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번역이란 무엇인가
1. 요약
① 서론 – 번역의 목적
번역할 때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한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접근하면 고유한 번역관으로서 작업을 수행한다. 그런데 번역사업에서의 번역 스타일을 결정하는 것은 번역자의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사업 목적이다. 스타일의 통일성은 번역사업이 공동 번역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진행 중인 한국고전번역원의 권역별 거점연구소 협동번역사업의 “미번역 고전의 조기 번역”과 “고전번역 인재 양성”을 일차적인 목표로 표방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목표는 “한국 인문학의 토대 구축 및 한국 문화 콘텐츠 자원의 획기적 확충”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누구를 위해, 왜 번역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② 학술번역과 대중번역
일반적으로 번역은 독자층에 따라 학술번역과 대중번역으로 구분된다.학술번역을 추구하는 번역자는 다소 난해한 번역문을 만들더라도 가급적 원문의 구조와 의미를 그대로 전하고자 하며, 대중번역을 추구하는 번역자는 원문의 미묘한 함의를 잃더라도 가독성을 우선순위에 두고 일상어에 가까운 번역문을 만들려는 경향을 보인다. 현재 고전번역에 대한 시대적 요구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하지만 대중번역은 앞서 언급한 번역사업의 목적과는 거리가 있으며, 번역사업의 번역 대상인 한국 문집에도 적합하지 않다.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의 목적들을 통해 학술번역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문학의 토대 구축”이라는 번역사업의 첫 번째 목적은 번역서가 인문학 전반의 학문적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번역서의 일차적인 독자가 문사철을 위시한 인문학 방면의 전문연구자임을 의미한다. 현재 문집 번역서의 주된 이용자가 전문연구자라는 점에서도 이러한 해석은 근거가 있다. “문화 콘텐츠 자원의 확충”이라는 두 번째 목적은 번역사업의 성과가 널리 파급되어 각종 문화 콘텐츠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적에 부합하는 독자는 문화 콘텐츠를 기획, 생산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고전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다.
독자층을 이렇게 상정한다면, 기본적으로 전문연구자를 위한 번역이면서 고전에서 정보를 찾고자 하는 적극적인 준전문가 집단의 접근이 가능한 수준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독자층을 비교적 넓게 상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아무리 전문연구자라도 전공분야 이외의 배경지식은 대체로 준전문가와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집 번역의 기본 방향은 전문연구자를 위한 학술번역으로 하되, 인문학 방면에 국한하지 말고 모든 방면의 전문연구자 및 준전문가들이 이해 가능하며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수준으로 가공해야 한다. 독자층을 이렇게 상정할 경우 가장 문제되는 것은 가독성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논하도록 한다.
③ 학술번역의 개념
학술번역의 개념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논고는 심경호의 논문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이에 따르면 학술번역은 “철저한 문헌고증을 토대로 하면서 완전한 주석을 곁들인 번역”을 말한다. 심경호가 제시한 학술번역은 원전 텍스트의 장악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학술번역의 유형을 굳이 구분하자면 일본식 학술번역과 서구식 학술번역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상술한 심경호의 주장은 일본식 학술번역에 가깝다. 일본식 학술번역은 텍스트의 내적 완결성을 추구하며, 서구식 학술번역은 텍스트의 외적 확장성에 주목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식 학술번역은 원전의 축자적 이해를 위하여 텍스트의 교감 및 표점 등 원전의 철저한 가공을 우선한 뒤 원문의 전고 및 출전 등을 상세히 밝히면서 원문의 구조와 어휘에 충실한 번역을 수행한다. 서구식 학술번역은 원전의 비판적 이해와 활용을 위하여 텍스트 자체의 이해를 위한 번역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둘러싼 인물과 시대를 비롯한 세계를 이해하면서 번역자가 가지고 있는 작금의 문제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고전번역은 이 둘 사이에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전자에 기울어진 감이 있다. 그래서 학술번역은 원문의 축자적 이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비판적 이해와 활용은 전문연구자에게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원문의 문법 구조, 그리고 자구의 미묘한 함의를 밝혀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일본식 학술번역이 적합하기는 하다. 그러나 번역사업의 목적과 현실을 감안하면, 일본식 학술번역을 전범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첫째, 일본식 학술번역은 월등한 권위를 가진 고전(經史子集 및 佛經 등)을 위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필자는 이를 ‘전범적 고전’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한국문집총간 수록 문집이 모두 전범적 고전의 지위를 차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 일본식 학술번역이 번역사업이 상정한 독자층의 요구와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앞서 문집 번역서의 독자로 상정한 이들은 대부분 문집을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일종의 DB로 취급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식 학술번역은 투입되는 노력에 비례하는 효과를 거둔다고 보기 어렵다. 셋째, 일본식 학술번역을 추구하려 해도 현실적인 여건이 미비하다는 점이다. 일본식 학술번역의 대표적 성과는 오로지 텍스트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 기약없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여건이 뒷받침되었다.
