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의 꽃은 뭐니뭐니 해도 제사일 것이며 그 제사를 지내는 당위성에 대한 철학적인 논거는 효이며, 효는 다시 인류 보편적인 구세의 메시지 仁으로 회귀된다. 공자가 논어에서 그토록 외치던 仁의 현실적인 모양이 바로 제사가 아니던가. 제사에 대한 의식이 똑바로 박혀 있으면 유자요, 제사에 대한 의식이 희미하면 그는 유자가 아니다. 진정한 유자가 되고 싶거든 아버지 제사부터 구구한 핑계를 대지말고 확실하게 지내라. 과일하나라도 정성껏 씻거나 다듬어서 올리고 절 한 번이라도 그냥 요식행위로서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만 안 받으려고 하지 말고 깊숙이 올려라. 엎드려서 너무 오래 있구나 할 정도로 쉽사리 무릎을 떼기 힘든 것처럼 일어나라. 주역에 [백리진경 불상비창]이란 말이 있다. 중진뢰에 나오는 말이다. 뢰괘는, 즉 우레를 나타내는 이 괘는 인간 생활에서는 '동작' '움직임'을 상징하는 괘인데, 64괘 중에서 그 뢰괘가 겹치는 중진뢰는 범벅쏘시개 같은 어지러운 상황, 또는 그런 세상에서 침착할 것을 요구하는 괘이이다. 우리 현대사 같은 경우 4. 19 전후 같은 때를 말함이리라. 이런 때 정치 지도자에게 해당하는 괘가 중진뢰의 저 구절일 것이다, "백리를 울리는 우레가 쳐도 제사상에 올리는 술잔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아무리 경거망동하는 자라도 일단 제사상 앞에 꿇어 앉으면 조신해 지는 법이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술잔을 받아들었다가 갑자기 우레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도 백리 사방을 놀라게 하는 우레 소리가 난다면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술잔을 내동댕이치고 말리라. 그런 경우에도 침착하라는 말이야 말로 침착의 극대치일 것이다. 침착하라는 비유를 하필이면 제사상 앞에서 술잔을 든 비유를 한 것이 재미있다. 제사에 대해 유가의 입장을 떠나 인류학의 관점에서 봐도 여러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제사의 형태는 각 종족마다 각 사회마다 양식은 다를 망정 다 있다. 심지어 가장 유가의 제사를 반발하며 우상에 절하는 행위라고 매도하는 기독교에서 조차 구약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일이 빈번히 나온다. '번제'라는 말이 바로 '제사'이다. 다만 초기에 우리말 성경을 만들던 사람들이 '제사'라는 말을 쓰면 유가의 '제사'를 연상시킬 것을 염려하여 고심 끝에 '번제'라고 했을 따름이다. 수많은 형태의 제의 중에서 유가는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그 제사 양식을 다듬기 시작하여 가장 합리적인 시간, 가장 덜 지루한 양식을 찾아내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카톨릭이나 불교에서도 제의의 형태가 있지만, 그러나 그쪽의 제의는 이미 그 종교의 신앙 속에 깊이 함몰되어 그 제의 자체에 대한 의미를 크게 두지 않고 있다. 실제 카톨릭이나 불교의 제의에 참가 해보면 주관하는 사제나 스님이 일방적으로 다 해치우고 참여하는 일반인으로서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유가의 제사는 아무리 큰 제사라해도 초헌 아헌 종헌 삼잔이며, 그 제사가 끝나기 까지 일반 제관들의 참여도가 매우 높다. 말하자면 적절한 변화를 주어 덜 지루하게 하고 있다. 제사는 왜 지내는가. 그것 다 헛된 미신 행위가 아닌가. 이 대명천지에 귀신에 제사지낸다는 건 참으로 황당한 일 아닌가. 나는 그런 말을 더러 더러 듣는다. 어디서 들은 '제사는 정성이다'라는 말을 하며, 그렇다면 자신의 정성대로 하면 되지 굳이 동두서미니 조율이시를 이야기할 필요가 어딧는가 한다. 그렇다. 제사는 정성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을 잊지 않으려는 정성에서 기인된 것이 기제사가 아닌가. 그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면 일정한 양식이 필요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지낼 때마다 달라진다면 결국 그러한 제사는 안지내도 되는 결론으로 가고 말 것이리라. 제사의 양식은 절대 불변은 아니었다. 그 양식의 변화상을 보면 시대를 따라 계속 발전되어 왔다. 율곡선생의 제찬도를 보면 김치가 올라 있다. 그런가하면 임란 이전엔 제사를 산소에 가서 지냈다가 임란 이후엔 정침에서 지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제사에 대해 오늘날에도 논의가 참 분분하다. 이 쪽의 전문가연하는 사람들은 강연하러 다니면서 퇴계선생 제사, 율곡선생의 제사, 또 누구의 제사 모양을 담아 보이며 여기는 이렇게 차렸네 이 분 제사는 이렇게 되어 있네 하며 파워포인트로 영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중용한 것은 제사 상차림 보다 왜 제사를 지내야 하나라는 제사의 당위성에 대한 논리 제공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아, 제사란 정말 중요한 일이구나, 하고 깨달았다면 그 다음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 될 것이리라. 주변에서 하도 제사 폐기하는 집이 많아지자 우리 와이프 같은 경우도 이렇게 제사지내는 집은 우리 집 뿐이라고 번번이 나에게 타박을 한다. 그러면 나는 그런다. "당신 자식들이 당신 제사를 안 지낸대도 당신 마음이 편할까." 우리가 몹시 목마를 때 물 한 잔을 얻어 마셔도 마신 뒤엔 고맙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법인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있게 한 분에 대한 고마움을 외면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비정이 아닐 것인가. 그러한 비정한 행동은 다시 자신이 또한 자식들로부터 비정한 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할아버지 제사에선 사촌들이 모여 할아버지를 추억하는 시간이요, 아버지 제사는 형제들이 모여 아버지를 회고하는 시간이다. 제사는 안 지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처럼 부자간의 소송 형제간의 소송도 예사가 되어 있는 현대에서 매몰된 인간성을 살리는 길은 돌아가신 부모님 제사에서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생일상이라도 그득히 차려드리고 그 앞에서 깊숙이 절을 올리는 데서 출발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