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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를 찾는 사람들[봉찾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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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추억들 스크랩 3.1절 특별기획 - 어느 육형제의 독립전쟁
자미부인2 추천 0 조회 44 11.07.08 22: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일제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한 노인이 괴상하게 목매어 자살하다? 

 

 

역사학자들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세계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또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투쟁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끈질기게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독립투쟁을 벌였을 뿐아니라,

아버지의 대를 이어 아들들까지도 독립투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부분 잊혀진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1932년 11월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를 한 번 보시죠.

 

 

‘대련수상서유치중 괴! 액사한 노인(大連水上署留置中 怪! 縊死한 老人)’

 

'대련수상'일제가 중국 대련에 설치한 수상경찰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대련의 한 경찰서에 유치되었던 노인이 괴 액사, 괴상하게 목을 매어 죽었다'는 것입니다.

 

기사 내용을 좀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에서 내려 일본 경찰에 조사를 받던 중 유치장 창살에 목을 메어 죽은 이상한 노인이다'

 

이 기사를 보면 참 의아한 부분이 많습니다.

살 날이 많지 않은 노인이 자살을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경찰이 감시하고 있는 중에 유치장 창살에 목을 매어 죽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 여기 보면  O O운동의 중대인물’,

 

경찰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워진 듯 한데 도대체 어떤 운동이었을까요?

이 노인은 누구였을까요?

 

이 기사만 봐서는 이 노인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은 채

중국에서 일어난 일을 이렇게 우리나라 신문에까지 실린 것입니다.

 

3.1절 특별기획 역사스페셜은

일본의 한 유치장 감옥에서 차디찬 시체가 된 한 노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노인의 죽음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32년 11월 17일.

그로부터 국내신문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기록을 찾아봤다.

 

노인의 죽음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노인이 죽은 후 일본 수상경찰서의 긴장된 분위기였다.

또한 노인이 죽을 때 사용했다고 한 빨랫줄의 출처 또한 명확하지 않았다.

 

의문의 죽음이 일어난 중국의 대련(大連)경찰서는 어떤 곳일까?

 

중국의 5대 무역도시 중 하나인 대련.

 

요동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대련은

예로부터 동북지방의 관문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1930년대 대련은 일제의 통치하에 있었다.

중국침략의 전진기지로써 일제는 이곳에 일본관동군사령부를 설치했다.

 

의문의 사건이 있었던 일본 대련수상경찰서가 있었던 곳은 여객터미널 앞,

경찰서 자리엔 현재 대련항무국 건물이 있다.

 

당시 대련경찰서는

배를 타고 대련으로 들어오는 독립운동세력을 검거하기 위해

삼엄한 경비망을 펼쳐놓고 있었다.

 

 

 

1932년이라고 하면 일제가 만주침략한 직후거든요.

따라서 독립운동 세력에 대해선 씨를 말리겠다는 의식이 대단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이 특히 관동군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대련경찰서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선착장에 도착한 노인은 일제의 검문을 받고 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노인은 독립운동가가 아닐까?

노인에 대해 신문마다 지워져 있는 두 글자는 ‘독립(獨立)’이 분명했다.

 

1932년 11월 22일. 드디어 노인의 정체가 밝혀졌다!

우당 이회영!

당시 나이 66세,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라고 했다.

 

이회영의 죽음이 밝혀진 뒤에도 각 신문마다 이회영의 기사를 싣고 있다.

이는 이회영에 관한 당시 사회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 말해주고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

세상을 떠나기 전 이회영이 마지막 입고 있던 옷은 고국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하는 그의 옷에는 붉은 선혈자국이 선명했다.

 

 

 

“지금 가장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따님 규숙씨가 시체를 보고 한 말이죠.

모포에 선혈이 낭자했다고 한 말은 자살로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거죠.

자살을 했다는 것은 또 분명한 흔적이 있잖아요.

그런 점으로 볼 때 고문에 의한 타살이 아닌가 보는 거죠.”

                                                                                        - 서중석 교수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일제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회영.

