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5일(오순절 후 스무 번째 주일)
고린도후서 4:16-5:1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십여 년 전에 소천한 강영우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열네 살 때 눈을 다쳐 실명했습니다. 그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그 당시 열일곱 살이던 누나가 어린 세 동생을 부양해야만 했습니다.
누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봉제공장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그만 16개월 만에 과로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린 강영우는 시각장애인 재활원으로, 열세 살이었던 남동생은 철물점 직원으로, 아홉 살 된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평일에는 천막을 만들었고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에게도 고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갈리오가 아가야 지역의 총독으로 있었을 때였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민란을 일으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법정으로 끌고 가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협력했던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바울 대신 때렸습니다.
결국 이 일로 바울은 고린도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린도를 떠나 안디옥으로 떠났지만, 바울은 이 일로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많은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고후 11:23-28). 그는 복음을 위해 육신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또 그는 복음을 위해 심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경제적인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고통이 닥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소개해 드린 강영우 박사나, 바울과 같은 분들은 인생을 살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은 분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많은 고난을 겪으신 분들은 일반적으로 인생에 관한 생각이 깊습니다. 그분들 나름대로 인생철학을 가지고 있어요. 처음부터 인생철학을 가졌던 분들도 계시지만, 고난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인생철학이 생기고, 고난을 이해할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나요? 바울은 사람을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겉 사람은 무엇이고, 속사람은 또 무엇입니까? 겉 사람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인입니다. 공부하고, 아이들 키우고, 사회생활 하는 그런 자연인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대로, 그런 자연인은 점차로 낡아집니다.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61세의 환갑을 기준으로 노인이라고 부르지요? 국제 노년학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Gerontology)의 발표에 따르면, 노인이란 환경변화에 적절히 적응할 수 있는 능력에 결손이 있거나, 자신을 통합하려는 능력이 감퇴 되어 가는 시기의 사람, 혹은 인체 기관이나 조직, 기능에 있어 쇠퇴 현상이 일어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노인은 단지 신체적인 나이만 많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는 환경변화에 대해서 적응 능력이 떨어지는 시기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어 가면 몸이 병들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사회 적응력이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어떤 분이 그래요. “40대는 외모의 평준화가 일어나고, 50대는 지성의 평준화가 일어나며, 60대는 물질의 평준화가 일어나고, 70대는 정신의 평준화가 일어나고, 80대는 삶의 평준화가 일어난다.”
참, 서글픈 일이지요? 남들보다 더 잘살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시간이 흐르자 겉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낡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바울이 겉 사람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속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속사람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세계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이 있으니까 글을 읽고, 생각하고, 웃으며, 울고, 사랑합니다. 또 사람은 영혼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영원한 하늘나라를 꿈꿉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도 의미가 있습니다.
심리학의 이론 가운데 ‘의미 요법’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을 다른 말로, 로고 테라피(Logo Therapy)라고도 하는데요, 이 이론의 창시자는 빅터 프랭클(Victor Emil Frankl)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원래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의해서 강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됐던 분입니다. 그는 그곳에 수용되어 죽음을 눈앞에 둔 많은 동료 유대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극한 상황이 오더라도, 그런 외부적인 압력이 우리의 실존 의지와 자유를 결코 박탈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아무리 겉 사람이 낡아지더라도, 의미를 추구하는 속사람은 절대로 낡아지지 않는다는 거지요.
빅터 프랭클이 주장하는 의미 요법의 기본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떤 조건 속에서도 삶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둘째, 사람에게는 의미를 찾는 의지가 있고, 행복은 그것의 성취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셋째, 인간에게는 한정된 상황 속에서도 의미를 구현하는 자유가 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세상에 공헌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찾아라. 둘째는,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의미를 찾아라. 세 번째로, 피할 수 없는 고통이나 감당할 수 없는 역경과 같이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운명과 싸우며 의미를 찾아가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귀담아들어야 할 교훈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환경 그 자체는 우리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환경을 운명으로 탓하며 자포자기하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환경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만큼은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프랭클의 말대로, 삶은 어떤 조건 속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성공하는 인생의 비결이 됩니다.
혹시 여러분이 지금 고난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몸부림치고 계십니까?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도록 노력해 보세요.
마치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어떤 집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처럼,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문제와 좀 더 거리를 두고 문제를 살펴보세요.
물론 저는 이것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문제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가면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요. 그래서 바울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 말씀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먼저 시간상으로 보면, 우리가 지금 받는 환난은 잠시 잠깐의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받게 될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또 그 강도에 있어서, 우리가 지금 받는 환난은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받게 될 영광은 지극히 크고 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들이 자라면서 여러 번 넘어지고 다칩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몰라요. 그래서 제 무릎이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때 꼭 생기는 게 딱지입니다. 딱지는 보기에도 흉하고, 조금 지나면 얼마나 간질간질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보통 딱지가 생기면 스스로 떼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합니다. 기어이 손가락으로 긁어서 떼고 맙니다.
