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남북한 통틀어 20세기 최고의 국(언)어학자 중 한 명”
분단시대 한 지식인의 신산한 삶과 걸출한 성취
왜 지금 언어학자 김수경인가
어쩌다 북한 인사들 또는 북한 언론을 접할 때면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로동당(노동당), 력사(역사), 리론(이론) 등의 말에서 이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민족’의 주요 결정 요소 중 하나가 동일 언어인 만큼 이런 낯섦을 줄여나가는 것은 우리 겨레의 앞날을 위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북한의 언어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언어학자가 김수경이다.
그는 현행 북의 철자법의 기초가 된 《조선어 철자법》의 초안을 만들었고, 해방 직후 북에서 최초로 공간된 《조선어 문법》을 비롯하여, 1954년에 간행되어 중국과 일본의 동포들에게까지 널리 교육된 《조선어 문법》을 집필했다. 한마디로 김수경은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 무렵까지 북한 언어학의 모든 분야에서 활약한 언어학자이자 언어정책의 설계자로 그를 빼놓고는 북한의 언어학을 빼놓을 수 없다. 한때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시작되었던 《겨레말큰사전》 공동 편찬사업이 지지부진한 만큼 더욱 그동안 잊혔던 언어학자 김수경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목차
이 책을 우리말로 읽는 독자들에게
일러두기
머리말
[제1장] 식민지의 다언어 사용자
1. 행하기에 앞서 존재한다
2. 언어학자로의 길
3. 말과 사상
I. 구조와 역사: 김수경 언어학의 시작
1. 구조언어학과 역사언어학
2. 훈민정음과 음운론
3. 조선어사를 현대에 접속시키다
[제2장] 해방과 월북
1. 38선을 넘을 때까지: 두 종합대학 사이에서
2. 월북 후의 활동
3. 언어정책과 정치
[제3장] 배낭 속의 수첩: 한국전쟁과 이산가족
1. 회고록의 생성: 가족 이산의 원점을 회상하다
2. 문체와 리얼리티
3. 수기에 새겨진 전쟁터
남으로|북으로 후퇴|다시 ‘남진’
II. 조선어의 ‘혁명’: 규범을 창출하다
1. 새로운 문자체계와 김두봉의 문자사상
2. 정서법 개혁과 형태주의
두음의 고정 표기|절음부의 도입|신6자모의 도입|형태주의의 두 계보
3. 조선어 문법의 구축
《조선어 문법》의 성립 과정|《조선어 문법》의 특색
4. 소비에트 언어학 수용의 맥락
[제4장] 한국전쟁기 학문체제의 개편
1. 전시하의 종합대학
2. 과학원의 출범
3. 스탈린 언어학 논문의 충격
[제5장] 정치와 언어학
1. 문자개혁과 사회주의 나라의 ‘형제’관계
2. 정치적 비판과 언어학적 비판
3. 김수경이 학계에서 사라질 때까지
III. 민족의 언어와 인터내셔널리즘
1. 스탈린 논문의 수용
2. 조선어 문법의 재정립: ‘토’의 이중성
3. 형태주의의 폴리틱스
IV. ‘주체’의 조선어학
1. 문법이론의 ‘주체’ 확립을 둘러싸고
‘토’를 둘러싼 논쟁|형태론에서의 ‘주체’
2. 조선어 문체론의 구축
문체와 문풍|김수경의 문체론
3. 조선어학의 ‘주체화’
정서법의 재개혁|조선어학사의 혁명 전통화|이론적 권위의 일원화
[제6장] 재회와 복권
1. 이주와 정주, 이산과 연결
한국전쟁 전의 이주와 가족|한국전쟁과 이산|남에서의 정착과 북미로의 이민|편지 교환과 재회의 실현
2. 되찾은 시간
활동 재개와 복권|조선어사로의 회귀|황혼
맺음말
옮기고 나서
김수경 연보
김수경 저술 목록
김수경 저술 목록 보유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이타가키 류타 (板垣?太)
1972년 생. 일본 도시샤대학 사회학부 교수. 전공은 문화인류학, 조선근현대사, 식민지조선의 사회구조. 도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대표저서로 『한국근대의 역사민족지: 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한국어판 2015), 『동아시아 기억의 장』(공저, 한국어판 2015) 등이 있음.
