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岩里
오늘날의 일로읍 소재지는 일본세력이 진출하기 전에는 매우 한적한 농촌 모습이었다. 1915년 지적원도를 보면 역전 통 부근에서 대지는 3개 지번밖에 없고 일로초등학교 근방에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일제가 철도역과 소재지를 월암리에 설치하면서 비로소 신흥중심취락으로서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또한 장항포 농장과 영화농장의 조성에 이어 동척과 금융조합의 설치, 그리고 1922년 일로보통학교, 1937년 무안농업실습학교가 개교하자 일로면이 실질적으로 무안군 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갖게 되었다. 이어 1946년에 무안중학교 개교 1961년 무안농업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1913년 처음 일로역이 개통될 때의 이름은 삼향역이었다. 당시에는 일로보다는 나주의 영내 삼향의 위상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이후 1924년에 일로역으로 개칭한다.
월암리는 일로읍 소재지가 자리한 곳이며 예전에는 영산강과 호남선을 비롯하여 각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황우동, 신흥, 덕산, 월암, 회인동, 강남산, 부흥정, 다복동 등 모두 8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거주 주민이 늘어나면서 분구가 시작되어 현재는 황소안, 신흥, 덕산, 월암, 강남산, 부흥동, 다복동, 중앙동, 연소동, 읍동 취락촌 등 11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월암리 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1914년 일본에 의해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비로소 월암리 등이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 일로면 연소동 황우동 월암리가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월암리 월암 동현리 덕암리 부흥정 회인동으로 표기된다. 1987년의 자료에는 일로읍 월암리 황우동 신흥 덕산 월암 강남산 부흥정 다복동 등 7개 마을이 나온다.
일로장이 있으며 사회복지기관인 소전원이 있다. 월암마을에 천안전씨삼강비가 있다. 강남산에 나주정씨 삼강비와 효자각 그리고 강족 비와 경모재가 있으며 연소동 마을에 교도소가 들어섰으며 입구에 백범선생 관련 두 기의 비가 있다.
일로역이 들어서면서 발전했던 마을 - 월암1리 황소안
황소안 마을은 월암1리에 속한다. 구 일로역 앞에서 남쪽 방향으로 장항포 들까지 남양홍씨 문중 산이 있었는데 지형적인 모습이 마치 황소가 누워있는 것과 같다고도 하고 막 일어서려는 모습과도 같은 형국을 지녔다고 했다. 황소안이란 지명은 마을이 그 산을 안고 형성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황소 형국을 한 산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홍씨 문중에서는 오래 전에 그 산 일부를 매각하였는데 현재는 황소머리 부분만 남아있다.
주민들은 마을이 가난하고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은 마을의 버팀목이 되었던 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고 있다. 즉 새로 산을 구입한 소유주가 개발하기 위해서 산을 깎아버려 마치 황소의 잔등을 파버린 형국이 되어 마을에 우환이 많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산을 확인 하는 도중 커다란 바위가 있어 고인돌인 줄 알았으나 토석을 채취하면서 나타난 바위라고 한다. 현재 그 바위는 없다.
입향조는 남양 홍씨와 김해 김씨인데 김해 김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인 할 수가 없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를 보면 마을에 역과 역을 연결해주는 황우원(黃牛院)이 있었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한 기록이나 자료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을의 지리적인 위치가 장항포가 막히기 전까지는 바다와 면해 있어 교통상의 요충지였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조선시대 중기 이후 무안에서 장시가 형성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院이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해 보인다.
월암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일로읍 소재지는 일본이 진출하기 전에는 매우 한적한 농촌 취락지였다. 1915년 지적원도를 보면 역전통 부근에서 대지는 3개 지번밖에 없었고 일로초등학교 근방에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일제가 철도역과 면소재지를 월암리에 설치하면서 신흥중심취락으로서 기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장항포 농장과 영화농장의 조성에 이어 동척(현재 일로 천주교성당자리)과 금융조합의 설치, 그리고 1922년 일로보통학교, 1937년 무안농업실습학교가 개교하자 일로면이 실질적으로 군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갖게 되었다. 참고로 일로역의 이름이 1913년에는 삼향역이었다. 당시에는 일로보다는 나주의 영내 삼향의 위상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1924년이 되어서야 일로역으로 개칭했다.
일로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한적한 농촌 취락지
청호리 방면의 체육중학교 담장을 끼고 장항포들 쪽으로 가는 길을 옥가마(또는 옥가메) 길이라고 한다. 옥가마라고 부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옥가마[玉鼎]는 옥으로 만든 솥을 말하는데 그 부근의 지형이 마치 옥으로 만든 솥의 형국으로 명당의 혈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옥가마 길 옆에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때 오까마라는 일본인이 살았던 곳을 말한다. 실지로 오까마 주변에 일본인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왜냐하면 영화농장과 무룡동신사 등 일본인과 관련된 시설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까마로 들어가는 입구에 오바잔등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두 개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어 주민들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오래 전 누군가가 가져가 버렸다. 주민들은 두 개의 바위 중 큰 바위에 한자로 글씨가 많이 새겨져 있었는데 글씨가 부식되어 읽어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마을의 주 소득원은 벼농사인데 다른 마을과는 상대적으로 주민들이 어렵게 산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영산강 간척으로 영산강에 접해 있던 다른 마을들은 농지를 싼 값으로 불하 받았으나 이 마을만은 지리적인 영향 때문에 받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철둑 밑에 주민들에게는 분양권을 준다고 했으나 의산리까지만 오고 월암리 주민들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마을에 영세농가가 세대수에 비해 상당히 많다. 한때 265세대가 살았는데 그중 영세 농가가 50여세대에 이를 정도였다. 현재는 무안군에서 아파트 단지를 제외하고 자연마을로는 가장 많은 넓이와 세대수 그리고 인구를 자랑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간척지 조성에 사용했던 대나무 조각들의 묶음을 말하는 특이한 용어를 확인할 수 있었다(장항포 간척지를 경작하고 있는 삼향면의 이동, 용포 마을에서도 확인 된다). 이른바 ‘쑤기를 박다(묻는다)’라는 용어다. 쑤기란 간척지 논에서 염분을 제거하기 위해 묻는 대나무 다발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쪼개진 대 조각을 한 필지의 논에 두 개 세 개의 구덩이를 차례로 파서 논 깊숙이 묻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농사를 짓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장항포를 막아서 형성된 마을 앞 간척지에 일본인들이 측량을 하여 600 - 900평씩의 농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농지에 두세 개의 깊숙한 개웅을 만들어 이 쑤기를 박은 것이다. 이후 세 개의 개웅이 만나는 곳에 조그마한 둠벙을 만들었다. 그러면 논 속의 염분이 대 조각을 따라 흘러서 이 둠벙에 모이게 되는데 나중에 이것을 퍼내어 염분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자리에 황토를 뿌려서 갯벌 성분을 중화시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마을 바로 옆에는 일로장이 있다. 일로장은 우(牛)시장을 포함한 장으로 처음 당월촌에서 시작하여 지장리 송태(삼향장)로 이전했다가 천주교 성당 부근으로 옮겨 현재의 장소에 이른 것이다. 일로장은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영암군 미암과 삼호에서도 일로 주롱나루를 건너서 장 보러 오고 나주 동강, 몽탄과 청계 그리고 목포 등에서도 사람들이 모였으니 일로 장날이 되면 일로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그때는 품바타령과 함께 막걸리도 많이 나가고 국밥집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무안군의 오일장은 무안장, 일로장, 해제장, 망운장이 있다. 기존의 몽탄장, 청계장이 사라지고 현재 해제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모든 것은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교통이 편리하다 보니 일어나는 현상이다. 공공기관으로 전남체육중고등학교와 중앙교회가 있다. 중앙교회는 30여년 전에 무전산 밑에서 시작하였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체육중고등학교는 원래 무안중학교가 있었던 자리인데 2000년도에 특수목적교인 체육중고등학교가 들어선 것이다.
