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풍광을 빌려 와 안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욕망이 이곳보다 더 강한 곳이 있을까? 이른바 차경(借景)의 기법이 가장 효율적으로 적용된 곳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이 공간을 지었다. 활엽수의 녹음을 다 벗은 겨울의 병산(屛山)은 말 그대로 검은 병풍이다. 방문객의 눈에는 만리장성 같은 흑벽이다. 왜 만대루가 필요한지는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서 알 수 있다. 수직으로 서 있는 병풍을 앞에 둔 서원의 강당인 입교당 마루에서는 풍광을 조망할 수 없다. 도동서원이나 도산서원과 달리 왜 검은 장벽과 같은 산을 앞에 두고 서원이 서 있는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만대루는 외삼문 안에 서 있다. 도동서원의 수월루는 환주문 바로 앞에 높이 서 있어서 안에서 조망하는 시선에 오히려 방해된다. 이곳 병산서원이 누를 안으로 들인 것은 병산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이가 필요해서이다. 만대루는 병산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직으로 곧게 서 있는 병산의 폐쇄성을 만대루의 개방성이 응대하고 있다.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한 번도 강경파에 속하지 않았던 온건파였다. 퇴계의 제자답게 남명의 강한 절의(節義)보다 부드러움을 배웠다. 이조 전랑의 자리싸움으로 심의겸의 서인과 김효은의 동인으로 갈라진다. 동인 정여립 모반 사건인 기축옥사를 빌미로 서인이 조정을 장악한다. 이때 이 사건의 최종 책임자가 서인 정철이었다. 서인에 의해 3년 동안 천 명에 달하는 동인이 처형되었다. 하지만 정철이 선조에게 세자 책봉을 건의한 것이 화근이 되어 동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서인의 처벌 문제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다. 처벌에 온건한 입장을 취한 남인은 퇴계와 서애와 같은 퇴계의 제자들이다. 반면에 강경한 입장을 취한 쪽인 북인은 남명과 정인홍과 같은 남명의 제자들이다. 서애의 부드러움이 병산서원의 만대루에 육화되어 있는 듯하다. 병산서원을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만대루 때문일 것이다. 서원의 구도는 여느 서원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성리학적 질서에 따라 배치된 대칭적 구조를 규준으로 해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서애가 고려 중기부터 있던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선조 5)에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병산서원으로 개칭했다. 그가 실제로 얼마나 살았는지 혹은 이 건축물을 실지로 어느 정도 개축 혹은 증축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인공과 자연이 빚어내는 건물 하나하나의 공간성과 풍광이 주요 포인트이다.
모든 풍경은 주변의 풍경들을 빌어 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은 게슈탈트(Gestalt)적이다. 즉, 건물 하나하나를 보지 않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의 풍경을 함께 경험한다. 이것을 통상적으로 차경(借景)이라고 한다. 나는 만대루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만대루의 풍광은 차경으로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아쉽다. 병풍처럼 펼쳐진 병산(屛山)의 막힘과 만대루의 열림이 빚어내는 차이가 서로를 아름답게 만든다. 말 그대로 느지막한 저녁에 마주하는 병산의 아름다움이다.
병산은 활엽수가 주목인데,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낙동강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만대루 하층의 수직 기둥들과 상층의 수평 마루가 겹쳐지면서 드러나는 차이를 생산하는 차연(差延)이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서로 달라서 더욱 아름답다. 다름의 미학이 잘 살아 있는 만대루이다. ‘차연’이라는 어휘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 데리다(J. Derrida, 1932~2004)가 자주 사용한다. 차연의 연(延)은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밀리다, 연기하다, 퍼지다, 혹은 겹치다 등의 의미이다. 차연은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에게 밀려 들어와 흔적을 남기면서 차이를 빚어내는 활동이다. 차이 이전의 차이를 생산하는 활동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한국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은 개방성과 폐쇄성, 직선과 곡선, 기둥과 마루 등이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면서 빚어내는 차이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나는 한국 건축의 이러한 특이성을 차경(借景)이 아닌 차경(差景)으로 부르고 싶다. 굳이 중국에서 빌어 온 차경(借景)이란 어휘를 쓸 이유는 없다. 차경(借景)은 바깥의 경치를 빌어 와 안의 경치와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룬다. 반면에 차경(差景)은 서로 다른 것들이 이루어 내는 부조화의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좀 덧붙인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동일성의 반복에서 생기지 않는다. 여러 개의 음이 겹치면서 생산하는 차이 때문에 아름답다. 앞소리의 여운이 뒷소리와 겹쳐지면서 생산되는 차이성이 아름다움의 원리이다. 신호등의 붉은 색이 꺼지면서 그 여운이 황색과 녹색으로 밀려나 겹쳐지며 생산되는 차이성이 각 색깔의 의미를 결정한다. 신호등의 붉은 색 어디에도 ‘정지’라는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 의미는 다만 다른 색들과의 관계에서 그때그때 결정될 뿐이다. 그러므로 만대루의 아름다움은 주변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만대루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것은 만대루가 아니라 만대루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다. 그 구조가 빚어내는 서로 다른 것들의 부조화가 아름다움의 요체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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