그는 누구일까?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

이회영을 알기 위해 취재팀은 안양에 있는 이회영의 후손을 만났다.

 

이회영의 막내아들 이규동씨.

아버지 이회영이 세상을 떠날 때 이규동씨는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가

오직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아버지의 유품을 통해서였다.

 

아버지를 말해주는 유품은 또 있었다.

 

이규동씨는 취재팀에게 어머니의 자서전을 보여줬다.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모진 풍상을 겪은 이은숙은 자식들을 모두 키우고 말년에 이 기록을 남겼다.

 

 

 

“아버지에 대한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추도회다 뭐다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게 없으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절실히 느끼셔서 나라도 이런 기록을 남겨야 되겠다 해서 쓰셨어요.”

                                                                           - 이규동, 우당 이회영 셋째 아들

 

5년의 세월동안 한지 200장에 꼼꼼히 써 내려간 이은숙의 기록은

잊혀진 독립운동가 이회영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취재팀은 이은숙의 수기를 통해 이회영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그가 신흥무관학교의 발기인이라는 것이었다.

 

 

 

 

2. 서간도 독립운동의 수령 이회영!~

            신흥무관학교를 비롯 십여 개의 민족학교를 세우다!~  

 

 

 

“바로 이 분이 독립운동가 이회영입니다..

다소 낯설지만, 1930년대 우리 사회는 이 이회영의 죽음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의 죽음에는 독립운동가와 많은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이회영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 위치나 비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하면 아마 모르는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지금 보시는 이 사진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신흥무관학교의 수업장면을 찍은 것입니다.

밭을 갈고 있는 생도의 모습이 보이시죠.

당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 뿐아니라 이렇게 영농도 했습니다.

 

 

 

리고 지금 보시는 이 사진은 해방후 조국에 돌아온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만든 신흥학우단의 사진입니다.

이렇듯 신흥무관학교가 우리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수기를 통해

이회영이 신흥무관학교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취재팀은 중국 요녕성 신빈현 인민정부를 찾았다.

당사관리위원회, 이곳에서 만난 조문기 선생은 한인 독립운동가를 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다.

그는 그동안 수집한 이회영에 대한 기록들을 보여줬다.

 

“여기에 있는 자료들 중 이회영에 관한 기록은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여러 자료에서 이회영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 조문기 교수, 무순시 사회과학원 연구소장

 

중국과 일본에서 편찬한 만주지역 항일운동사엔 이회영의 활동상이 담겨 있다고 했다.

이회영에 대한 기록 중 취재팀의 눈길을 끈 것은 한 장의 청원서.

 

‘동북삼성총독에게 보낸 청원서’한인대표로 이회영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인즉 중국에 이주해온 한인들이 생업을 유지하게 땅을 사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회영이 토지를 매입한 곳은 어디였을까?

 

중국 류하현 삼원포.

황량한 들판 끝머리에 작은 마을 추가가가 있다.

 

 

한일합방 이후 한인들은 고국과 가까운 이곳 추가가로 대거 이주해왔고

이회영이 중국으로부터 가장 먼저 매입한 곳도 바로 이 추가가 일대다.

 

 

 

조선족 이민과 함께 당시의 흔적을 찾아봤다.

 

이회영과 한인들은 마을 앞 대고산에서

독립기지건설을 결의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회영 일가는 이곳에서 토지를 매입하고 집을 지었습니다.

막 도착했을 때는 농사를 지으면서 항일운동의 길을 함께 모색했습니다.

 

처음에 세운 것은 경학사

농사를 지으면서 민족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청년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습니다.”

                                                                                   - 조문기 교수

 

이회영과 함께 활동한 이상룡의 문집 <석주유고>에는 경학사의 취지문이 실려있다.

그 취지문의 내용은 경학사의 성격을 말해준다.

 

 

주민자치단체였던 경학사는

내부에 신흥강습소를 설치하는데

이것이 초기 신흥무관학교다.

 

독립군양성의 신호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 년 후 이회영은 새로운 독립군기지로 이동한다.

 

 

중국 통하현 합니하.