국밥과 품바가 있는 장터 마을 - 월암2리 시장촌
시장촌은 신흥마을이라고도 불리며 1971년에 월암리가 1,2구로 나뉘어지면서 형성된 마을로 대부분의 주민이 시장 상인들이다. 일로장은 영산강의 영향으로 당월촌에서 시작했다가 지장리 송태(삼향장, 세명장이라고도 함)로 옮겼다. 이어 일제강점기에 일로역이 개설되면서 일로역 후문과 연결되는 강남산 마을에 장터가 이전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러다 장소가 좁아 1956년(1960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원래 이곳은 뻘밭이었다. 지금도 조금만 깊게 파면 뻘이 나온다. 그러다 물이 빠지면서 농지가 되었고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시장터를 조성할 때 무안군에서는 일로 지역 아녀자들을 동원하여 민속놀이인 강강수월래를 하면서 터 다지기를 하기도 했다. 또한 터가 좁아 우시장이 활성화 되지 못할 때 시장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정학남(82세. 털보식당 운영)씨가 478평을 아무 조건 없이 무안군에 희사했다. 무안군은 그 땅을 축협에 매도해 일로장의 대표적인 상품인 우시장이 활성화 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일로 장날(1일, 6일)이 되면 근방의 걸인패들이 판을 치고 다니며 각설이 타령도 하고 시끌벅적하게 흥청거렸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영암군 미암과 삼호에서 청호리 주룡나루를 통해 장을 보러 오고 나주 동강, 무안의 청계 몽탄 삼향과 목포 등 4개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으니 일로 장날은 그 자체가 큰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어찌나 사람들이 많았던지 마치 개미들이 우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일로장이 컸었던 것은 영산강이라는 지리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난장판이 되었다. 시장 곳곳이 움푹 패이고 진흙 뻘땅이 만들어져 장화가 없이는 생활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인정이 있었고 웃음과 낭만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장이 형성된 곳은 운송로가 좋고 물산이 풍부한 영산강 주변의 나주와 무안이라 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나 흔적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영산강 주변인 일로에서 처음으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하지만 주민들과 대화에서도 삼향장 이전의 장터는 모른다는 것이다.
원래 시장촌 자리는 농지였으며 군유지였다. 군에서 시장을 형성하면서 이곳에 국민주택을 지어 보급하였다. 그러다 1970년대 광주세무서 직원이었던 이석호에게 땅을 빼앗겨 군에서 재판을 통해 다시 찾아오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현재는 개인들이 군으로부터 불하를 받아 군 소유의 땅이 많이 줄어들었다.
국밥과 품바가 있어
이 시장에는 두 개의 명물이 있다. 하나는 일로 국밥이다. 국물 맛이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난다. 국밥집 주인인 장영자씨는 시어머니 때부터 해온 장사로 처음엔 영산강과 남창촌에서 잡아 올린 가물치회로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영산강과 남창천이 오염되고 가물치의 명성이 사라지자 국수집과 국밥집을 했는데 시어머니의 음식솜씨가 뛰어나 맛있기로 널리 알려졌다. 시장이 썰렁해진 지금도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전의 맛을 찾아서 온다.
두 번째는 품바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로 장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난 손님이 각설이패들이다. 장타령으로 불려지는 각설이 타령은 세명장에서부터 있어왔으며 품바는 이 각설이패들의 가락과 사설을 발전시킨 것이다.
각설이의 주인공 자근이는 원래 남창천의 큰강다리 밑에서 거주하다 의산리 천사촌으로 이주하였으며 키가 작았지만 의리가 있었다. 남을 속이지도 않았으며 도둑질은 물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한테는 거지였지만 인기가 있었다. 또한 그는 마케팅의 전략가였다.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얻어먹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거기다 등에는 아이를 업고 입으로는 장타령을 잘 불러 인기도 있었다. 후일 이 장타령은 사위인 김광진에게 전수되었고 1980년대에 김시라를 만나면서 품바라는 예술로 발전한 것이다.
자근이는 땅꾼이기도 하였다. 장날이면 손님을 끌기 위해서 직접 잡은 뱀들을 가지고 뱀장사를 하기도 했다. 해서 인근의 시장 군수 서장 등 권력가들이 뱀탕을 먹기 위해서 자근이를 찾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결핵 환자들에게는 구세주이기도 하였다.
현재 시장촌 주민들은 불만이 많다. 시장이 흥청거리고 우시장에서 소는 150마리, 돼지가 50마리 정도 거래가 될 때는 주민들이 살기 좋았다. 하지만 현재는 도로의 발달과 인근의 대형 상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2년 전 일로시장의 큰 축이었던 우시장이 구 일로 역 밑으로 빠져나가면서 시장의 위상은 대폭 축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인 남악에서 운영되고 있는 대형마트는 상인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또한 전통시장 현대화의 일환으로 건설했던 시장촌 안의 각종 구조물이 오히려 시장의 발전에 저해가 되어 난처한 지경이 되었다. 실지로 8시만 되면 일로 거리에는 불 켜진 가게가 거의 없다. 유령의 도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우시장이 이전하면서 무안 축협이 소유하고 있었던 시장터 일부를 주민들에게 희사해 그곳에 마을회관을 지어 주민들의 쉼터로 사용하게 된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고 있다.
