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은 그 양식면이나 주제면에서 볼 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개화기를 분기점으로 한 그 이전의 연극 양식과 그 이후의 연극양식이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은 개화기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 문화의 충격으로 전통적인 것이 뒤로 밀려나고 대신 서구적 문학형태가 이 땅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화기 이후 모든 문화예술은 서양적인 것을 받아들여 그것을 토착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해 왔다.
연극은 물론 미술이나 문학 ·음악 ·무용 ·건축 등 모든 예술양식이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여러 나라가 비슷했으며, 오늘날 제3세계로 일컬어지는 나라들이 그런 과정을 밟아왔다. 개화기는 각 나라마다 시기는 다르지만 자기의 전통문화를 뒤로 하면서 서양문화를 받아들인 초기를 말한다.
한국의 경우는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까지가 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화기 이전에 생성 ·발전했던 연극을 민속극 또는 전통극 ·고전극이라 부르고, 개화기 이후 서양문화의 영향 밑에서 형성되어 지금까지 연극의 주류를 이루는 것을 근대극 또는 신극(新劇)이라 부른다.
1. 한국의 전통극
사실 서양연극이나 한국연극, 더 나아가 동양연극은 다같이 원시적인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시작되어 무대예술로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서양연극과 동양연극과의 차이라면 서양연극이 종교의식에서 일찍 탈피하여 예술로 급속히 발전한 것이고, 동양연극은 오래도록 원시적 종합예술로 내려왔다는 점이다. 서양연극이 희곡을 바탕으로 한 인간중심적 무대예술로 발전한 것도 그 때문이고, 동양연극이 음악 ·무용 ·연극이 선명하게 분리되지 못한 채 제의적(祭儀的) 성격을 지니고 연희(演戱)되어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 하겠다.
이처럼 서양연극이 일찍부터 예술로 발전해 오면서 여러 문예사조의 과정을 겪게 되었던 데 반해 한국연극은 그러한 문예사조의 발전과정을 겪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한국연극사에는 고전주의극이니 바로크극이니 낭만주의극이니 하는 것은 없고 다만 개화기 이후에 서양에서 2000여 년 동안 밟아온 연극 유산을 한꺼번에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것을 일컬어 신극 또는 근대극이라 한다.
그리고 개화기 이전의 한국연극은 고급예술로 다듬어지지 않은 채 세시풍속의 민간예능으로 연희되어왔기 때문에 민속극이라는 명칭이 붙기도 한다. 이러한 한국의 고전극도 표현양식이 여러 가지란 점에서 특이하다. 속칭 탈춤이라 불리는 가면극을 비롯하여 꼭두각시놀음이라 일컬어지는 인형극과 그림자극[影繪戱], 그리고 판소리 등 네 종류나 된다.
판소리는 또 개화기에 창극(唱劇)이라는 연극양식을 파생시켰으므로 고전극은 사실상 다섯 종류가 되는 셈이다.
가면극은 명칭 그대로 가면을 쓰고 춤을 추면서 하는 연극양식이다. ‘서낭굿’과 같은 원시제의에 태반을 두고 서역(西域) 계통의 가면희(假面戱)를 받아들여 삼국시대에 형성된 가면극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승된다. 물론 오늘날 전승되는 가면극이 삼국시대의 것과 같은 것은 아니고, 그 내용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완전히 정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가면극은 산대도감(山臺都監)이라는 관청의 후원을 받았으나 후기에 와서 외침과 내정 등에 의해 왕조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각 지역의 민속예능으로 정착했던 것이다.
