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정암 조광조의 운명의 날이다. 그래 마침내 올것이 왔다. 억울하기보다 조금은 황당했다. 후일 죽은뒤 중종이라 불리운 임금과 지난 사오년간 우린 군신이기이전에 형제나 연인처럼 자주보고 서로 의지했었다.
임금이 이토록 싸늘히 변할지는 몰랐다. 급한 마음에 내가 좀 과격하게 개혁을 몰아 부치긴 했지만 그게 누구를 위함인지는 임금도 모르진 않으리라 여겼기에 나의 당혹감은 더 깊었다.
올해 내나이 서른일곱. 아직 이나라를 반듯하게 도학의 이념이 넘치는 나라로 이끌어야 할 나이다. 이제 겨우 시동이 걸렸을 뿐인데 임금께서는 벌써 지치신 건가 보다.
훈구파들의 모략으로 이곳 전라도 화순땅으로 유배온지 겨우 한달여. 나는 임금께서 조만간 다시 불러주심을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내 기대는 산산조각났다. 금부도사는 사약을 들고 내게 죽을것을 명했다. 명색이 조선의 대사헌을 지낸 내게 무엇이 이리급해 한달여만에 사약을 내린단 말인가.
오호통재라. 슬픔에 겨워 나는 급하게 술을 마시고 임금을 향해앉아 내마음을 읊어나갔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 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조광조의 절명시)
그래 이게 나의 충심이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은 싸늘하게 식었다. 따라서 내 사랑의 세레나데는 돌아선 연인의 등뒤에 대고 부르는 부질없는 짝사랑에 다름 아니다 서럽고 억울한 일이다.
주초위왕. 꿈에서라도 생각해보지 않은 조씨가 장차 조선의 왕이 될것이라는 나뭇잎에 새겨진 벌레들의 글씨. 중종 임금 역시 그것이 훈구파 세력들의 모함인지 몰랐을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나를 따르던 젊은 사림만이 개혁의지에 사로잡혀 그런 조짐을 무시하고 훗날 "기묘사화" 라 불리우는 사건이 일어나는날 밤 심지어는 대취해 있어 긴급하게 대처하지 못한게 결정적 화근이 된것이다.
자만이었으리라. 임금이 개혁에 대한 피로가 있긴했지만 그렇게 가는길이 옳다고 공감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꼭두각시. 말하기 무엇하지만 연산군의 폭정에 못견뎌 얼떨결에 훗날 중종반정이라 불리우는, 박원종등의 세력에 의해 진성대군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된 남자. 그러나 그들의 얼굴마담이자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왕. 그가 중종이였다.
반정이후 십여년 말이 좋아 왕이지만 그들에 의해 조강지처 아내 신씨마저 강제로 헤어지고(치마바위의 전설은 이렇게 태동한다)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인 나날들 아니었든가 말이다.
그런 그가 운명적으로 나를 만나 비로서 날개를 펴지 않았던가. 나를 중심으로한 젊은 사림들이 훈구파로 불리는 중종반정 세력들과의 정쟁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중종을 비로서 왕다운 왕이 되게하였고 조선을 유학의 정신이 깃드는 나라로 만들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게도 문제는 있었다. 타협할줄 모르는 외고집. 돌아갈줄 모른는 강한 성격 역지사지, 입장바꿔 생각해보는 상대의배려가 부족했던것 같다.
그러나 그런 사족을 생각하기엔 이나라 조선의 기강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반정세력들의 기득권은 왕을 넘어 조선이 그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중종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지만 서럽고 한심했을 터였다.
임금으로선 은밀히 세력을 키우려 노심초사 하던차 나 정암을 중심으로한 젊은 사림을 만났고,
나 역시 유학의 이념을 골수에 새긴 사림의 태두 김종직을 이은 한훤당 김굉필에게 수학한터여서 자기안위와 사리사욕에 얽매인 저들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이나라 조선의 미래가 암담하다고 여기던 터였다.