주민들은 시장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님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먹거리를 특화시켜 물건을 파는 것보다 보여주고 먹게 해주는 것이 일로시장을 살리는 길이라고 한다. 해서 현대화된 건물보다 간소한 비가림 시설로 노점상들이 들어서고 엿장수를 비롯한 각종 길거리 장수들도 자리를 잡아 흥청거릴 수 있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근면하고 부지런한 덕이 있는 마을 - 월암3리 덕산
월암리는 일로읍 소재지가 자리한 곳이며 예전에는 영산강과 호남선을 비롯하여 각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황우동, 신흥, 덕산, 월암, 회인동, 강남산, 부흥정, 다복동 등 모두 8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거주 주민이 늘어나면서 분구가 시작되어 현재는 황소안, 신흥, 덕산, 월암, 강남산, 부흥동, 다복동, 중앙동, 연소동, 읍동 취락촌 등 11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월암리 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1914년 일본에 의해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비로소 월암리 등이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 일로면 연소동 황우동 월암리가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월암리 월암 동현리 덕암리 부흥정 회인동으로 표기된다. 1987년의 자료에는 일로읍 월암리 황우동 신흥 덕산 월암 강남산 부흥정 다복동 등 7개 마을이 나온다.
덕산은 월암3리에 속하는 마을로 회인동 연동 덕산으로 이루어졌다. 이중 回寅洞의 지명유래는 십간십이지 중에서 寅을 품었다 하는 말이 있으나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 마을에는 30년 전에 세워진 다복2차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連洞은 마을이 이어져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나 다른 주민은 솔개 鳶을 써서 鳶洞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실지로 마을 뒤 대절로 가는 고개를 솔갯재라 부르며 뒷마을인 대절 마을에는 매봉이 있어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德山은 산이 덕이 있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마을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 보면 뒷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와우형이다. 소가 누워있는 지형으로 일명 소쿠리 명당으로 불려지는 마을이다. 대체로 소는 덕이 있는 짐승으로 완만한 능선의 와우형 지형이면 지명에 德자가 많이 들어간다.
또한 함평이씨 족보에 이 마을 입향조로 추정되는 분의 묘가 德浦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에서는 덕포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어 어디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 회인동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는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덕포는 회인동을 말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또한 일제강점기 대의 자료인 조선면리동 일람에 德岩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 지명도 회인동에 있었던 3기의 고인돌을 지칭하여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표지석은 2006년 12월에 세운 것인데 마을의 유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은 일로읍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1㎞ 지점에 위치하여 덕산 회인동 연동 세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동으로는 용산리 북으로는 지장리와 접해 있고 예로부터 회인동으로 불러왔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덕이 있다 하여 덕산이라 하였다. 약 459 년 전에 함풍이씨 이건직이 나주에서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에 왕산리와 덕림리가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회인동과 덕암리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도 일로면 월암리 회인동 덕암리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일로읍 월암리 덕산이란 한 지명만 나온다.
근면하고 부지런한 마을
마을은 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일로의 주산인 인의산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주산인 왕산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왕산으로 부르지 않고 삼호 뒷산, 대절 앞산 등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함평이씨 제각인 왕산재의 터가 왕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고 함평이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며 제각의 기록에도 이 산을 왕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함평이씨 夢聖(자-성보, 호-해옹. 1740-1801)이다. 나주에서 남악으로 건너와 거주하다가 18세기 말엽에 이 마을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표지석의 기록에는 함평이씨 이건직이 나주에서 곧 바로 이 마을로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자세히 모르고 있으며 확인할 수도 없었다. 월암3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 마을 다 함평이씨 집성촌이었으나 근래에 들어서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현재 다복2차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자리가 포구였다. 예전에는 그곳까지 물이 들어와 배가 드나들었으며 배를 매었던 바위들이 있었는데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3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그러다 20여 년 전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돌을 깨거나 가져가 버려 3기의 고인돌은 주민들의 의식 속에만 남아있다.
집성촌이었으면서도 한국전쟁 때는 주민들 간 갈등이 좀 있었다. 다른 마을과는 달리 3명의 희생자가 있었고 부상자는 더 많았다. 마을의 주 소득원은 벼농사 외에 시금치와 고추농사를 하고 있다. 주민들 모두 근면하고 부지런해 대부분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덕산 마을 앞에 낚시명당이란 터가 있다. 낚시는 한번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러한 터라고 말한다. 해서 덕산 마을 사람들은 주변 마을보다 더 유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연동 마을에 ‘일류선생이계희영모비’가 세워져 있다. 연동 마을에서 서당을 크게 일어 주변사람들을 가르친 분으로 문생들이 세운 비다.
연동 마을 왼쪽으로 충정골이라 부르는 곳의 서당이 있었던 자리에 함평이씨 제각이 있다. 왕산재인데 내부에는 6개의 현판이 있으며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1,5칸의 구조를 갖고 있다. 삼문은 없으나 제각 앞에는 표지석과 함평이씨삼강비가 세워져 있다. 연애기라는 지명과 젓공장이 있었던 젓동산과 각종 과일나무가 심어있는 꽃동산이란 지명도 있다.
인심이 좋고 넉넉한 달바우 마을 - 월암4리 월암
월암은 월암4리에 속하는 마을로 200여년 전부터 천안전씨 김해김씨 등 십여 호로 형성되었다. 이후 천안전씨나 김해김씨 등은 다른 마을로 이주하고 현재는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 최초의 입향조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로면 내화촌(현재는 목포시 삼향동 내화촌)에서 이주한 나주정씨 정순섭(자-봉원. 1892-1981)이다. 공은 일로역 보선사무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이 마을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룬 것이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도 ‘나주정씨 정봉원이 1886년경 삼향면 하당에서 이주했다. 정씨가 이곳에 이주할 당시 노씨 김씨 임씨 등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월암이란 지명은 우리 지역에 많이 있는데 이 마을은 서쪽 등성이에 있는(현재 일로초등학교 안) 달바위에 의해 월암이라 이름 하였다. 문헌으로 지명의 유래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후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 비로소 월암리가 나온다.