가면극의 명칭 앞에 반드시 지역의 이름이 붙은 까닭도 그 때문이다. 가령 현전하는 가면극으로서 산대도감 계통으로 경기형(京畿型) 양주(楊州)별산대놀이, 송파(松坡)산대놀이라든지, 해서형(海西型) 봉산탈춤, 강령(康翎)탈춤, 은율(殷栗)탈춤, 그리고 영남형 통영오광대(統營五廣大), 고성(固城)오광대, 가산(駕山)오광대와 동래야유(東萊野遊), 수영(水營)야유 등이 그렇고, 하회(河回)별신굿놀이, 북청(北靑)사자놀음, 강릉(江陵)가면극 등 비(非)산대도감극 계열도 마찬가지로 앞에 지명이 붙은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가면극이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어오면서 지역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고, 따라서 근본 바탕은 같아도 가면의 모양새나 춤 ·대사 등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대체로 중 ·양반 ·천민 등 조선시대를 대표할 만한 2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각 지역의 가면들은 전국적으로 270여 가지나 된다. 이러한 가면은 그 하나하나가 드라마의 기능을 하는 만큼 당시대의 생활감정을 잘 표현해준다. 한국 가면은 이웃나라 가면들과는 달리 질박하고 인간적이며 자연미를 풍긴다든지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며 낙천적인 표정을 지녔다.
한국 가면은 대표적인 하회가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탈속(脫俗)의 초월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점은 내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에피소드식으로 구성된 가면극은 노장(老長)과장으로 일컬어지는 종교(불교)극적 주제와 양반과장인 사회문제극적 주제, 그리고 미얄할미과장이라는 가정극적 주제로 나뉜다. 노장과장은 한국인의 종교관 및 세계관의 표현이고 양반과장은 사회정치관이며, 미얄과장은 남권우위(男權優位) 가정관의 표출이다.
수도 승려의 환속 ·파계는 성속(聖俗) 갈등의 현세주의적인 한국인의 내세관과 함께 영원무애(永遠無涯)의 초월사상을 표현한 것이고, 양반과장은 조선 후기의 정치 부패와 가치관의 전도, 사회계층의 붕괴를 희화화한 것이며, 미얄과장은 처첩간의 갈등을 통해 봉건시대의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비판한 것이다. 특히 세번째 주제인 미얄과장은 조강지처가 젊은 첩에게 패배하는 이야기여서 비극적인 냄새도 없지 않지만 그것은 희극 구조상의 풍자와 멜로드라마라는 양쪽 날개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가면극은 희극구조로 되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미얄과장은 봉건시대의 남권우월사상과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풍자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뛰어 넘어 사랑과 결혼, 삶과 죽음 등도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한다. 이처럼 가면과 가면극 속에 줄기차게 흐르는 것은 권세라든지 명망(名望) ·재물 ·사랑 등도 물거품처럼 우스꽝스럽다는 것이고 죽음과 종교, 심지어 삶 자체까지도 한 바탕의 폭소거리에 불과하다는 영원무애의 초월사상인 것이다.
그만큼 가면극은 극히 어두웠던 봉건시대에 민중의 삶과 꿈을 표출했고 살아가는 데 있어 감정을 해소시켜주는 생존철학이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존의 지혜 구실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꼭두각시놀음으로 불리는 인형극도 예외가 아니었다. 꼭두각시와 더불어 박첨지(朴僉知) ·홍동지(洪同知)가 주역 구실을 하는 한국의 민속인형극을 박첨지놀음 또는 홍동지놀음 등 주인공의 이름을 붙여 여러 가지로 부르기도 한다. 꼭두각시놀음의 기원에 관해서도 몇 가지 이설(異說)이 있지만 대체로 대륙전래설이 지배적이다. 독일의 연극학자인 피셸이 인형극의 본고장을 고대 인도로 밝히고, 거기에 살던 집시족이 처음 시작했다는 주장이 정설처럼 되어왔으나 근자에는 중국발생설도 나왔다.