그래서 마침내 여러차례의 개혁과정을 걸처 개혁의 결정판, 위훈삭제의 결정적 칼을 빼내든 것이었다. 저 훈구파세력들을 무력화시킬수 있는 히든 카드라 생각했다. 공도 없거나 역할도 많지 않으면서 줄을잘서 공신록에 이름을 얹어 호사를 누리는 저세력들을 제거하면 왕은 왕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왕도정치가 열릴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왕 중종이 이 정쟁에 이렇게 빨리 지칠줄 몰랐다. 돌이켜보니 왕은 자신의 왕권에만 몰두한것 같다. 그의 눈에는 나를 중심으로한 개혁사림세력이나 훈구세력이나 권력다툼에 이전투구하는듯 보인 모양이다. 어느 세력이든 왕권을 흔드는 세력에겐 분노가 일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 왕 중종은 이제 권력의 맛을 안것이었다. 나를 통해 훈구세력들을 약화시켰듯 나의 세력 역시 비대해짐을 불안한 눈으로 본것이였다.
정의감이 앞선 내가 보지 못한 결정적인 실수였다. 과정이 아무리 옳았어도 끊임없이 밀어부치는 개혁에 왕은 피곤하고 한편 불안했던 모양이다.
또하나의 훈구세력이 생겨난다고 여긴모양이다. 그리하여 적절히 권력을 안배할 생각을 한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벼락치기로 이렇게 잡아들이고 귀양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1519년 11월 15일 밤. 위훈삭제를 단행한 사흘째밤. 내가 측근들과 술에 취해 있던 밤. 왕은 홍경주,남곤, 심정등 훈구세력을 은밀히 불러들여 나를 잡아들이라고 어명을 내린것이다.
나 정암으로선 생각치도 못했던 왕의 배신이었다 내 목숨보다 사랑했던 연인, 중종 왕의 배신이였다. 자고로 돌아선 연인이 더 매정한법.
왕은 내 세력들을 철저히 무력화 시켰고 나를 이곳 화순땅에 유배보낸 한달여, 오늘 끝끝내 사약을 보낸것이다.
운명이다. 억울하긴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내죽은뒤 중종왕은 별다른 치적없이 '그저그런' 왕으로 죽게되지 않았는가.
내 개혁이 조금만 더 진행됐으면 조선은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엇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젊은 개혁가 나 정암은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 한때 조선을 움직였던 권력가였지만 죽어 시신마저 함부로 들판에 버려진 기구한 운명이 된것이다.
다행히 내 절친한 벗 훗날 조선 제일의 정원이 된 소쇄원의 양팽손이 목숨걸고 내 시신을 거둬 고향 용인땅에 묻어줘 내 유골이라도 지킬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훗날 선조 임금께서 내 신원을 회복해줘 나는 불충의 이름을 지우고 개혁가의 명예를 되찾을수 있어 다행이다.
그대 양팽손, 그대의 후손에 축복있을진저!
사족. 권불십년,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혹여 내삶과 죽음의 흔적을 보고 싶거나 내 무덤에 술한잔 따라줄 마음이 생긴 후손들, 내가 죽은 화순땅 정암 적려유허지나 경기도 용인 심곡서원이나 정암 묘를 찾아 주시길....
★역사적 사실이 더 궁금하시면 조광조 관련 책이나 인터넷을 검색하시면 도움이 될것입니다. 위의 글은 조광조의 입장에서 써본 답사기 형태임을 양지하시고 개인적인 의견과 다소 다르더라도 혜량을 부탁드립니다. 이런글은, 특히 sns에 올리는 글은 사실적 기록을 나열하기엔 제가 전문가도 아니고 재미(?)도 덜해 주관적 입장에서 제나름으로 해석해서 읽혀지는(?)글을 의도적으로 씀을 밝혀둡니다~^^^
역시 퍼팅박사님의 글은 심오 합니다.~~^^ 특히 오늘글은 중종때의 역사라 더 관심있게 봤습니다.~~ 제 16대 할아버지께서 중종반정을 일으키고, 중종때 영의정을 지내시면서 1512년에 돌아가신 류순정 할아버님 이시거든요.~~ 지금 이분의 묘가 구로구 오류동에 있는데 서울시 문화재 22호로 지정되어 있어 4000여평의 묘소를 잘 관리해주고 있지요.~~^^ 아마 임란전의 묘지형태라든가, 문인석의 복식등이 연구대상인가 봅니다.~~ 그때 이분이 사후에 중종한테 오류동,온수동,작동등 총 300여만평을 하사 받았는데, 그때부터 저희 집안이 16대째 오류동에 살고 있습니다.~~^^ 암튼 박사님 만나면 할애기는 많을것 같네요.~~ㅎㅎ 글 잘 봤습니다.
