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관한 시모음 23)
설날 아침에 /백무산
그믐날까지 연 사흘 눈 내리더니
설날 아침엔 개었다가 흐리다
지붕마다 눈 녹아 처마에 고드름 달고
빈 무밭에 까막까치
깜장 발자국 찍어댄다
새벽 어둑서니에 마당 쓰는 소리 잠을 깨우고
집집이 못 보던 신발들 섬돌이 좁다
어느 찢어질 가난인들 섬길 이 없을까
아랫사람 만나서도 옷깃 여민다
아재 아인교, 고샅길에서
이기 누고 당산 앞에서
욕봤데이, 그래 객지서 욕봤데이
뒷산도 눈을 털고 그래그래
앞강도 뽀얀 얼굴로 오냐오냐
예전엔 내가 저 풍경 속에 있더니
언제부턴가 풍경을 벗어났네
아무래도 나는 다시 저 풍경으로 가려네
내가 담긴 풍경을 내가 보고 살 궁리 하나
설날 아침에 작정을 하네
설날 아침 /강보철
우직하게
논 갈고 밭 갈았지만
손바닥 바람에 흐트러지는 쭉정이
상처투성이 해넘이인가
벌겋게 솟는 햇살 등에 태우고
검은 호랑이 어슬렁어슬렁 꼬리 흔들며
어흥!
갑갑한 가슴 '뻥' 뚫리려나
아침을 깨우는 까치 소리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그리움
두근두근 눈길은 먼발치로....
잘 있으면 됐다.
세뱃돈 /염경희
도둑이 오려나 보다
새벽까치 노래하고
주홍빛 햇살은 거실에 눕는다.
딩동, 뎅 동~
강아지 여덟 마리가
우리를 휘 집어 놓는다.
영혼은 가출하고
기둥뿌리 들썩이는 설날
쌈짓돈마저 술술 풀어 놓는다
설날의 마음 /주선옥
물보다 낮고 은근하게
바다보다도 깊게
더 넓게 흘려 보내야 합니다
채송화보다 가련하게
백합보다 순결하나
수선화처럼 고결하게
사람보다 위에
사람보다 아래
저 비둘기의 생명도 무겁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벼이 보고
누군 누구를 우러러보고
귀한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삼백예순날의 첫날
그 하룻날의 첫 마음이
정화수 처럼 맑게 고였다가
마음 고단한이 만나거든
가는길이 멀어 외로운이 있거든
향기로운 우담바라 함께 피워요.
그 시절 정월 초하루 /최이천
백지 같은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날
푯대를 세우고 각오한다.
거지도 얻어먹지 않겠다고
동냥을 안 하고 노름꾼도
손을 씻쳐 끊으며
과거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집안 어르신,
마을 어르신께 세배하러 간다.
형제들 먼저 종갓집 찾아가고
또래들 만나 동네 어르신
찾아 단이며 세배하며 덕담 들었다
아련한 추억 속 보물들이
내 속에서 눈을 깜박여
누군가를 찾는다
개구쟁이 나에게
깍듯이 당숙님 오시야고
인사하던 종갓집 질부님
따뜻한 떡국과 다과상을
내오시던 그 모습이 영화같이
머릿속에 상영됩니다
그 앞에서 장난기가 사라지고
의젓해지고 싶어 마음을 꼭꼭
누르던 내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어 봅니다
설날 /이남일
하얗게 해를 넘긴 설날은
꿈꾸는 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보고 있는 꽃보다
보고 싶은 꽃이 더 예쁜 것처럼
주고받는 덕담들이
온통 꿈을 기다리는 소망 같습니다.