그러므로 인도와 중국에서 각각 발생했는데 중국인형극이 인도인형극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이다. 가령 인도 집시들이 인형극을 ‘kuki’ 또는 ‘kukli’라 불렀고, 중국에서는 괴뢰(傀儡)라 불렀는데, 인도인형극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첫음절 ‘kuk’이 ‘kwak(郭)’으로 전음(轉音)되고 주인공이 대머리라 하여 독(禿)자가 붙음으로써 ‘곽독(郭禿)’이 되고, 그것이 고구려에 전래될 때 꼭두로 되었으며 다시 일본에 전해져서 ‘구구쓰(クグツ:傀儡)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꼭두각시는 꼭두의 젊은 처라는 뜻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꼭두각시놀음이 오늘날과 같은 형식과 내용을 갖춘 것은 대체로 고려시대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이규보(李奎報)의 관극시(觀劇詩)에 인형극 내용에 대하여 그렇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꼭두각시놀음도 가면극과 비슷한 주제를 지녔지만 가면극과는 달리 박첨지라는 한 가족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면서 박첨지의 일대기(一代記)를 에피소드식으로 엮은 것이다. 극본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10막의 황해도 장연본(長淵本)이고 다른 하나는 8막으로 구성된 서울본이다. 또 어떤 연극인은 박첨지마당과 평안감사마당의 2부로 나누기도 한다. 주인공 박첨지는 가정을 버리고 방랑하는 유랑예인(流浪藝人)이다. 그는 첩을 얻고서도 자기를 찾아다니는 본처를 만난다. 그러나 다시 처와 첩을 버리고 방랑하다가 온갖 고난을 다 당한 후 절을 짓고 허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내용으로 볼 때, 꼭두각시놀음도 어두운 봉건시대의 삶의 실상과 꿈, 그리고 구원문제를 다룬 것인데, 탈현실(脫現實)의 초월사상이 전체를 지배한다.
이처럼 꼭두각시놀음도 봉건사회의 가족윤리로부터 정치부패까지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세속적 삶의 허상과 덧없음을 인형이라는 환상을 통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패가 가지고 다니던 여러 레퍼터리 중의 하나로 외국에서도 유랑예인들이 하는 것이 특징이다. 크기 20 cm 가량의 인형이 20여 개 등장하는 꼭두각시놀음은 가설무대를 만들고 공연을 갖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인형극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림자극이 있었다. 1920년대까지 사찰을 중심으로 연희되던 그림자극이 중동과 동남아시아 일대에서는 아직도 중요한 고전극 장르로 존재한다.
주로 십장생(十長生) 등 동물이 많이 등장하는 그림자극은 ‘운심게작법’이라는 승무(僧舞)와 화청(和請)이 특색이다. 세속의 영화 모두가 별것이 아니라는 불교적 주제를 담고 있는 그림자극은 가죽으로 만든 인형을 막에 비춰서 연희하는 것으로 ‘만석중놀이’라고도 불렸다.
이상과 같은 연극양식과 다른 음악극형식으로 판소리가 있다. 판소리 양식에 대해서는 서사문학(敍事文學) 또는 음악 등 여러 주장들이 엇갈리지만 그것이 개화기에 창극(唱劇)을 파생시킨 점이라든지 작품의 구조, 운문적인 문장 등으로 볼 때 연극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판소리의 구성요소 중에 발림(연극적 동작)과 고수(鼓手)의 역할로 보아서도 연극임이 분명하다.
판소리의 기원에 대해서도 한두 가지 주장이 있지만 무의(巫儀) 기원설이 유력하다. 무가로부터 시작된 판소리는 각종 민요 ·잡가 ·속담 ·양반가사까지 받아들이고 불교음악 등 민속음악을 통합함으로써 민족예술의 결정체처럼 된 것이다. 창자(唱者)와 고수의 2인극 형태인 판소리는 창 ·아니리(사설) ·발림 ·추임새 등으로 구성되지만 역시 소리가 주조를 이룬다.
18세기 이전에 이미 완벽한 음악극 형식으로 정립된 판소리는 열두 마당이 전래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신재효(申在孝)에 의해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의 여섯 마당으로 재정리되었다. 재정리 과정에서 도태된 것은 대체로 노골적이고 외설적이며 저속하다고 생각된 작품들이다. 높은 음악성과 예술성 때문에 사회계층을 초월해서 가장 폭넓은 관객층을 확보했던 판소리도 개화기를 맞아 심한 변화를 겪었다.
