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하늘에 드리워진 보름달은 촘촘한 빛을 뿌리며 빛나고 있었다. 해가 질 시간부터 적빛이던 하늘은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피빛으로 변하다 어느새 검은빛과 구분지을 수 없을만큼 짙은 검붉은 빛으로 변하였다.
달빛은 반구형의 천장 중앙에 뚫린 구멍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둥근 구멍의 모양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쳐 촛불 하나없이 캄캄한 천장 아래에 놓인 돌 제단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돌 제단 위에는 검은 머리칼에 흰 피부를 가진 소녀가 누워있었다. 소녀는 숨도 쉬지 않으면서 아직도 살아있는 듯 장밋빛이었고 입술은 붉은 빛이었다. 달빛을 받아 하나 하나 붉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은 묘하게 아름다웠다.
"달의 여신이여."
어둠 속에서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목소리가 울리자 고요하던 바람의 흐름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여기 제물을 바치나이다."
다시 이어진 그 소리에 미묘하게 움직이던 바람이 점차 리듬을 타고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정확하게 재단의 소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엄숙하면서도 깊이가 깃든 그 목소리를 따라 수십의 목소리가 그 공간을 울렸다.
"들어주소서."
그리고 그 때였다. 희미한 불빛이 하나 둘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소녀를 둘러싼 원에서 생겨나는 빛이었다.
빛이 생겨나자 원 안에 서 있던 아홉명의 사람들이 비춰졌다. 검은 로브를 쓰고 높이 손을 들고 있던 그들의 발 밑에서 검붉은 빛이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간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바르락거렸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붉은 빛에 마치 생기를 흡수당하듯 몸이 바짝 바짝 마르다가 녹아버렸다.
아홉 사람이 죽고 흐르는 액체가 붉게 빛나는 원을 적시자 그 요사스러운 원은 더욱 붉게 빛나다못해 검붉은 빛이 되어갔다. 그것은 마치 오늘 석양이 붉어지다못해 검붉은 빛이 되던 것과 똑같은 색이었다. 불길한 하늘과 똑같은 빛깔. 요사스럽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했다.
붉은 원이 희미하게 붉은 빛이 도는 검은 빛을 사방으로 흩뿌리자 그제야 그 공간에 있던 자들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반구형의 천장에서 땅 아래까지, 그 곳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자들이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자들로부터 시작해서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있는 자들, 허공에 앉은 자세를 하고 있는 자들까지 그들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게 있으면서도 한점 흐트러짐없는 자세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엄숙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듯 보였다.
빛이 허공을 계속 맴돌고 있다고 느껴졌을 때 그 빛은 점점 숨을 쉬듯 조금씩 오그라들었다 뿜어져나왔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순간 숨을 멈추듯이 약간 오그라든채 멈춘 것처럼 보여졌을 때 제단의 소녀에게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숨까지 멈춘 듯한 고요가 그 순간의 긴장감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빛이 다 빨려들어가자 마치 처음부터 그런 원은 없었던 듯, 그리고 아무도 없었던 공간처럼 달빛이 비추는 소녀와 제단 외에는 다시 암흑이 되었다. 그리고 의식없는 듯 보이는 소녀의 손가락 끝이 까닥하고 움직였다. 까닥인 손가락은 몇 번 더 까닥거리기를 반복하더니 손 전체, 팔, 몸으로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소녀는 눈을 떴다. 붉은 색의 눈동자는 안개에 가려진 듯 희뿌연 느낌이었다. 소녀가 자리를 박차자 몸이 붕하고 허공에 떴다. 그리고 음율을 조율하듯 소녀의 손가락은 공중에 뜬 채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의 박자에 맞추어 바람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풍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광풍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사람을 찢어발길만큼 날카로운 바람이 되어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소녀는 그 원에서 나던 빛만큼이나 섬뜩한 느낌을 주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휘자의 손짓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손짓에 그 날카로운 바람이 흔들리며 피분수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암흑 속에 가려진 비명소리와 함께 흩날리는 그 피분수를 소녀는 조용히 감상하듯 미소짓고 있었다.
광풍에 몸이 찢겨나는 소리, 고통을 참아내지 못한 비명소리가 어느새 잦아들더니 바람의 칼날에 찢겨나가는 돌 부서지는 소리에 섞인 희미한 비명 몇개만이 들렸다. 그 소리에 귀기울이던 소녀는 마지막 남은 비명소리조차 잦아들자 조용히 손을 우아하게 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있던 몸이 천정 위로 올라가더니 그 곳을 빠져나와 있었다. 소녀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로, 땅으로 도망가는 자들을 보았다. 소녀는 손가락을 허공에 휘저었다. 마치 바람이 살아서 움직인 듯이 그들의 뒤를 칼처럼 예리해진 바람이 갈랐다. 온 몸이 피분수를 뿜으며 두개로 갈라졌다.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은 인간들의 마을이었다.
피빛 달은 그녀의 뒤를 섬뜩하게 비추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입가에 띈 미소만큼이나.
아라레.
아라레. 아라레라 하였네.
아라레, 아라레 아라레라 하였네.
