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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서문원 바오로
지금 이 땅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종교가 있고
신봉하는 대상도 제 각기지만 그중에서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성공회 등은 부르는 이름이
다르고 교리에 상이점이 있다 하여도 이천여 년
전 불현듯 나타나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예수라는 한 분을 따르는 종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 구성 비율은 인구의 삼분의 일
가까이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명목상 신자인
분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것도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처럼 명예와 천수, 때로
권력을 누린 것도 아니고 한창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안타까운 구도자일 뿐인데...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믿음을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그분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맹목적 신앙심으로는
그분을 구체적으로 고찰하기 어려워 이 글에서는
이성을 앞세운 다소 미심쩍은 시각으로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가 과연 누구인지 진정 구세주,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들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에 대한 기록
예수를 바로 알려면 지금 저희는 그를 만날 수도
없고 목소리를 들을 방법도 없어 결국 전해오는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 있나요. 성경과 외경, 성경
외의 전승, 역사서 등에 있습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고대사’와 타키투스의 ‘연대기‘ 등의
여러 역사서는 그가 실제 유대 땅에 살았던
지혜로운 사람으로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하더라도 그 기록들은 대강의 생애와
십자가 처형, 신적인 능력을 확인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행적은 쓰여 있지 않으며 성경 외의
다른 전승 등은 신빙성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록의 대부분은
신약 성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기독교의 경전이니 불신자가 볼 때
예수에 관한 성경의 내용이 과연 참될까 의심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 기록의 참됨
그러면 신약 성경에 기술된 예수에 대한 기록의
참됨 여부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참으로 난감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으라 하면
합리적이지 않지요. 그래 참됨을 검증하기 위해
거꾸로 사람들은 대개 어떤 경우 거짓을 전할까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거짓을 말할 경우 그
이유가 분명 있을 테지요. 특히 소소한 일상과
관련이 없는 사실을 왜곡할 때는 어떤 목적이
분명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권력을 추구하기도,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고도, 명예를 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사도들과
제자들, 초대 기독교 신자들을 돌아보겠습니다.
그들도 어쩌면 정치적 야망을 처음에 가졌을지
모르지만 십자가 형틀에서 예수가 돌아가실 때 그
모든 희망은 부서졌습니다. 또한 이후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끔찍한 박해와 순교의 길이었으니
그들이 세속 욕심으로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전했을 리 만무합니다. 오로지 예수에 대한
경외와 사랑, 확신으로 전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록에 뜻하지 않은 착오는 미소하게 존재할지
몰라도 의도적인 거짓은 절대 있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목격자들의 증언
예부터 재판에서 둘 이상의 증인을 세우게 한
것은 그 증언의 신뢰를 부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예수님 행적이 참된
기술이라면 다수의 목격자가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한 후로 늘
혼자가 아니셨고 모든 이적과 기적도 대부분
공개된 장소였으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다볼산 거룩한 변모 사건도 제자 셋을 동행하여
신성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즉, 기록된
대부분의 공생활 행적은 다수의 목격자가
존재했으며 주관적인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전승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공생활 이전의 탄생과 소년 시절은
추정하건대 성모 마리아의 말씀에 따라
기술되었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이 역시도
마리아나 저자가 정치 경제 사회적 욕심을 가진
분들이 아니고 또한 구술할 당시에는, 성경은
훗날 쓰였다 하여도, 그 내용을 증언할 수 있는
가까운 이웃들이 생존했으므로 검증을 거쳤을
것이며 결코 거짓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미화하려 했으면
공생활 이전 모두를 신비롭게 구술하였을 테지만
성장 과정 등은 극히 간단하게 언급했고 예수의
직업이나 출신에 대해서도 치장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차별성
사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각자