2. 신연극의 여명기
한국 고전극의 한 표현양식인 판소리는 중국 ·일본 등 주변 국가의 세력과 함께 들어온 외국 연극양식의 영향을 받아 창극이라는 또 다른 연극양식을 파생시켰다. 즉, 19세기 말 청(淸)나라 사람들이 서울 청계천변에 상가(商街)를 이루어 극장인 청국관을 지었고, 그 곳에서 경극(京劇)이 자주 공연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강용환(姜龍換) 등 명창들은 1902년 처음으로 연희장 협률사(協律社)가 황실에 의해 지어지자 판소리의 분창(分唱) 실험을 했고, 결국 1908년 원각사(圓覺社)가 되면서 원근산천의 간단한 무대장치까지 갖춘 창극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이는 신식 바람에 따른 것으로 판소리 명창들의 고육책으로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처음 《춘향가》 등 재래 판소리를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창극화한 명창들은 차차 새로운 레퍼토리를 찾게 되었고, 그 하나가 《은세계(銀世界)》(이인직 작)라는 신연극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극운동도 일본의 병탄에 따라 순탄치 못했고, 결국 원각사가 폐관됨으로써 지방의 유랑창극단으로 전락하였다. 그리하여 창극의 자리는 자연히 일본 세력과 함께 들어온 신파극(新派劇)이 차지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정치극으로 시작된 신파극은 군사극과 탐정극을 거쳐 가정비극으로 굳어진 일본식 멜로드라마이다. 권선징악과 감상주의를 주조로 한 신파극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08~09년 사이지만 그것은 서울의 일본거류민을 상대로 한 공연이었다. 따라서 한국사람이 일본신파를 본떠서 처음 시작한 것은 11년 12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활동부터였다. 일본 신파를 그대로 답습한 임성구 일행은 《불효천벌(不孝天罰)》을 창립공연으로 가진 이후 10년대를 신파극시대로 만들었다. 임성구의 혁신단 이후 윤백남(尹白南)이 문수성(文秀星)이라는 신파극단을 창립했고, 이기세(李基世)도 유일단(唯一團)을 조직했지만 혁신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신파극단들은 계몽주의를 내세웠지만 그들의 예술의식은 저속했고 전근대적이었다. 감상적인 일본신파를 한국식으로 조금 변형시켰을 뿐이다. 일본 신파극의 인기 레퍼토리를 한국식으로 번안한 《장한몽(長恨夢)》 《쌍옥루(雙玉淚)》 같은 사랑과 의리 ·인정 ·이별 등의 주제를 지닌 작품이 풍미하였다. 이러한 감상적 작품들은 당시 나라를 빼앗기고 슬픔에 젖어 있던 대중에게 크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저질 신파극도 3 ·1운동 이후부터는 급속히 퇴조하였다. 일본에서 근대문예를 공부한 유학생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그보다 광범위한 민족자각운동이 일어나면서 연극도 서구 근대극의 형식을 도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의리나 인정과 같은 전근대적 감정에 연극이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사회변혁에 기여하는 연극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20년 봄 김우진(金祐鎭) ·홍해성(洪海星) ·조명희(趙明熙) 등 도쿄[東京] 유학생들은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서구 근대극 연구를 시도했고 그 이듬해에는 동우회순회극단(同友會巡廻劇團), 또 한 해 뒤에는 형설회(螢雪會) 순회극단과 갈돕회 등이 탄생하여 전국을 순회하는 학생극운동을 벌였다.
3. 토월회 이후 암흑기까지
한국연극은 각지에서 아마추어 극단들이 수백 개나 등장하여 미숙하나마 연극을 통한 민족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이러한 아마추어 연극운동은 20년대 상반기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박승희(朴勝喜)가 주도했던 토월회(土月會) 같은 극단도 당초의 출발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아마추어 단체였다. 결국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우진 같은 탁월한 연극인도 탄생할 수 있었다. 김우진은 비록 30세에 자살하고 말았지만 표현주의극(表現主義劇) 이론을 소개하고 동시에 희곡으로 실험까지 했으며 선구적인 연극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대적 연극정신은 30년대에 들어서 극예술연구회라는 본격적 근대극 단체를 탄생시키게 된다. 유치진(柳致眞) ·서항석(徐恒錫) 등 해외문학파 10명은 윤백남 ·홍해성 등 중진 연극인과 함께 본격적인 신극운동을 벌이기 위해 극예술연구회를 만들었고, 실제로 만 8년 동안 서양 근대극을 이 땅에 이식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유치진이 《토막(土幕)》 등 사실주의 희곡을 씀으로써 희곡문학의 기틀을 잡아놓았다. 이광래(李光來) ·함세덕(咸世德) 등의 극작가들도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30년대는 또한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인 동양극장(東洋劇場)이 설립되어(1935) 유랑극단화된 신파극을 이 땅에 정착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극이 대중적인 신파극과 서양 근대극을 계승한 번역극 위주의 본격 신극으로 분명하게 갈라진 시기도 바로 30년대였다.
