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흔적을 찾아서<2>
<2024년 3월 9일>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흔적을 찾아서<1>] 편에 이어지는 일정의 사진입니다.
계단을 내려와 지봉로와 교차지점에서 동망산길로 접어들어 동망봉터널이 있는 지봉로를 건너면 정업원 옛터가 있는 [청룡사]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우화루], 단종이 귀양가는 길에 이 당우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왕과 상왕을 거쳐 노산군 신분으로 강등되어 유배가는 17세의 단종과 왕비와 왕대비를 거쳐 군부인으로 강등된 18세의
정순왕후, 그 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화루] 우측 끝에서계단을 내려와 쪽문을 열면 비긱이 있다.
1771년 영조가 친히 여기에 거동하여 친필의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우고, 비각 현판 또한 영조의 친필이다.
"前峰後巖於千萬年,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앞산 뒷바위 천만 년을 가리라.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또한 영조는 비각 건너편 봉우리 바위에 "東望峰"이란 친필을 새기게 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채석장을 운영하면서 바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정업원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절로서 양반출신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머물던 비구니의 절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왕궁에서 나온 궁녀 등이 머물던 곳으로, 임금에 따라 억불숭유로 인한 부침이 심했다고 한다.(선조 때 폐지)
"前峰後巖於千萬年,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앞산 뒷바위 천만 년을 가리라.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언제나 비각 문이 잠겨 있어서 백과사전에 게재된 비석 사진을 퍼왔습니다. <퍼온 사진>
동망산길을 따라, 채석으로 인해 절개지 경사가 심한 정업원 옛터 건너편 언덕, [숭인근린공원]으로 향한다.
매년 가을 길일에 보문동 주민들이 동망각에서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며, 마을의 무사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단다.
*** 원래 아래쪽에 있었으나, 보문3지구주택재개발사업으로 철거 후, 2017년 이 자리에 건립.
현판 중 오른쪽 [동망봉] 현판글씨는 영조 친필 집자임.
[숭인재(崇仁齋)] 2018년 개관한 숭인재는 정순왕후 기념공간, 어울림 쉼터, 공중화장실 등으로 구성
[東望亭]
[동묘시장] [여인시장 옛터]
정순왕후는 세조의 도움을 거절한 채, 시녀와 더불어 무명을 짜거나, 紫芝洞泉(자주동샘)에서
자줏빛 염색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정순왕후에 대한 이웃의 도움을 조정에서 금지 시키자
이웃주민들은 새벽 시간에 남자들은 출입할 수 없는 금남의 '여인시장'을 열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영도교] 영월로 귀양가는 단종과 마지막 이별, '영원히 건너간 다리'이기도 하지만 '영원히 이별한 다리'라 하여 '영리교'라고도.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역까지 원점회귀
We go together!!!
♣ 1698년(숙종24)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를 莊陵으로, 정순왕후도 추봉, 능호는 思陵(남양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