역 : 고영진
도시샤(同志社) 대학교 글로벌지역문화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문학 박사이다.
역 : 임경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도쿄대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를 졸업했다.(문학박사)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한일비교문학, 일본사회운동사, 코리안 디아스포라 비교연구 등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으며 [한겨레] 일본어판의 번역가로도 활동해 왔다. 역서로 『나는 사회주의자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 선집』,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등이 있다.
책 속으로
김수경은 어릴 때 고향 통천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거처를 따라 옮겨 다녔다. 조선인 대상의 소학교인 보통학교는 신의주에서 입학했다. 그 후 군산 공립보통학교(1925년 여름에 전학), 군산 공립중학교(1930년 입학)를 거쳐 193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 p.51
예과 시절 김수경은 친구들과 함께 사회과학서적 독서 모임을 이끌었다. 구제 고등학교와 제대 예과의 ‘마르크스 보이’ 문화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 p.56
1937년 4월 김수경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진학했다. …… 법문학부에서 김수경이 선택한 것은 철학과이다. …… 경성제대에서 언어학을 가르쳤던 고바야시 히데오는 “김 군은 [예과] 3학년 말에 학부 연구실로 나를 찾아와 언어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공교롭게도 성대[경성제대의 약칭]의 법문학부에는 언어학 강좌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 나는 철학과를 추천했다.”
--- p.58
예과 시절의 일로 김수경 등 10여 명이 조선어학회 사무실에 가서 새로 정해진 한글맞춤법을 리극로에게 배웠다는 취재기사가 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대표하는 작가였던 림화와 동기생 신구현의 권유로 조선의 문헌을 정리한 모리스 쿠랑의 대저 《조선 서지》의 번역에 착수한 것은 1939년 가을의 일이었다
--- p.63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1940년 4월 30일 자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대학원에 입학 …… 이런 시기에 김수경은 〈조선어의 비교언어학적 연구〉를 연구과제로 하여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다
--- p.64
1944년 3월 15일 자로 ‘일신상의 이유’로 자퇴를 하고, 4월 15일 자로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어학 연구실의 촉탁이 되었다. …… “김수경은 학도 동원을 피하기 위해 경성제대 조선어 및 조선문학 강좌의 무급 조수를 했다.”
--- p.69
김수경은 조선 해방의 날(만 27세)까지 인도유럽어족의 고전어(그리스어, 라틴어, 산스크리트) 및 인도유럽어족(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덴마크어), 그리고 동아시아의 고전어인 한문과 여러 언어(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를 습득한 셈이다. 이 유례없는 어학 능력은 폭넓은 김수경 언어학을 담보했다고 할 수 있다
--- p.75
김수경이 …… 서울에서 1945년에 인쇄한 《〈로걸대〉 제 판본의 재음미》는, 해방 전에 나온 김수경의 유일한 언어학 저작 …… 김수경은 우선 규장각 장서에서 모두 33점에 이르는 《노걸대》 판본을 찾아냈다
--- p.94
김수경은 1946년 8월에 월북했다. 이 때문에 그가 해방 후 남한에 남긴 업적은, 쿠랑의 번역서인 《조선문화사서설》과 번역 논문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구성〉을 제외하면, 《진단학보》에 게재된 논문 〈《룡비어천가》 삽입자음고〉 한 편뿐이다
--- p.97