그러나 40년대 들어와서는 연극계가 일대 혼란으로 빠져들어갔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모든 연극을 ‘국민연극’이라는 이름 아래 국책화(國策化)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일본어극을 강요하면서 모든 연극행위를 어용화(御用化)하였다. 극작가들이 어용극을 많이 쓰는 등 한마디로 암흑기였다. 30년대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저항적인 작품을 썼던 작가들도 대부분 국민연극 활동을 한 치욕의 시기였다.
4. 조국광복과 한국전쟁
한국연극은 8 ·15광복과 더불어 재빨리 활동을 시작한 예술운동의 하나였지만, 그것은 좌 ·우익 연극으로 분열되었다. 20년대 중반부터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주창한 일부 연극인이 있었지만 식민지시대에는 큰 역할을 못했다. 그러나 8 ·15광복 후 사회가 좌 ·우익으로 양분되면서 연극도 마찬가지로 분열되어 심한 혼란을 겪었다. 다행히 정부가 수립되면서 좌익연극인들의 주류가 월북함으로써 연극계는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었다.
더구나 50년 처음으로 국립극장이 설립되어 우익 민족극은 오랜만에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즉, 39년 극예술연구회가 해체당한 지 8년 뒤인 47년에 극협(劇協)으로 계승되었다가 국립극장 전속의 신협(新協)으로 화려하게 신극정신이 되살아난 것이다.
극장장인 유치진의 후원 아래 이광래 ·이해랑(李海浪) ·김동원(金東園) ·박상익(朴商翊) ·김선영(金鮮英) 등 대표적인 연극인 14명으로 구성된 신협은 개관공연으로 《원술랑(元述郞)》(유치진 작)을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민족연극예술의 수립과 창조’란 기치를 내걸고 순탄하게 출발한 신협도 곧이어 일어난 6 ·25전쟁으로 제2회 공연을 끝으로 국립극장 전속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8 ·15광복 직후, 정통적인 신극은 한때 크게 상처를 입었지만 상업주의적인 신파극과 그 아류인 악극(樂劇)은 대단히 번성하였다. 수십 개의 극단들이 난립하면서 대중을 사로잡았지만 그 중에서도 김춘광(金春光)이 주도한 청춘극장과 성광현(成光顯)의 황금좌(黃金座)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리고 신청년과 같은 중도적인 극단도 꾸준한 활동을 벌였다.
그런데 혼란기에 크게 번성했던 상업극도 6 ·25전쟁을 겪으면서 급속히 쇠퇴해갔다. 부산 ·대구 등 피난지에서 이들의 활동이 미약했던 반면, 신협이 단연 연극계를 주도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신협은 부산을 본거지로 6 ·25전쟁 중에도 여러 편의 셰익스피어극을 꾸준히 상연하는 등 연극사의 명맥을 이었고, 수복 후 즉시 환도하여 파괴된 서울에서 연극활동을 재개하였다. 국립극장도 피난지 대구에서 존속하다가 56년 환도했으나 신협과는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만큼 신협이 독무대를 이루었고, 또 신협은 미국문화의 영향으로 브로드웨이 스타일의 연극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통해 아서 밀러, 노트, 윌리엄스, 오닐 등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리얼리즘을 주조로 하는 《신협》이 독주하자 대학극 출신의 차범석(車凡錫) ·최창봉(崔彰鳳) 등 신예들이 ‘현대극의 실험과 형상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56년 제작극회(制作劇會)를 출범시킴으로써 연극계는 차차 새로운 판도를 만들어나갔다.
특히 58년 처음으로 소극장 원각사가 개설되면서 소극장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원방각(圓方角) 등 몇 개의 극단들도 다시 생겨났다. 그러나 원각사가 2년 만에 소실(燒失)됨으로써 군소 극단들은 발판을 잃었고, 따라서 연극계는 전후의 폐허 위에서 삭막해졌다.
