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05 세계 한인의 날, 교과서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2 - 영국의 생물학자 키스 캠벨(Campbell, Keith) 사망 캠벨 [Campbell, Keith, 1954.5.23~2012.10.5] '복제 양 돌리' 주역 英 캠벨 교수 타계 세계 최초의 동물 체세포 복제 사례인 복제 양(羊) 돌리 탄생의 주역인 영국인 과학자 키스 캠벨 노팅엄대 교수가 5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영국 노팅엄대학은 11일(이하 현지시간) 1996년 복제 양 돌리 실험에 참여했던 캠벨 교수가 지난 5일 자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대학 측은 사망 원인은 밝히지 않고 캠벨 교수가 사망 직전까지 대학에서 연구 업무를 수행했다고만 밝혔다. 캠벨 교수는 1996년 에든버러대학 로슬린 연구소에서 이언 윌머트 교수와 함께 다 자란 양의 체세포를 복제해 새끼 양 돌리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당시 6년생 양의 체세포에서 채취한 유전자를 핵이 제거된 다른 양의 난자와 결합시켜 대리모 자궁에 이식하는 방법으로 최초의 포유동물 복제에 성공했다. 돌리는 태어난 지 6년 6개월 만에 폐질환으로 안락사했지만 동물 복제 연구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대표 연구자인 윌머트 교수는 캠벨 교수의 돌리 복제에 대한 기여도가 자신보다 많은 66%에 이른다고 밝힌 바 있다. 캠벨 교수는 1999년 노팅엄 대학으로 옮겨 동물 복제 연구를 해 왔다. (런던=연합뉴스) 김태한 특파원 thkim@yna.co.kr /연합뉴스 2012/10/12 01:49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10/12/0200000000AKR 20121012004000085.HTML?did=1179m
2011 - 미국 애플사의 공동 창업자, 경영자 스티브 잡스(Jobs, Steve) 사망 스티브 잡스 [Jobs, Steve, 1955.2.24~2011.10.5]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 사망 미국 애플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가 향년 56세로 사망했다고 5일 애플이 발표했다. 잡스는 지난 2004년 췌장암 수술을 받고 2009년 간이식 수술을 받는 등 지난 7년 동안 투병생활을 해왔다. 그는 지난 8월 24일 애플의 CEO 직에서 물러났는데, 건강상태를 염려하는 전문가 추측이 잇따랐다. 디지털뉴스팀 /경향신문 2011-10-06 08:42:1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0060842111&code=970211
- 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 2003.1.13
- 멕시코한인이민100주년기념 (2005.5.12. 발행)
2007 - 제1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 개최 제1회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이 5일 삼성동 코엑스에서 세계 각지의 재외동포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7백만 재외동포의 축제의 장이자 전 세계 한인의 화합의 장인 이 행사에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 출신인 장훈씨 등 재외동포들과 한덕수 국무총리,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등 국내인사들이 참석했습니다. 한 총리는 치사에서 “어제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에 이 자리가 더욱 뜻 깊다”며 “특히 남북정상이 해외동포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은 동포들에게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송 장관은 기념사에서 “정부의 재외동포정책은 동포들이 거주국에서 번창하고 거주국 발전에 기여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며 “외교부는 ‘세계한인의 날’ 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재외동포 7백만 시대에 걸맞게 인정미 넘치는 맞춤형 서비스를 동포들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부는 재외동포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재외동포와 모국과의 유대강화를 위해 지난 5월 ‘세계한인의 날’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하였으며, 4일부터 7일까지를 ‘세계한인주간’으로 정해 어울림한마당, 이민사진전, 통일 마라톤 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합니다. /외교통상부 [제183호] 2007년 10월 5일 금요일 http://news.mofat.go.kr/enewspaper/articleview.php?aid=327&mvid=409
- 이황 탄신 500주년 기념, 2002.1.3 발행
2001 - 이황 탄신 500주년 기념 '세계유교문화축제' (10.5~31) 퇴계 탄신 500주년 기념『세계유교문화축제』 퇴계 탄신 500주년을 맞아 한국 전통유학과 유교문화의 독창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세계유교문화축제』가 오는 10월5일부터 10월31까지 27일간의 일정으로 안동낙동강변축제장, 도산서원 한국국학진흥원, 하회마을 등에서 개최된다. (담당부서 : 유교문화권 개발사업단 053-602-5262)