김수경에 따르면, …… 문자의 발명에 앞서, 중국어와 대조함으로써 조선어의 음운 체계를 해명한 것이야말로 훈민정음의 획기성이라고 김수경은 평가한 것이다
--- p.111
미군정에 의해 자치를 부정당한 끝에, 김수경은 결국 1945년 11월 30일 자로 경성대학의 촉탁과 자치위원회 위원을 사임하게 되었다. 대학을 둘러싼 혼란 속에서 김수경은 해방 직후부터 진단학회에 관여하고 있었다
--- p.120
경성대학을 사직한 김수경은 1945년 12월 1일 자로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치게 되었다. …… 이 학교 외에 김수경은 1946년 봄부터는 경성대학 법문학부 강사를 겸임했으며, 경성대학 예과와 경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 부설 임시중등교원양성소에서 조선어학개론을 강의했다
--- p.126
김수경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한 것은 1946년 5월 6일이었는데 …… 박시형과 김석형이 대학 위촉 의사를 전했고, 조금 늦게 찾아온 신구현이 김일성 명의의 위촉장을 가지고 온 …… 경성제대 동기의 우정과 정치적 신념으로 맺어진 친밀한 인적 네트워크가 김수경의 월북을 촉진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김수경은 김석형?박시형과 셋이서 “8월 17일 밤 반바지에 등산모 차림으로 몰래 38선을 넘어 입북”했다
--- p.131
김수경은 1946년 8월 20일 자로 김일성대학 문학부 교원으로 임명되었다. 곧이어 9월 15일에 개교식이 열리고 10월에는 개강했다
--- p.133
교원이 부족하였던 만큼 …… 나는 《조선어학사》, 《언어학개론》, 《방언학》, 《조선어문법》 등의 과목을 조선어학과 학생들이 진급해 올라가는 데 따라 차례로 강의해야 했으며 다른 학부에 나가서는 영어, 라틴어 등도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135
논문이 4편, 소련의 언어학 문헌 번역이 단행본 1권과 논문 6편, 그리고 공저로 《조선어 문법》을 출판했다. …… 이남재의 기억에 따르면, 김수경은 집필용 책상 옆 벽에 언어학자 주시경의 사진을 걸어 놓고“인생의 목표는 조선어라는 기계의 작지만 필요한 나사 하나가 되는것”이라며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 p.138
‘한자 한 글자’=‘조선어 일 음절’=‘사각형의 한글 한 글자’라는 원칙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어의 문자체계가 사각형이 된 것은 역사적 경위의 산물이지, 그러한 필연성이 언어 자체에 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낡은’ 것에서 탈피하여 ‘과학적’인 것을 지향하는 언어학자일수록 풀어쓰기는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 p.158
1948년 1월에 공표된 ‘조선어 신철자법’에는 많은 특징이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도 ‘통일안’과 달라진 부분은 ① 두음법칙의 폐기, ② 절음부(‘분리부’라고도 불리는데, 나중에 ‘사이표’라고 불리게 되는 부호)의 도입, ③새로운 6개의 문자요소(신6자모) 도입이라는 세 가지였다. …… 모두에 김수경이 깊숙이 관여하여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했다
--- p.165
1949년 말에 간행된 조선어문연구회의 《조선어문법》은 북한에서 최초로 공간된 규범 문법서이다. 정서법뿐만 아니라, 이 책의 편찬에도 김수경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 p.189
김일성대 교수들은 이남의 ‘해방지구’에서 정치강습 등 조선로동당의 사업에 종사하기 위해 8월 9일 남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평양을 출발할 때에는 “전쟁이 오래 끌 것으로 예견되지 않았”다
--- p.220
정전 합의 40주년을 기념하여 평양에서는 전국로병대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김수경도 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때 주변의 권유로 한국전쟁 수기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93년 8월 15일부터 쓰기 시작하여, 1994년 11월 20일에 정서를 완료했다. 제목은 ‘배낭 속의 수첩을 펼치며’였다