월암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일로읍 소재지는 일본세력이 진출하기 전에는 매우 한적한 농촌 취락지였다. 1915년 지적원도를 보면 역전통 부근에서 대지는 3개 지번밖에 없었고 일로초등학교 부근에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일제가 철도역과 면소재지를 월암리에 설치하면서 신흥 중심취락으로서 기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1913년 처음 일로역이 개통될 때의 이름은 삼향역이었다. 당시에는 일로보다는 나주의 영내 삼향의 위상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이후 1924년에 일로역으로 개칭한다.
1900년대 초에 죽산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 마을로 옮기고 1922년 일로보통학교 그리고 금융조합과 1937년 일로우편소가 마을에 들어서면서 마을이 커졌다. 이처럼 일로읍에서는 마을이 제일 성해 한때는 마을에 두 사람의 무당이 자리 잡기도 했다.
사람들은 일로읍에서 제일 좋은 터 두 자리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토지개량조합이 있는 자리이고 또 하나는 이 마을의 보해상사가 있는 자리다. 보해상사 터는 예전에 죽산리에 있었던 면사무소가 옮겨 온 자리이기도 하다. 또한 보해상사 앞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옹기배가 다녔던 선착장이기도 하였다. 1920년대 영화농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사 주변을 파면 수많은 옹기 파편들이 발견된다. 이 상사 앞에서 무전산까지 둑이 있었는데 지금도 주민들은 둑방길이라 부른다.
인심이 좋고 넉넉한 마을
마을에는 천안전씨의 흔적이 크게 남아있다. 마을회관 앞에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천안전씨 삼강문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인데 그 안에 효자비나 열부비는 없고 186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여지는 御賜丹書라고 쓰여진 全 龍의 충신비(향교지에는 전용당으로 표기 되었다)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이 삼강문의 주인공들은 다음과 같다.
충신 전 용은 임진왜란 시 선조께서 의주 피란길에 오를 때 호종을 하면서 공을 세웠다. 그 후 秋官의 벼슬을 제수 받고 33년 후 갑자년에 靖社勳臣에 기록되고 鐵券(조선 시대,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들의 공적과 그에 따른 상훈을 기록한 서책. 공신에게 나누어 주었다) 을 하사받았다. 열부 탐진 최씨는 전 용의 7대손인 전인익의 처로서 매사에 법도와 의례에 벗어난 적이 없으며 남편의 병환이 위급하자 두 차례나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공양하였다. 효자 구상과 경상은 당시 어렸으나 어머니가 자신의 살을 베어 아버지 병구환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해 부친을 회생시켰다.
또한 마을에 전씨 소유의 6칸 ㄷ자 형의 큰집이 얼마 전까지 있었으나 현재는 많이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전씨의 후손들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로 경방대장(현재의 소방대장)을 맡았고 해방 이후에는 대동청년단의 간부를 맡아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마을에는 교장 교수 등 교육계 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한 일로 문화상품의 대명사인 품바 타령의 1대품바인 정규수의 고향이기도 하다. 정규수의 부친 또한 마을에서 조리중(농악이나 오광대놀이에 등장하는 인물로 중의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으로 불려질 정도로 뛰어난 예인이었다.
마을 이름이 되기도 한 달바위는 일로초등학교 안에 있는데 예전에는 학교 옆 등성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바위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바위 때문에 남창천 건너 삼향읍의 용포 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여겨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해서 용포 사람들은 바위를 세우지 못하게 하고 월암리 사람들은 바위가 서야 마을이 잘 된다고 믿고 세우려고 한데서 갈등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달바위 주변에 대나무를 심어 가리게 되었는데 현재는 대나무는 없고 바위도 일로초등학교 안에 놓이게 되었다.
바위를 자세히 보면 조그마한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영화농장의 둑을 쌓으면서 돌이 필요해 이 돌을 가져가려고 뚫어놓은 남포 구멍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의해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에 뚫었던 흔적만 남아있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월암이 일로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 중에 하나라고 자랑한다. 주민들이 텃세가 없어 외지인들도 쉽게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으며 주민들의 화합이 잘 되어 다투는 목소리가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길 옆의 깡샘을 비롯한 4개의 샘이 있었다.
넉넉한 인심과 높은 단결력을 자랑했던 마을 - 월암5구 강남산
강남산은 월암5구에 속하는 마을이다.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나 1912년에 발간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강남산이란 지명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마을로 보인다. 실지로 산정리에 살던 나주 정씨들이 100여년 전에 문중 산이 있는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은 나주 정씨의 문중산인 江南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강남산 마을이 되었다. 영산강의 남쪽에 있다 해서 강남산으로 붙여진 이 이름은 더 이상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마을은 이 강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강남산 맞은편 농지개량조합 아래에 교꾼산(?)이 있었다. 일로역 철도 노동자들이 머물며 일하는 곳인데 이 산이 개발되면서 강남산 마을이 넓어졌다.
마을의 지형을 보면 풍수적으로 쇠스랑 형국의 골짜기이다. 월암리는 대체로 일로읍사무소 뒤 여내기산을 축으로 세 개의 고랑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고랑은 일로초등학교로 가는 줄기이고, 두 번째 고랑은 일로교회로 가는 고랑이며 세 번째 고랑은 소전원을 포함한 강남산으로 뻗어 있는 고랑이다. 이 마을은 세 번째 고랑에 해당된다. 또 다른 사람은 그물 형국이라고도 한다. 해서 이 마을에서는 돈을 벌고 명예를 가꿀 수도 있지만 마을을 벗어나면 모든 복들이 넘쳐버리기 때문에 대부분 실패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일로읍의 중심지로서 대부분의 기관이 이 마을에 있었으나 1990년도에 10리 읍동으로 分里가 되면서 남아있는 기관으로는 농지개량조합 사무실과 천주교회, 그리고 사회복지기관인 소전원이 남아있다. 읍동과 분리되기 전까지만 해도 일로읍에서 제일 가는 부자 마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심도 좋아 ‘강남산에 가면 굶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주민들이 넉넉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단결심도 좋아 주민 중에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이 있으면 추렴을 해서라도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일로성당은 1953년 월암리에 공소가 설립되어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56년 5월 10일 목포 산정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설립되었다.
천주교회 아래에 일제강점기 때 사용했던 쌀 창고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무렵 그 창고에는 나락이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나락을 가져갈 수 없으니까 창고에 불을 질러버렸다. 주민들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창고에서 타고 남은 쌀숯을 가져다가 연료로 사용했던 일을 인상 깊어 했었다.