그런데 딱지가 있어야 상처 부위에 세균도 들어가지 않고, 상처가 깔끔하게 없어지거든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어렸을 적에 생긴 영광의 딱지를 아직까지 붙이고 다니는 분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영광의 딱지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환난은 잠깐이에요. 그에 비해,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속에 깃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선하고, 의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환난을 통해 지극히 크고도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잠시 고난도 주시고, 아픔도 주십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가 이야기한 대로, 우리에게는 고통도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고통마저도 하나님의 영광된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겉 사람은 낡아지더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큰 죄에 빠진 나를 주 예수 건지사
그 넓은 품에 다시 품으신 은혜는
저 바다보다 깊고 저 하늘보다 깊다
그 사랑 영원토록 나 찬송하리라
날로 더욱 귀하다 날로 더욱 귀하다
한이 없이 넓은 우리 주의 사랑 날로 더욱 귀하다
이 얼마나 귀한 고백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환난을 겪을 때 주님께서는 바다처럼 깊은 사랑으로, 하늘처럼 넓은 사랑으로 여러분을 품에 안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품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날로 더욱 귀한 줄로 믿습니다.
어린 시절에 강영우 박사는 부모를 잃고 심지어 큰 누님까지 잃었어도, 그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 줄 아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는 시각장애인으로서 맹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해야 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자신을 사용하실 하나님에 대한 큰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강영우는 희망의 끈을 붙들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점자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 서울맹학교 고등부를 졸업한 뒤,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해서 단과대 차석으로 연세대를 졸업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강영우는 거기에서 안주하지 않고 더 큰 희망을 품고 국제로터리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는 1976년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교육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듬해인 1977년부터 1999년까지 22년 동안이나 미국 인디애나주 정부의 특수교육국장과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학의 특수교육학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그는 2001년에 한국인 최초로 미국 백악관의 국가장애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물론 강영우 박사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장애인으로서, 또 가난 때문에,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를 격려하며 도왔던 것은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의 아내 석은옥 여사는 강영우 박사보다 몇 살 위인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맹학교에 자원봉사를 나갔다가 청년 강영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비록 시각장애인이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청년 강영우를 만나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두 아들을 낳게 됩니다.
큰아들 폴(진석)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조지타운대학 안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고, 둘째 크리스토퍼(진영)는 변호사로 백악관의 선임 법률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췌장암에 걸려 의사로부터 두 달밖에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마지막으로 책을 하나 냈습니다. 그 책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책 제목은「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나의 장애는 저주가 아닌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축복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책 끝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는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에게 보내는 찬사입니다. 둘째로, “사랑합니다.”는 그동안 강 박사의 지팡이가 되어 준 아내 석은옥 여사에게 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복합니다.”는 아버지의 삶을 살게 한 두 아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육신의 눈이 멀었던 강영우 박사가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라고 고백했다면, 건강한 육신의 눈을 가진 저와 여러분이 좌절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도 강영우 박사처럼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과거에는 보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계를 보고, 그동안 꿈꿀 수 없던 영원한 세계를 사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축복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영원한 세계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언젠가 우리의 장막 집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장막 집이란 우리의 육신을 말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육신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무너지는 날, 우리는 새롭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영원한 집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이 예비하신 집은 우리를 위해 하늘에 지으신 집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우리가 육체의 장막을 벗게 될 날,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고전 15:42~44).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넓은 평수의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는 평수 제한이 없습니다.
또한 혹시 여러분 가운데 육신의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고통 가운데 계시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육신의 장막을 벗는 순간 저와 여러분은 영광스럽고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몸은 다시는 죄가 틈타지 못하는 영광된 몸이요, 질병과 죽음이 넘보지 못하는 완전한 몸이 될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몸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이러한 소망을 가진 분들을 위해 트리나 폴러스가 지은 「꽃들에게 희망을」의 한 대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 마리의 나비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요?
나를 잘 보거라.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마치 숨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치란 피해 달아나는 장소가 아니란다.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잠시 머무르는 여인숙과 같은 곳이지.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도약이란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말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에고치에 들어가야 합니다. 어둡고 칙칙한 누에고치는 분명 애벌레에게 고통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누에고치는 애벌레가 피해 달아는 장소가 아니라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잠시 머무르는 여인숙과 같은 곳입니다. 마치 멀리뛰기 선수가 좀 더 멀리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밟아야만 하는 도약판과도 같습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여러분이 겪는 고난은 장차 여러분을 영광스러운 주님의 몸으로 변화시켜 주기 위해 마련된 훌륭한 누에고치와 같습니다.
훗날 당신이 저 천국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영광된 길을 걸을 때, 당신은 주님께 다음과 같이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 그 어려운 시간에 제가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저도 나비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어요.”
그때 주님은 당신에게 시선을 맞추며 이렇게 대답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무렴, 나의 착한 아이야! 네가 가진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나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