--- p.224
1996년 7월에 토론토에 거주하는 장남 김태정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아버지와 재회했다. 그때 김태정은 이 수기를 건네받았다
--- p.224
김수경 등은 야간에 전차와 전차 사이를 뚫고 지나가거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 경부선 철로를 달려 가로지르거나, 식량도 없이 가파른 문경새재를 오르내리거나, 외나무다리에서 강물로 추락할 뻔하기도 하면서 서서히 북상했다
--- p.241
1950년 10월, 김일성대 교원 가족들은 일제히 북쪽으로 피란하기 시작했다. 유엔군 낙하산 부대가 투입되는 가운데,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고 판단한 이남재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10월 20일경 남편을 찾아서 서울로 향했던 것이다
--- p.252
1951년 11월 대학 운영이 1년 반 만에 재개되었으나, 구성군에서는 한 곳에 캠퍼스를 집중할 수 없어서 반경 8킬로미터에 걸친 7개 리에 분산 배치되었다. …… 눈보라 휘몰아치는 구성의 산골에서 낮 동안 나무하러 갔다온 피로도 풀 새 없이, 깜박거리는 카바이드 등잔불의 두리에 앉아 과정안, 교수 요강을 다시 짜고, 교재, 교과서를 집필하며 전공 리론서적을 륜독하기에 밤가는줄 모르던 전시하 대학생활의 나날을 결코 나는 잊을 수 없다
--- p.262
김수경은 1953년경 김정순과 재혼했다. …… 공적인 신용이 필요한 과학 사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가족을 새로 구성할 필요가 있었고, 주위의 권유도 있어 재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p.279
교육성의 비준을 받아 2권으로 나뉘어 간행된 교과서 《조선어 문법》은 …… 1954년 11월에 제1~2학년용만으로 24만 5,000부가 인쇄되었는데, 이로써 김수경 언어학은 광범위하게 공적으로 교육되게 되었다
--- p.293
명사 등 체언의 뒤에 붙는 조사도, 동사?형용사 등 용언의 어간 뒤에 붙는 활용어미도, 함께 아울러 ‘토’라고 불렀다. …… 《조선어 문법》에서 김수경은 …… ‘토’만을 다른 모든 품사와 구별하여 ‘보조적 품사’로 특별히 자리매김했다
--- p.297
언어학계에서 김두봉과 김수경에 대한 비판이 조직적으로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것은 김두봉에 대한 공개 비판을 거친 뒤인 1958년 1월 17~18일에 개최된 학술토론회에서였다
--- p.338
김두봉에 대해서는 존칭 없이 치명적인 비판을 쏟아 낸 것과 대조적으로, 김수경은 어디까지나 그를 “추종”한“동무”로 비판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비겁하고 공명주의와 출세주의에 사로잡히”었다거나 “성실치 못하”다는 등 개인의 자질을 의문시하는 거친 표현들이 사용되긴 했지만, 정치적인 비판까지는 가해지지 않았다. 실제로 …… 김수경은 연구자로서의 생명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 p.342
1964년 1월 3일 김일성은 …… 불필요한 한자어, 외래어 등을 정리하여 조선어의 고유어화를 추진할 것, 이른바 ‘말 다듬기’를 중요 과제로 제시했던 것이다. ‘주체의 확립’이라는 큰 방침과도 관련된 ‘교시’였다
--- p.347
1950년대에 김수경이 제기한 문제는, 다양한 논의를 거쳐 1960년대 김대계의 문법서에 반영되었고, 그것이 이후 북한 문법론의 틀을 만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체’ 확립에 대한 논의도 어우러지면서, 조선어의 교착어적 요소들을 자리매김하는 것이 독자적인 방법으로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인도유럽어족 언어들의 문법 개념을 ‘교조주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중심에 놓고 문법서의 편성도 조선어의 특성에 맞춘 ‘주체’적인 것이 되었다
--- p.377
김수경이 1960년대에 새롭게 씨름한 영역은 조선어 문체론이다. …… 그것은 북한 최초의 문체론에 관한 저작 《조선어 문체론》으로 체계화되었다
--- p.378
지나친 띄어쓰기를 완화하고 부호(사이표)를 없앰으로써 남북 간 언어 규범의 차이는 약간 옅어지게 되었다. 더구나 그것은 김일성의 교시에 의해 견고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형태주의라는 원칙 자체는 유지하면서도, ‘54년 철자법’에 남아 있던 김두봉적인 요소, 다시 말해 장래의 풀어쓰기를 염두에 두고 도입했던 정서법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 p.395