현실을 고려하여 가용한 자원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여기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 독자의 요구이다. 독자의 요구를 고려하면, 포기해야 할 것은 일본식 학술번역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사업 목적과 번역 대상의 특성, 독자층의 요구를 감안하면 서구식 학술번역의 성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준높은 대중 또한 독자로 포섭할 수 있으므로 사업 목적과 부합한다. 또한 서구식 학술번역은 번역자의 관점과 입장이 명료하게 드러나므로, 우리 고전번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가지 방식의 장단점을 고려하여 탄력적으로 선택하거나 절충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④ 학술번역의 실제 - 『월정집』을 중심으로
이 장에서는 문집 번역서의 학술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번역 방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월정집』 번역을 예시하고자 한다. 다양한 문체와 별도의 저술이 합편된 『월정집』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우선 텍스트의 성립 과정을 고찰하고, 이어서 월정이라는 인물과 그의 저술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을 평가하여 번역의 주안점을 가늠할 필요가 있다.
『월정집』은 1647년 丹陽과 咸興에서 분할 판각되었다. 한 질의 문집을 두 지역에서 나누어 판각하는 것은 드문 일인데, 당시 丙子, 丁卯 兩亂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현전하는 『월정집』은 월정의 저술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월정은 생전에 자신의 시문을 자편하였으나 임란을 거치면서 상당수가 산일되었다.
월정 형제는 권력의 핵심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여 가문을 중흥하였다. 이것은 조선 중기 정치사의 권력 구도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16세기는 사림 중심의 정치 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이다. 월정의 부친은 趙光祖의 문인으로서 己卯士林과 교유를 맺고 있었다. 이 때문에 기묘사림에 대한 월정의 평가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사림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정치적 위상을 확보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월정은 사림세력의 득세와 붕당간의 대립, 그리고 서인계의 집권세력화에 이르는 조선 중기 정치사의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월정의 생평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그가 對名外交에서 담당한 역할이다. 그가 참여한 공식 사행만 4회(1566, 1573, 1589, 1594)에 달하며, 임란 중에는 10여 차례 이상 명을 오가며 외교활동을 벌였다.월정은 명대 古文辭派의 존재와 저작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며, 『월정집』에는 명의 문인 및 장수들과 주고받은 시문이 적지 않았다. 『월정집』 번역은 이같은 월정의 정치적, 외교적, 문화적 위상을 구체적으로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시 번역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원문의 의미적 손실과 미적 손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미적 손실을 선택하는 것이 마땅하다. 문집 번역서의 시를 문예적인 취향에서 감상하는 독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시의 미감을 살피고자 하는 연구자라면 원문을 보아야 한다. 또한 번역자가 입증할 수 있는 능력은 번역 능력이지 시적 언어의 운용 능력이 아니다.
『월정집』 번역에서는 거의 모든 시제에 창작 시기와 배경에 관한 주석을 부기하였으며,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는 추정을 시도하였다. 아울러 본문에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해설하는 주석을 부기하였는데, 감상평으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고 작자의 의도와 사실 관계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시제의 주석에서는 창작 시기를 밝혔다. 시기를 일일이 고증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현재 구축된 DB를 검색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도까지 가능하다. 인물에 대한 정보는 인물사전식의 장황한 정보보다 필수적인 요소만을 간략히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산문은 정보를 찾고자 하는 독자가 가장 주목하는 갈래이다. 가능하다면 산문의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걸음 나아가 역사적 맥락에서 그 내용을 조감할 수 있는 부가정보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텍스트 외적 요소를 얼마나 고려하여 번역하였는가는 학술번역의 수준과 직결된다. 다만 번역자의 감상이나 편협한 견해가 들어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끝으로, 역자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이 점은 서구식 학술번역의 특징이기도 한데, 전범을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번역자들에게 익숙한 경서 주석의 전통을 참고할 수 있다. 경서 주석은 당대까지의 수많은 주석을 두루 검토하고 정리한 바탕 위에서 우열을 따지거나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는 방식이다. 중요한 점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주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거 문인들이 취했던 ‘傳疑’의 태도와 같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그대로 남겨도면 족하다.