1989 - 달라이라마,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역사속의 오늘] 달라이 라마, 노벨평화상 선정 "우리는 (중국과) 오랫동안 투쟁해 왔습니다. 우리의 이유가 정당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폭력은 더 큰 폭력과 고통을 가져 오므로 우리의 투쟁은 비폭력적이고 증오심이 없어야 합니다.” 1989년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 독립운동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모든 고통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믿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과 만족이라는 이기적인 추구로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사랑과 자비인 애타주의의 수련, 그리고 무지와 이기심과 탐욕의 제거를 통해 마침내 달성되는 평화와 만족감에서 오는 것입니다.”라고 달라이 라마는 부연설명했다. 1950년 10월 중국의 침략, 1959년 인도로의 망명 이후 40년을 이어온 비폭력 독립투쟁을 인정받은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주권 침탈, 동족 살해의 원수국 중국을 상대로 한 독립투쟁 과정에서도 항상 용서와 화해를 잊지 않은 달라이 라마의 온화한 모습은 세계를 감동시켰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10월 0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4197&yy=2006
1986 - 제10회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폐막 1986년 9월 20일에 개막한 서울아시안게임이 10월 5일 폐막됐다. 서울아시아드 심벌마크가 그려진 대형풍선이 6개의 조명을 받으며 승천하자 8만 관중은 빨강ㆍ초록ㆍ하양의 손전등을 일제히 켜들고 작별인사를했다. 27개국이 출전, 중국이 금메달 94개로 종합1위, 한국이 금메달 93개로 2위 일본이 금메달 58개로 3위를 각각 차지했다. 서울아시안게임은 역대 대회사상 최대규모인 4,839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했으며 경기종목은 태권도를 포함해 25개 종목이고 세계신기록 11개, 세계타이기록 2개, 아시아신기록 90개, 아시아타이기록 8개, 대회신기록 224개, 대회타이기록 32개를 각각 수립, 1982년 인도대회때보다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
공산 폴란드 최초의 자유노조인 ‘연대’의 전국위원회 의장을 지낸 레흐 바웬사(Wałesa, Lech,1943~ )가 1983년 10월 5일 폴란드의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역사속의 오늘-자연보호 헌장 선포 우리나라 자연보호헌장은 1978년 10월 5일 선포됐다. 학계·언론계 등 각계 전문가 100명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중 11명의 헌장 심의위원들 회의에서 초안을 작성했다. 수차례의 심의를 거친 끝에 헌장 제정 위원회와 자연보호위원회의 의견을 거쳐 확정된 것이다. 이렇게 제정된 자연보호헌장은 전문과 7개의 실천사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자연을 적정하게 개발하고 환경보호 활동에 법적·행정적 지원을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개발' 논리가 우선하던 당시 상황에 비해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표절시비가 계속 일었다. 헌장의 실천사항 1항 내용이 일본헌장 1항과 글자 몇 개만 제외하고는 똑같다는 지적이었다. 제정된 지 27년이 흐른 지금 자연보호헌장이 개정된다. “현행 자연보호헌장의 일부 내용이 최근의 환경정책과 일치하지 않고, 문장에 사용된 단어 가운데 현대문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 전문과 실천사항 등을 시대 상황에 맞게 고치기로 했다”는 것이 환경부의 설명이다.시대변화에 내용은 바뀌지만 '자연보호'라는 정신은 변해서는 안될 것이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5년 10월 0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6771&yy=2005
/YTN
1968 - 미군, 베트남 케산 철수
(케산은 베트남 전쟁 당시 비무장지대였던 북위 17°선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며 주(駐)베트남 미국군과 한국군의 기지가 있었다. 1968년 미국과 북(北)베트남 사이에 파리평화회담이 개최되기 직전 ‘제2의 디엔비엔푸’라고 일컬을 정도로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네이버)
http://www.inchristjesus.net/articles/charisma27.html
1962 - 한국-에콰도르 국교 수립 에콰도르는 1949년 10월 4일 한국을 승인하고 양국은 1962년 10월 5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74년 3월 15일 주(駐)에콰도르 대한민국대사관, 1981년 6월에는 주한 에콰도르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58년 5월 알제리의 프랑스 주둔군과 이민자들의 반란을 계기로 드골은 절대다수로 국민의회의 신임을 얻어 정계에 복귀하였다. 곧 그는 의회로부터 위임받은 특별권한에 의하여 신헌법을 기초, 그 초안이 9월 28일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5일 공포됨으로써 제5공화정이 발족되었다. 이 헌법에서는 종래의 정국 불안정을 청산하기 위하여 의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하였으며, 총리를 임명하고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이외에는 행정 ·외교 ·군통수 분야에서 절대적인 권한이 인정되었다. 드골은 1959년 제5공화정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네이버