1958년에 김수경이 비판받을 때, 김두봉을 ‘추종’했다는 이유 외에 유일하게 김수경에게만 향해졌던 비판이 바로 이 형태론에서 외국 문헌을 적극적으로 참조한 것이었다. 교조주의적이다, 창조성이 없다, 말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등의 비난이 김수경에게 퍼부어졌다
--- p.402
1988년 이후 주로 조선어사와 관련된 연구로 학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월북 후에는 거의 현대 조선어의 연구에 전념했던 것을 고려하면, 예전의 관심 주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p.409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이었다. …… 이남재의 가족은 …… ‘육모정’이라 불리는 별장에서 살게 되었다. ……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 ‘빨갱이 동생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도록 마을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고 한다. 거기에서 한동안 피란민용 배급물자에 의존하며 생활했다
--- p.420
딸이 해외로 이민을 갈지도 모르는 시점이 되자, 이남재는 남편의 존재 여부를 애매하게 하여 자녀의 출국허가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마침내 ‘정리’하기로 결단했다
--- p.424
1986년 1월 15일 자로 “남재에게”라는 수신자 이름으로 시작되는 김수경의 4장짜리 편지는, 아내를 “당신”이라 부르며 전체가 경어체로 씌어 있어, 이남재에 대한 경의와 미안함과 이해해 달라는 뜻으로 가득 차 있다. …… 남북이 통일되기 전에는 당신과 아이들의 소식을 알 길이 없으리라 단념하다싶이 하던 차에 이렇게 편지를 받으니 커다란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는 가운데 오래동안 망연할 뿐이였습니다
--- p.430
1988년 5월 사회과학원이 주재하여 평양에서 개최한 〈조선관계 전문학자들의 국제과학토론회〉였다. …… 13개 나라에서 온 165명의 학자 선생들과 10명의 재일본 조선 사회과학자들”이 참가하여 대대적으로 개최된 국제학회였다. …… 북한에서 김수경을 포함한 5명의 ‘의장’이 선출되었다
--- p.441
1988년의 학계 복귀로부터 1994년의 마지막 학술 논문에 이르기까지 김수경의 관심은 1945년 이전에 심층적으로 조사했던 주제, 즉 《노걸대》를 비롯한 14~19세기 조선의 어학서에 집중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집필을 진행하여 그것으로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세나라 시기 언어 력사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었다
--- p.442
1990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91년에는 교수 학직도 받았다. 약관 31세의 나이에 부교수가 되었는데, 73세에 가까스로 교수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은 것은 아니고, 소속은 계속 인민대학습당 그대로였다
--- p.448
1989년 9월에 서울의 한국문화사에서 〈해외 우리 어문학 총서〉의 한 권으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김수경이 북한 밖에 있는 독자들을 향해 “민족분렬론”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 p.456
김수경은 이남재에게 마비된 손으로 “心園속의 不死鳥 한 쌍 당신의 수경”이라고 적어 아들에게 건넸다. ‘심원心園’은 김수경과 이남재가 친구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한 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다방의 이름으로, 이른바 첫 만남의 장이다. “심원 속의 불사조 한 쌍”이란 수차례의 고난을 뚫고 불사조처럼 살아온 두 사람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 p.463
