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쯤에 KBS방송국에서 나와서 영산나루 동척 문서고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던 일이 있습니다.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를 조명하는 역사 스페셜 프로그램이었는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요즈음은 한국이 어느정도 국력을 갖추게 되니 식민지였던 과거 조선의 역사가 피부에 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들은 일제시에 동양척식회사라는 존재가 조선의 수탈기관이었다는 강한 기억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일 합병의 슬픈 역사와 함께 동양척식회사의 조선 농민에 대한 수탈도 잊으면 안되겠지만
일본의 한 변호사가 조선 농민과 민중을 위해 법정 변호를 하고 그의 일생을 민중을 위해 헌신한 역사적 사실도 있었음을 간과하면 안될 것입니다.
더구나 동척에 의해 빼앗긴 농토의 반환을 위한 재판이었기에 이곳 동척의 문서고에서 함께 후세의 바른 민중의식을 기려보아야겠습니다. 후세 다츠지의 이야기는 정규 고등교육을 받은 일반인에게 너무 생소한 스토리인듯하여 이곳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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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츠지의 생애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양심적인 인권변호사로 활약
일본인 최초로 우리나라 ‘건국훈장 애족장’ 수상
일본판 쉰들러, 「변호사 후세 다츠지」 2010년 8월 15일 한ㆍ일 동시개봉
인간은 누구라도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정직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이것은 양심의 목소리다.
나는 그 목소리에 따라 엄숙하게 ‘자기혁명’을 선언한다.
-1920년 5월 15일 후세 다츠지의 「자기혁명의 고백」 中
ㆍ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후세 다츠지의 묘비에 새겨진 말-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을 통해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는 1920년 5월 ‘전통적인 변호사’에서 ‘민중의 변호사’로 거듭나겠다는 「자기 혁명의 고백」을 선언한 후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양심적인 인권변호사로 활약했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핍박받는 민족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헌신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변호사가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다. 솔직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를 수탈한 일본의 국민이, 일본을 비판하며 독립을 절규하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를 위해 변호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그의 이름은 없다. 2004년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그 이름이 조명되기 시작했다. 2007년 가을, 도쿄의 고려박물관에서는 <후세 다츠지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이 책은 <후세 다츠지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강연회의 강연록과 후세 다츠지의 행보와 사상에 대한 논고 두 편을 엮어서 만든 책이다.
자민족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고결한 양심으로 빛났던 후세 다츠지. 그의 생애는 한국과 일본, 더 나아가 전 세계가 나아가야 할 화합의 길을 제시해준다.
■ 후세 다츠지布施辰治(1880년 11월 13일~1953년 9월 13일)
후세 다츠지는 1880년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에서 태어났다. 1899년 고향을 떠나 도쿄로 상경해 메이지 법률학교에 입학했다. 1902년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고 1903년 4월 후츠노미야 지방 재판소에 사법관 시보로 부임했다.
ㆍ일본판 쉰들러, 후세 다츠지
후세 다츠지는 자신의 사상적 토대와 양심의 잣대에 어긋나는 법관의 자리에 회의를 느끼고 전도유망한 사법관 시보의 자리를 떠나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전통적인 변호사’에서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한다는 장문의 「자기혁명의 고백」을 선언한 후, 가난한 민중들과 일본 내 핍박받는 민족을 위해 무료 법률 상담과 강연회를 여는 등, 주요 활동 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고, 사회운동에 더욱 매진했다.
ㆍ일본인 최초 우리나라 ‘건국훈장 애족장’ 수상
후세 다츠지는 특히,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농민 들을 위해 헌신했다. 관동대지진의 잔혹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와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의 사죄문을 언론사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조선인 지원활동으로 변호사 자격을 세 번이나 박탈당하고 두 차례나 투옥되기도 한다.
후세는 1953년 만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고별식 장례위원으로 참석했다. 조선인에게 있어 아버지와 형 같은 존재였던 그는 식민지 민중의 ‘벗’으로 때로는 ‘동지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2004년 10월, 한국정부는 일본 식민지 시대에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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