·8일,
대덕읍 대덕장이 5·10일, 용산면 용산장과 장평면 장평장,
회진면 회진장이 1·6일, 유치면 유치장이 4·9일에 열린다.
그 밖의 면은 가까운 곳에 있는 장을 이용한다.
특히, 장흥장은 전라남도 지방에서도
손꼽히는 대규모 장이며, 공산품의
계통 출하가 이루어지고 있다.
장흥장·대덕장에는 우시장이 열리며,
장흥은 인근지역의 소가 거래되고 있고,
대덕은 완도지역의 소가 거래된다.
주요 거래 품목으로 식료품·의류·야채·과일류·
곡물류·생선류 및 생활용품을 공급하고 있다.
장흥읍을 중심으로
목포∼부산간의 국도가
이 군의 중앙부를 동서로 통과.
보성·강진·나주·영암 등을 연결하는 국도와
지방도 등의 도로망이 사방으로 뻗어 있어 편리.
또한, 해상교통이 발달된 지역으로 회진면 회진항은
노력도(老力島)와 완도군 생일도(生日島)·조약도(助藥島)
등을 연결하는 유일한 항구이나 항구 시설의 미비로 선박 통행에
불편을 주며, 폭풍이나 해일시에는 큰 피해를 입고 있다.
가지산·천관산 등의 자연 관광자원과
인근의 사찰 및 문화재가 이 지역의
주요 관광지 및 관광자원이다.
가지산은 단풍이 울창해
주위경관이 아름다우며,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보림사가 있다.
천관산은 산세와 경관이 뛰어나며, 천관사가 있다.
장흥읍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인근에
부춘정·용호정·창랑정·독취정 등의 정자가 있어 여름 피서지
남산공원(南山公園)은
옛 장흥토성의 일부로,
반달띠 모양의 낮은 산에 있다.
안량면 수문리에는 수문포 해수욕장이 있어
매년 해수욕객이 증가하고 있다. 이 해수욕장은
경사가 완만하고 해안을 따라 흰모래가 1㎞ 가량 발달
해수욕장으로 자연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지리적으로 내륙의 주요 교통로와 떨어져
관광 위락시설 및 편의시설이 미비한 실정.
관광자원을 효율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주요 관광도로의 확장과 관광지의 홍보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기존의
남해안관광권과 연계시켜야 한다.
2017.9.12~15
2박3일 여행기.
장흥~목포~압해도~
암태도~자운도~팔금도
안좌도~팔금도 고산 선착장~
목포 북항~ 불갑산~서산 ~서울.
06:00 일행 4인이 승용차로 서울 출발.
장흥 천관사~천관산 도립공원을 구경한 후
정남진 CC 골프텔 숙소에서 첫날밤을 지냈다.
장흥은 지난번 2박3일 여행때
집중적으로 장흥 명소들을 다녔다.
그래서, 일행과 섬여행 하기로 합의.
장흥 일박 후, 전 김대중 대통령 생가가 있는
하의도로 갈 예정이었으나, 배편이 마땅치 않아
압해도 송공선착장에서 배타고., 암태도 행 결정.
암태도에서 '자운도~암태도
~ 팔금도 ~ 안좌도' 드라이브.
그 이후.,목포북항으로 나왔다.
목포북항 일몰.
탐라로 가는 물길.,탐진강.
탐진강
'탐라' 탐, 강진' 진(津)자를 따서 탐진.
이라고도 불리운다.
전라남도 영암군·장흥군·강진군을 흘러 남해로 유입.
남동쪽으로 흘러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 앞을 지나 남쪽으로 바꾼다.
강진읍 남쪽에서 남해 도암만으로 흘러든다.
부산평야·장흥평야·강진평야 분포.
탐진강 하구 구십포는 수심·수온 등이 장어 서식지.
은어도 서식하나 하천오염으로 인해 줄어들고 있다.
사찰과 궁성·수인산성·수암서원·연곡서원·사인정·부춘정 등.
상류지역은 월출산국립공원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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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인류의 직접 조상으로 보지 않는다.
중원대륙 상동인 뇌용량이 오늘날 인간과 크기가 비슷.
어떠한 흔적을 남겼는지는 모른다.
당시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유물.
.
80% 이상이 현재 한반도에 모여 있다.
현생 인류의 발상지가 한반도라는 증거.
그중 1만여기는 북한 지방에, 3만여기는 남한에 분포.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수만 기가 유실되었다 한다.
세계고인돌의 80%이상 존재.,주장.
10호 고인돌은 돌뚜껑 겉면에 80개 별자리를 새겨 놓은 점.
또한 상원군 번동 2호 고인돌 뚜껑돌에도 역시 80개 별자리.
일반적으로 세계천문학계에서는 기원전 1200년경.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토지경계비에 별자리 암각.
한반도 고인돌의 별자리는 이보다 1800년 이상 앞선다.
부근에는 한국 것과 닮은 당간지주와 솟대가 발견된다.
"인도인이 원래 한국에서부터 왔다."고 주장을 한다.
고인돌 문화를 건설했다는 학설이 성립된다.
오늘날, 인간은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으로 크게 구분.
황인종인 한민족이 한반도에서 전세계로 퍼진 현생인류.
흑인종은 기후와 풍토의 영향을 받아 유전적 형질이 변형.
지금으로부터 약8000년전 소나무배가 발견.
한반도 충북 청원에서 발견된 점도 주목할 근거.
2만2천년전 마제석기 발견으로 고고학계 파란.
이란 이랔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발견된 바 있다.
전 세계로 퍼져 '황 백 흑' 인종으로 변화.
본래의 원형은 한민족 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장흥 고인돌...............................
전라남도 장흥에는 모두 210여 군데에 2,250여 기.
그중 90여기가 모여있는.,장흥 방촌리 고인돌 유적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숲속에 있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적.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존재하고 있다.
및 고인돌 축제.,차기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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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거석문화 국제학술대회 및 고인돌 축제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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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제패한.,장흥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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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찬, 상서시중, 역임후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다.
숙종 초 예부와 이부 상서가 되어 관료 생활로 칭송 받았다.
장흥(長興)은 전라남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
신라에서 마읍현으로 고쳐 보성의 영현으로 삼았다.
장흥부(長興府)에 내속(來屬)시켰다.
장흥도호부 승격 1652년(효종 3) 장흥현으로 강등.
관산 위씨(冠山 魏氏)라고도 하였다.
위씨의 상계분파(上系分派)가 시작.
관북파(關北派) 함흥파(咸興派)로 분파.
그리고 위자검(魏自儉)은 후손이 끊겼다.
무과 급제자 18명을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