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급성 백혈병) 투병 구백일흔두(972) 번째 날 편지, 1 (안부, 소식) - 2023년 5월 6일 토요일
사랑하는 큰아들에게
2023년 5월 6일 토요일로, 황금연휴 이틀째구나….
오늘 편지 배경음악은 ‘매일 묵상하는 최고의 찬송가 연속 듣기’를 렸으니, 클릭해서 찬양을 들으면서 편지를 천천히 읽어 보시게…….^^
골수이식 후 숙주 반응과 약제 부작용과 합병증 등으로 손바닥에 생기는 물집들을 수시로 터뜨리고, 터드린 부분에 고인 진물을 모두 다 빼내고, 피부과에서 처방된 약을 바르고 나면, 금방 또다시 다른 부위에 연이어 물집이 발생해 극심한 통증을 주니 이거 참 큰일이구나….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고, 견딜 수는 있지만, 물집이 생긴 부분과 터드린 부분과 그 주변의 손바닥이 전체가 너무도 아프고, 쓰리고, 간지러워서 연일연야 너무도 견디기 힘들드는구나.
그래서 ‘피부과 약과 감염내과 약을 먹을까?’하는 생각을 수시로 하다가도 "약을 먹으면 먹을 수록 신장(콩팥)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고 했기에 참고, 참으며면서 처방된 연고들만 연속으로 바르면서 견디어 본다네….
어제 아침에는 호박과 감자 등을 썰어 넣고 만든 된장국에 밥을 한 그릇 먹고, 아침 약을 먹었고, 점심은 아래층에 사는 분이 방금 해서 따끈따끈한 콩나물밥을 가지고 왔기에 따뜻한 콩나물밥을 사랑하는 엄마가 만든 맛 나는 간장 양념으로 비벼서 먹었구나….
그리고, 어제 아침편지에 "고기 등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다."고 기록했더니, 편지를 읽은 사랑하는 엄마가 낮에 나가서 목 삼겹살(13,000원)과 상추 등을 사와 저녁에 소금 간을 해서 팽이버섯을 넣어 구워서 한 상을 차려주기에 아주 맛나게 먹었구나.
그런데, 아빠가 먹고 싶은 목 삼겹살 고기를 사다가 구워준 사랑과 성의가 고맙기는 하지만, 마치 먹고 싶은 것을 보채는 아이처럼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 아빠로 인해 돈을 쓰게 했으니, 사랑하는 엄마와 우리 세 자녀에게 미안하구나….
오늘은 ‘물 폭탄’이라는 기도문과 2023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보내면서 ‘나 어린 시절의 많은 추억’ 중 하나인 [천왕동에서 셋방살이할 때]라는 글을 2006년 1월 초에 정리해 두었던 것을 편지에 기록해 본다네.
♡물 폭탄♡
글: 주시(主視) 김형중
주님!
어린이날에 남부에 '물 폭탄'이
쏟아지면서 제주·전남·경남지역
공사현장과 주택 일시침수,
도로 장애물 제거 등 총 92건의
안전조치를 했고, 현재 인명피해는
없으나, 이날 오후 5시를 기해
중대본 1단계를 가동하고, 위기경보
수준을 '주의' 단계로 발령했다고
하오니 앞으로 비 피해 없도록
안전하게 지켜주시옵소서. -아멘-
(2023년 5월 6일 토요일에)
♡천왕동에서 셋방살이할 때♡
글: 주시(主視) 김형중
지금(2006년 당시)은 우리 집(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삼성연립 / 1986년 5월 26일부터 2010년까지)에서 살지만, 간혹 주변에서 세를 사는 이들이 셋방살이에 대하여 말할 때면, 많은 추억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애환(哀歡)이 담겨있는 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들이 한가득 있는데, 그중 몇 가지를 고르고 골라서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와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에서 처음으로 세를 산 일들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1960년대 말까지 충청북도 내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께서 먼저 서울로 가셔서 변변한 손잡이가 없던 시대에 스테인리스로 문손잡이를 만드는 사업(제일기업 대표이사 / 1969.-1973.)을 하시며, 공장을 경영하는 기업가로 자리를 잡으셨다.
우리 가족들은 서울로 먼저 올라가신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를 따라, 1970년 봄에 내가 출생하고 자란 내 고향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그때 서울로 이사 와서 첫 번째 살았던 동네가 서울 구로구 오류동 옆에 있는 천왕동이었다.
바다도 없고, 통행 금지도 없었던 인심 좋고, 사람 좋고, 물 좋은 내 고향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당시, 만승면)을 떠나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우리 집이 이사할 때도 요즈음처럼 이삿짐 차를 빌려 이사를 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어머니께서 일일이 짐을 꾸려 서울 용산으로 가는 시외버스 편을 이용해 서울로 오고 가는 길에 하나씩 들어서 이사를 하신 것이다.