마을에는 구장터 자리가 있다. 원래 일로장은 지장리 송태(삼향장이라고도 함)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로역이 개설되면서 일로역 후문과 연결되는 이곳에 장터가 형성된 것이다. 장날이 되면 근방의 걸인패들이 판을 치고 다니며 각설이 소리도 많이 하고 시끌벅적하게 흥청거렸던 곳이다. 이곳은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영암군 미암과 삼호에서 주룡나루를 통해 장 보러 오고 나주 동강, 무안과 목포 등 4개 지역 사람들이 모였으니 장날은 큰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1960년(1956년이란 설도 있음)도에 현재의 일로장으로 옮겼다. 지금도 마을에는 주조장이 있으며 정미소가 세 군데나 있다.
강남산에 가면 굶지는 않는다
마을에 있는 사회복지기관인 소전원은 이 마을 주민들에게 많은 애증을 갖게 하는 시설이다. 소전원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쟁고아를 수용하기 위해 당시 이 지역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던 나판수 씨가 설립,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을 결손 가정 아동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실지로 이 마을 주민들이 회고하건데 소전원 아이들을 부러워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려웠던 시절 마을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나와도 다행이었는데 소전원 아이들은 공부만 잘 하면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갈 수 있으니 오히려 소전원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기도 했다. 소전원 출신으로 해군 소장을 포함한 경제계 학계 등 각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전(蘇田)원의 설립 취지는 ‘蘇田’이란 한자 풀이에서 보듯이 ‘곡식이 잘 가꾸어진 들녘’이라는 뜻으로 원생들을 잘 보살피고 바르게 교육시켜 사회에 진출시킨다는 설립 이념이 담겨있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즉 설립자인 나판수씨가 젊었을 때 素全 손재형 선생에게 글씨를 배우러 다녔는데 1951년 고아원을 세우면서 평소 존경하던 스승 소전 선생의 아호를 따 音만 빌려 쓰고 한자는 다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나주 정씨 門中山인 강남산 기슭에는 산정리에서 옮겨 온 ‘충절문’이 있다. 시멘트 구조물로 이루어졌는데 안에는 세 개의 단비가 있다. 중앙에 충절공정완첨정지단 오른쪽에 효자정처인(정집중 정창일)지단 왼쪽에 동계처사정공낙섭지단이라는 비가 있다. 또한 충절문이란 현판 뒤에 오륜사라는 글씨가 각이 되어 있다. 충절문 옆에 ‘충절공정완기적비1962’ 가 있다. 그 외에도 나주정씨삼강비1980 다산정선생유적비1969 문도공다산정선생추모단1983이 있다.
충절공 정완은 선조 병자년에 무안군 청계면 송현리에서 태어나서 16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년 후인 1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 막하에 편입되어 당포싸움, 한산도싸움, 진도싸움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워 임진왜란 공신으로 선무훈록에 기록된 사람이다. 그 후 영조 임금이 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忠良祠에 배향하였다. 후손들은 충절공의 德業을 오래 기리고자 공이 만년에 기거하던 일로읍 산정리에 忠節祠를 지어 문중에서 제사를 받들며 후세의 귀감으로 삼게 했다.
그곳에서 조금 내려가 길 아래에는 효자각이 있다. 그곳에는 ‘효자초산정공지단’이라는 단비가 각 안에 있다. 각 옆에는 ‘효자초산정재연지비1980’이라 쓰여진 비석이 있다. 효자각 아래에는 1932년에 지은 나주 정씨 재각인 경모재가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안에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또한 강남산 밑에는 1989에 세운 ‘나주정씨일로입향조유허비’가 있다.
다시 일어나는 마을 - 월암6리 부흥정
復興亭은 월암리 6리에 속하는 마을로 9리의 숲돌이와 연소동과는 한 마을이었다. 일로읍에서 청계 방면으로 문화로를 따라 200여 미터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마을 뒤에는 1989년 11월에 들어선 목포교도소가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장항포 간척으로 조성된 농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마을 오른쪽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와 호남선 고속철도가 지나고 있어 조금은 시끄럽기도 하다. 또한 마을을 가르고 가운데로 문화로가 지나고 있어 마을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復興亭이란 지명의 유래는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마을이 형성될 당시 피폐 했기에 다시 일어나라는 뜻으로 부흥정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은 잘못 알려진 지명유래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원래부터 간척 등 넓따란 농지를 갖고 있어 마을이 풍족한 마을인데 가난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해서 주민들은 다르게 지명유래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교도소가 들어선 마을 뒷산의 지형이 반달형이다. 반달도 지는 반달이 아니라 보름달이 되어가는 반달형이다. 해서 주민들은 뒷산으로 달이 뜰 때마다 마을도 저 달처럼 다시 일어서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 부흥정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마을 시조가 입향하여 제례를 올릴 때 부엉이가 울었는데 이것을 길조라 여겨 마을이 크게 일어날 징조라 생각해 부흥정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주민들도 마을의 주산인 뒷동산에 부엉이가 많이 살고 있어 저녁이 되면 ‘부엉 부엉’ 하는 소리가 많이 들렸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와 증언들을 바탕으로 살펴 볼 때 부흥정이란 마을 이름은 부엉이 소리를 음차 하여 지은 지명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금령김씨 金恒秋(1636 - 1727, 자 - 鳴義)다. 공은 조선 세조 때 충신인 충의공 김문기의 8세 孫으로 남원에서 세거하다가 아버지 代에 영암군 아산으로 이거했다. 이후 1689년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공은 거주지를 벗어나 이곳 일로읍 부흥정에 자리 잡고 이름을 숨긴채 자연을 벗 삼아 평생을 보냈다. 또한 풍류를 즐기면서 후손들의 교육에 힘을 쏟기도 했다. 자료로 지명의 흔적을 찾아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부흥정이란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고 1912년과 1917년의 자료부터 나온다. 주민들은 성주 都씨와 금령 金씨가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하나 都씨의 입향 연도나 족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광암 마을과 함께 당시 일로면에서 두 번째로 잘 사는 마을이었다. 인물도 많이 났을 뿐 아니라 주민들이 얼마나 근면하고 성실했던지 식민지 토지 수탈의 앞잡이였던 동양척식회사가 이 마을 주민들의 근면함과 선진화된 영농기술을 보고 상을 준 일이 있을 정도였다. 실지로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를 비롯하여 5-60년대에도 앞서가는 농촌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주민이었던 김재규씨는 목화씨를 가져 와 목화밭을 일구어 많은 소득을 올리자 목화재배시범지구 마을로 선정되었으며 주변 마을에 보급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주민 중 일로면장을 역임했던 분이 있었다. 김용균이라는 분으로 면에 나갈 때는 늘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마을 앞에 돌캐뜰이라는 간척지가 있는데 이 간척은 서울 사람이 해서 마을 주민들은 소작을 해야 했다. 그런데 소작료가 워낙 비싸 불만이 많았다. 이때 김용균은 주민들로 농지위원회를 조직하여 지주와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해서 소작료를 인하하기도 했다.