⑤ 결론 – 학술번역의 가능성
1930년대부터 해방 직후까지 활동한 국학 세대, 그리고 이들의 뒤를 이은 한국학 1세대에게 학문연구와 고전번역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직접 자료를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하였으니, 이 시기에는 연구자가 곧 번역자였다. 그러나 7,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 학문의 단절과 더불어 한문 문헌을 해독할 능력을 갖춘 인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다르다. 현재는 연구자와 번역자의 구분이 점차 사라지는 추세이다.
번역서가 학술적 업적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번역과 연구가 별개라는 인식 때문이다. 현재 고전번역은 축적된 선행연구와 방대한 DB의 기반 위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연구자와 번역자의 거리는 다시 좁아지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연구자와 번역자의 구분이 없어지고, 연구서와 번역서의 구분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2. 의견
학술번역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을 살펴보았다. 서론에서 진행 중인 한국고전번역원 사업의 목적을 제시하여 학술번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독자층을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을 위한 번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본식 학술번역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서구식 학술번역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두 방식을 취사 선택하는 번역자의 현명함을 주문하였다. 그 결과의 예시로 『월정집』을 활용해서 이러한 것을 종합적으로 보여주었다. 끝으로 번역을 연구와 함께 접근해서 번역서의 목적과 활용성 그리고 학술적 가치를 높이고, 더 나아가 역자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밝혀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번역서가 독자적인 연구서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 논문에서 학술번역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제언은 합리적이고 틀린 말이 없다. 이에 여기서 제시한 학술번역에 대한 접근을 탄력적으로 하고자 한다. 우선 서론에 한국고전번역원 사업의 목표를 보면 “미번역 고전의 조기 번역”과 “고전번역 인재 양성”으로 표방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인문학의 토대 구축 및 한국 문화 컨텐츠 자원의 획기적 확충”이라는 목적을 설정하였다. 논문에서는 이 문구들을 학술번역에 적용할 때 서구식으로의 점진적 방향 전환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미번역 고전을 조기에 번역한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한정된 지원과 시간으로 사업을 시작해서 이러한 문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전번역 인재를 양성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한문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미번역 고전을 번역하면서, 그들을 인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제한된 여건 속에서 효율성을 극적으로 끌어 올릴 수 있을 듯 하다. 그렇다면 이 조건 아래에서, 서구식 학술번역을 일변도로 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일수도 있다. 그러나 논문에서 이것 또한 일본식에 비견될 만큼 시간적,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필요로 하는 바를 명시하였다. 필자는 두 방식의 장점들을 적절히 섞어 번역사업에서 기대하는 사항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보았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공동번역이라는 용어를 알게 되었다. 공동번역이란 대상 텍스트를 한 사람이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2인 이상의 번역자가 참여하여 진행하는 번역 방식으로, 번역자 간에 상호교섭이 긴밀하게 이루어지는 방식이다.이것의 정의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의 단계들의 예시를 살펴보았다.고려대학교 거점연구소의 공동번역 운영 방식은 번역자 6인의 연간 번역량 전체를 윤독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고 있다. 윤독회가 시작되면, 해당 번역자는 교감표점문에 현토하여 읽는다. 그리고 검토와 함께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번역자와 참여자, 참여자 상호 간의 논의들이 이루어진다.
번역결과물의 질적 수준이 상향 평준화, 피드백을 상시 활용함으로써 후속세대를 양성, 대상 정보의 광범위한 습득과 윤문 교정의 수월성의 세 가지 결과들은 공동번역에 대한 전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이것의 성과는 일본식 학술번역의 내적 완결성과 서구식 학술번역의 외적 확장성 중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적절히 배합하였으며, 미래의 방향성을 잘 내세웠다고 생각한다.
3. 토론해보고 싶은 사항
일본식 학술번역, 서구식 학술번역, 두 번역 방식을 혼합한 형태 중에 어떤 것으로 하면 번역이 효율적으로 잘 될 것 같은가? 두 번역 방식을 혼합하고자 한다면 그것들의 어떠한 요소들을 취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