1951 - 아일랜드의 가수, 배우 밥 겔도프(Geldof, Bob) 출생 겔도프 [Geldof, Robert Frederick Zenon "Bob", 1951.10.5~ ] [역사속의 인물] 'Live Aid' 기획 가수 밥 겔도프 아일랜드 출신 가수 밥 겔도프가 1951년 오늘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그는 별다른 히트곡을 내놓지 못했다. 한마디로 가수로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대중음악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1984년 영국 BBC 방송의 에티오피아 기아난민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들을 돕기 위한 대륙간 자선콘서트 'Live Aid'를 기획했다. 1985년 7월 13일 내로라하는 팝스타들이 참여한 가운데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열린 이 콘서트는 60개여국의 4억명이 넘는 시청자가 지켜봤다. 이 공연으로 무려 1억5천만 파운드의 자선기금이 모아졌으며 BBC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16시간 동안 이 공연을 생방송, 그 자체로도 화제를 모았다. 겔도프는 이 공로로 '음악계의 성자'라는 찬사와 함께 영국 왕실로부터 명예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 공연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굶주림은 팝스타들의 자선 공연 따위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이며, 결국 이러한 문제의식 없는 콘서트는 자선이란 허울을 쓴 유명 연예인들의 한바탕 잔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0월 0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3126&yy=2009
1941 - 미국의 법률가, 대법관 루이(루이스) 브랜디스(Brandeis, Louis) 사망 브랜디스 [Brandeis, Louis Dembitz, 1856.11.13~1941.10.5] [오늘<1229>(10월5일)] 브랜디스 1941년 10월 5일 미국 법률가 루이 브랜디스가 85세로 작고했다. 스물두해 남짓의 연방대법원 판사직에서 물러난 지 두 해 만이었다. 켄터키주 루이빌 출신의 브랜디스는 1916년 유대인으로는 처음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가 되었다. 연방대법원 판사로서 브랜디스는, 절친했던 동료 올리버 웬델 홈스와 함께, 미국 사법부의 혁신적 흐름을 대표했다. 시장 실패를 치유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을 타당하게 여겨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 시절의 뉴딜 입법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것이 그 예다. 그러나 브랜디스는 초기 뉴딜정책의 버팀목이었던 전국산업부흥법이 입법권을 정부에 부당하게 위임한 위헌법률이라고 판시해 정부 개입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소수자 인권에 대한 브랜디스의 관심은 그가 보스턴에서 변호사로 개업한 20대 초에 시작됐다. 브랜디스는 노동자와 여성, 중소기업의 이익을 법률적으로 대변하며 이름을 얻은 대가로 대자본가를 비롯한 백인 남성 지배계급의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그의 연방대법원 판사 지명은 미국 주류집단의 질시와 배척을 막아내며 뜻을 굽히지 않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결단으로 가능했다. 법사상사에 대한 브랜디스의 가장 큰 기여는 ‘홀로 남겨질 권리(Right to be left alone)’, 다시 말해 프라이버시권을 개념화한 데 있다. 브랜디스는 정략적ㆍ상업적 이익을 위해 개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정부와 거대기업의 행태가,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는 대중의 욕망과 이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미디어의 선정주의와 결합해, 자유의 본질적 부분인 프라이버시를 위협할 수 있음을 꿰뚫어보았다. 자유주의적 법률가로서 브랜디스가 강력하게 옹호한 프라이버시권은 범죄 예방을 명분으로 개인들을 유리벽 속으로 마구 밀어넣고 있는 오늘날의 전자 감시사회에서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4/10/04 21:24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410/h2004100421230525340.htm&ver=v002
하벨 [Havel, Václav, 1936.10.5~ ] 체코의 극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대통령. 1936년 10월 5일 프라하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48년 체코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부르주아적인 배경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택시운전기사 등 노동을 하였다. 그후 프라하 예술아카데미를 졸업, 작가의 길로 매진하였으며, 1963년 희곡 《뜰의 축제 Zahradn 1968년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후에는 트로트노바 근처의 외딴 농촌에서 은거하며 양조장 직원으로 일하였으며, 수많은 동료 반체제운동가들이 투옥 등으로 활동에 제한을 받는 가운데 반정부운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8월 '인권헌장77'을 공동기초하여 투옥되었고, 1979년 공화국 전복기도 혐의로 4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러자 그의 희곡을 읽지 않은 체코슬로바키아인들도 그를 반체제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받아들였다. 1989년 11월 그는 반체제연합 '시민포럼'을 조직, 공산당의 권력독점 폐지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여, 1940년 동안 군림해 온 공산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어 12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의회에 의해 비공산당 출신으로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립 이후인 1993년 1월 말 실시된 선거에서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95년 체코의 실업률은 3.3%로 유럽 최저이며, 인플레율도 10%로 중앙 유럽국가 중 최저로, 박식한 지식과 균형잡힌 이념을 가진 하벨은 정치면에서의 경험미숙을 훌륭한 통찰력으로 잘 극복하고 있다. /네이버