추가가에서 40킬로미터 심심산골을 들어가면 합니하가 있다.

 

마을은 강 너머에 있다고 했다.

마침 합니하가 꽁꽁 얼어있어 취재팀은 마을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마을을 들어서자 드넓은 분지가 나타났다.

밖에서 보이지 않는 이 천연요새에 뜻밖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곳에 살았다는 한 주민은

이곳에 있었던 신흥무관학교 터를 알려주었다.

 

“바로 저기예요.

저기 집들이 있는 곳에 학교가 있었지요.”

                                                            - 마을주민

 

합니하로 건너온 이회영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이곳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의 규모와 형태는 어떠했을까?

 

최근 영문출판된 김산의 <아리랑>을 통해 대략적이나마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 최연소로 입학한 김산은 당시 학교 전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생도들이 영농을 하고 있는 이 빛바랜 사진 속에서 건물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자료를 근거로 신흥무관학교를 복원해봤다.

교실은 산허리를 따라 18개가 나란히 줄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넓은 분지는 연병장으로 사용되었다.

 

 

"신흥무관학교애국지사를 배출함으로써 후에 무장부대를 세우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한국은 처음에는 주로 사상적인 항일운동만 펼쳤는데

신흥무관학교는 그들에게 군사기술을 가르쳐 훗날 무장투쟁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조문기 교수

 

독립군을 양성할 지휘관을 목표로 하는 만큼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았다.

 

일반 군사 교재는 대부분 일제시대 금서로

우리나라의 말과 지리, 역사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재인 <국민독본>의 내용을 보자.

 

우리 민족의 역사에 빛나는 승전과 명장들을 소개함으로써

생도들에게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이렇게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약 3,500여 명.

이들은 청산리전투 등 무장투쟁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의열단 활동과 같은 의열투쟁,

그리고 1945년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던 광복군 활동까지

독립군 활동의 주축으로써 맹활동을 펼쳤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각지에 제2의 신흥무관학교를 만듦으로써

만주 또는 중국, 러시아지역의 항일투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흥무관학교 같은 경우는 꼭 만주에 영향을 끼쳤다기보다도

한국 독립운동사 전체에 있어 무장투쟁에 있어서는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무관학교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죠." 

                                                                                       - 박 환 교수, 수원대 사학과

 

이회영의 활동은 신흥무관학교 설립으로 그치지 않았다.

 

'노학당 유지(동창학교 분교터)'

 

만주 길림성 환인현에 서 있는 이 비석은

일제시대 민족교육학교인 동창학교의 존재를 말해준다.

 

그런데 설립 초기 이 학교의 재정을 지원해준 사람 가운데 이회영이 있었다

 

"이 학교는 항일투쟁을 위한 혁명학교였습니다."

                                                                       - 마을 주민

 

신흥무관학교와 마찬가지로

동창학교 역시 수많은 독립투사를 양성했다.

 

"이회영 선생은 이곳 외에도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조선인과 중국인이 항일투쟁을 하는데 있어 필요한 사상계몽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 조문기 교수 

 

이회영 선생의 자취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취재팀은 길림성 매하구시를 찾았다. 

 

매하구시에 위치한 산성진 조선족 중심학교

80여 년전 이 학교 역시 이회영에 의해 설립되었다.

 

"우당 선생님이 생각하시기를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몇 해 사이에 완성되지 않을 거다 이거예요.

 

아주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생각해서

우선 후대교양(교육)을 해가지고

그 사람들에게 문화지식을 주고

그 사람들에게 우리 독립사상을 불어넣어 주고 해서

한국의 독립은 후대들에게 밀어주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학교를 여기저기에 돌아가면서 세우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남만주(서간도)에서는

이회영씨를 우리 독립운동의 수령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 김창범 교감

 

독립투쟁을 위해 십여 개의 민족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남만주 사람들에게 이회영은 독립운동의 수령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3. 나라를 잃고!...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서간도 삼원포로 향한다!~

 

 

"남만주 일대의 독립운동의 수령!

