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박정희는 여순 14연대 반란 진압후 며칠이 지난...11월11일 체포 됩니다.
박정희가 남로당 가입 등 좌익혐의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된 것은 1948년 11월 11일이었다.
이 날은 육사 7기생들의 졸업식날이기도 했다.
박정희(당시 육사 1중대장) 소령은 여순사건 관련자 토벌 차 광주로 따라 내려갔다가
육사로 돌아온 직후였다. 당시 군 수사당국은 육사로까지 범위를 넓혀 좌익분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이 무렵 태릉 주둔 1연대의 정보주임 김창룡(특무대장 역임)은 수족들을 풀어 서울시내에서
'거동수상자'들을 붙잡아 조사를 벌였다.
그러던 중 부하들이 한 거동수상자를 체포했는데, 그가 붙잡히자마자 뭔가를 우물우물하며 삼키는 걸 보고
수상히 여겨 김창룡에게 그를 보고했다. 확인결과 그는 박정희를 포섭한 이재복이었다.
거동수상자 불심검문에서 잡힌 남로당 군총책
김창룡의 직속상관인 김안일(육군 준장 예편) 특무과장은 이재복이 체포된 경위를 유양수씨
(육군 소장 예편 )에게 증언한 바 있습니다. 다음은 유씨의 전언.
"어느 날 김창룡이 와서 '거동수상자를 하나 붙잡았는데 이것저것 조사해도 마땅한 증거 같은게
안나와서 석방하려다가 석방 직전에 오일균을 감옥서 꺼내 물어보니 그가 바로 남로당 군
총책 이재복이었다."
이재복에 이어 이재복의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면서 숙군 수사는 급진전됐습니다.
수사팀은 김영식을 통해 군내 좌익세포 명단을 통째로 손에 넣게 됐다. 다시 김안일 특무과장의 증언입니다..
"김영식을 데리고 전국의 군부대를 돌면서 그에게 남로당 세포들을 찍으라 했더니 이후의 수사는
그냥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재복의 명단 속에 바로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결국 박정희는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합니다.(이렇게 고문을 당했던 작자가..훗날
민주투사들을 마구 고문하였으니 아이러니하죠..아니 아이러니가 아니고 아주 쥑일놈입니다.이미 죽었지만..)
그럼 김창룡이 누구냐...
특무부대장인 김창룡은 일본군 헌병( 憲兵隊 일본 발음 겐페이타이)군조 출신입니다. 군조는 흔히 하사관이죠..
해방 이후 월남해서 다른자들처럼 초창기 한국군에 들어가는데 아주 악랄한 짓을 자행합니다..
자기가 일본군때 했던 버릇을 그대로 한국군에 들어와서 한것이죠..
물론 박정희는 김창룡에게 고문을 당하지만.. 이런 악귀 김창룡에게서 살아남은 것은..동지들을 팔아넘기는
엄청난 배신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증빙하는 사진이 아래 이것이죠..
김창룡(1916~1956)
이 사진에 맨 오른쪽에 머리 거시기한 양반이 박정희 대령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이 김창룡 대령이죠.
한국전쟁 중에 사진을 추정됩니다.그 이유는 김창룡이 1953년에 준장 진급을 하죠.
웃긴건...이 김창룡의 무덤을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옮긴것이 국군기무사령부라는것입니다.
아래는 그 자료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대전 지역 시민단체들이 몇 년째 대전 국립묘지에 있는 친일군인 김창룡 묘 이장을 요구하면서
그자를 백범 암살의 ‘배후’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것이 그 까닭이다.
원고 쪽, 즉 김창룡의 미망인은 김창룡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없이
오직 김창룡은 백범 암살을 사전에 모의한 적이 없으므로 ‘배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사전 모의는 없었고 사후 처리를 가담했으니 ‘배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자들의 파렴치에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1995년 국회가 채택한 〈백범김구선생암살 진상조사보고서〉 ‘암살의 배후’편을 보면
김창룡의 구실이 아래와 같이 자주 나오고 있다.
“안두희는 특무대로 이송되어 특별 대우를 받게 되는데, 이에 개입한 사람은 총참모장 채병덕과
특무대의 김창룡이었다. 안두희는 그의 회고에서 사건 전에 김창룡을 만난 적이 있다고 언급했지만,
그의 사전 개입은 아직 명백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김창룡이 사건의 뒷처리에서 누구보다
직접 개입하였다는 점은 명백하다. (중략)
결국 군부에서는 장은산이 사전에 직접 명령·지휘하였고,
김창룡은 사건의 뒷처리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 외 전봉덕, 김창룡, 채병덕, 원용덕, 김병삼 등은 외곽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백범이 저격당한 49년 6월26일 저녁 암살범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시켜 쉬게 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를 15년으로 감형시키는데 영향을 미쳤다.