1998년 7월 16~24일, 이남재의 평양 방문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 p.466
2000년 3월 1일 오전 8시 20분, 김수경은 81년 10개월의 생애를 마감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평양시 평천구역 유골 보관소에 안치되었다. 부고는 김정순(김수경의 평양에서의 아내)과 김태균이 곧바로 각각 편지 두 장에 적어 이남재에게 전달했다. 봉서가 토론토에 도착한 것은 3월 하순의 일이었다. 편지에는 유발이 동봉되어 있었다
--- p.468
출판사 리뷰
북한 어문의 기틀을 마련한 언어 천재
김수경은 10개 국어 이상을 구사한 언어 천재였다. 그는 경성제대 본과에 진학하면서 언어학에 뜻을 두었는데, 지은이는 “어학에 능통한 청년에게 여러 언어에 두루 걸쳐 있는 일반언어학의 세계가 출구 없는 식민지 상황에서 세계를 개척하는 것으로 비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 보이’가 동시에 ‘소쉬르 보이’로도 될 수 있었던 동인은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김수경은 ‘이론/리론, 논리/론리’ 등 이른바 두음법칙을 폐지하는 것이 훨씬 더 언어생활에 유익하다는 것을 형태주의 이론으로 명백히 뒷받침했다. ‘스탈린 언어학’의 수용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조사와 용언의 활용어미를 보조적 품사 ‘토’라 규정하여 자주적인 언어학을 시도했다. 여기에 일본어와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로 쓰인 외국 문헌을 참조하는 등, 그의 어학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말년의 노작 《세나라시기 언어력사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의 언어는 어휘와 음운 체계에서 약간의 방언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공통되는 하나의 언어였음을 주장하는 등 조선어사 연구에서도 일가를 이뤘다.
‘비판적 코리아 연구’자 이타가키 류타 교수가 집필하다
저자 이타가키 류타 교수(일본 도시샤대학, 역사인류학)는 2015년 한국에 번역 소개된 〈한국 근대의 역사민족지: 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에서 경상북도 상주라는 지역사회를 사례로 식민지 조선 사회변화의 실태를 촘촘하게 살폈다. 근세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을 염두에 두면서 장기간의 현지조사와 방대한 자료를 통해 조선의 식민지 경험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획기적인 연구로 한국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주류 지식체계는 중앙, 국가, 제국이나 엘리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식민지화 과정에서의 근대 경험 연구에 치중되어 있었다. 반면 이타가키 류타 교수의 이 연구는 그러한 주류 지식체계를 역전시켜 마을, 개인, 지방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국가나 제국, 세계사적 규모에서 일어나는 일들과의 접속성 속에서 고찰한다. 이 같은 역사서술은 그가 견지해온 ‘비판적 코리아 연구’의 일환이었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그의 이러한 ‘비판적 코리아 연구’의 또 다른 실천이다. 북한으로 연구대상을 넓힌 그는 이 책에서 한 지식인의 경험을 통해 식민지기부터 냉전기로 이어지는 북한의 역사서술을 시도한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 미국, 캐나다, 러시아, 중국, 한국, 북한 등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찾고 구술조사를 수행한다. 이를 토대로 개인을 가로질러 접속되고 연동되는 복수의 맥락들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김수경 개인의 역사를 북한사, 한반도사, 세계사로 확장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식민지 지배나 냉전이 만들어낸 학문의 경계를 넘어 언어학, 정치학 사회학 등을 교차시키고 체제의 억압에 짓눌린 사람들의 행위자성이나 창조성을 드러낸다.