당시, 시골서 살던 많은 살림살이를 대부분을 그대로 두고, 우리 가족들이 당장 덮고 자야 할 이불과 우리가 입어야 할 옷가지들만을 챙겨 서울로 이사 온 것이다.
당시에 천왕동에 집을 얻어 산 것은 천왕동에서 가까운 경기도 광명시 옥길리(동)에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공장(제일기업 대표이사 / 1969.-1973.)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천왕동에 세를 들어 살기 시작해 그렇게 우리는 서울로 이사 와서 서울 셋방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내 고향 충청도에 살 때는 만승초등학교와 만승중, 고등학교 바로 정문 앞에 있는 비교적 넓은 우리 집에서 마음껏 뛰어놀면서 살던 우리는 아주 비좁은 방 한 칸과 다락, 그리고 다락 밑에 딸린 비좁은 부엌이 있는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사한 그 날부터 우리 집은 상시 비상사태였다.
이사할 당시에 우리 어머니께서 셋방을 얻을 때, 발품을 팔면서 여기저기 살 집을 보았지만, 방을 세놓을 주인들마다 “아이들이 많으면 방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여기저기 다니시며,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겨우 얻으신 방이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 산 밑에 있는 집에 있는 방이었다.
산밑 집에서 방 하나를 세 얻을 때도 “아이들이 많으면 세를 안 준다.”고 하기에 우리 집에는 아이가 다섯 명이나 되는데도 우리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 방을 얻기 위해 “아이가 많지 않고, 모두 온순하고, 조용하다.”고 하시며, 주인에게 사정사정하셔서 세를 겨우 얻었다.
우리가 그 집으로 어렵게 이사한 후에 어머니께서는 마치 숨바꼭질하듯이 주인 모르게 우리를 집으로 살며시 데리고 들어오신 까닭에 우리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행여 떠들거나, 동생들이 울까 봐 무척이나 신경을 쓰면서 사셨으니, 참으로 마음고생 많이 하셨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방과 주인집 거실과는 달랑 문 하나로 막혀 있기에 아주 조그만 소리가 나도 다 들리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아주 조용히 지내야만 그 집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떠들거나 울면 주인이 ‘시끄럽다고 당장 방을 빼라’고 하면, 아이가 다섯 명이나 되기에 다시 방을 얻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 형제들에게 조용히 살라고 당부하셨다.
우리는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아이들이 없는 듯이 아주 조용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조용히 살라."고 수시로 당부하셔서 우리는 어린 시절에 매일 쥐 죽은 듯이 숨죽이며 하루 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셋방살이를 하는 우리 5남매의 삶은 한마디로 쥐 죽은 듯이 사는 것이었는데, 행여 조금이라도 떠들다 방을 빼라고 하면, 당시는 아이가 있으면, 셋방을 얻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그나마 우리 가족들에게 방을 임대한 주인에게 수시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조용히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행여 조금만 소리가 나도 금방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는 주인과 주인의 그 눈치를 보시고, 먼저 ‘조용히 하라.’고 하시는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보이지 않는 묵언(默言) 전쟁을 치르며, 정말 조용히 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행여 어린 동생들이 울려고 하기라도 하면, 입을 손으로 막기도 하셨고, 어머니께서 얼른 밖으로 업고, 뒷동산으로 올라가셔서 달래시기도 하시며, 어머니나 우리 형제자매들 역시 몹시도 힘겹게 셋방살이를 하면서 살았다.
그때 우리는 언제나 시끄럽게 할 수 있고, 마음대로 말하거나 활동할 수 있는 집주인이 무척이나 부러웠고, ‘우리는 언제 우리 방을 갖고, 우리 집에서 마음 놓고 살 수 있을까?’하는 것이 우리 어린 형제들의 다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번은 우리 막내가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나 큰 소리로 울게 되었다.
요즈음 같으면, 어린아이가 우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당시 우리 집으로는 큰일 날 일이기 때문에 우리 집은 막내의 울음에 비상이 걸려 막내를 달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쓰며, 울음을 그치도록 했으나 막내의 울음소리는 더욱더 커지기만 했다.
아마도 그동안 제대로 한 번 울어보지 못했던 것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모두 막내를 달래려고 애를 쓰다가 도저히 그쳐지지 않자 어머니께서는 급기야 막내 입을 손으로 막으셨고, 입이 막힌 막내는 울기는 하지만, 그 소리가 줄어들게 되었다.
당시에 우리 어머니께서 얼마나 속이 탔으면, 사랑하는 막내딸의 입을 손으로 막으셨을까?