창시자가 있으며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신앙조차도 여럿으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예수를
단지 창시자의 한 분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는
다른 분들과는 확연히 차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탄생부터 공생활과 죽음, 부활까지 너무나
특별합니다. 마리아의 진술에 의존한다 하여도
남자 없이 태어난 성자, 종교 창시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모세는 하느님께 기적을 청하고
명에 의해 행한 예언자였고, 마호메트는 정치
종교 지도자, 석가모니는 고행과 깨달음의 성자,
공자는 도덕과 윤리의 현자라 일컬어지기는
하더라도 신적인 권능에 의한 이적과 기적을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병자의 치유,
소경의 눈 뜸, 벙어리가 말을 하고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이가 되살아났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일으키며 권위 있고
지혜로운 말씀도 풍성하게 전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예지 아니면 불가능한 역사였습니다. 또한
죽음은 더욱 특별했습니다. 종교 창시자 중 누가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습니까. 신적인 권위는
어디로 가고 예수는 십자가 수난과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 당시 명망으로 하면 혁명을
일으켜도 될 정도로 대중의 우러름을 받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성경에 의하면
순명하여 형벌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돌이켜 보면,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처음부터
희생적인 사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정도는 달라도 무언가 세속적 욕망으로
예수를 좇지 않았을까 합니다. 예언의 메시아는
압제와 지배로부터 민족을 해방시켜 주는 분이라
기대하였을 테니 제자들이 그러했다 한들 비난할
수 없습니다. 아니 당시의 희망으로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세상의 기대와는 다른 분이었죠,
그래서 바람이 도리어 저주가 되었나요. 기적과
이적으로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왕으로
모시려던 분이 도리어 받아들이기 난망한 언행과
함께 온몸 난자당한 불행한 모양으로 군중 앞에
서니 그들은 가차 없이 예수를 야유와 조롱
가운데 십자가 형장으로 보냅니다. 여기에서
다른 종교 창시자와의 큰 차이가 있고 세속의
시각을 벗어난 구도자의 모습과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적 완성이 드러납니다. 역설적으로 십자가
죽음은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든 타
종교와의 감히 좁힐 수 없는 격차를
만들었습니다. 즉, 죽음마저 받아들이는 희생 순종
사랑의 대종교 역사가 그의 죽음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죽음으로 다
끝났으면 이 신앙이 지금까지 면면히 전해져
내려왔을까요. 아마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세상인심은 누구라도 권력 앞에는 모이고 가난한
이에게는 등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따르던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기록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목격한 바처럼
부활하고 군중 앞에서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대중 앞에 명확하게 드러낸
사건입니다.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앞에서 단서를 달았듯 성경 기록이
복수의 증인들의 목격과 증언의 기술이라면 이
역시 진실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죽음과 부활, 승천은 예수 외에 누구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부활의 희망으로
고난도 축복이라 여깁니다.
예수와 제자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 수
있고 자녀들을 통해 집안의 혈통과 기질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을
고찰해보면 예수가 누구신지 또 그에 대한 기록이
참된 것인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 그들 중 사도들조차도 공생활 중 예수의
참모습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신성을 보았기에
도리어 정치적 열망과 기대도 커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행로는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한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예수의
참담한 죽음 이후 도리어 교세는 크게 확장되었고
세속적 욕망을 버리지 못했던 사도들이 완전히
변화되어 박해와 순교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습니다. 어느 누구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스승보다 더한 형벌도 감수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들을 죽음마저
받아들이는 굳센 믿음으로 이끌었을까요. 그것은
예수의 사랑과 죽음, 부활, 신성, 영생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보고 듣고
체험하였기에 믿을 수 있었고 성령의 이끄심에
의탁하며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와 제자들의 극적인
전교 활동과 순교를 보며 예수의 신성의 기록이
진실됨을 역으로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의 일생
예수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정리한
“예수성심”이라는 시(詩) 한 편을 인용하겠습니다.