이것이 남만주 사람들의 이회영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 신흥무관학교를 시작으로 이회영은 남만주 일대에 수많은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교육활동이 아니라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 하나를 만드는 데는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 같은 경우는 그 설립 자금이 지금 돈으로 몇 백억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자금을 모으는데도 이회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회영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이회영의 출신을 알기 위해 족보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회영은 경주이씨 상서공파 35세손.

 

"그 유명한 이항복이 경주이씨 25세손입니다. 영의정을 하셨구요.

또 영의정 하셨던 분이 아들 종성이란 분이 계십니다...."  

                                                                      - 봉성기,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전문원

 

이회영 가문은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아버지 이유승도 이조판서를 지낸 분이다.

 

이유승은 슬하에 모두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 넷째 아들이 이회영,

그리고 다섯째 아들은 우리나라 초대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다.

 

청년시절 이회영의 자취를 찾은 곳은 상동교회.

 

'김상옥 열사 추모회'

지금도 해마다 애국열사의 추모회를 열고 있는 상동교회는

한말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자료실.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신학문을 배운 이회영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상동교회 청년학교 교사생활을 한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상동교회 최초의 한인 목사였던 전덕기와 함께 거사를 모의한다.

그것이 바로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이다.

 

흔히 헤이그밀사사건은 고종이 이준, 이위종, 이상설 세 열사를

비밀리에 네델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후엔 고종에게 밀사파견을 제안하고 

친서까지 전달한 이회영과 전덕기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국운이 점차 기울어지자

상동교회 인물을 주축으로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결성된다.

 

그들은 장기적인 투쟁 근거지로 해외독립운동기지건설을 계획하고

장소 물색을 위해 이동녕과 이회영을 파견한다.

이 때 답사로 결정된 곳이 최초의 독립운동기지인 삼원보다.

 

"1910년에 나라가 망한 후 많은 분들이 해외로 망명을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만주로, 어떤 분은 러시아로, 어떤 분들은 미주나 상해로 이주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주로 이주한 분들은 주로 무장투쟁을 지향했던 그런 분들이 많았습니다." 

                                                                                                  - 박 환 교수

 

1910년 한일강제합병이 이루어졌다.

서울 효자동에 위치한 우당기념관엔 이회영의 독립활동을 기리는 각종 자료와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한일합방 이후 우당의 행적을 말해주는 그림 한 점이 있다.

 

나라를 빼앗기자

우당은 형제들을 불러모아 만주행을 제안했다고 한다.

 

"슬픈 일이외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 공신의 후예여서

국운과 세덕이

일세에 관하였다고 일컫고 있소이다.

 

이제 한일합방의 괴변을 당하여

반도 산하의 판도가

왜적에 속하였습니다. 

 

이 때 우리 형제는

당연히 생사를 막론하고

처자를 인솔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차라리 중국인이 되는 것이 좋을까 하오이다.

 

또 나는 동지들과 상의하여  

그동안 해왔던 독립운동을  

만주로 옮겨 실천하고자 합니다... "

 

이회영의 제안에 형제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회영 육형제는 일제히 망명을 결의했던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이곳엔 이회영의 둘째형 이석영이 살았던 집터가 남아있다.

 

"이 뒤쪽이 전부 집터 자리인데

한 10년 전만해도 99칸의 절반은 있었습니다."

                                                                 - 임병규, 남양주시 향토사료관장

 

이회영의 둘째형 이석영은

고종 시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갔다.

 

99칸 고대광실에 개인 절까지 짓고 살았던 이유원은

조선시대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갑부였다.

 

어마어마한 이유원의 재산은 양아들인 이석영에게 상속되었고

이석영은 망명하기 전 그 대부분을 처분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당시 이석영이 만주로 가져간 재산은 40만원!

 

오늘날 화폐가치로 어느 정도에 해당하는지

조선시대 물가상승을 연구하는 전승호 박사의 자문을 구했다.

 

"그 당시 화폐가치가 워낙 문란하던 시기라서 정확히 환산하는 것은 좀 무리일 수 있으나

당시 소 가격과 땅 가격을 가지고 따져보면

당시 40만원을 가지고 소를 샀을 경우에 약 1만 3천 두 정도를 살 정도의 가치입니다.