당시 '다섯 명의 자녀로 인하여 방을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만일 시끄럽다고 여기서 쫓겨난다면, 어디 가서 방을 얻어야 할까?'하는 참담한 생각을 하셨을 우리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눈에는 소리 없이 이슬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흐른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에 아직 아기인 우리 막내는 지쳤는지, 아니면 매우 놀랐는지 깊이 잠이 들었고, 우리 집은 다시 적막이 흐르는 절간처럼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조용한 적막감과 고요함만이 가득한 집이 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매일같이 아주 조용히 숨죽이며 사느라고, 내가 학교와 친구들에게서 매일같이 빌려온 책들을 붙들고, 매일 같이 학교에서 우리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하루에 한두 권의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된 모양이다.
또 한번은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께서 이사하고 처음으로 손님을 모시고 왔는데, 방이 비좁은 가운데, 어린 동생이(김 변호사) 방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자, 아버지는 어린 동생에게 ‘비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어린 동생은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딱히 비킬 데가 없기에 저녁이라 곧바로 나가서 어둡고 무서운 뒷산에 갈 수도 없는 처지라 머뭇거리고 있자 아버지께서는 급하게 동생을 들어서 다락문을 열고 다락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그러자 어두운 다락에 던져진 동생은 결국 울기 시작했는데, 그 울음소리가 주인에게 들릴까 봐 다락문을 닫아 버려 울음소리가 주인집에 들리지 않게 하신 적도 있다네.
그러나 아마도 주인은 이미 우리 집에 아이가 많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지만, 우리 형제들이 평소에 워낙 조용하고, 온순하고, 착하게 지내니, 그냥 묵인(默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를 다락에 집어넣었으니, 어린아이를 학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어린아이를 다락에 집어넣어 무서워 크게 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때는 주인이 시끄럽다고 말하기 전에 조용히 시키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주눅이 들어 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그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살았던 이유는 단 하나, 어느 코미디 프로에서 '방 빼~~~~'라고 소리 지르는 주인처럼, 만일 주인이 ’시끄러우니 방을 빼라.‘고 하면, 우리는 형제들이 많아서 그나마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울에서 첫 번째 셋방살이의 설움이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추억 아닌 추억거리가 되었고, 그때 우리들의 꿈은 아니, 부모님의 꿈 역시 내 집을 갖고 사는 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셋방살이를 한지 얼마 후인 1971년에 우리 아버지께서 천왕동 옆에 있는 경기도 광명시에 우리 집을 짓고, 새집으로 이사를 하게 돼 그곳에서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있는 오류초등학교와 서울 구로구 항동에 있는 유한중학교와 유한공업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자유롭게 살았다.
건축업을 하시며 광명시에 빌라 수십채를 건축해서 분양하신 우리 어머니께서 1978년에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에 빌라 20여채를 지어 분양하시고, 남은 한 채에 우리가 이사해서 살았다.
그러다가 동생들 학교 문제로 인해, 당시 학군이 가장 좋다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금화아파트로 1979년 봄에 이사 가서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약 4년여를 살다가 서울시 강서구 화곡 2동에 있는 아담하고, 예쁜 양옥집에 세를 얻어 1984년 4월 10일에 이사를 해서 2년을 살다가 바로 옆에 있던 화곡본동에 있는 30여평짜리 삼성연립을 매입해 1986년 5월 26일에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2006년 1월 이 글을 다시 작성할 때) 약 20여 년을 삼성연립에서 살면서 우리 세 아이들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므로, 우리 가정과 아이들의 고향이요,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2023년 5월 6일 토요일에)
여름의 시작인 입하(立夏)이자, 황금연휴 2일째인 오늘(6일/토) 아침 최저기온은 10∼18도, 낮 최고기온은 12∼20도로, 전국이 대체로 흐리고 비가 내리는데, 수도권에는 낮까지, 그 밖의 전국은 오후까지 비가 내린다네.
오늘까지 예상 강수량은 전남권·경남권 동부·경남 서부 남해안·제주도(북부 해안 제외), 지리산 부근 50∼100㎜(많은 곳 150~200㎜ 이상)고, 그 밖의 지역은 20∼70㎜(많은 곳 100㎜ 이상)의 비가 내린다네.
앞바다 물결은 동해 1.5∼4.0m, 서해 0.5∼3.0m, 남해 1.0∼3.0m로 일겠고, 해안선에서 약 200㎞ 내의 먼바다 파고는 동해·남해 1.5∼4.0m, 서해 1.0∼4.0m로, 대부분 해상에선 돌풍과 함께 천둥·번개가 치는 곳이 있으니 안전사고에 유의하라네.
아무튼, 오늘 오전 편지 여기서 마치니, 오늘 하루도 안전하고, 건강하고, 늘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안녕히…….
2023년 5월 6일 토요일 오전에 혈액암 투병 중인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