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를 거룩한 참회 생활로 깨끗하게 하시어
다가오는 축제를 성실한 마음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37,3-4.12-13ㄷ.17ㄹ-28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스켐 근처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형들이 스켐 근처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지 않느냐?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
17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그들을 찾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그의 저고리, 곧 그가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졌다. 그것은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빵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보니,
길앗에서 오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낙타에 향고무와 유향과 반일향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27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28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십일조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바치는 법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지 설명해줍니다. 바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아서입니다. 바로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지 않아서입니다. 그것을 바치게 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이 주님의 덕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주인님을 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작인들은 이렇게 결의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자신들이 주인님이 되려고 하니 주인님이 죽게 됩니다. 내가 옳다고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진리로 오시는 분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내 안에 능력이 있었다고 믿는다면 전능하신 분을 죽이는 게 됩니다. 내 안에 생명력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성체로 오시는 참 생명이신 분을 죽게 만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고 스스로 살아갈 수도 없고 스스로 옳은 길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모든 것을 해 주시는 분을 죽여 버리는 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못된 소작인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겸손함을 키우고 감사함을 키워 모든 게 주님 덕분임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절대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하듯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님의 마음을 알려면 주인님이 되어보는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면 하느님이 되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된다는 말이 교만처럼 여겨지지만, 이 길이 겸손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김희아 씨는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보지도 못한, 그리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자기 딸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딸을 키우며 그렇게 태어나서 키울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낀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요즘 사순이라 구역 판공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두세 구역씩 묶어서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한 구역에 두세 분씩이라도 냉담하시던 분들이 고해성사를 보러 오십니다. 냉담을 풀기에 성당까지는 너무 멀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공동체 봉사자들, 특별히 반장님들의 역할이 큽니다. 그분들의 설득이 아니면 냉담하시던 분들은 사제에게 고해성사하고 면담까지 하는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공 봉사자분들도 다 느끼시겠지만, 저는 특별히 ‘강생의 신비’를 느낍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재래식 화장실에 떨어진 채변봉투를 주워주시기 위해 그 냄새나고 더러운 곳까지 손을 뻗쳐 그것을 건져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덕분으로 저는 학교에서 혼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가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굳이 가게 되는 것도 하나의 강생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속으로 내려오시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어쨌거나 신자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낮춤이고 아버지가 되어감입니다. 그러며 저를 위해 낮아지신 아버지와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아버지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함으로써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갖게 되는 게 교만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못된 소작인들이 정말 못된 것은 그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맡기며 살게 한 일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받았으면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다 보면 그렇게 베풀었는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주인을 외면하는 잘못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합시다. 선교는 하느님이 되는 길입니다.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하며 고생을 할 때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통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앞에서 십일조를 바치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낮에는 식당, 밤에는 술집을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손님이 줄어 운영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주인은 며칠 간의 고심 끝에, 저녁에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점심을 공짜로 주겠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님이 점점 몰려들어 장사는 나날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가게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글쎄 저녁 술값에 다음 날 점심값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도둑놈 심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공짜만을 좋아하고 또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님께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의 발전이 공짜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봉헌이 있었고, 많은 순교자의 피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신앙인 덕분에 우리 교회가 계속 발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계속 공짜 인생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그 어떤 노력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기도의 연속은 아니었습니까?
공짜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더 사랑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모두 갚아주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포도밭을 일군 다음 소작인들에게 맡기지요. 그리고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역시 마찬가지의 악행을 저지릅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은 존중할 거라는 마음으로 보냈지만,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버리면, 이 포도밭을 차지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예언자를 죽이고, 심지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당연히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욕심과 이기심이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못된 소작인의 모습이 아닌, 겸손한 삶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착한 소작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으로 인정을 받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이다(카네기).
사진설명: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