근면하고 부지런 했던 마을
1950년대 60년대에는 왕골을 심어서 모자를 만든다거나 돛자리를 만들어 많은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일로에서 전깃불이 이 마을에 빨리 들어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장항포가 막히면서 마을 앞의 남창천이 농지로 변하는데 그때 갯벌을 농지로 조성하면서 주민들은 암거(지하에 설치되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도랑 또는 통수로)를 만들어 그곳에 대나무 다발(쑤기라고도 함)을 묻어 염분을 제거 하였다. 이러한 간척지 염분 제거 방법은 장항포 들 주변에서 많이 시용되었는데 광복 이후에는 마을 주민들이 암거 속의 대나무를 파내어 집을 짓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1989년 11월 마을의 주산인 뒷동산의 일부인 숲돌이라 부르는 지역에 9만여평의 목포교도소가 들어섰다. 숲돌이란 지명은 숲이 울창하게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목포교도소는 주민들을 많은 어려움에 빠지게 하였다. 교도소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좋지 않은 이미지와 교도소 주변이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이면서 주민들의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감돈리 방향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농협창고 앞에 성주 도씨 ‘도지삼의 妻 김소지’의 정절비가 있었다. 원래는 마을 앞 돌캐뜰에 있었던 것인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비문을 보면 내용에 김해김씨나 달성배씨가 아닌 여인의 이름이 직접 나타난 것도 흥미롭고 1910년(명치43년. 경술년) 일본 통감의 표창을 받은 기념으로 세운 비인 것도 관심을 끈다. 주민들의 지적이 없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일인데 건축기자재 및 폐기물로 덮여 있어 존재 유무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방치되고 있었다.
동학혁명이나 한국전쟁 등 나라의 변란기에도 주민들의 피해가 하나도 없었던 마을이다. 또한 일찍부터 대부분의 주민들이 송태마을 바우동에 있는 서당에 다녀 문맹자가 없으며 주민들의 학습 열의가 높아서 관공서 등 공무원의 배출이 끊이지 않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교도소 자리로 편입된 보자기골과 짓쿠테이, 행기방천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품바 공연을 최초로 했던 마을 - 월암7리 다복동
다복동은 월암7리에 속하는 마을로 1970년대 후반에 일로초등학교를 기준으로 4구인 월암 마을에서 분리되었다. 해서 1789년의 문헌인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고 1987년이 되어서야 나온다. 분구되기 전에는 작은 마을로 불려졌으며 따박골이라 불렀던 마을이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서 예전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이곳은 깊숙한 골짜기였다. 이러한 골짜기에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따박골이 음운의 변화를 일으켜 다복동이 된 것이다.
따박골의 의미는 따박따박 쟁여놓는 골짜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복동의 유래도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가난한 부부가 늦게 아들을 낳은 후부터 살림이 늘자 아들 이름을 다복이라 짓고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자가 된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다복동이라 하였다’고 한 것처럼 복을 많이 받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주민들은 ‘예전에 다복솔이 많은 이 골 안이 잘 사는 동리로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담아 다복동이라 하였다’고 말한다.
마을의 지형을 보면 풍수적으로 쇠스랑 형국이다. 월암리는 일로읍사무소 뒤 여내기산을 축으로 세 개의 고랑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고랑은 여내기잔등이라 일컫는 일로초등학교로 가는 줄기이고, 두 번째 고랑은 일로제일교회로 가는 고랑이며 세 번째 고랑은 소전원을 포함한 강남산으로 뻗어 있는 고랑이다. 이 마을은 여내기 잔등 아래에 자리잡고 있어 아늑한 분지형의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입향조는 1920년대에 들어온 광산김씨 김영두(자-재백, 1897-1961)이다. 공이 이 마을에 자리를 잡을 때 세 가구가 있었으나 현재 두 가구의 후손은 살고 있지 않다. 또한 광복 당시에도 이 마을에 7가구 정도 살았으나 한국전쟁 이후에서야 많은 주민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일로초등학교 뒤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주민들이 달바위라고 부르는 입석이다. 지형상으로 봤을 때 상당히 높은 둔덕에 위치하고 있어 개발이 되기 전에는 일로 주변의 마을에서 모두 바라보았을 선돌이다. 크기도 길이가 4미터 50에 하단의 너비는 3미터가 될 정도로 크다. 월암리라는 里名이 이 바위에서 비롯되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 바위는 월출산에서 달이 뜰 때 달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런 모습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지역이 장항포 들 너머에 있는 삼향면 용포 마을이다. 용포 마을에서는 이 돌이 마치 불끈 솟은 남성으로 보여 마을 여자들이 바람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위를 자세히 보면 조그마한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영화농장의 둑을 쌓으면서 돌이 필요해 이 돌을 가져가려고 뚫어놓은 남포 구멍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의해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에 뚫었던 흔적만 남아있는 것이다.
품바 발상지 표지석은 이 마을에 있어야
주민들은 이 바위 아래서 세 개의 항아리가 나왔으며 그 속에서 동전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가지고 있는 주민도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주민들이 이 돌 앞에다 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이 마을의 지형이 낮아 답답한 느낌을 준다. 특히 마을 옆으로 주거환경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길이 나는데 마을 쪽에서 보면 6미터가 넘는 높이의 옹벽이 들어서게 된다. 이를 보고 주민들은 마을을 감옥으로 만들고 있다고 불만이 많다. 또한 지대가 낮기 때문에 예전에는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마을 일부가 침수를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수도 공사 때 수로를 넓혀 그 이후부터는 침수 사태가 없었다고 한다.
일로 노인회관 앞에 일로공회당이 있었다. 일로공회당은 품바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1981년 12월 김시라와 서선진 박성안 정규수를 비롯한 인의예술회가 중심이 되어 품바를 이곳에서 처음으로 공연 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후 품바는 무안과 광주 공연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 공연을 거듭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 상품이 되었다. 주민들은 의산리에 있는 품바 발상지라는 표지석이 공회당 터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은 당시의 건물을 철거해 빈터만 남아있는데 주민들에게는 추억의 장소이다. 그 아래로 커다란 정미소가 있었으나 그 또한 지금은 없다.