설날이 설레는 것은
꿈을 채우는 기쁨보다
고난을 이기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설 /이원문
눈 내려 하얀 세상
그런 하얀 설이었는데
몇 날 며칠씩 기다렸던 설이었고
먹고 싶던 흰 가래떡에
조청 엿 강정 다식
뻥튀기는 없었나 뻥튀기도 튀겼고
옷 양말도 새것으로 갈아 신고
아껴 두었던 신발도 새것으로
세배 돈 얻으려 세배도 다녔었는데
뻥튀기 한 줌 쥐고 동네 한 바퀴
옷 자랑 신발 자랑 언제 해볼까
이웃 친구에게 내 옷 만져 봐라
썰매 타는 재미 누가 빨리 달리나
살얼음 깨어져 물에 빠졌었고
성냥 딱지 비벼가며 겨우 피운 모닥불
그 모닥불 얼마나 따뜻했나
옷 양말 태웠다 부지갱이 춤추던 날
초가의 그 하얀 설 까치에게 그려준다
구정 /정민기
귀향길에 오른 철새들의 날갯짓
시린 하늘 물에 놀라서 펄럭거리고 있다
할 일 없이 그냥 하늘가에 서서
우화처럼 그가 해를 던져 물수제비뜬다
햇살 꽃 활짝 피어 꿈인 듯 어리둥절해
두 사람은 흘러가는 세월 반주 삼아 노래 부른다
지친 듯 차가운 후렴은 훌쩍 떠나가고
오랜만이라서 잘못 든 골목길에 가로등처럼 서서
아직 빛이 없어 어두운 눈동자를 굴리고 있다
한숨 섞인 입 모여드니 온기가 전해지고
어느새 미지근한 그리움 한 장 낙엽처럼 바스락거린다
빈 마음이라도 덜컹거리며 굴러가는 바퀴 같으니
잔칫날처럼 참새들의 집은 밤늦도록 시끌벅적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처음 마주한 떡국 한 그릇,
겨울 햇빛 받아놓기가 바쁘게 구멍이 난 듯
새어 나가는 바람에 다시 줄다리기하듯 끌어당기고 있다
털실 뭉치로 만든 것 같은 눈사람이 마중 나온
고향 가는 길목마다
낙엽들의 환호성이 바스락바스락 들려온다
설날은 /정심 김덕성
멀리 떠났던 자녀들
귀염둥이 손자들 선물꾸러미 들고
보란 듯이 우시되며 찾아오네
잃었던 사랑 되찾은 듯
집집마다 따듯한 사랑의 웃음꽃 피고
마을은 물론 온 나라 구석구석
훈훈한 사랑 꽃이 피네
온가족이 모여 정 나누며
부모께 감사와 효심의 세배 올리고
부모는 둥근 사랑으로 품어주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라네
한상에 들러 앉아
대소大笑하며 설음식 나누며
부모님 계셔 행복합니다
너희들 있어 든든하구나
훈훈하게 화답하는 우리 집
얼씨구 좋네 설날일세
설날 아침 /장희한
잎이 다 떨어진 가지 끝에 봉긋이 맺힌 아목
머문 듯 가만히 있어도
포르라니 달라져 보이는 건 내 눈의 시각 차인지 몰라도
벗고 준비하는 나무처럼
설날 초하루
무엇을 다짐해 보는 마음 해마다 있어도
크게 한번 이룩해 보지 못하는 건 웬일일까
한평생 살아오면서 계획하고 실행해 보지 못하는
그런 삶
돌아보는 마음인들 없었으면 어쩌나 하지만
또 오늘 같은 날
아목처럼 맺고 필 것이라 다짐하고 다짐 한다
타향의 설 /이원문
날마다 그믐의 마음
누가 아는 그 마음이고
맞이 해야 할 설인가
한 잔 술에 담긴 고향
눈시울에 노을진다
보리밭에 숨은 동무들
모두 모두 다 잘 있고
짧은 그날 긴 옛날
성황당 길 우리 동네
달라진 것은 없는지
마음 굳혀 떠나온 날
다시 본 나의 고향
십 년 하고도 서너 해
고드름에 매달리니
마지막 뒷산 길 오늘도 저문다
설날 /하영순
설은 年始 元旦 年頭
한 해의 시작을 말합니다
年頭에 먹은 마음
섣달그믐까지 변함없기를 다짐해봅니다
지난 한 해 그 많은 아픔 속에
오늘이 있음이 감사입니다.
365일
재해 없는 삶을 원합니다
받아서 무거운 마음보다
비워서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기적이며 행운입니다
설은
덜 익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글지 못한 인생
뉘우치고 반성하면서 영글고 싶습니다
정초에 먹은 마음
흐트러짐 없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癸卯年 원단에
설날 추위 /鞍山백원기
산성 고갯길은 춥기에
겹쳐 입고 문밖을 나선다
햇볕은 전등 알처럼 따뜻한데
바람은 쌀쌀맞다
코가 시리고 귀가 시리고
입술이 덜덜 떨린다
기다리던 구정 설날
봄도 멀지 않으리
아랫목처럼 따뜻하게
오손도손 가족 온정
구름아 햇볕 가리지 말고
바람아 멈추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