예 수 성 심/서문원 바오로
태초 계시된 말씀 이루시려
정갈한 동정녀 택하실 때
마리아 어찌 두려움 없었을까
스치듯 지나가는 만 가지 상념
가만히 그녀 귓가 속삭였지
내 어머니시여, 용기 내세요
당신 한마디 세상 평화 달려있어요
사람의 몸 입어야 하니
열 달 기다림 당연해
그리해도 태중 날들
차라리 편안했다 하려나
다가올 시련들 예고하려는 듯
그 밤 공기 절기보다 차가운데
여린 등 눕힐 자리 하나 없어
여물 담는 구유 아기 누워
하늘임금님 땅에 오셔도
반기는 이들 목동들 뿐인가
그래 이는 시작일 따름이라
갑작스레 밀려오는 서러움
갓난 그분 눈물 터뜨렸나요
누추한 거처라도 엄마 품 안
젖먹이 아기 마냥 행복했는데
그마저 그분에게 사치라 여기시나
무죄한 아기들 원통한 죽음 뒤로
먼 데 이국땅 피난길 떠나야 했어
때가 되어 돌아온 내 나라
가난하고 소박한 살림이라도
부지런하고 솜씨 좋은 부모
어린 시절 성가정 행복한 터전이라
열두 살 되던 어느 해
엄마 속 무던히 썩였지
훗날 삼일 기다림에
비할 바 아니라 해도
아직 소년 아들 찾는 어머니 심정
어이 까맣게 타들어가지 않았으려나
자상한 아버지 요셉
뜻하지 않은 병고
이제 세상 떠나는가요
그의 신실하고 겸손한 믿음
근면 성실한 장인의 성품
사랑으로 부양하는 가장의 모범이여
요셉은 생전에 이미 성인이라
하늘나라 이름 새겨지더라도
모자람이 없구나 하느님 축복하시고
남겨진 모자 서로 의지하며
오손도손 두런두런 다정하게
동화 속 풍경처럼 지냈나요
그리하여도 사랑하는 어머니
언제까지 여기 머무르지는 못해
모진 마음 가슴 안고 떠나는 발걸음
그래도 얼굴은 살포시 미소 띠며
어머니 돌아올게요 인사드리누나
모래 흩날리는 너른 벌판 지나
맑고 깊은 물줄기 강가에 서서
회개하라 외치는 큰 소리여
주님 모습 멀리서 보고
이미 누구신지 알아봐
이제 시기가 이르렀는가
저는 당신 그토록 기다려
그 앞에 마주 선 하느님 아들
지극히 가난한 마음으로
죄 없는 분이 예식 청하시네
땅에 내려오셨으니 그 법 따라
본을 보이시려 흠 없는 주님께서
겸양된 모습 물로 세례 받으시고
몇 제자 따르거라 부르시며
혼인잔치 동행하시어
신랑 신부 축복하시나요
무르익는 잔치 급작스러운 근심
술이 동 났으니 혼주들 어이해
인정 많은 님 효성스러운 아들
어머니 바람에 물을 포도주 바꾸시고
당신이 누구신지 드러내셨어라
아, 고집 센 백성들 어떻게
하늘의 진리 가르칠까
쉼 없이 다니며 복음 전하시고
갖가지 이적과 기적으로
가난한 백성 위로하시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말씀
하느님 나라 설파하시는가요
하늘나라는 겨자씨 누룩이어라
썩어 싹 돋아 무성한 나무 자라고
삭혀야 부풀어 밀가루 빵이 되며
그리해 넓은 그늘 나그네 쉬고
수많은 새 무리 둥지 틀며
향기로운 음식 허기진 이들 달래나요
그처럼 하늘나라 넓히고
구원의 길 다지려니
누군가 희생 있어야
그래 내가 앞서 그 길 가련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살다 보면 시련 고통
무섭게 달려들더라도
내가 지고 간 십자가 되새겨
기어이 이겨내고 봉헌해
오직 하느님께 영광 되어라
아버지, 이미 각오한 형극이라도
십자가 고통 길 견디기 어려워
어머니 뒤따르며 가슴 미어지고
애처로이 보는 눈길 처량하구나
주여, 수난 십자나무
이리 원망스러워도
그로 천국 문 열리나요
순전한 사랑의 성심이시여
기어이 물과 피 다 쏟아
자비의 숨결 강물 되어 보내니
님이여, 어이 오시어
험한 세월 모진 고초
피하지 않으시는가요
하느님 손수 마련하신 동산
불순종 교만에 무너진 이상이여
이를 회복하려 대속물 바쳐야 해
완전한 희생제물 어디서 찾으려나
그리하여 하느님 아들 보내시고
사랑으로 고난 감내하셨는가요
그래 자녀들아, 향기롭게 살다가
그 영혼 순백 흰나리로 올라오너라
성부의 바람 강생한 나의 소망
누구도 잃지 않으려는 비원이라오
이렇게 보여주고 매달려도
의심 많고 강퍅한 심령들
열 명의 나병환자 나았는데
돌아와 감사드린 이 하나뿐
못 미더워도 사랑하는 자녀들
내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으려
하늘 영화 마다하고 또다시
값없는 빵 형상으로 내려온단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좁은 감실 기다리는
성심의 고뇌 짐작하느냐
외롭고 쓸쓸해도 곁에 머무를 수 있어
나는 진정 기쁘고 심장은 불타오른단다
이리 오너라 어서 오너라
내 품에 안겨 쉬고
아픈 이야기 호소하거라
나는 사랑과 자비의 성심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는
창조와 영겁으로 이어지며
에덴의 꿈 이루려는 주님이니라
지극한 사랑의 예수성심
끝없는 자비의 예수성심
애끓는 심장의 예수성심
원죄를 대신한 예수성심
대속을 청하는 예수성심
가시 깊게 박힌 예수성심
위로와 은혜의 예수성심
치유와 회복의 예수성심
은총의 보고이신 예수성심
성체성사 제정하신 예수성심
성체로 하나 되시는 예수성심
거룩한 미사 희생제물 예수성심
성령을 발하시는 예수성심
은사를 부어주시는 예수성심
굳센 신앙으로 이끄시는 예수성심
어머니를 세우신 예수성심
마리아 불러올리신 예수성심
성모님 아끼는 성심이시여!
