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의 학문적 위세를 각인하려는 욕망이 또렷하게 재현된 공간이 도동서원이다. 조선 도학의 계통도를 보자.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내려오는 하행선과 남명, 이황, 이이, 이언적, 조광조로 올라가는 상행선의 교차로에서 만나는 한훤당 김굉필이다. 그는 조선 도학의 교차로이면서 동시에 정점이기도 하다. 아래에서 보면 정점이다. 그 도학의 정점인 한훤당을 배향하는 도동서원이다. 조선 도학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을 또렷이 각인해 놓았다. 한훤당은 이 서원을 증축한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외증조이다. 이 서원은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여느 서원보다도 대칭적인 질서를 잘 지키고 있다. 한강은 건축가로서도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퇴계의 도산서당에 비하면 도동서원은 미학적으로 잘 구성된 공간이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한훤당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순천에서 극형에 처해졌다. 그를 추념하는 옥천서원이 순천에 건립되었다. 2016년 1월 31일,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었다. 그때 찍어 두었던 서원 안내판이다. 중종반정 후 복권되어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우의정. 1575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한훤당은 김종직에게 사사했으나 기간이 짧았고,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어 훈구파를 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결별한다. 김종직 사후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이처럼 한훤당은 스승과 결별할 정도로 강직했고, 스스로 자신의 학문 세계를 구축한 학자였다.
외증조를 배향하는 이 서원을 한강은 가문의 이름을 걸고 증축했을 것이다. 한강의 고향은 경상북도 성주이다. 성주는 경상 좌·우도의 경계에 위치한다. 우에서나 좌에서 보면 변방이다. 강을 따라 구분하면 낙동강의 상과 하의 가운데이다. 이렇듯 성주는 지리적으로는 중간에 위치한다. 경상 좌·우도의 경계와 강의 중류에 살았던 그는 자연스럽게 학문의 경계에 서 있었다. 대부분 지방에서 벼슬을 한 그는 자신과 가문의 학문을 중심에 세우고 싶었다. 그가 서울 가까운 곳까지 퇴계의 학문의 장을 넓힌 근기학파(近畿學派)의 문을 연 것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지리적으로는 변방이지만 그 정신은 중심이다. 도동서원은 좌우로 기울었던 도학의 정신을 반듯하게 중심을 잡고 있다. 이곳 어디에도 유가적 질서를 훼손하는 불경스러움은 없다. 또렷한 일직선의 중심축과 그 축을 중심으로 한 좌우 대칭적 배치가 가장 확연한 공간이다. 하지만 정연함은 개인의 자발성을 통제하는 계층성(hierarchy)의 규준이기도 하다.
건축은 터 잡기부터 시작된다. 어디에 집을 지을 것인가를 정할 때 집의 구도는 이미 정해진다. 서원 중 가장 경사진 곳에 지어진 것이 도동서원이다. 왜 경사진 곳에 지었을까? 전저후고의 완전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저의 차이가 또렷하다. 고저의 차이가 클수록 권력을 공간화하는 효과는 더 크다. 이 서원을 지은 건축가는 디자인 단계부터 공간과 권력의 역학 관계를 고려했다. 고저의 차이가 있어 그에 따른 계단식 담장의 구성, 그리고 각 공간에서 연출되는 개방성과 폐쇄성의 교묘한 조화 등이 이 서원을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말하게 한다. 조선 성리학적 질서의 반듯함은 르네상스 양식을 대변한다. 정확한 기하학적 구도에 따라 정연하게 배치된 구조이다. 그러면서 담장을 구성하는 미학적 장치나 중정당 기단에 각인된 다양한 동물의 머리 장식 조형물은 바로크풍을 띤다. 기하학적 구조의 지루함을 바로크풍으로 보완하는 탁월한 구성이다. ‘덜 미학적일수록 더 윤리적(Less Aesthetics, More Ethics)’이라는 일본의 관습이 적용되는 공간은 아니다.
첫댓글 김굉필이란 분은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김굉필을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점차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천기를 알지 못했는데,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다. 따라서 마음을 다해 자식구실을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으며, 그의 학문적 성향은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쪽이라 한다.
한편 도동서원은 현풍읍에서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져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고 하였는데 1607년에는 선조로부터 친필로 쓴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아 지금의 지금의 도동서원으로 사액했다. '도동(道東)'의 의미는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라고 한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병산서원 · 도산서원 · 옥산서원 · 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스스로 자신의 학문을 구축하였다고 전해진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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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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