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방시 모음 25편
《1》
갈대
오정방
미풍에도 흔들려주는 순종
어쩌다 강풍이 몰아칠 때도
심한 몸살을 앓을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는 그 의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는 겸손과
우러러 하늘을 쳐다봐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는 그 순수
아, 나는 오늘 갈대밭에 서고 싶다.
그의 동무가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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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걱정 마라
오정방
한 친구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불림을 받을 때가 되어서
그럴만한 때가 되었기로
그가 먼저 불려간 것뿐이다
이제 우리 친구들
모두 엇비슷 그런 나이가 되었다
왜, 걱정이 되느냐?
걱정 놓아라
염려를 접어라
그런 소리 안 들어도 될 날 오나니
자신이 저 세상 간 뒤에는
절대로 부음을 듣지 않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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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건망증
오정방
40대 때엔
전년前年에 일어난 일도
어렴풋이 기억되더니
50대 때엔
전월前月에 일어난 일도
하나같이 기억이 희미했다
60대 때엔
전주前週에 했던 일도
까마득하여 기억을 더듬는데
70대가 되면
어저께 무엇하며 보냈는지
조목조목 기억이나 할까?
아, 그렇구나
망각하면서 살 수 있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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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겸손과 교만
오정방
진실로 겸손한 자는
대인관계에서 나보다 늘
남을 낫게 여길 뿐만 아니라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조차
언제나 잊고 사는 사람이다
참으로 교만한 자는
자기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스스로는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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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향집 설날
오정방
세상일 접어두고
고향집 찾아가서
설빔으로 차려입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웃음꽃
맛있는 음식
배가 절로 부르리
타관서 멍든 상처
고향가서 치료받고
그립던 일가친척
만난 곳이 낙원이라
덕담에
훈훈한 인정
해 지는 줄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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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치
오정방
일일이
종류를 가릴 것 없이
하나하나
이름을 댈 것도 없이
평생을 먹고도
물리지 않는
김치, 김치
요, 밥도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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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까지도 감사
오정방
젊은 날 참으로 길었지만,
늙어 남은 날 짧지마는
그것까지도 감사한다
은혜로 몸은 건강하지만,
약한 부분도 있지마는
그것까지도 감사한다
이미 이루어진 꿈 많지만,
채 못 이룬 것 있지마는
그것까지도 감사한다
가지고 있는 것은 있지만,
없는 것이 더 많건마는
그것까지도 감사한다
큰사랑 받아 행복하지만,
때론 슬픈 일 있지마는
그것까지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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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는 바보
오정방
욕하면
그 욕을 먹을지언정
따라서 욕하지 못한다
때리면
그 매를 맞을지언정
맞서서 때리지 못한다
버리면
버림을 받을지언정
스스로 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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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동치미
오정방
산천엔 하마 눈이 하얗게 덮이고
북풍이 세차게 부는 겨울밤
구들방 따뜻한 아랫목에서
타는 목을 축이려고
살얼음이 둥둥 뜬
동치미 한 그릇 청해 마시면서도
시치미를 딱 떼고
한마디 감사하다는 말도
인색하게 하지 않는다거나
참 시원하단 말조차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분명
남다른 악취미를 가진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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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무더위도 감사해
오정방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된다
그래도 감사, 감사한 것은
이 정도면 견딜 만하다는 것이다
지구와 태양간의 거리가
이쯤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태양이 이보다 훨씬 가까워지면
무더위를 견디다 못하여
살아남을 자 그 누가 있으리
태양이 지구에서 너무 멀리 있어도
견디기 어려운 저온으로 인하여
그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리니
천지를 짓고 섭리하시는 창조주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런 것까지도 다 헤아리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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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배꼽
오정방
샤워 후에 거울 앞에 서서
배꼽을 바라보노라니
어머니 생각이 난다
길고 긴 삼 백여 날을
저를 통해
푸근한 어머니의 우주에서 유영했던
자랑스런 흔적
저 탯줄 잘리기 전에
당신이 겪었던 엄청난 산통 떠올리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이젠 이 세상에 안 계신
어머니,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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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보릿고개
오정방
나 어릴 적
수없이 들었던 말
보릿고개
무슨 무슨 고개
아무리 높다해도
이 보릿고개처럼
높지는 않을 거라고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랜
지긋지긋한 보릿고개
그 당시엔
이 고개를 넘지 못해
자진한 사람 소식이
심심찮게
신문 사회면을 차지하고
힘겹게 넘던
그 보릿고개 시절엔
종달새도
더욱 슬피 울었더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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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부부
오정방
남남끼리 서로 만나
한 뜻, 한 몸을 이루고
좋은 일도 궂은 일도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쉬운 일도 힘든 일도
서로 나누어 가지는
그래서
잡은 손놓지 않고
험한 세상 나란히