 

그럼 소 1만 3천 두를 가지고 현재 시세로 환산한다면

소 한마리의 가격을 5백만원으로 잡는다면

약 650억 정도의 자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가신 것 같습니다."

                                                              - 전성호 박사, 책임연구원, 물가사(物價史) 전공

 

600억이 넘는 이석영의 재산은 고스란히 독립자금으로 씌였다.

 

신흥무관학교의 생도대장이었던 원병상은

학교의 초기 재정을 이석영의 사재에 의존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당대 명문가 자제들이

일시에 만주로 떠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점 이후 일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양반 회유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작위거액의 은사금을 주었을 뿐아니라

부부동반 일본여행까지 시켜주기도 했다.

 

지배층의 기득권을 보호해줌으로써

저항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나라를 잃은 원인하고도 관계가 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미 집권층이 부패해 있었다, 그래서 이미 나라를 지킬 힘이 없었다,

 

그래서 외세가 들어왔을 때

거기 붙어서 자기 권세를 유지하려고 하는 세력이 되어버렸다고 볼 수 있고,

 

오히려 거기에 배제되었던 세력들과 민중들이

나라를 지키려고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이정은 수석연구원,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대다수 양반들의 침묵 속에서

일제의 합병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압록강 신의주.

 

그러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일제의 회유를 버리고  

이회영와 형제들은 일가족 40여 명을 이끌고 신의주로 향했다. 

 

조선 최고 명문가  집안의 만주행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위험 속에서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팔도에 있는 동지들께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차로 보냈다.

신의주에 연락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처럼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

우리 동지는 서울서 오전 8시에 떠나서

오후 9시에 신의주에 도착

그 집에 몇시간 머물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가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3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 이은숙 자서전 중에서

 

가족들과 함께 무사히 압록강을 건넌 이은숙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안고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독립운동기지 삼원포로 향했다.

 

 

 4. 상해임시정부 참여!~형제의 같은 꿈, 다른 길!~

               아나키스트 이회영 북경으로!~이시영은 임정에!~

 

 

"손에 쥐고 있던 부와 권력을 두고 만주행을 택한 이회영 육형제.

그것은 목숨까지 건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때의 만주행을 월남 이상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 월남 이상재

 

제 뒤에 있는 인물들이 이회영 육형제입니다.

 

 

 

첫째가 이건영, 이석영, 이 이석영은 당시 대한제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부(巨富)였습니다.

그리고 셋째가 이철영, 넷째가 이회영, 다섯째가 이시영이었습니다.      

한일합방 당시 일제는 이시영에게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했으나

이시영 역시 일제의 회유를 뿌리치고 망명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여섯째가 이호영이었습니다. 

 

 

 

이들의 가족 족보를 보면

이건영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남은 신흥무관학교 교사였고,

차남과 삼남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석영의 장남과 넷째 이회영의 장남 역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고

또 이시영의 아들은 신흥무관학교 본과 교사였습니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 발기인이고

이석영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와 운영자금을 댄 인물입니다.

 

그야말로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한 것인데요,

이회영과 이시영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또 한 번 독립운동을 도모합니다.

 

이제 이회영, 이시영, 두 사람의 행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상하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모였다.

 

그리고 하나의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이 개최되었다.

이 때 이회영, 이시영 형제도 나란히 의정원에 참여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신채호, 이동녕, 이동휘 등은

이승만이 대통령 되는 것을 반대하며 임시정부를 떠나고

이유는 달랐지만 이 무렵 이회영도 임시정부와 결별한다.

 

"이회영 선생은 당시 임시정부라는 '정부' 타이틀을 붙이면

우리 민족의 속성상 상당히 많은 정치적 갈등, 감투싸움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정부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말고 '독립운동총본부'를 조직해서

각자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는 단체를 기획하고 통솔하는 그런 단체를 만들자 주장했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하고 북경으로 오게 됩니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북경(베이징)에서 이회영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취재팀은 이회영의 북경시절을 알고 있는 한 가족을 만났다.