마을엔 자랑거리도 많다. 주민들이 성실하고 온순해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를 꺼려 할 정도로 인정이 깊은 마을이다. 또한 65세 이상의 노인이 70명이 넘을 정도로 많아 장수 마을로 알려졌으며 주민 중 제일 고령은 92세이다. 마을에 뛰어난 소리꾼이 있었다. 소리 할 때는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였던 사람으로 방송국에서 특별 취재를 할 정도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일로에는 유명한 샘이 있었다. 큰샘 참샘이라고도 불리는 이 샘은 월암8리 중앙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은 메꿔져 연립주택이 들어 서 있다. 이 샘물은 일로 주민 전체와 당시 무안중학교의 학생들이 먹을 정도로 수량이 많았으며 아무리 퍼내도 바닥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물을 사용하지 않으면 넘치는 것이 아니라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1922년에 개교한 일로초등학교와 일로파출소 그리고 일로우체국이 있으며 일로초등학교 뒤를 초분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정치인 배기선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주요건물로는 광성아파트 승원팰리츠 우체국 파출소 노인회 일로분회 하나로마트 등이 들어서 있다. 새로 신축된 노인회 일로분회 사무실 옆에는 1971년에 세운 ‘대한영노회기념비’와 1984년에 세운 ‘도의원임경규공적비’가 서있다.
일로의 번화가에 참샘이 있는 마을 - 월암8리 중앙동
月岩은 원래 달바우골이라 불렸다. 현재 일로초등학교 안에 고인돌이나 선돌처렴 여겨지는 큰 바위가 있는데 마을 이름이 그 바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바위에는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있다. 달이 동쪽에서 뜨면 제일 먼저 그 바위에 달빛이 머무는데 아기를 밴 임산부가 그 달빛을 안으면 총명한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다.
해서 똑똑한 아이를 낳으려는 아낙네들은 의도적으로 보름달이 뜨는 때면 몸을 정히 하고 속옷은 입지 않고 겉옷만 입은 채 바위 곁으로 갔다. 이런 사실이 소문이 나자 주변 마을의 청년들이 음심이 생겨 바위 주변에 몰래 숨어 있다가 달맞이 하러 온 아낙네들을 괴롭히곤 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하여 달바위 주위에다 대나무를 심기도 하였다고 한다.
중앙동은 월암 8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일로읍에서 청호리로 가는 일로로를 경계로 20여년 전에 월암2리 신흥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축협 앞의 길 오른쪽은 시장촌 그리고 왼쪽이 중앙동이다. 중앙동에 소속된 대표적인 건물은 희망아파트와 연립주택 거전우리빌 아파트 그리고 남부 신협과 농어민상담소 중앙치과 등이다.
이 마을은 원래 월암4리 월암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소유했던 농지에 조성된 마을이다. 1983년 무렵 축협 앞 큰 길 가에 소도읍 가꾸기를 하면서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때는 평당 500만원이 넘게 거래되었던 땅들이지만 현재는 인구의 감소와 상권의 축소가 맞물려 시세가 훨씬 낮게 형성된다고 한다.
이 마을은 월암리 11개 마을에서 가장 면적이 좁은 마을이지만 번잡한 거리이기도 하다. 일로읍 대부분의 거리는 저녁 8시만 되면 깜깜한 밤이 되지만 이 지역은 10시가 넘어도 상점의 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 많이 있다. 그만큼 유동인구가 있다는 것이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큰길 옆으로 목화 타는 공장도 있었고 밀가루를 빻는 제분소도 있었다. 또한 똥비누라 일컬어지는 검정빨래비누 공장도 있었다. 이 똥비누는 쌀을 찧고 남은 누과에 양잿물을 섞어서 만든 비누로 예전에 세탁용품으로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 이었다.
참샘이 있는 마을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천사들의 쉼터이기도 했다. 보해상사 앞 구 철로 길 둔덕은 경사지고 양지바른 곳이다. 겨울철이나 이른 봄이면 10여명의 천사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눕기도 하고 이를 잡기도 하는 등 그들만의 해방구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주변에는 인가가 없고 주민들이 별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샘이 있었다. 참샘이라고도 불리는 이 샘은 현재 거전 우리빌 아파트 101동과 102동 사이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무안 중학교의 학생들을 비롯하여 일로읍 사람 모두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잘 나왔다. 실지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하루 종일 두레박으로 퍼 올려도 수위가 그대로였다고 한다. 또한 물을 사용하지 않으면 넘치는 것이 아니라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샘물은 식용만이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사용하였는데 지하수 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물길이 마르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마을이 농지 옆에 있으면서도 주민들 중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대부분 상인과 직장인들로 이루어졌다.
일로 주민들은 일로읍에서 제일 좋은 터가 두 자리 있다고 한다. 하나는 토지개량조합이 있는 자리이고 또 하나는 이 마을 옆의 보해상사가 있는 자리다. 보해상사 터는 예전에 죽산리에 있었던 면사무소가 옮겨 온 자리이기도 하다. 또한 보해상사 앞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옹기배가 다녔던 선착장이기도 하였다. 1920년대 영화농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사 주변을 파면 수많은 옹기 파편들이 발견된다. 이 상사 앞에서 무전산까지 둑이 있었는데 지금도 주민들은 둑방길이라 부른다.
마을 앞에 있는 무전산은 원래 ‘황우등’ 또는 ‘평정골’이라 했는데 후일 이 산에 통신과 관련된 송신탑 등이 건립되고서부터 ‘무전산’이라 했다. 정부는 1940년대와 1960년대 초에 무전산에서 장항포 들까지 비행장 건설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주민들의 반대도 심했지만 무전산의 기능이 크게 부각되면서 무산되었다. 즉 무전산의 송수신 기능은 태평양의 무선도 잡아낼 정도로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어서 무전산을 옮길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무선 안테나가 12개 있었는데 지금은 5개만 있다.
제비똥 바위가 있는 제비집골의 마을 - 월암9리 연소동
연소동은 월암9리에 속하는 마을로 일로농협 주유소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목포에서 일로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교통상으로도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자방포의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남창천이 흐르고 있다. 원래는 월암 6리의 부흥정과 같은 행정구역이었으나 오래 전에 분리되었다. 하지만 마을의 입향조나 성씨의 분포도는 부흥정 마을과 매우 비슷하다.
