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방교회와 동방교회(Ⅱ) - 헤어짐과 만남 김성태 신부(前 가톨릭대 교수, 現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교세가 성장함에 따라 로마제국의 행정단위인 속주의 총독제를 본받아 사도들이 세운 교회인 로마교회, 그리고 로마교회를 으뜸 교회로 인정하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교회와 안티오키아교회의 주교들은 관할지역 밖에 있는 교구들에 대해서도 재치권을 행사하였다. 325년에 니체아공의회는 이러한 옛 관습을 승인하면서 서열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로 정하였다. 이러한 교회조직이 총대주교구(總大主敎區)로 발전되었다.
프란체스코 솔리메나 /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Francesco Solimena, The Meeting of Pope Leo and Attila
비잔틴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는 로마법을 반포하면서 명예직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법적 총대주교로 승인함으로써 그는 로마주교(교황) 밑에서 자치권을 갖는 교회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교황 펠라지오 2세(재위: 579-590)와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는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제 동방교회들은 교황을 으뜸으로 하는 총대주교구체제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그런데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비잔틴제국의 다른 총대주교의 관할지역을 정복하자 총대주교구의 균형은 깨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만이 남아 로마교회에 대해 경쟁과 대립의 위치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케롤라리오스는 총대주교구의 독자적 자치권을 주장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유일한 로마제국의 수도임을 내세우면서 로마교회(교황청)와 그리스도 세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동반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강력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총대주교는 그의 관할지역에 있는 서방라틴전례의 성당에서 동방비잔틴전례를 지키도록 명령하였고 신조에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구절의 삽입을 금지하였다.
레오 9세는 두 교회의 관계개선을 위해 실바 칸디다의 추기경 훔베르(1000-1061)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처음부터 잘못 시작되었다. 사절단은 황제를 만나 도도한 자세로 교황의 절대권을 강조하며 서방라틴교회의 전례관습이 전승에 맞는 유일한 것임을 내세웠다. 황제가 중재에 나서서 케롤라리오스 총대주교에게 사절단을 만나도록 권유하였으나 총대주교는 거절하였다.
훔베르토는 케롤라리오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파문서를 작성하여 1054년 7월 16일에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대 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파문소식을 들은 케롤라리오스 추종자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황제는 질서 회복을 위해 파문서를 소각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소집된 교회회의에서 훔베르토 추기경과 일행을 파문하였다. 이로써 두교회가 헤어져 그리스도교 세계는 둘로 갈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결별은 두교회 사이의 공식파문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훔베르토는 레오 9세가 사망한 다음 총대주교를 파문하였기 때문에 파문의 효력은 없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회의에서 파문한 대상도 교황이 아니라 사절단이었다.
1438년 3월에 비잔틴제국의 황제 요한 8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함께 대표단을 이끌고 페라라-피렌체공의회(1431-1445)에 참석하여 연옥, '그리고 성자로부터', 성령, 성체성사,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공동합의를 이루고 일치교령이 반포되었다. 공의회는 "로마의 거룩한 사도좌는 전세계(全世界) 안에서 수위권을 갖고 있으며 로마교황은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의 참된 대리자, 전교회(全敎會)의 으뜸,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의 아버지이며 교사이다"라고 정의하였다. 1439년 6월 6일에 양측 대표들은 일치교령에 서명하였다.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 이후 현대 교황들과 동방교회의 지도자들은 대화를 통해서 분열의 원인이었던 교리논쟁도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일부 고대동방교회의 지도자들은 칼체돈 공의회의 그리스도 논쟁은 신학문제보다는 용어문제에 기인하였다고 인정하면서 가톨릭교회와 함께 신앙공동선언도 발표하였으며 교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합동대화위원회도 구성하였다. 1979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를 방문한 자리에서 신학대화를 위한 '가톨릭-정교회합동위원회'가 결성되어 오늘날 대화의 결실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중,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관계에 관한 서술에 있어서 두 교회 사이의 틈새가 벌어져 결별에 이르게 된 역사적 배경이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결별을 이끈 역사 사건들이 모두 서술되기에는 교과서의 지면이 부족함은 이해되면서도 1054년 결별의 직접적 원인인 케롤라리오스사건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교과서들은 성화상파괴논쟁을 결별의 계기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서방교회의 성화상 지지와 비잔틴교회의 성화상 배척으로 양분되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황이 성화상 파괴를 비난하고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였지만 성화상 파괴논쟁은 비잔틴교회 안에서 황제들과 일부 주교들이 성화상을 반대함으로써 여기에 대부분의 주교들과 수도자 그리고 국민들이 성화상 옹호에 나서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고 아울러 성화상 공경은 동방교회 안에서는 활발한 신심으로 오늘날까지 이루어지고 있음도 참고함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교과서에 '성화상숭경'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을 때에 교사나 학생들에게 우상숭배로 잘못 이해되거나 잘못 전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성화상 파괴논쟁을 다루면서 성화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견해가 올바르게 받아들여지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의 결별과정에 관한 설명을 통해서 초대교회에서부터 교황의 수위권이 확립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고 두 교회의 헤어짐이 교리나 윤리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한 심각한 차이점으로 피할 수 없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여기에는 사소한 인간적 대립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적 교훈이 참고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첫댓글 항상 정성드려 올려주신 자료 감사히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