1931 - 미국의 클라이드 팡본과 휴 헌던, 태평양 무착륙 횡단 비행에 성공 1931년 10월 4일~5일 클라이드 팡본과 휴 헌던, 단발단엽기 미스 비돌로 일본 아오모리 현의 사비시로에서 미국 서해안의 웨낫치까지의 북태평양황단비행에 성공(미국) /항공발달연대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etw12&logNo= 100110502331&viewDate=¤tPage=1&listtype=0
아오모리 스토리-미사와 항공과학박물관 박물관 앞엔 길쭉하게 뻗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요, 기념비의 주인공은 1931년 10월 4일 미사와를 출발해 미국 서해안의 웨낫치까지 인류 최초로 태평양 무착륙 횡단 비행에 성공한 미스 비들호와 조종사 클라이드 팡본, 휴 헌던입니다. 기념비의 높이는 19.31m로 횡단 비행에 성공한 연도에 맞췄다고 하네요. 미사와 항공과학박물관은 아오모리가 일본의 항공 과학과 얼마나 많은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곳으로, 야와 테마 파크, 실내 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3년에 개관을 했습니다. 奇星 /Design Republic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ksstudio&logNo= 30102566733&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Trans-Pacific flight Pangborn and Herndon finally took off on October 4, 1931 from Sabishiro Beach, Misawa, Aomori, Japan. Their destination was Seattle, Washington, just under 5500 miles (8500 km) away, a distance exceeding Charles Lindbergh's flight from New York to Paris by 2000 miles. Immediately after take-off, a problem arose: the device intended to jettison the landing gear partially failed. The gear was ejected, but the two root struts remained. Pangborn was forced to climb out on the wing supports barefoot at 14,000 feet in the air to remove the struts. Due to fog in both Seattle and Spokane, Washington, Pangborn and Herndon landed in Fancher Field in East Wenatchee, Washington on October 5, 1931, after 41 hours and 15 minutes of flying. A memorial to the historic flight is located near the landing site, and a propeller damaged from the landing is on display in a Wenatchee museum. The regional airport, Pangborn Memorial (EAT) in East Wenatchee, also honors his accomplishment.
- P. R. Popovitch, Y. P. Artyukhin and Soyuz 14 - Gagarin, Titop, Nikolayev, Popovich
포포비치 [Popovich, Pavel Romanovich, 1930.10.5~ ] 소련의 우주비행사. 1962년 8월 12일 발사된 보스토크 4호를 조종했다. 보스토크 3호를 타고 하루 먼저 우주로 발사된 A.G.니콜라예프와 함께 최초로 동시에 2명이 우주에 있었다. 어렸을 때 목동이었던 그는 1951년에 러시아 연방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곧 공군으로 전속되어 1954년 볼고그라드공군대학을 졸업한 뒤 조종사가 되었다. 1960년에는 최초로 우주비행사 훈련에 참여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Y. P.아르튜힌과 함께 소유스 14호로 우주비행(1974. 7. 3~19)할 때 주조종사였다. 이들은 6월 25일 궤도에 올려진 우주정거장인 살류트 3호와 도킹하여 15일간의 과학실험계획을 수행했다. 자서전 〈아침에 이륙 Vyletayu utrom〉(1974)이 있다. /브리태니커
- 올림픽복권 (동대문운동장)
1925 - 경성운동장 준공 [책갈피 속의 오늘]1925년 경성운동장 준공 성동원두(城東原頭·서울 도성 동쪽의 넓은 벌판). 1925년 10월 5일 모습을 드러낸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의 별칭이다. 낙산줄기가 움츠리고 남산이 채 솟아오르기 전인 평지는 애초부터 무(武)의 기상이 드높았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41004/8113146/1
[역사 속의 인물] 보이스카우트와 독립운동가 조철호 지금의 중`장년들은 초등학교 시절 보이스카우트 단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멋있는 제복에 야영활동을 하면서 단체생활 방식을 배우고 사회봉사 활동을 벌이던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우리나라에 보이스카우트가 도입된 것은 독립운동가 조철호(1890~ 1941) 선생이 1922년 오늘 한국 스카우트연맹의 전신인 조선소년군을 창설한 덕분이다. 조 선생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조선군 사단에 배속됐다가 일제의 주구가 되는 것이 싫어 만주로 망명했으나 붙잡혀 징역을 살았다. 이후 이승훈 선생이 만든 오산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다가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옮겼다. 이때 조선의 청소년들을 제대로 가르쳐 독립운동가로 양성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조선소년군을 만든 것. 1926년에는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다시 옥고를 치르고는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만주로 옮겨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다시 귀국, 동아일보에 입사해 조선소년군 육성에 나섰는데 일제는 조선소년군이 향후 골칫거리가 된다는 판단에 따라 1937년 강제 해산시켰다. 최정암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3년 10월 0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9419&yy=2013