5. 세대교체와 다양한 전개
한국 연극은 4 ·19혁명과 5 ·16군사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은 싹트고 있었다. 60년대 초반, 대학극 엘리트들인 이낙훈(李樂薰) ·김의경(金義卿) ·김동훈(金東勳) ·허규(許圭) 등이 동인제 극단인 실험극장을 탄생시켰다. 또 차범석이 극단 산하(山河)를 발족시켜서 동인제 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관객층이 엷고 전쟁 직후의 경제난으로 연극계는 계속 격심한 불황을 겪었다. 다행히 유치진이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62년 현대적인 전용극장 드라마센터를 설립하여 ‘민족연극의 재건’을 내걸고 연극인들을 집결시킴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드라마센터는 연극진흥을 내걸고 《햄릿》으로 화려한 개관공연을 했지만 그것도 역시 재정난으로 1년을 못 버티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드라마센터는 연극학교로 발전해갔으며 연극의 중심은 다시 국립극장 무대로 옮겨졌다. 마땅한 공연장이 없었으므로 뒤이어 나타난 민중극장 ·광장 ·가교(架橋) ·여인극장(女人劇場) ·자유극장 등 동인제 극단들은 봄 ·가을 국립극장에서 번역극 위주의 공연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전속극단까지 두고 있었던 국립극장이 대관(貸館) 극장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60년대는 6 ·25전쟁으로 파괴된 연극계의 재건기로 신예 극작가가 많이 배출된 시기였다. 노경식(盧炅植) ·이재현(李載賢) ·윤대성(尹大星) ·오태석(吳泰錫) 등 10여 명이 바로 그들이다. 차범석과 오영진(吳泳鎭) ·하유상(河有祥) ·이근삼(李根三) 등이 있었던 희곡계에 재능 있는 신인들이 가세하여 창작극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이 시기의 희곡으로는 차범석의 《산불》, 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 박조열(朴祚烈)의 《토끼와 포수》, 천승세(千勝世)의 《만선》, 하유상(河有祥)의 《미풍》 등을 들 수 있다.
연출가로는 이기하(李基夏) ·허규 ·김정옥(金正鈺) ·임영웅(林英雄) ·표재순(表在淳) 등이 배출되었다.
번역극도 미국 작품 위주에서 벗어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극작가들에게 많이 의존했고 이오네스코 ·베케트 등 부조리(不條理)연극 작가들도 소개되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젊은 극작가들도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서사극 ·부조리극 등을 실험하였다.
70년대에 들어와 ‘우리 연극’ 부재에 대한 반성이 싹트기 시작하여 가면극 ·판소리 ·인형극 ·굿 ·제의 ·전승연희 등이 복원되고 본격적인 확산을 보였다. 오영진(吳泳鎭) 작 허규 연출의 《허생전(許生傳)》, 최인훈(崔仁勳) 작 김정옥 연출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 《달아달아 밝은 달아》 등은 한국 연극의 한 획을 그었다. 또한 오태석(吳泰錫)은 《초분》 《태》 《춘풍의 처》 《물보라》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미국에서 새로운 기법을 배우고 돌아온 연출가 유덕형(柳德馨) ·안민수(安民洙)의 결정적인 역할로 큰 반향을 보였다. 유덕형은 미국에서 동작 중심의 실험극을 도입하여 작가와 연출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민속과 고전문학에 소재 원천을 두는 희곡을 창작하게 하는 동시에 가면극 ·판소리 등 고전극의 기법을 현대극에 응용해보는 실험극운동도 낳게 되었다.
이 무렵에 이강백(李康白) ·윤조병(尹朝炳) ·이현화(李鉉和) ·이반(李盤) ·장소현(張素賢) ·김의경 등은 한국연극을 다양한 세계로 전개시켰다. 앞서 서술한 작품 외에 노경식의 《달집》, 이재현의 《포로들》, 김의경의 《남한산성》, 윤대성의 《출세기》, 허규의 《물도리동》을 들 수 있다. 새로운 연출가도 대량으로 탄생하였고, 연극인의 양적인 팽창이 두드러진 현상이다. 따라서 73년 장충동에 국립극장, 78년 세종문화회관이 건립되고, 실험소극장 ·창고극장 ·세실극장 ·공간사랑 등 소극장이 잇달아 출연하였다.
