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규 영파(聖奎 影波)강사 (1728-1812) 조선 영조/순조 때 스님
스님의 법명은 성규(聖奎)이고 법호는 영파(影波)로서 함월의 법을 이어 받은
제자이고 환성의 손자 뻘 제자이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 인근 마을 출신이다.
영파스님의 자는 회은이고 성씨는 전씨로서 고려 옥산군 영령(永齡)의 16대손 이며
만기(萬紀)의 아들이다. 어머니 응천 박씨는 어느날 꿈에 큰 별하나가 품안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잉태, 조선조 영조 4년(1728년) 기이한 골격을 갖춘 아이를 낳는다.
이 아이가 바로 조선조 후기의 쇠잔해가는 불교에 새 희망과 활력소를 제공했던
영파 스님이다.
어려서부터 슬기로움이 뛰어나 9류(九流)의 학문에 통달하고 글씨를 잘 써서 이원교의
문하에 참예할 정도였으며 글씨는 용이 꿈틀대듯, 뱀이 내닫듯 힘차 보였다.
15세 무렵, 청량암에서 책을 읽다가 공양할 때 여러 스님들이 절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오묘한 느낌을 받아 출가할 뜻을 굳힌다.
4년이 지난 뒤 집을 하직하고 용천사로 찾아가 출가를 받아들여 주기를 간청하매
환응 장로가 기특하게 여겨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소년은 머리 깎고 계율을 받아 마침내 수행의 길로 자신의 인생 항로를 바꿨다.
이날 밤, 영파 스님은 꿈에 가사를 수한 노스님 한 분이 섬돌 앞에 서서 경쇠를
울리며 세 번 예 올리는 광경을 보았다.
영파 스님은 제방을 운유하면서 해봉․연암․용파․영허 등 당대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부지런히 정진하였다.
하루는 문득 “부처님의 문안에서 가르침을 천명하려면 깨달음을 우선해야 한다” 는
생각이 일어나 이에 금강대에 재(齋)를 설하고 관세음보살의 법력을 기구하였다.
재를 마치는 날 밤, 영파 스님은 묘한 꿈을 꾼다. 어느 방에 들어갔더니
서가에 책이 가득 꽂혀있는데 모두 <화엄경> 이었다. 곁에 한 노스님이 있다가
책들을 가리키면서 “진리가 모두 여기에 있다” 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9년의 세월이 흐른 뒤 황산퇴은(黃山退隱) 장로를 만났는데 그는 한 번에
영파 스님과 마음이 맞아서 가지고 있던 <화엄경> 전부를 내주었다.
앞서 꾸었던 꿈 속의 현상과 여합부절하게 맞아 떨어진 데 대해
영파 스님은 내심 놀랄 뿐이다.
이때부터 스님의 <화엄경>에 대한 공부는 본격화된다.
스님은 <화엄경>의 깊고 오묘한 이치를 궁구하는 30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변함없이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영파 스님은 또 정조 2년(1778년)부터 정조 5년(1781년) 까지 대비주(大悲呪)를
외우기 10만 번, 송주(誦呪)로 일과를 삼았다.
이보다 앞서 스님은 영조 30년(1754년) 이후 당대의 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치던
설파․함월 두 화상에게 참예하여 <화엄경>의 종지와 선교의 요령을 모두
터득하고 함월 스님께 의발을 전해 받았다.
이때부터 스님은 조사선 여래선을 거침없이 설하였는데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대중들을 부르지 않아도 스님의 휘하에는 늘 물이 아래로 흐르듯 많은 학인들이
몰려들었고 명예를 팔지 않아도 스님의 문전은 늘 저자를 이루었다.
산 넘고 물 건너 스님이 운수행각은 전국 어느 절이든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두륜산 대둔사(대흥사)의 약사전에서 크게 법회를 열자 제방에서
수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운집, 대성황을 이루었다.
법회를 마친 뒤 신월암에서 하안거를, 진불암에사 동안거를 마쳤다.
영파 스님은 대둔사(대흥사) 약사전에서의 법회를 마치고 나서 신월암 에서 하안거,
진불암에서 동안거를 보냈는데 이 무렵 그는 대자유를 증득한 자신의 심정을 자주
시로써 드러내 보이곤 하였다.