북경대 교수인 유등로씨는 취재팀에게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줬다.

 

 

 

유자명.

그는 의열단 활동을 비롯해 임시정부의 연락책을 맡기도 했던 독립운동가다.

 

"이회영씨는 아버지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셨죠.

이회영 선생님은 중국의 혁명열사가 되셨는데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했기 때문에 중국정부는 그분께 혁명열사라는 증서를 발급했죠."

                                                          - 유광휘, 유자명의 아들, 유득로, 유자명의 딸

 

북경시 후루고원동.

북경에서 유자명은 이회영을 자주 만났다고 한다.

 

유득로 남매의 도움으로 이회영이 살았다는 후루고원을 찾아가 봤다. 

이곳엔 아직 1920년대 북경의 전형적인 건축물인 사하보가 남아 있었다.

 

 

 

사하보는 우리나라 사각형 형태의 집을 연상시키는 집이다.

후루고원 시절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이는 집이었다. 

이 때 유자명 등의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이회영은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받아들인다.

 

 

 

"그동안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알려지면서 인식의 혼란과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는데,

아나키즘은 말하자면 인간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그런 사상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고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자유를 주장했던 그러한 이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덕일

 

아나키스트가 된 이회영은 무정부주의 단체를 조직하고

행동대원인 젊은이들의 테러활동을 지원한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의 가장 큰 특징은 말할 것도 없이 독립운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써의 테러활동이라고 할까,

폭탄 투척을 포함한 투쟁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서중석 교수

 

한편 임시정부에 남은 동생 이시영은

해방이 되는 그 날까지 임시정부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펼친다.

 

이시영은 줄곧 재무총장을 맡으며

임시정부의 살림은 물론 독립자금 확보에도 주력했다.

 

 

 

 

 

 

이회영과 이시영.

형제의 길은 달랐지만 뜻은 하나, 조국의 독립이었다.

 

 

 5.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가난과 생이별, 몰살!~

                  이회영과 그 형제들이 지킨 '노블레스 오블리제'!~ 

 

  

"이 비석은 독립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이회영의 어록비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1920년대 이회영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인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서 중앙정치기구를 구성하며,

경제건설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 운영의 합리화를 꾀하여야 한다.'

 

이회영은 독립된 조국을 이런 세상으로 만들고 싶었나 봅니다.

이 아나키즘은 사유재산과 공산체제의 일당 체제를 모두 부정했습니다.

 

때문에 아나키즘은 당시 독립운동 세력의 커다란 줄기였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양쪽으로부터 다 배척을 당했습니다.

 

이회영처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음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1920년대 이후 이회영과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결연한 의지로 망명을 선택했던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운명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명동성당 앞.

지난 2월 22일 서울시는 명동에 이회영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세웠다.

 

이종찬 전 의원 등 후손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취재팀은 이규창옹을 만났다.

 

이회영의 둘째아들 이규찬옹은

가족 중에서 아버지 이회영과 가장 오래 같이 지낸 인물이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을 했던 이규찬옹은

십 년 넘게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미 아흔을 넘긴 나이,

희미해진 중국시절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이규찬옹에게 독립운동사 자료집을 보여주었다.

 

"이거 우리 아버지...

이 사람은 신채호 선생, 이 양반 성격 참 무섭습니다.

(북경에서 보신 적 있으세요?)

그렇죠. 같이 있었는데..."

 

낯익은 사진과 더불어 되살아난

1920년대 북경에서의 생활은 처절하리만치 비참했다.

 

"가난해서... 밥을 먹어본 것이... 하루에 한 끼 먹을까 말까 했습니다...

속이 상해서..그렇다고 내가 배가 고프다고 소릴 지를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아버지께서 뭐를 해서 해줄 수도 없으셨고...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으니까..."

                                                                                   - 이규찬옹, 이회영의 둘째아들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회영의 생활을 점점 어려워졌다.

이회영은 빈민가를 전전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 시절 이회영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한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그 시절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미 예순이 가까운 나이.