저희 미천한 종 어떻게
님 마음 닮으려 하겠나이까
그저 작은 정성 기도 행함으로
어두운 감실 애절한 님의 마음
미소하게라도 위로가 되게 하소서
세상 여정 중에 당신 따르며
그 사랑으로 오롯이 살다
성심 안겨 죽을 수 있나요
그로 감사와 행복 넘쳐나겠나이다
세상의 군주는 지배하려 하지만 평화의 군왕은 다
내어줍니다. 이것이 성경의 기록이며 예수의
일생입니다.
예수와 예언서
글을 쓰며 예수에 대해서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그분은 특별한 능력과 감정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는
누구인가를 좀 더 파헤쳐보기 위해 그가 태어나기
전 유대민족이 염원하던 메시아에 대한 예언서의
기록을 조명하려 합니다. 이 과정도 예수의
실체를 이성과 지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리라 사료됩니다.
다만, 예언서의 내용들은 주관적 신적 계시를
기술한 것이기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예언서의 메시아가 예수를 통해 구현됐는가를
중요한 논점으로 삼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만약 그 예언들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그가
신의 계시로 예정된 인물이며 하느님을 믿는 종교
신학적 차원에서 고찰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구약성서 여러
말씀에 나타납니다. 한데 사람들은 여기서도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여 이사야서의 백미인
‘주님의 종’의 노래에 대해서는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압제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킬 메시아의 모습과 주님의 종의 고통받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고 그들에게 메시아는 정치적
군왕의 모습이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사야서는 누군가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고 그 모습은 예수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정말
전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만 올려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사 52, 13-15)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이사 53, 1-12)
한 구절 두 구절 정독하다 보면 신약성경 예수의
수난이 스치듯 교차되지 않는가요. 물론 혹자는
박해 때 계명을 지킨 유다인들이나 다른 선지자를
지칭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의 종 다른 세 노래를 전부 비교해서
읽어보면 그 성경 말씀의 예언은 예수에 대한
표현임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예수와 하느님
그러면 여기서 앞에 언급한 물음을 다시 꺼내어
이에 대한 답을 구해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정하시고 특별한 탄생을 통해 이 땅에 내려
보내신 예수의 신원은 진정 무엇일까요. 물론
믿음으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바로 하느님입니다.”라고 고백하면
복된 신앙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쉽게 수용하기는
어려운 믿음의 고백이지요. 그래서 또다시
살펴보려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일어난 기적과
이적은 그 당시 과학 기술과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사실 지금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그 사건들은 신적인 권능
아니고서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신의 속성을 감히 부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전지전능한 신의 권능입니다.
역으로 그 능력을 가진 이는 신의 육화라
가정해도 좋을 테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성서에
분명 말씀하셨듯이 신은 오로지 한 분뿐이므로
신성을 가진 예수는 신학적으로 하느님의 한
위격으로 설명이 되어야 맞을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로 이야기하자면 태양은 본체와 빛과 열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하나 되어 태양의 본질을
구성합니다. 이와 같이 이 글에서 깊이 다루지는
않겠지만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 보호자 성령
세 분은 각 위격으로 현존하시면서도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일치합니다. 그러기에 구약성경 여러
곳에 예언되고 수많은 기적으로 권능과 권위를
드러내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되신 예수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며 또한 하느님이라 할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1, 9-14)
지금까지 여러 관점에서 예수를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면 볼수록 그는 특별한 신적 권위를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순종과 희생,
완전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고 이를 통해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으며 힘이 아닌
사랑과 희생으로 세상에 빛을 주신 예언서 평화의
군왕이시고 진정 구원자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요한복음서 20장 2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편 생각해 보면
너무 많은 의구심은 도리어 복된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의문이 해소되면 열정을 갖고 믿음의 실천으로
굳세게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의심이 걷히자 즉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예수님께 엎드려
말씀드렸지요. 저희도 그런 확신에 찬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16, 15-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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