이때 지은 시들은 호남 각지 사찰의 많은 스님들에 의해 널리 회자되었다.
특히 침계루와 진불암에 걸려 있는 시는 유명하다.
영파 스님이 오대사(悟大師: 始悟인듯하다)에게 준 시에는 시를 짓게된 배경에 대해
약간의 언급이 보인다.
“호남 대둔사의 오스님(悟上人)이, 완호 스님을 좇아와서 나와 만났을 때
소매 속에서 연담 노스님이 율시를 꺼내어 보여 주면서 화답시를 써달라고 하기에
나는 화답시를 쓰지 못하고 대신 선게로써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어 영파스님은 선게를 읊었다.
관중에서의 7일 설법은
위엄스런 우레소리 천지를 진동했네
말없이 말한 천고의 진리를 알고픈가
가을밤, 찬 종소리 절문에 걸렸고녀
순조 4년(1804년) 낙동 문인 성파 가 쓰다
또 제자 설허가 써서 시오스님께 준 시도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호남의 뛰어난 벗이 영남에 노닐더니
소산으로 나를 찾던 날, 누각에는 흰눈이 가득
일만 이천봉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 끝없이 펼쳐지는데
붉은 해당화 만개한 길에서 조는 갈매기에게 도(道)를 묻노라
순조 10년(1810년) 초봄에 영남의 설허가 쓰다.
영파 스님은 설파와 함월 두 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의 종지와 선교의 요령을
모두 터득한 뒤 함월 스님의 의발을 전해 받고 나서 영조 30년(1754년) 이래
등단설법 하다가 순조 12년(1812년) 생애를 마쳤다. 나이 85세, 승랍 66세 였다.
이에 앞서 영파 스님은 꿈에 천구성(天拘星)이 궁(窮)과 달(達), 수(壽)와 요(夭)를
물으매 이렇게 대답을 한 적이 있다.
“명성은 동국에 가득하고 영달하여 곤궁치 않으며 목숨은 80에 다섯을 더할 것입니다.”
과연 스님의 이와 같은 꿈은 영험이 있어 85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다비 하던 날 저녁, 신비스러운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상서로운
구름이 다비장 하늘을 뒤덮었다.
스님의 성품은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기뻐하거나 성내는 적이 없었으며 돈을 품안에
넣고 다니는 일도 없었다.
문인 11명이 있었는데 그중 설허가 수좌를 차지하였다.
대종사 두예(斗藝)는 영파스님을 평하여 “연담 스님께서 입적하신 이래 명성과 인품의
훌륭함이 영파보다 뛰어난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고 하였다.
스님이 입적한 뒤 4년 만인 순조 16년(1816), 당시 규장각 제학으로 있던
남공철(南公轍)이 비석글을 써서 세운 비석이 은해사에 있다.
영파스님의 법계는 비석 기록에 서산(西山)의 6세라고 하였으니 곧 다음과 같다.
청허→편양→풍담→월담→환성→함월→영파.
1812년(순조 12) 세수 85세, 법랍 66년을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1816년(순조 16) 스님이 입적한 지 4년이 지나 당시 규장각 제학(提學)이었던
남공철(1760∼1840)이 글을 쓴 비가 영천 은해사에 세워졌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6C8E3555BC0F160A)
![](https://t1.daumcdn.net/cfile/cafe/2136C63A55BC0F3B05)
“연담스님이 입적한 이래 명성과 인품에서 영파 성규스님보다 뛰어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蓮潭沒後 名德之盛 無出波之右).”
화엄의 종지 드높인 당대의 선승
![](https://t1.daumcdn.net/cfile/cafe/277B213A55BC0C270B)
<사진설명> 예천 용문사에 봉안돼 있는 성규스님 진영.
화폭속 모습서 검소한 삶 느껴져
스님은 이 진영에서 오른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두 손에는 주장자와 염주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일생을 검소하게 살다간 선승의 풍모가 느껴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이시대에 꼭 오세야할 스님이십니다.
영파 성규스님관련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듯 존경 받을 스님의 정보가 불교계를 밝게합니다.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