이타가키 교수는 ‘비판적 코리아 연구’를 단순한 학문 연구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기고 있기도 하다. 일본사회의 우경화에 저항하여 히노마루?기미가요 법제화나 언론 탄압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거나 교토의 조선학교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에 반대하여 재판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며 식민지 지배책임을 묻는 실천을 하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의 호평
저자의 이 같은 노력 덕분인지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일본 학계에서도 여러 저명한 학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미쓰이 다카시 교수(도쿄대)는 “이 책은 우선 한 지식인의 궤적을 통해 식민지기-해방-한국전쟁-북한의 학문사를 그려 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가족 이산의 비극을 낳은 전쟁이라는 요인을 실증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이산한 가족을 만남의 장으로 이끄는 네트워크의 역사적 규정성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제국대학의 사제관계나 김일성종합대학의 사제관계 등 다양한 연결망이 역동적으로 기능하면서 정보가 전달되는 구도는 독자를 흥분시킨다. 또한 언어학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사, 정치사로서 조선학의 학문사를 그려 낼 가능성을 제시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라고 말한다.
다나카 가쓰히코 명예교수(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이 책은 그(김수경)가 주장했던 한글의 풀어쓰기 방식을 도입하여, 조선어의 한자에 대한 의존을 근본적으로 끊어 내려 한 시도이다. 한글은 아무리 한자를 폐지했다고 하나, 그 문자의 원리는 사각의 단위 안에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여 하나의 글자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을 단위로 한다는 점에서는 한자의 원리로부터 궁극적으로 결별했다고는 할 수 없다. 풀어쓰기란, 그 사각의 단위 속에 억지로 집어 넣어진 문자를 풀어내어, 알파벳처럼 일률적으로 옆으로 쓰는 방식이다. 본서는 그러한 조선어 형태론의 표기에 관련되는 기본 문제도 설명하면서, 김수경의 전 생애를 상세히 그려 내려 한 귀중한 시도이다”라고 평한다.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도쿄대)는 “이 책은 지금도 베일에 싸인 나라로 남아 있는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살아남아 학자로서의 생애를 완수한 걸출한 지식인 김수경에 대해, 가족들만 가지고 있던 비공개 수기, 한국전쟁 종군기 등 참고할 수 있는 문서, 자료의 거의 대부분을 전 세계에서 수집하여 그 극적인 생애를 묘사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까지 쓰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쓰이지 않을 작품이다”라고 말하며 “일본에서도 세계적으로도 무엇보다 본국에서도 충실한 자료의 섭렵과 검증을 통한 본격적인 코리아 근현대사 연구 작품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수준 높은 업적이 탄생한 것은 실로 경하해 마지않을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고 높은 평가를 덧붙인다.
큰 울림을 자아내는 이산가족사
문화인류학자로 ‘비판적 코리아 연구’에 천착해온 이타가키 교수는 이 책을 ‘학문사’라 규정했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로서는 남북 분단을 몸으로 겪어낸 김수경과 그의 가족의 신산한 삶에 눈길이 갈 터이다. 한국전쟁에 종군한 김수경과 그를 찾아 월남한 가족의 엇갈림, 캐나다로 이민 간 딸과의 베이징에서의 해후, 띄엄띄엄 편지 왕래 끝에 아내 이남재와의 만남 그리고 2000년 임종하기까지 한 지식인의 삶을 통해 20세기 한반도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조선어학의 길에 들어섰고, 미군정하에서 지하 활동에 들어갔을 때는 ‘가시밭길’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때 당신과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가시밭길’을 걷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나보다도 당신과 아이들에게 ‘가시밭길’을 걷게 했다니……” 맏딸을 먼저 보낸 아내의 회한이 담긴 시를 읽고 김수경이 편지에 적은 감회로 6장 재회와 복권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은 학문사를 지향하는 평전이지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그 어떤 소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책의 구성은 독특하다. 김수경의 삶과 그의 학문 세계를 각각 1~6장과 Ⅰ~Ⅳ장으로 나눠 마치 대위법처럼 교차시켜 서술했다. 필요에 따라 혹은 취향에 따라 골라 읽을 수도, 따로 읽을 수도 있도록 한 구성이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다. 일본인 학자가 국적도 전공도 다른 이의 삶과 학문을 이토록 꼼꼼하게 그려낸 데 대한 감탄은 별도로 치더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