1919 - 인촌 김성수, 경성방직주식회사 설립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 1919년 10월 (5일) 김성수가 자본금 100만 원, 제1회 납입자본금 25만 원으로 창립한 회사. 1923년 4월 최초로 제품이 출하되었는데, '삼성'·'삼각산' 등의 상표가 붙은 광목(廣木)이었다. 광목은 일본 대(大)방직자본의 주력제품이었기 때문에 당시 다른 조선인 도시직물업자들은 이들과의 직접적 경쟁?회피하여 수입면사를 이용한 특수직물을 주로 제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성방직은 바로 이 광목을 생산했다는 점에서 근대 조선인 직물업의 발전과정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1923년 생산품이 출하되자 초창기의 낮은 품질 및 상품인식, 일본제 광목과의 경쟁으로 극심한 판매부진을 겪었다. 1923년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전개된 '물산장려운동' 등 민족감정에 대한 호소로 시장을 확보해나가는 한편, 증자와 조선총독부의 보조 및 식산은행으로부터의 차입으로 배당과 신증설을 이루어나갔다. ... /브리태니커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3654
1918 - 프랑스의 비행사, 세계최초 에이스 롤랑 가로(Garros, Roland) 전사 가로 [Garros, Roland, 1888.10.6~1918.10.5] (참고) [역사 속의 인물] 프랑스 공군 최초의 영웅, 롤랑 가로 프랑스 오픈 테니스 대회는 붉은 흙으로 된 롤랑 가로 코트에서 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코트의 이름은 프랑스 공군의 에이스이자 세계 최초의 에이스인 롤랑 가로에게서 따온 것이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붉은 흙처럼 짧고 굵은 롤랑 가로의 삶도 불 속에서 산화했다. 에이스는 5대의 적기를 격추한 조종사를 일컫지만, 그는 적기 4대만 격추했다. 엄밀히 따지면 잘못 붙은 호칭이지만 그는 에이스로 통했다. 1888년에 태어난 롤랑 가로는 1913년에 지중해 횡단 비행에 성공, 유명해졌다. 다음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당시 전투기의 문제점을 고치는데 애썼다. 조종석과 프로펠러 사이에 설치된 기관총이 발사될 때 프로펠러를 멈추게 하는 동기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자 프로펠러를 보호하려고 그 뒤에 철판을 설치하는 데 도움을 줬다. 1915년 4월, 독일군 전투기 3대를 잇달아 격추한 그는 며칠 뒤인 그 해 오늘, 전투기가 고장을 일으켜 독일군 진영에 불시착했다. 그는 자신의 전투기를 폭파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독일군은 그의 전투기를 연구, 개선된 동기 장치를 만들어냈다. 포로가 된 그는 몇 차례 시도 끝에 2년 10개월 만인 1918년 2월에 탈출, 다시 조종간을 잡았다. 그 해 10월 적기 1대를 격추한 지 며칠 뒤 30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격추당해 숨졌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3년 04월 18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9340&yy=2013
1902 - 맥도날드(McDonald's Co.) 창립자 크록(Kroc, Ray) 출생 크록 [Kroc, Ray, 1902.10.5~1984.1.14] Ray Kroc (October 5, 1902 - January 14, 1984) took over the then small-scale McDonald's Corporation franchise in 1955 and built it into the most successful fast food operation in the world. Dubbed the Hamburger King, Kroc was included in the TIME 100 list of the world's most influential builders and titans of industry, and ammassed a $500 million fortune during his lifetime. He was also the owner of the San Diego Padres baseball team starting in 1974. http://en.wikipedia.org/wiki/Ray_Kroc
1895 - 미국의 육군 장성, 외교관, 행정관 스미스(Smith, Walter Bedell) 출생 스미스 [Smith, Walter Bedell, 1895.10.5~1961.8.9] 미국의 육군장성·외교관·행정관. 제2차 세계대전중 유럽에서 미군 참모장을 지냈다. 스미스는 인디애나 주 국민군에서 사병으로 군대생활을 시작했으며(1910~15), 1917년 미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잠시 전투에 참가한 후, 진급을 거듭하며 미국과 필리핀에서 복무했고 보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2년 2월 그는 준장의 계급으로 합동참모본부의 사무장 겸 연합군 통합참모본부의 미국측 사무장으로 임명되었다. 9월에는 유럽 작전지구 참모장 겸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장군의 참모장이 되었고 종전 후 아이젠하워가 유럽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연합군 대표로 협상에 참여해 이탈리아의 항복(1943)과 독일의 항복(1945)을 받아냈다. 1945년 미국으로 돌아온 스미스는 육군성 작전계획국의 참모장으로 있다가 얼마 후 소련 주재 미국대사(1946~49)를 지냈다. 그후 제1군 사령관(1949~50)과 중앙정보국장(1950~53)을 역임했으며, 1951년에 대장이 되었다. 1953년 퇴역해 국무차관이 되었다. 1954년 10월 행정관직을 사임하고 민간기업체에 들어갔다. 그의 저서로는 〈나의 모스크바 생활 3년 My Three Years in Moscow〉(1950)·〈아이젠하워의 6대 결단 Eisenhower's Six Great Decisions〉(1956)이 있다. /브리태니커
