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예수뎐]예수의 거문고 소리, 누가 알아들었을까
백성호의 현문우답
차를 타고 갈릴리 지역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척박한 풍경이 펼쳐졌다.
메마른 광야와 푸석푸석한 모래 땅. 중간중간 오아시스 마을도 보였다.
광야를 떠난 예수도 이 길을 걸었을 터이다.
홀로 요르단 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터벅터벅 걸었을 터이다.
아마도 예수는 이 길을 따라서 갈릴리로 가지 않았을까.
아니면 반대편인 서쪽으로 갔을까.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위협을 느낀 나머지 유대인들이 꺼리는 서쪽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했을까.
그 길로 고향인 나사렛으로 갔을까.
예수는 외로웠을 터이다.
그 누구도 예수의 ‘주인공’을 알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 깃든 ‘신의 속성’을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나사렛에 사는 요셉의 아들, 목수 일을 하는 청년으로만 여겼다.
(33)예수의 거문고 소리, 누가 알아들었을까
세례 요한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안목이 있었다.
광야에서 예수가 세례를 청했을 때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복음 3장 14절) 하며 사양했다.
중국 춘추시대에 백아(伯牙)라는 사람은 거문고의 명수였다.
그의 소리를 알아주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이름은 종자기(鐘子期)였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과 큰 강을 연주하면 종자기는 여지없이 읽어냈다.
“하늘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태산(泰山) 같다.”
가락으로 강물을 읊어도 읽어냈다.
“넘칠 듯 넘칠 듯이 흘러가는 것이 황화(黃河) 같다.”
둘은 서로 통했다. 그러다 종자기가 병으로 먼저 죽었다.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이다.
‘마음의 소리’를 아는 이, 즉 ‘지음(知音)’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갈릴리로 가던 밤, 예수는 달을 보며 세례 요한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의 죽음을 애달파하지 않았을까.
예수에게 세례 요한은 ‘지음(知音)’이었다.
오직 요한만이 예수가 ‘신을 품은 인간’임을 알았다.
예수의 제자들도 몰랐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도 제자들은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몰랐다.
그의 내면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그러니 예수는 외롭지 않았을까.
자신의 가락을 알아주던 세례 요한이 죽었으니 말이다.
기록에는 없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에게 숱한 질문을 퍼붓지 않았을까.
‘하느님 나라’에 대해, ‘신의 속성’에 대해 온갖 물음을 던지지 않았을까.
예수는 또 반가운 마음으로 하나하나 답하지 않았을까.
마치 백아와 종자기가 ‘마음의 소리’를 주고받았듯이 말이다.
그래도 예수는 달랐다.
거문고의 줄을 끊지 않았다.
갈릴리로 가서 오히려 더 많은 가락을 연주했다.
자신의 내면에 깃든 하느님 나라를 풀어서 메시지로 펼쳤다.
한참을 달리자 차창 밖으로 사막 특유의 건조한 풍광이 변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했다. ‘뭐가 달라진 거지?’
버스가 북쪽으로 달릴수록 초록색 점들이 하나씩 둘씩 더 보였다. 나무도 풀도 꽃도 조금씩 더 보였다.
이스라엘에는 삭막한 광야와 따가운 햇볕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나무도 꽃도 푸르게 살아났다.
‘아, 이 땅에도 생기가 도는구나!’
갈릴리 지역에 들어섰을 때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했다.
믿기지 않았다. 그곳은 푸르디푸른 ‘제주도’였다.
커다란 호수와 풀이 무성한 언덕, 울창한 나무들……. 가슴 밑바닥까지 초록이 밀려왔다.
버스에서 내리자 상쾌한 바람이 스쳤다.
성서에서 숱하게 들은 이름, 갈릴리 호수.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갈릴리 호수가 그렇게 큰 줄 몰랐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호수라기보다 바다에 훨씬 더 가까웠다.
영어 이름도 ‘Sea of Galilee’, 즉 갈릴리 바다이다.
동서 폭이 14㎞, 남북의 길이는 무려 21㎞다. 넓이는 170㎢. 호수 둘레는 63㎞. 그만큼 컸다.
갈릴리 호수는 바다처럼 넓다. 그래서 영어 이름도 '갈릴리 호수'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어째서 북쪽으로 올라올수록 초록빛이 더 많이 보이는지 말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우러나는 생명의 기운 때문이었다.
요르단 강의 수량(水量)도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더 풍부했다.
갈릴리 호수 일대에는 작은 마을들이 있었고 조그만 회당도 있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모여 신앙 활동을 하는 곳이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마지막 7일째 쉬었다고 한다.
일, 월, 화, 수, 목, 금 그리고 토요일이다.
유대교에선 마지막 7일째가 토요일이다.
그래서 안식일도 토요일이다.
예수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토요일에 회당을 찾았다.
유대인들이 그곳에 모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설교를 했다.
설교 주제는 ‘하느님 나라’였다.
예수는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신의 속성’을 풀었다.
나와 세상과 우주가 어떻게 숨을 쉬고, 어떻게 맞물려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이치를 설했다.
‘하느님 나라’가 무엇이고, 그걸 품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아주 쉬운 말로 설했다.
예수의 설교는 명쾌하고 막힘이 없었다.
사람들은 예수의 설교에 가슴이 뚫렸다.
성서에는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장 22절)라고 기록돼 있다.
‘권위’라는 건 어떤 걸까.
그건 어떨 때 생겨나는 걸까.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는 권위는 쉽사리 생기지 않는다.
그건 상대방이 마음을 끄덕일 때 비로소 생겨난다.
그럼 어떠할 때 사람들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까.
예수의 메시지, 예수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할 때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삶의 물음표에 누군가 답을 내놓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느낌표가 생긴다.
이리저리 아무리 살펴봐도 그 답에 “맞아!”하며 고개가 끄덕여질 때 비로소 권위가 생긴다.
사람들이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는 권위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그런 권위가 있었다.
그의 눈이 인간의 속성과 신의 속성을 이미 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갈릴리 호숫가를 걸었다.
예수의 고향은 갈릴리에서 멀지 않다.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도 종종 이곳을 찾았을 터이다.
‘이 커다란 호수와 푸른 나무들, 갈대가 가득한 언덕, 바람과 함께 철썩대는 파도.
그 모두가 예수에게 말을 걸었겠지.
어린 예수, 청년 예수, 장년 예수는 모두 갈릴리의 추억을 가지고 있었겠지.
이곳에서 자연의 숨결을 익혔겠지. 그 안에 깃든 신의 숨결도 보았겠지.’
갈릴리의 풍성한 물과 초록의 나무는 예수에게 또 하나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렸다.
갈릴리의 푸른 호수, 그 뒤로 펼쳐진 푸른 언덕. 갈릴리의 밤하늘에는 그보다 더 푸른 별들이 박혀 있었다. 2000년 전 예수도 갈릴리의 밤 언덕에서 저 별들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겠지.
홀로 기도하고 묵상하며 신의 속성을 품었겠지. 그렇게 푸른 갈릴리를 노래했겠지.
〈34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