이회영은 퉁소를 불며 배고픔을 잊었다고 한다.

 

생활비도 없던 시절.

독립자금을 마련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이회영은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난을 쳤다.

 

 

 

생활비를 덜기 위해 남편과 생이별을 하고 아내 이은숙은 홀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중국으로부터 두 딸이 고아원에 맡겨졌다는 비참한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로 돌아온 이은숙은 남의 집 식모살이까지 한 돈을 중국으로 부쳤다.

 

"어머니가 기술을 배우셨대요.

기술을 배워서 뭘 어떻게 해보자고 해서 학생제복을 만들어 파는 일도 했어요.

 

기찻질 있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가실적에 그 앞에 기차가 지나가요.

그럼 제가 떼를 써요. 빨리 저 칙칙폭폭 타고 아버님한테 가자고...

 

참 그때 철없이 그랬는데

저희 어머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 이규동, 우당 이회영의 셋째 아들

 

이회영은 상해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상해에는 아들 이규학이 일제의 눈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1932년 11월 외탄부두.

이회영은 최후의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행을 결심한다.

 

예순의 노구로 만주로 향하는 이회영은 당시 심정을 '시사여귀(視死如歸)'로 표현했다.

죽음을 맞이할 땅을 찾아갈 만큼 그는 비장했다.

그것이 아들 이규창이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상해에서 아버님 가실 때 혼자 배웅하고 눈물이 어떻게 나던지 많이 울었다고 했어요.

마지막인 거 같아서..."

                                                                               - 정문경 여사, 이규창씨 부인 

 

대련항에 도착한 이회영은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대기한 일제 경찰에 붙들린다.

그리고 일제 경찰서 차디찬 감옥에서 치열했던 생을 마감한다.

 

만석꾼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모두 내놓은 이석영 역시 오랜세월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동생 이회영이 죽은 지 2년 후 이석영은 상해에서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석영, 그분이 죽을 때까지 존경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관련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그분이 은둔생활을 주로 했다,

표면에 나서는 것은 회영이라든가 시영이라든가, 너희들이 해라 내가 뒤에서 봐준다,

그분은 계속 그런 태도로 사셨거든요. 더군다나 30년대  들어가서는 굉장히 궁핍한 생활을 하고 되고

따라서 사람들 이목에서 거의 사라진 생활을 하셨습니다."

                                                                                                                           - 서중석 교수

 

 

그후 막내 이호영도 가족과 함께 몰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만주에서 먼저 고국으로 돌아온 건영과 철영은 해방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에서 생을 마감한 석영과 호영은 대까지 끊어지고 말았다.

결국 육형제 중 해방 후 살아 돌아온 사람은 시영,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조선 왕조를 이끌어왔던 지배층 중에서 독립운동에 끝까지 무관했다고 본다면

저는 그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권문세가 이회영과 형제들이

그 많은 재산을 다 바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면

그 자체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서중석 교수

 

1945년 9월.

임정요인들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다.

 

벅찬 환희의 순간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고 있다!

육형제 중 살아 돌아온 사람!

 

이시영이었다!

 

 

"프랑스영국100년 전쟁을 치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칼레를 점령한 영국군이 이런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만약 칼레시를 대표하는 여섯 명의 목숨을 내놓는다면 나머지 시민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이런 조건에 대해서 칼레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았던 여섯 명의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칼레시를 대표하는 내놓라 하는 귀족들이었습니다.

이후 이 칼레 시민들은 이 여섯 명의 귀족들을 기념하기 위해

오퀴스트 로댕에게 부탁하여 이들을 조각으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이 유명한 '칼레의 시민상'입니다.

 

사회  지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의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생각할 때면 우리는 이 '칼레의 시민상'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100년 전,  우리에게도 이 '칼레의 시민상'을 떠올릴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돈과 권력을 모두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망명길에 오른 이회영과 그 형제들입니다.

 

600억이 넘는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자신들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견디며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습니다. 

 

육형제 중 세 명이 중국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그 자녀들도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지도층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회영과 형제들은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에서(좋은 가을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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