안두희도 1992년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김창룡을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김창룡이 꾸민 것만 해도..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 ‘정국은 간첩조작 사건’
‘동해안 반란 사건’ ‘국가원수 암살음모 사건’ 등은
당시의 정치 행태와 사회 규범의 후진성을 고려한다 해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열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당시 이승만 주변에 한국군부는 좌창룡 ,우용덕이었습니다.(즉 김창룡이 왼팔,원용덕이 오른팔)
안두희가 1992년, 사건 43년 만에 입을 열어 “김창룡의 사주를 받아 범행했다”고 진술한 바 있는데
그 진위와 관련 유무를 떠나 씁쓸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안두희가 이승만 정권 내내 초고속 승진에 사업가로 성공한것은
김창룡의 뒷배 봐주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1998년까지 안양에 묻혀 있던 김창룡은 유족들의 요구로 육군특무부대 후신인 국군기무사령부 주관으로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창룡은 워낙 이승만의 삽살개가 되어..( 아...이러면 안되죠..개새끼는 귀엽기나 하지..)
군부내에서 공포분위기를 자아내어 ..군부내에도 곧 적을 만들고 결국 그의 최후가 다가옵니다.
김창룡의 악명을 알려주는 내용은 다음같은 어이없는 일도 있습니다.
백선엽 회고록 《실록 지리산》에 쓰여진 또 하나의 사건 또한 당시 김창룡의 다소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한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李雲起)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인지가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
김창룡의 숙군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1949년에는 국군 2개 대대가 월북을 해버리죠.. ㅡ.ㅡ;;
강태무,표무원 두 장교가 대대병력을 이끌고 넘어가 버립니다.파장이 상당히 이때 커서..
이응준 참모총장이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채병덕이 대신 앉았죠..
강태무(1924년 ~ 2007년 6월 17일)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2기로
1949년 5월 4일 육군 제8연대의 자신의 대대 300명을 기만하여 함께
월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강태무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육군 제8연대 2대대장으로 복무하던 중 휘하의 대대를 이끌고
1949년 5월 4일 강원도 현리 부근에서 대북시위를 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월북하였다.
강태무는 월북한 후 인민군 대대장, 연대장, 부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 했으며
종전 직후에는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77년 양강도 행정위원회(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96년부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활동하였다.
김일성훈장과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강태무의 고향친구 표무원도 자신이 지휘하던 대대를 이끌고 같은 날 함께 월북하였다.
2007년에 조선 중앙통신이 강태무의 사망을 알렸죠.
월북 국군 대대장 강태무(82)가 사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8일 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조선인민군 중장
강태무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강태무는 창군이후 국군에서 일어난 최대 월북사건의 주모자다.
육사 2기생으로 육군 8연대 2대대장(소령)으로 복무하던 중 휘하의 대대를 이끌고
1949년 5월 4일 강원도 현리 부근에서 월북했다.
당일 같은 연대 1대대장(소령) 이였던 표무원도 실탄을 휴대하지 않은
대대병력을 끌고 대북시위를 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월북하였다.
강씨와 표씨는 한 고향(경남 고성) 출신으로 보통학교 때부터 어울려 다닌 소꿉친구였다.
남로당 출신으로 알려졌던 강씨와 표씨는 군에서 진행하던 숙청에 겁을 먹고 월북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김창룡 수사팀장이 강씨와 표씨를 구속수사하려고 하였지만 “38선을 지키는 지휘관들을 함부로
구속할 수는 없다”는
이응준 육군참모총장의 반대로 무산 됐다고 한다.
이일로 이응준 육군참모총장은 자리를 내놓았고 8연대장(중령) 김형일은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소령)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북한은 월북한 강태무 씨와 대대를 개성에서 평양까지 연도환영으로 극진히 맞아 주었다.
이후 강씨는 인민군 대대장, 연대장, 부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 했으며 종전 직후에는
젊은 나이에 소장(한국군 계급에는 준장에 해당)으로 전격 승진하기도 하였다.
출신성분이 문제가 되 한때 군복을 벗고 좌천되기도 했던 강씨는 1977년 김정일의
지시로 양강도 행정위원회(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
96년부터는 인민군에 다시 복귀해 중장(소장)계급을 달고 사망 전까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6.25전쟁기념관)
강사로 활동하였다.
2005년에 80세 생일에 김정일에게 생일상 받은
강태무.
표무원(1924~2006년 4월 15일)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2기로 1949년 5월 4일
육군 제8연대의 자신의 대대 450명을 기만하여 함께 월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한국전쟁에 인민군 연대장으로 참전하였으며 이후 중장까지 진급하였다.