1887 - 프랑스의 법학자 카생(Cassin, René) 출생 카생 [Cassin, René(-Samuel), 1887.10.5~1976.2.20] 프랑스의 법학자. 유럽 인권재판소장을 지냈고, 국제연합(UN) 인권선언을 기초했으며, 1968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유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카생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육군에 입대하기 전 법학을 공부했다. 전쟁중 복부에 입은 부상으로 여생을 고통스럽게 보냈다. 전후 파리에서 국제법교수로 일했으며, 1924~38년에는 제네바의 국제연맹 회의와 군축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하여 활동했다.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 후 런던에서 샤를 드골 장군과 합류하여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카생은 프랑스 최고행정재판소인 국참사원(콩세이데타)의 원장이 되었고, 프랑스 사법·행정 부문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국제적으로는 1944년에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설립에 참여했으며, 1945~52년에는 UNESCO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다. 1946~68년에 UN 프랑스 대표를 지내면서 UN 인권위원회의 의장으로 활동했고(1947~48), 인권선언을 기초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인권선언 비준 20주년 기념일인 1968년 12월 20일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시오니스트였던 그는 유대인의 권리를 위해 활동한 운동가로서 프랑스에 있던 이스라엘인 동맹의 의장으로도 활동했다. UN 인권선언에 대한 그의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하여 1987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유해는 프랑스의 위인들만이 묻히는 파리의 팡테옹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브리태니커
1882 - 미국 로켓의 아버지 고더드(Goddard, Robert) 출생 고더드 [Goddard, Robert Hutchings, 1882.10.5~1945.8.10] [역사 속의 인물] 현대로켓의 아버지 로버트 고달드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을 흔히 ‘천재’라고 한다. 생전엔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조롱거리가 됐으나 사후 수년 뒤 현대적 로켓학의 아버지로 칭송받은 이가 미 물리학자이면서 액체연료형 로켓을 처음 개발한 로버트 H. 고달드이다. 미국 도시에 막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하던 1882년 오늘 태어난 고달드는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보여준 전기발생실험을 보고 과학에 흥미를 느꼈고 열일곱 살 땐 H.G 웰스가 쓴 과학픽션고전을 읽고 우주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후 미사일과 우주여행에 대한 과학적 가능성을 누구보다 먼저 인식하고 로켓 디자인과 개발에 평생을 바쳤다. 1926년 3월 고달드는 세계 최초로 액체추진로켓을 발사, 시속 885㎞/h로 2.6㎞ 상공까지 성공적으로 쏘아올렸다. 이후 1941년까지 그가 쏘아올린 로켓 수는 모두 34개. 그는 로켓 관련 특허만도 214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미사일과 우주선 발사에 이용되고 있는 3축 제어방식과 자로스코프 및 조타추진체 등은 모두 그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들이다. 하지만 살아서는 어떤 공공기관의 지원도 받지 못하다가 1945년 그가 사망한 지 수년 후 우주시대의 여명기에 비로소 현대로켓학의 아버지로 인정받았다. 우문기기자 /매일신문 2010년 10월 0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0068&yy=2010
1880 - 독일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 오펜바흐(Offenbach, Jacques) 사망 오펜바흐 [Offenbach, Jacques, 1819.6.20~1880.10.5] 프랑스 제2제정시대의 대표적인 오페라부파의 작곡가. 본명은 Jacob Levy Eberst인데, 아버지 Issac Juda Eberst가 오펜바흐 암 마인 출신이어서 이 이름으로 불렀다. 유대인으로, 1883년 14세 때에 파리로 나가 파리 음악학원에서 첼로를 배웠다. 관현악단과 오페라코미크에 근무하다가 알레비에게 작곡을 배웠고 1855년에는 스스로 극장을 경영하여 《천국과 지옥(지옥의 오르페우스) Orph 또 하나의 특징은 사회 풍자를 비롯한 ‘비꼼’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의하여 제2제정의 위정자와 사회를 풍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C.W.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 Orfeo ed Euridice》도 음악적으로 비꼬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유작 《호프만 이야기 Coutes d’Hoffman》(1881)는 순수한 오페라 코미크이다. 오펜바흐의 영향은 F.주페, J.슈트라우스(아들), 영국의 W.S.길버트, A.S.설리번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