흩어진 세월, 후회로 망울져
돌이킬 수 없는 시간만을 그리워하네.
아. 아아. 아아. 아아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네.
내겐 죽은 이를 달랠 진혼곡 밖에는 없어.
사랑하는 이도,
미워했던 이도,
이 노래로 편안히 잠들기를.
편안하게 잠들기를.
그래서 이 죽은 땅에 평화를 다시 가져오기를.
- 검은 땅의 진혼곡
50년 전, 이 땅에 마녀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은 붉은 달이 뜰 때마다 사람들을 죽이는 마녀들이 사라진 걸 기뻐했다.
그러나, 북쪽에 생긴 거대한 검은 땅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 땅은 어떤 인간도 살아갈 수 없는, 끔찍하고 지독한 땅이다.
수도 없이 많은 괴물들의 터전이며 식물들의 터전이고 흐르는 물조차 독물인 끔찍한 땅이고
한번 들어가면 누구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땅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아니, 마녀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ㅡ
검은 땅이 생겨나고 50년 뒤에 일어난
한 마녀의 이야기다.
발 하나 디디기 힘들 정도로 빽빽한 숲, 큰 나무 줄기들에 가로막혀 땅조차 밟을 수 없었다. 들이쉬는 공기조차 은은한 독기를 머금고 있을 만큼 치명적이나 이 독은 식물들과 괴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맑고 깨끗한 공기였다.
저벅.
누군가가 그 고요한 숲에 나타났다. 아니,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50년 전부터 그녀는 이 숲에 살아온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무 줄기 위에 발을 딛고 선 그녀는 소녀의 외모였다. 이제 겨우 17세쯤 되었을까. 유독 붉은 입술과 보라색과 갈색의 다른 색을 띄고 있는 오드아이(양 눈의 색깔이 다른 눈동자를 말한다. 한 쪽 눈은 보라색, 다른 한 쪽 눈은 갈색이다.)가 눈에 띄는 소녀였다. 소녀의 표정은 그 나이 또래에 어울리지 않게 지독하게 무심한 표정이었다. 원래 그런 표정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은 그랬다. 소녀가 한 걸음 더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바스락.
어디선가 갑자기 소리가 들렷다. 깜짝 놀라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울 오른 쪽 수풀 사이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피칠갑을 한 갑옷을 입고 붉은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긴 칼을 들고 있는 그 남자가 찌를듯한 살기가 가득한 눈초리로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는 밸 것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소녀의 표정은 무심했다. 아니, 지독히 담담했다. 소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남자가 매서운 눈빛을 지으며 검을 움직이려고 하자 소녀가 주머니에서 사과를 천천히 꺼냈다. 그 사과를 보자 남자의 행동이 멈칫했다. 소녀는 그 사과를 깨물었다.
아삭.
흘러나오는 맛있는 과즙을 삼키며 소녀는 입에 물은 사과 조각을 씹었다. 남자는 소녀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해야할 일조차 잊은 듯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소녀는 맛있는지, 맛없는지도 분간할 수 없을만큼 무표정한 태도로 사과를 다 씹고는 툭하고 아무데로나 던졌다.
데구르르르.
바닥에 떨어진 사과 찌꺼기가 나무줄기를 타고 굴러가다가 남자의 발 옆에서 멈추었다. 남자는 아까보다 더 긴장한 태도로 눈에 핏기까지 세우며 소녀를 노려보았다. 검을 내리칠 기세였다.
"자."
그러나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방 안을 뒤져 새 사과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남자가 노려보기만할 뿐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자 소녀는 땅바닥에 떨어뜨려 굴러가게 내버려뒀다. 사과가 남자 옆으로까지 굴러가서 멈추자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먹기 싫음 말던지."
그리고 남자가 어떤 움직임을 보이기도 전에 그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남자는 소녀가 자신의 앞에 있을 때 칼을 높이 치켜올렸지만 어째선지 내려치지 못했다. 두 손을 든 채로 부들부들 떨다가 그는 소녀를 놓쳤다. 어느새 소녀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남자는 다리까지 부들 떨다가 주저앉았다.
그리고 소녀가 떨어뜨려주고 간 사과를 갑자기 움켜쥐고는 허겁지겁 입 안에 쑤셔넣었다. 이 숲에서 그는 5일 이상을 물도 먹지 않고 버텨왔던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먹자 더 허기가 졌다. 먹지 않은 것보다 조금 먹은 것이 더 허기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그 소녀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죽은 이의 안배는 모든 것을 꿰뚫었으나
새로운 인연은 변수가 된다.
예기치못한 인연으로 미래는 바뀔 것인가.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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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른 홈페이지에도 연재하고 있고요,
꽤 오랫동안 틀을 잡아온 소설입니다.
나름대로 정성을 들였으니 예쁘게 봐주세요.
첫댓글 특이하고 매력적인 소재예요. 다음 편, 기대하겠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다음편 빨리 올릴께요!!
왜 다음편 안 쓰시나요 성실연재를 안하시는군요 ㅜㅡ
연중공지를 올린지 한참 되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