@퍼팅박사목숨을 잃고 세력이 약화되는 일을 겪게되지요. 그후 선조이후 사림세력들이 훈구파를 누르고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고 김효원의 동인과 심의겸의 서인으로 나뉘고 자기들끼리 죽고죽이는 당쟁을 벌이게 되지요. 아시다싶이 이 당쟁으로 조선은 숱한 고난을 치르게 되고요~~^^
연꽃님께서 일러주신 말씀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 아마추어의 어설픈 답사 이야기다라고 혜량하시고 심심풀이 삼아 읽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ㅎ
긴글 읽어주시고 자세한 답글 달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술하신 글 4대사화중 갑자사화는 성종시대가 아니고 역시 연산군시대 생모 죽음에 얽힌 사건으로 사림과 훈구세력등 다수가 피해를 입은 사화
유승님. 아하, 역사속 실존인물의 후손이라 하시니 조금신기합니다~^ 역사속 인물이야기는 사실 쓰기가 쉽지않습니다. 어느쪽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입장이 되기 때문이지요 저야 강원도 벽지 벼슬과는 무관한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역사속 인물을 '그야말로 역사속 인물' 로보는 조금은 무심한 편이지만 유승님과 같은 분들은 조금 다른 느낌이겠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조상님의 유적답사를 하고 이야기도 듣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딘. 제 엉망인 골프 레슨도 겸해서요~~^ㅎㅎ 부족한 긴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연휴, 잘 보내셨군요~~~ㅎㅎ 이번은 제글을 읽고 연꽃님과 유승님의 댓글을 같이 읽는게 이해에 큰 도움이 되듯합니다. 저도 아는건 많지 않습니다. 다만 무언가를 보고 인상 깊으면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서 끄적여대는 버릇이 있고 그 끄적거림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서 부족하나마 이렇게 올려보는 겁니다. 해 골프님처럼 제글을 읽고 도움이 된다면 저로서야 큰 보람이지요~~~ㅎㅎ 긴글 읽느라 애쓰셨습니다~~
첫댓글 박사님 역사 교수님 이세요?ㅎ
역사관련 티비 프로그램을 즐겨보는편이라 박사님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ㅎ
ㅎㅎ~~^
야메님, 야메 역사학도 입니딘~^^ㅋㅋ
농담입니다.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합ㄴㄱ다.
중년에 역사책 들여다보는 재미가 들려 이런어줍짢은 글을 끄적거려봅니다.
고달픈 직딩(?)입니다~^^ㅋㅋ
역시 퍼팅박사님의 글은 심오 합니다.~~^^
특히 오늘글은 중종때의 역사라 더 관심있게 봤습니다.~~
제 16대 할아버지께서 중종반정을 일으키고, 중종때 영의정을 지내시면서 1512년에 돌아가신 류순정 할아버님 이시거든요.~~
지금 이분의 묘가 구로구 오류동에 있는데 서울시 문화재 22호로 지정되어 있어 4000여평의 묘소를 잘 관리해주고 있지요.~~^^
아마 임란전의 묘지형태라든가, 문인석의 복식등이 연구대상인가 봅니다.~~
그때 이분이 사후에 중종한테 오류동,온수동,작동등 총 300여만평을 하사 받았는데, 그때부터 저희 집안이 16대째 오류동에 살고 있습니다.~~^^
암튼 박사님 만나면 할애기는 많을것 같네요.~~ㅎㅎ
글 잘 봤습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저희선산을 둘러 보시면서 역사얘기 하고 싶네요.~~^^
저희동네가 의외로 역사적 인물들의 묘지도 많고 동네 이름도 그래서 궁동, 천왕동등 근처에 그런 이름의 동네도 있습니다.~~ㅎㅎ
@유승 고맙습니다.
댓글이 잘못달려 저 밑에 따로 노네요~^^ㅎ
아!!! 정암 조광조~~~
불꽃처럼 살다 가신~~~~
ㅎㅎ~~^^
불꽃~~^
저는 전공이 철학이다 보니
과거,
동양철학,
한국철학에 대한 접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기억은 아리송 하지만
당시
조선의 초기 역사는
개혁을 추진하든
혁명사대부 훈구파와
보수 사대부 사림파의 대립으로 보입니다.