1877 - 네즈페르세 족 인디언을 이끌던 조셉 대추장, 연방군에 항복 조셉 대추장의 항복 1877년 10월 5일 조셉 대추장은 고향 땅과, 부족민과, 평화를 사랑했지만, 미국 군을 피해 도망 다니는 데 지쳤습니다. “추장 여러분, 들으세요. 저는 지쳤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슬픕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영원히 저는 더 이상 싸우지 않겠습니다.” 1877년 10월 5일, 조셉 대추장은 몬태나의 베어 포 산(Bear Paw Mountains)에서 항복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연방 군에 쫓겨 오리건, 워싱턴, 아이다호, 몬태나 등을 가로질러 1천 마일 이상의 괴로운 이동을 한 끝에, 조셉 대추장과 추종자들은 연방 군에 투항했습니다. 이들은 캐나다 국경과 자유를 40마일 앞둔 지점에서 투항했습니다. 평화를 신봉하던 조셉 대추장은 싸우지 않고 자기 부족인 네즈 페르세 족을 위해 고향 땅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조셉 대추장과 부족에게 고향 땅은 성당과 같이 신성한 곳이었습니다. 정부는 처음에는 이들이 고향 땅에 머무르도록 허용하더니, 몇 년 지난 후에 이들을 쫓아 내었습니다. 오리건의 왈로와 계곡(Wallowa Valley)의 선조의 땅에서 아이다호에 있는 보호구역으로 이동을 시작하려 하던 때에, 네즈 페르세 족의 세 청년이 고향 땅을 빼앗긴 데 격분하여 잔인한 일을 저지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 청년은 백인 정착민 무리를 학살했던 것입니다. 조셉 대추장은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했고, 부족원을 안전한 곳으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사로잡힌 후, 네즈 페르세 족은 캔저스로 옮겨졌지만, 두려움 없는 지도자인 조셉 대추장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조셉 대추장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갔습니다. 1885년, 조셉 대추장의 인내와 용기 덕분에 추장과 추종자들은 고향 땅에서 가까운 태평양 연안 북서부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셉 대추장의 아메리카 원주민 말로 된 이름은 그의 강인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산을 굴러 내려오는 천둥!” 미국의 역사여행 /주한미국대사관 공보과 아메리칸센터 http://kids.usembassy.or.kr/kor/05_history/history_0629.asp?pageid=6&subpage=29
1864 - 영화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루이 뤼미에르(Lumière, Louis) 출생 뤼미에르(Lumière, Louis, 1864.10.5~1948.6.6] [역사 속의 인물] 최초의 영화 만든 뤄미에르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의 지하에 1프랑씩의 입장료를 낸 사람 수십 명이 모였다. 조명이 꺼지고 전방의 하얀 막에 흑백의 동영상이 비치지 시작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사진 속의 기차가 움직이는 기상천외한 장면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일부 관객들은 진짜 기차가 다가오는 줄 알고 밖으로 도망쳤다. 이날 관객들이 본 것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라는 장비를 통해 비친 영화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였다. 시네마토그래프는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촬영기와 영사기다. 이에 앞서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했지만 한 사람씩만 구멍을 통해 활동사진을 볼 수 있었다. 대중들이 함께 활동사진을 볼 수 있는 영화 장비는 시네마토그래프가 최초였다. 뤼미에르 형제는 이미 1894년 2월 13일 시네마토그래프의 특허를 받았으며 유료 시사회 전인 1895년 3월 22일 지인들을 대상으로 '뤼미에르 공장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라는 영화의 시사회를 연 바 있다. 형제는 영화의 상업적 미래를 꿰뚫어봤던 것이다. 인류에게 영화라는 꿈의 공장을 선사한 뤼미에르 형제 중 동생인 루이가 1864년 오늘 태어났다. 김해용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2년 10월 0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4966&yy=2012
- 'Bonaparte in Egypt' - 'Napoleon'
1848 - 프랑스의 화가 데타유(Detaille, Édouard) 출생 데타유(드타유)[Detaille, (Jean-Baptiste-)Édouard, 1848.10.5~1912.12.23] 프랑스의 화가. 전투장면과 군대생활을 정확히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J. L. E. 메소니에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스승의 기법을 바탕으로 정확한 묘사기법을 구사했다. 군대생활에 대해 자세하고도 폭넓게 묘사해놓은 그의 작품은 19세기말의 군대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83년 알퐁스 드 뇌빌과 함께 삽화가 많이 들어간 〈프랑스 군대 L'Armée française〉라는 2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샹피니의 수비 The Defense of Champigny〉(1879) 등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그린 작품들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림 속에 전설과 감정을 뒤섞어 놓은 가장 독특한 작품들은 나폴레옹 1세와 그 군대를 묘사한 그림들이다. 드타유는 초상화나 군대와 관계없는 그림도 여러 점 그렸으며 배우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29 - 미국 제21대 대통령 아서(Arthur, Chester A.) 출생 아서 [Arthur, Chester Alan, 1829.10.5~1886.11.18] 미국의 제21대 대통령. 버몬트주(州)에서 출생했다. 1848년 뉴욕주의 유니언칼리지를 졸업한 후에 뉴욕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노예폐지론자로서 1854년 어느 노예의 소송사건을 변호하여 명성을 얻었다. 공화당이 발족하자 입당, 남북전쟁 중에는 뉴욕주(州)의 몇몇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71년 대통령 U.S.그랜트에 의하여 뉴욕항 세관장에 임명되었으나, 행정명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1878년 대통령 R.B.헤이스에 의하여 해임되었다.