1954년 재북의거자 정치학교 교장, 1961년 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77년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96년 다시 입대하여 중장의 계급으로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 강사로 활동했으며
체제에 기여한 공로로 '김일성훈장'과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표무원의 고향친구 강태무도 자신이 지휘하던 대대를 이끌고 같은 날 함께 월북하였다
이작가 목소리로 하자면.. "하아...육사 2기 좃밥새끼들.. 박정희.강태무,표무원..
아..김재규 제외...
1956년 그 유명한 김창룡 암살 사건이 벌어집니다.
출근길에 그가 탄 지프를 세우고 총격을 가한것이죠..
이승만은 김창룡이 죽자 애도를 표하러 직접 적십자 병원에 가고,육군장을 치룹니다.
그리고 중장으로 1계급 특진시킵니다.,. 하여튼 짝짜궁의 극치..
그리고 범인을 빨리 잡으라고 성을 냅니다..
결국 허태영 대령등 김창룡 암살단이 체포되죠.
1956년 1월 30일 아침, 김창룡 육군 특무부대장은 출근길에 괴한들로부터 세 발의 권총 저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건국이래 당시까지 최대의 군기 사건으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동안 김창룡은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었다.
때로는 그의 권력이 육군 참모총장의 권력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육군 특무부대장으로서 고급 장교들이나 장성들의 비행을 조사했던 그는 군 내부의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창룡에 대한 반대파들은 수차 그의 제거를 논의했으나 그는 이 대통령의 신임 때문에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건 한 달 만인 2월 23일 특무부대에 의해 범인들이 체포되었다.
권총을 쏜 행동대들과 배후지령자로 지목된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 허태영(許泰榮) 대령 등 7명이 체포되었다.
놀랍게도 허 대령과 공범 모두가 특무부대 출신이었고 하수인 2인도 특무부대 문관이었다.
그런데 허 대령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부인이 구명탄원서를 제출하면서 이 사건의 배후로 제2군사령관
강문봉(姜文奉) 중장, 전 헌병사령관 공국진(孔國鎭) 준장 등이 지목되었다.
본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추가 구속이 되면서 세인들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이제 사건은 개인의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최고위급 장성들까지 관련된 조직적인 범행으로 확산되는 듯했다.
이 일로 인해 삼성장군(三星將軍, 중장의 이칭)이 군법회의를 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강문봉 중장은 공판에서 "김창룡은 군대 내에 있어서 육군의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 존재였으므로
제거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허 대령에게 범행을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군내에서 강문봉은 명석하고 강직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또한 허태영 대령은 김창룡을 제거한 동기와 목적에 대해 그가 상관과 동료를 모략하여 자기 영달을 꾀하였고,
수많은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육사 졸업식에서의 대통령 암살 음모 사건도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 한 조작극이었으며, 고위 장성들의 비행을 조사하여 군을 이간시키고 단결을 저해했으며,
군 통수 계통을 문란케 하여 군 발전을 저해했으므로 군의 장래를 위해 그를 제거했다고 주장했다.
무려 54회 공판에 연 소요시간 2천 2백 56시간을 기록할 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모았던 이 재판은
1957년 3월 19일 강문봉 피고인에 대해 사형을 구형하는 등 전원에게 유죄를 구형하였다.
4월 17일 확정 판결에서 허태영, 송용고, 신초식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강문봉 중장은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허태영을 비롯한 3인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강문봉은 4ㆍ19혁명 후 석방, 복권되었다.
이 강문봉은 한번 더 고초를 당합니다..박정희 유신정권때 알라스카 토벌작전에 또 말을 잘못하여..
알라스카는 무엇이냐면..이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한두번 일으키는것이 아닙니다..
DJ에 대해서는 호남차별을 하였고..
군부내에 자기의 목을 누르는 자들중 이른바 함경도 출신들을 이른바 알라스카라고 불렀죠.
이때 강문봉이 정일권을 이른바 각하( 박정희) 후계자 비슷하게 말하여서..박정희의 레이더망에 걸렸죠.
그래서 알아서 기었다는... ㅡ.ㅡ;;
마지막으로 김창룡이 얼마나 악명을 떨쳤는지 일화입니다.
60년대의 어느 해인가의 육사 입학 시험에 김창룡의 아들이 응시를 하여 면접 시험까지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의 용모가 죽은 김창룡을 너무도 빼어 닮아, 육사 교장을 포함한 면접관들이 혼비백산하였다는
이야기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비화 제1공화국에 나온다.
이 일화만 보아도 김창룡의 무자비했던 숙군 작업에 장교들이 얼마나 공포심에 시달렸고
치를 떨었는지 엿볼수 있다. 김창룡의 아들은 당시 육사 시험에 최종 낙방 하였다고 한다.
첫댓글 김창룡..참 생긴 것부터 몬땠게 생겼네요..
저런 ㅆㅂ넘이 국립묘지에 묻혀있다니..참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알면 알수록 정의가 죽은 나라입니다..
동영상은 주말에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