보듬고 아끼며
끝 날까지
사랑하며 인내하며
함께 가야하는
결코 촌수를 잴 수 없는
무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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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쉼
오정방
문장에도 쉼표가 있고
악보에도 쉼표가 있듯이
쉼표,
때로는 우리의 삶에도
적당한 쉼이 필요하리라
더 깊이 보기 위하여
더 높이 뛰기 위하여
더 멀리 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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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시월
오정방
가을은 쓸쓸하나
시월은 슬프잖고
가을은 외로우나
시월은 고독찮네
루루루
풍성한 시월
노래하며 보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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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어떤 연기
- 고향풍경
오정방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움직이는 그림
아침은 아침대로
저녁이면 저녁대로
평화로웠던 내 고향 시골풍경
유년시절,
고향마을 초가지붕
그 굴뚝 위로 피어오르던
집집마다 머리 풀듯
밥짓는 뽀오얀 연기, 연기
근대화로 밀려난 아궁이 문화
그 결과로 인해
이제 어디서 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
아련히 떠오르는 그 옛 모습
고향은
오늘도 가슴속에 살아있다
잊지 못할 기억들은
언제나 머리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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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어떤 연기
오정방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움직이는 그림
아침은 아침대로
저녁이면 저녁대로
평화로웠던 내 고향 시골풍경
유년시절,
고향마을 초가지붕
그 굴뚝 위로 피어오르던
집집마다 머리 풀듯
밥짓는 뽀오얀 연기, 연기
근대화로 밀려난 아궁이 문화
그 결과로 인해
이제 어디서 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
아련히 떠오르는 그 옛 모습
고향은
오늘도 가슴속에 살아있다
잊지 못할 기억들은
언제나 머리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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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여름 산
오정방
더위를 피해 모두들 물을 찾아
바닷가로 강변으로 나갈 적에
바람을 맞으러
여름산을 찾아가 보라
시원한 나무그늘도 좋거니와
계곡을 흐르는 정겨운 물소리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가락
흥에 겨워 능선에 올라서면
확트인 시야와 더불어 맞게 될
산능에서의 산바람에
더위는 도적처럼 달아나고
마침내
여름산의 풍치에 도취되리라
여름산의 묘미를 만끽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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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연탄재
오정방
빙판길 미끄러워
연탄재 생각난다
함부로
차본 적 있다
철없었던 옛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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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입동아침
오정방
늦가을 끝자락에
입동이 찾아드니
가을은 떠날 채비
분주히 서두르고
자욱한
안개속 아침
꿈속처럼 거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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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자연의 소리
오정방
졸졸졸 물 흐르는 시냇가에서
숨죽이고 귀기울여
조용히 그 물소리를 듣는다
잔잔한 음악 같기도 하고
준엄한 교훈 같기도 하고
다정한 속삭임 같기도 하다
살구만한
사과만한
참외만한 둥근 돌 틈 사이로
낮은 데를 향해 흘러가며
끊임없이 들려주는 저 소리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흘러가는 저 물소리
오늘 내 귀에 들려오는
변함없는 저 자연의 소리
낮아져라
겸손해라
사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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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잠버릇
오정방
그래, 별난 버릇이라고 해도 좋고
우스운 습관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루의 피곤을 침대에 눕히고
밤에 잠을 청하기 직전에
집사람의 오른쪽 힘든 다리를
내 배 위에다 끌어 편안히 얹어놓고
오른팔은 내 가슴 위에 올리게 한 뒤
나의 왼쪽 손으로는
아내의 팔꿈치를 감싸주면서
서로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고 잔다
그래야 다리의 피곤이 풀릴 것 같고
그래야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수십 년간 정반대로 그리했던 것을
지금 수년 사이에 이렇게 해주므로
그 동안 많이 귀찮았을 데도
불평 없이 잘 참아왔던 내자에게
사랑의 빚진 것을
조금씩이나마 갚아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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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초록 그 절묘한 색깔
오정방
이 들판과 저 산,
온갖 초목의 색깔을
초록으로 지으신
창조주께 감사한다
붉은색이 아니고
검은색이 아니고
노란색이 아니고
초록색으로 지으신 것을
감사한다
붉은색이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혈기를 부렸을까
검은색이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생각조차 검었을까
노란색이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현기증에 시달렸을까
우리 일상생활에
포근하고 안정을 가질 수 있도록
초록으로 초목을 지으신
창조주의 그 은혜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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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평화와 전쟁
오정방
따사로운 봄날 아침
꽃들은 다투어 뽐내며 피어나고
마을은 이토록 조용하고 평화로운데
저 전장戰場의 봄은
모래폭풍 세차게 불어대고
먹구름 하늘을 가린 채
포성과 비명으로 얼룩지고 있으리
이름 모를 새들 즐거이 노래하고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게
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저 이라크의 하늘 아랜
새들도 집을 잃고 방황하며
무고한 백성들
지금도 생사의 기로에 떨고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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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후회
오정방
때는
이미
늦었지만
같은 일
되풀이
하지 않을
큰
교훈은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