- Palace of Versailles 1789 - 파리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시위하고, 베르사유 행진을 벌임 프랑스 혁명-프랑스혁명과 국왕의 파리귀환 프랑스 혁명 당시 근교농촌의 혼란도 있어 가을에는 파리의 식량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파리 하층시민의 부녀자들은 1789년 10월 5일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행렬을 지어 베르사유를 향해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 뒤에는 남편과 직인들이, 또 그 뒤에는 국민군의 병사들이 뒤따랐다. 저녁 때 일행은 왕궁에 도착하여 루이 16세에게 파리 귀환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룻밤을 숙영(宿營)하고 다음날 왕궁으로 난입하였다. 국왕 일가는 시민에게 포위된 채,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귀환하였다. 의회도 파리로 옮겨졌으며, 이후 왕궁과 더불어 파리 시민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날부터 프랑스에는 절대왕정으로의 복귀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역사가가 많다. /네이버
1781 - 체코의 수학자, 철학자 볼차노(Bolzano, Bernhard) 출생 볼차노 [Bolzano, Bernhard, 1781.10.5~1848.12.18] 보헤미아(체코)의 수학자·신학자. 1816년 이항정리를 자세히 증명했고, 유한류와 무한류를 구분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1905년 프라하대학교에서 사제 자격을 얻어 졸업했고 곧이어 철학 및 종교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군국주의는 사회적 파괴이며 전쟁은 불필요하다고 가르쳤다가 몇 년 후 여러 교수 및 교회 지도자와 멀어졌다. 그는 국가간의 무력충돌보다는 평화에 관심을 갖도록 교육·사회·경제 체계의 전반에 걸친 개혁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대학측과 로마 가톨릭 당국의 찬성을 얻어내지 못했고, 그의 신념을 버리고 자유주의적 가르침을 중단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는 그러한 요구를 거절했고 1819년 해고되었다. 그때부터 사회·종교·철학·수학 문제에 관한 집필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논리학, 수학적 변수, 극한, 연속성에 대해 앞서가는 견해를 가졌고, 힘·공간·시간의 물리적 측면에 대한 연구에서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이론에 대한 반대이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많은 연구는 살아 있는 동안 발표되지 않았고, 많은 결론들이 타인에 의해 독립적으로 유도되었을 때인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그의 저서로는 〈이항정리 Der binomische Lehrsatz〉(1816)·〈순수 해석 증명 Rein analytischer Beweis〉(1817)·〈함수모형 Functionenlehre〉(1834)·〈과학적 모형 Wissenschaftslehre〉(4권, 1834)·〈논리학의 새로운 표현에 대한 시도 Versuch einer neuen Darstellung der Logik〉(4권, 1837)·〈무한의 역설 Paradoxien des Unendlichen〉(1851)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713 -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작가 디드로(Diderot, Denis) 출생 디드로 [Diderot, Denis, 1713.10.5~1784.7.31] [오늘의 경제소사/10월5일] 디드로 백과전서의 주역은 디드로(Denis Diderot). 1713년 10월5일 부유한 철물업자 집안에서 태어나 중등학교를 마친 뒤 가업 승계를 마다하고 작가가 되겠다며 파리로 내달았다. 파리 생활은 고달팠다. 결혼도 ‘둘이 굶는 게 혼자 굶는 것보다 돈이 더 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치렀을 정도다. 백과전서와 인연을 맺은 것은 종교적 맹신을 비판한 책을 쓴 죄로 감옥에 있던 1748년. 두 권짜리 영국사전 번역을 의뢰받은 디드로는 단순번역을 거부하고 편집 전권과 무제한의 시간을 조건으로 편찬을 맡았다. 백과전서는 편집단계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각계각층의 전문가 200여명이 항목을 분담했기 때문이다. 검열과 출판금지, 출판업자의 삭제 등 난관을 뚫고 본문 17권, 도해 11권 등 28권의 백과전서가 완간된 것은 1772년. 제1권 출판 21년 만이다. 세트당 980리브르, 5인 가구의 3년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가격에도 당시에는 기록적 판매고인 4,250부가 팔려나갔다. 디드로도 1,200리브르의 특별격려금을 받고 러시아 황제의 개인사서로 초빙돼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났다. 디드로는 1784년 71세로 사망했지만 그가 집대성한 백과전서는 18세기 말까지 염가판을 포함해 2만5,000여부가 인쇄돼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가며 대혁명의 불을 댕겼다. 백과전서는 최근 새롭게 조명 받는 분위기다. 도해의 3분의2를 차지하는 기술편은 프랑스가 영국에 앞서 산업화에 들어섰다는 논거로 쓰이고 있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6/10/04 16:35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610/e2006100416350563820.htm
1592 - 임진왜란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 해전 임진왜란 해전 목록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거제시 옥포) - 이순신/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마산시 산호동) - 이순신 1592년 6월 17일(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카메이 코레노리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와키사카 야스하루 1592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구키 요시아키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1597년 10월 16일(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고니시 유키나가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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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