극단으로는 산울림 ·민예극단 ·현대극장 ·뿌리 등이 창단되었다. 허규의 민예극단은 김희창(金熙昌)의 《고려인 떡쇠》로 그 첫 공연을 장식하여 한국 고유의 연극을 뿌리내리게 하였다. 소극장이 늘어나면서 공연도 소극장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70년대 중반 실험극장의 《에쿠우스》(피터 셰퍼 작) 공연이 연극사상 최장기 기록을 수립하는 등 연극 붐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때의 연극 붐도 79년 10 ·26사태 이후 급속히 냉각되었다. 경제난과 함께 대학생 위주의 관객층이 사회개혁 이후 극장과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국연극의 기반 이 취약하고 또 직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6. 80년대 이후
한국연극은 1987년 6 ·29선언으로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가 완화되고 공연금지 작품들이 해금되자 박조열의 《오장군의 발톱》 등이 공연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그동안 대학가에서만 성행하던 마당극이 연극계로 확대되어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 ·공격 ·풍자로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소극장의 증가와 작품의 대량화는 오히려 연극의 왜소화 ·저질화 ·상업화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한편, 81년 문예회관 건립을 비롯, 호암아트홀 ·동숭아트센터 ·계몽문화센터 ·롯데월드예술극장 등 대극장이 개관하는 등 80년대의 한국의 연극계는 한마디로 풍요로운 해였다. 81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3세계연극제, 88년 올림픽문화축전 등을 통해 연극도 국제적인 개방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B.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1988), 말리극장의 《벚꽃동산》(90), 유고자파트의 《햄릿》, 일본의 노[能], 가부키[歌舞伎] 등을 접할 수 있었다.
한편, 극단 산울림은 《고도를 기다리며》로 국제무대에 진출하여 89년 아비뇽 페스티벌, 90년 더블린 연극제에서 극찬을 받기도 하여 한국연극의 위상을 높였다. 산울림의 《목소리》도 돋보였다. 90년대에 들어와 민예극단의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기국서의 《햄릿 5》, 농촌문제를 다룬 극단 성좌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가 화제작이였다. ‘연극 영화의 해’인 91년에는 여러 행사가 있었고, 조일재의 《병자삼인》, 유진오의 《박첨지》, 함세덕의 《동승》 등이 ‘한국 현대연극의 재발견’이라는 기치 아래 공연 ·시도되었고, 브레히트의 《하얀 동그라미 재판》이 다섯 연출가의 각기 다른 시각에 의해 초연되기도 하였다. 또 극단 까망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연 3년의 공연을 세우기도 하였다.
93년의 특색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심스러운 시도였다. 극단 자유와 오태석 ·이윤택이 이러한 실험을 선도해 나갔는데, 예를 들면 《햄릿》 《백마강 달밤에》 《홍동지는 살아 있다》 《바보각시》 등이다. 94년 ‘실험극 관점 94’는 6명의 젊은 연출가들이 모여 《세월이 좋다》 《가면 마임게임 햄릿》 《비디오 천국》 《황순원의 소나기 그리고 그 이후》 《파노라마》 등 다양한 작가의 세계를 선보였다.
‘오태석 연극제’는 자신 있는 극작가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심청이는 왜 두번 임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비닐하우스》 등으로 다양한 작가의 세계를 선보였다. 이 해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프랑스의 무언극 배우 M.마르소의 내한공연이다. 78년에도 내한한 바 있는 그는 독특하고 원숙한 팬터마임 기량으로 보는 이를 매료시켰다.
한국연극계는 고무적인 실험과 연구로 우리 고유의 연극예술을 정립하려 노력하고 있다. 연극을 살리려면 우선 연극 자체가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을 지녀야 한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가면극이나 인형극 ·판소리가 노래와 춤, 그리고 시대반영의 심오한 내용으로 대중의 불만 해소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즐거움과 꿈을 주었듯이 오늘의 한국연극도 이 시대 대중에게 걸맞는 연극양식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