조광조는 사림파로서
개혁측면에서 보면
사대주의를 바탕으로
지방사원을 강조하는
오히려 보수적 개혁이였을겁니다.
훈구파는
성균관 집현전을 강조하죠
조선초기
세조때 부터
강한 개혁의 드라이버를 거는
훈구파에 밀려 지방서원을 전전하든 사림파는
성종때 훈구파견제를 위해서 대거 정계로 진출을 합니다.
계보는
성리학의 시조인
김종직을 필두로
그 아래 김일손 조광조~
그 아래
영남학파의 이황 기호학파의 이이가 있습니다.
여튼
조선 4대 사화 무,갑,기,을
중
첫번째
훈구파가 꾸민
조의제문 사건으로
김종직 김일손의 사림파가 많은 희생을 치루게 됩니다.
그리고
성종과 그의 왕비인 윤씨와의 부부싸움에서~성종얼굴의 손톱자국으로 인해서 벌어진~ 갑자사화 ㅋㅋ
그리고,
역시 훈구파의 공격인 사림파 조광조의 기묘사화
그리고,
그후
소윤과 대윤 대립의
을사사화가 있겠네요.
여튼
조선초기
개혁성향을 띈 훈구파와
그 후 사대주의적 보수경향을 띈 사림파의 대립으로
조선역사가 전개 되다가
선조 이후 부터는
훈구파의 몰락으로
보수적인 사림파의 영향이 지배적이였다고 봐도 될겁니다.
@연꽃하나 조광조가
조선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가에 대해서~
퍼팅박사님이 올리신 글을 읽고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해서 간단히 적어 봤습니다.^^
조선조의
정사 야사를 가끔 읽어보면
골프만큼은 못 하지만 ㅎㅎ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더라고요.
퍼팅박사님
재미읽게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외람되게도
위에 언급되신 분들 중에
저의 친 할아버님도 계시는데요
존칭을 생략해서 후손으로서 많이 송구스럽습니다.
혜량해 주시겠지요.^^
@연꽃하나 우선 연꽃하나 님의 조상님께 경칭을 생략하는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폄하하자는 의도는 전혀없이 역사속 인물을 일일이 경칭을 붙이지 않음은 제글쓰기의 일종의 편리성이다 라고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연꽃님께서 쓰신대로 조선의 역사는 고려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성계등의 진보혁명파와
고려를 지키자는 보수파의 대립에서 이성계등의 성공으로 조선이 태동하지요
결국 두문불출로 회자되는 고려충신보수파 계열이 훗날 말씀하신대로 성종시대 김종직을 필두로 정계에 나서게 되는데 이들이 조선의 건국세력,훈구 권신파와 주도권 정쟁을 펼치게 되지요.
그와중에 4대사화가 발생하고 숱한 사림세력들이
@퍼팅박사 목숨을 잃고 세력이 약화되는 일을 겪게되지요.
그후 선조이후 사림세력들이 훈구파를 누르고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고 김효원의 동인과 심의겸의 서인으로 나뉘고 자기들끼리 죽고죽이는 당쟁을 벌이게 되지요.
아시다싶이 이 당쟁으로 조선은 숱한 고난을 치르게 되고요~~^^
연꽃님께서 일러주신 말씀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 아마추어의 어설픈 답사 이야기다라고 혜량하시고 심심풀이 삼아 읽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ㅎ
긴글 읽어주시고 자세한 답글 달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술하신 글 4대사화중 갑자사화는 성종시대가 아니고 역시 연산군시대 생모 죽음에 얽힌 사건으로 사림과 훈구세력등 다수가 피해를 입은 사화
@퍼팅박사 로 알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기묘는 중종
을사는 명종시대이고요~^
@퍼팅박사 아네~
성종과 성종비 윤씨(연산군의 생모)와의 부부싸움으로
인해~결과적으로
성종은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됩니다.
이 사건을
훗날 연산군이 알게되고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한
일파들에게 복수한 사건을 갑자사화라고 알고 있습니다.^^
@연꽃하나 네.
연관성에서는 맞습니다.
고맙습니다~^^
@퍼팅박사 참!!
그리고
퍼팅박사님의 본문 글이 아니라
저의 댓글에서
제가 할아버지를 언급하면서 존칭을 생략했답니다.
그래서
저 스스로 송구스럽다는 표현을 했고요.^^
경북 청도 서원리에 사액서원인
자계서원이 있습니다.
유형문화재인데요,
조의제문의
무오사화로 화를 입으신
조선의 대학자
탁영 김자 일자 손자 선생님의 서원인데요,
무오사화로 참변을 당하신 후
서원 앞의 개울천이 사흘동안 자색빛 색깔을 띄고 있었다고 해서
자계서원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탁영 김일손 선생님의
직계 후손입니다.^^
사진은
자계서원입니다.
@연꽃하나 아하,, 김 일손 선생님의 후손이시군요.
이글은 저로선 참신기한 경험을 하게 하는군요.
그저 역사속의 인물로만 여긴 막연했던 이름들이 오백년이상 흐른 지금도 면면이 살아내려오는 신기한 경험을 주는군요.
사림의 태두이자 조선건국 한세기만에 비로서 주류로 진출하신 분이 직계 조상님이라시니 역사를 대하는 시각이 남다를수밖에 업으시겠군요.
정암조광조 선생의 묘도 사액서원이고 대원군의 서원철폐시도 존립한47개서원중 한곳이라고 합니다^~
@퍼팅박사 네^^
자계서원은 현종때 사액되었다가
대원군때
사액서원이지만 " 봉양은 일인일원"의 원칙에 의해
훼철되어 1984년 다시 복원 되었답니다.
그나저나
퍼팅박사님의 역사견문이 대단하시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언제~ 퍼팅도 한수 지도 바랍니다. ㅎㅎ
따뜻한
휴일 저녁 되십시요.^^
@연꽃하나 송구스럽습니다~~^
좋은 주말 밤 되십시요~^^
유승님.
아하, 역사속 실존인물의 후손이라 하시니 조금신기합니다~^
역사속 인물이야기는 사실 쓰기가 쉽지않습니다.
어느쪽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입장이 되기 때문이지요
저야 강원도 벽지 벼슬과는 무관한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역사속 인물을 '그야말로 역사속 인물' 로보는 조금은 무심한 편이지만
유승님과 같은 분들은 조금 다른 느낌이겠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조상님의 유적답사를 하고 이야기도 듣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딘.
제 엉망인 골프 레슨도 겸해서요~~^ㅎㅎ
부족한 긴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지요?
저희야 직계후손이니까 어릴때부터 시제도 다니고 성묘도 다니면서 어른들한테 들어왔으니까 훌륭한 조상님으로 알고 있을수밖에 없지요.~~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의 기록물이니까, 박원종, 저희 할아버님인 류순정, 성희안, 이 세분의 중종반정 주역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할수밖에 없었겠지요. 어쨋든 영의정까지 지내시고 그 후손들도 판서를 포함해 여러 고위직을 지내셨으니 저희 후손들입장에서는 자랑할만한 할아버님으로 기억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한양조가 24대손입니다.
우리 집안의 어른이시죠.
그냥 초야에서 골프나 치시지..뭐하러 청와대에 가셔서..ㅠㅜ
암튼 감사합니다.
ㅎㅎ~~
청와대~~^ㅎㅎ
삼일 연휴 쉬고 들어오니
이런 좋은 글이 있어서 참 좋아요.
제가 기대했던 글이라
더 기분이 좋아요.
저는 지식이 없어서
글에 대한것에 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서
읽는것 자체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연휴는 잘 보내셨죠!
늦게 인사드립니다. ~^^ _()_
연휴, 잘 보내셨군요~~~ㅎㅎ
이번은 제글을 읽고 연꽃님과 유승님의
댓글을 같이 읽는게 이해에 큰 도움이 되듯합니다.
저도 아는건 많지 않습니다.
다만 무언가를 보고 인상 깊으면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서
끄적여대는 버릇이 있고
그 끄적거림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서
부족하나마 이렇게 올려보는 겁니다.
해 골프님처럼 제글을 읽고
도움이 된다면 저로서야 큰 보람이지요~~~ㅎㅎ
긴글 읽느라 애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