燕巢洞은 마을의 풍수적 지형을 본 따서 붙인 이름인 제비집골이다. 강냉기 잔등의 안쪽에 있는 마을의 위치가 臥牛형의 오목한 지형으로 마치 반달형의 제비집을 연상케 하고 있다. 특히 마을 뒷산인 남양 홍씨 門山은 황소안 마을 까지 연결되는데 이곳에는 주민들이 제비똥이라 부르는 바위들이 30여 미터에 걸쳐서 놓여있어 지명의 유래를 짐작케 해준다. 또한 마을 앞에 있는 소나무는 예전 취락촌에 있었던 산과 연결되어 제비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빨랫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 온 성씨는 금령김씨와 성주도씨이다. 대체로 부흥정과 한 마을이었다가 행정적으로 분리되어서 부흥정의 입향조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흥정 마을의 입향조는 금령김씨 金恒秋(1636 - 1727, 자 - 鳴義)다. 공은 조선 세조때 충신인 충의공 김문기의 8세 孫으로 남원에서 세거하다가 아버지 代에 영암군 아산으로 이거했다. 이후 1689년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공은 거주지를 벗어나 이곳 일로읍 부흥정에 자리 잡고 이름을 숨긴채 자연을 벗 삼아 평생을 보냈다. 또한 풍류를 즐기면서 후손들의 교육에 힘을 쏟기도 했다. 금령김씨보다 일찍 이 마을에 들어왔다는 성주도씨의 입향조는 확인할 수 없었다.
주민들도 마을 자체적으로 역사가 300여년이 되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을회관 앞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들 수령이 300여년이 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데서 비롯된다. 원래는 7그루의 소나무가 있었으나 몇 해 전에 재선충에 감염되어 고사되었다. 예전에는 주민들이 소나무 아래에서 쉬기도 하고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인구감소 및 관심이 없어 지내지 않고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는 물론 1912년 1917년의 자료와 근래에 만들어진 1987년의 자료에도 연소동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봤을 때 연소동이란 마을이 독립된 마을로 자리 잡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연소동을 포함한 숲둘이(숲두리, 싯돌) 江來汽(강냉기라고도 함) 취락구가 모여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숲둘이는 마을 오른쪽의 골짜기로 숲이 우거진 마을이다. 원래 신안주씨들이 이곳에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골이 깊고 숲이 잘 가꾸어져서 붙여진 이름인데 어휘의 변천으로 싯돌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곳곳에는 기와조각 등 생활도구들이 나와 예전에 주거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강래기는 강냉기라고도 부르는데 예견지명을 나타낸 이름이다. 즉 증기를 내뿜는 기구가 강을 건너온다는 지명으로 마치 기차역이 들어서는 것을 예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제비똥 바위가 있다
마을 뒤에 있는 제비똥 바위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바위가 아니며 바위의 색깔도 마치 제비똥처럼 3색으로 보인다. 지금은 바위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자방포 들[野]의 다리를 놓는데 사용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이 쪼갠 흔적들이다. 예전에는 이 바위의 영험함을 믿고 이 마을 주민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와서 공을 들였다고 한다.
마을에는 82년도에 취락구조가 형성되고 84년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대동아파트가 들어섰으며 86년에는 숲둘이를 포함한 마을 뒷산 9만여 평에 목포 교도소가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이 마을이 농가로서는 주변 마을에 비해 앞서가는 마을이었다. 특히 목화 재배에 뛰어나 목화재배 시범지구로 선정되기도 했다. 예전에는 마을에 커다란 연자방아가 있었으나 교도소 건설 때 묻혔다. 여내기와 쳐다보면서 가는 재라는 의미의 보자골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 입구 사거리에 백범선생추모비와 백범선생추모비건립사실기의 두기의 비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턴가 이 비가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다행히 일로읍의 주민이 영암에 이 비가 있는 것을 보고 일로읍사무소에 연락하여 되찾아온 것이다. 되찾은 비는 일로읍 사무소 앞에 놓여 있는데 예전의 비가 아닌 새로 제작한 비다.
이 비는 일로읍 산정에 살던 정재연씨를 비롯한 삼일동지회에서 1979년에 세운 비다. 비에는 백범을 존경하는 정재연씨가 다산사를 창건하면서 다산 정약용과 백범 김구를 동배 향사하였는데 풍우로 다산사가 훼손되자 다시 중건하여 모시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이곳에 비를 세워 사실을 기록한다고 쓰여져 있다. 동지회 사람들이 건재했을 때는 매년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마을에 일로한우리교회와 노인재가복지원 일로개발청년회 사무실 등이 있다.
일로읍의 중심마을 - 월암10리 읍동
오늘날의 일로읍 소재지는 일본세력이 진출하기 전에는 매우 한적한 농촌 모습이었다. 1915년 지적원도를 보면 역전 통 부근에서 대지는 3개 지번밖에 없고 일로초등학교 근방에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일제가 철도역과 소재지를 월암리에 설치하면서 비로소 신흥중심취락으로서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또한 장항포 농장과 영화농장의 조성에 이어 동척과 금융조합의 설치, 그리고 1922년 일로보통학교, 1937년 무안농업실습학교가 개교하자 일로면이 실질적으로 무안군 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갖게 되었다. 이어 1946년에 무안중학교 개교 1961년 무안농업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1913년 처음 일로역이 개통될 때의 이름은 삼향역이었다. 당시에는 일로보다는 나주의 영내 삼향의 위상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이후 1924년에 일로역으로 개칭한다.
월암리는 일로읍 소재지가 자리한 곳이며 예전에는 영산강과 호남선을 비롯하여 각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황우동, 신흥, 덕산, 월암, 회인동, 강남산, 부흥정, 다복동 등 모두 8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거주 주민이 늘어나면서 분구가 시작되어 현재는 황소안, 신흥, 덕산, 월암, 강남산, 부흥동, 다복동, 중앙동, 연소동, 읍동 취락촌 등 11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일로초등학교 뒤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주민들이 달바위라고 부르는 입석이다. 지형상으로 봤을 때 상당히 높은 둔덕에 위치하고 있어 개발이 되기 전에는 일로 주변에서 모두 바라보았을 선돌이다. 크기도 길이가 4미터 50에 하단의 너비는 3미터가 될 정도로 크다. 월암리라는 里名이 이 바위에서 비롯되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 바위는 월출산에서 달이 뜰 때 달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런 모습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지역이 장항포 들 너머에 있는 삼향면 용포 마을이다. 용포 마을에서는 이 돌이 마치 불끈 솟은 남성으로 보여 마을 여자들이 바람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달이 동쪽에서 뜨면 제일 먼저 그 바위에 달빛이 머무는데 아기를 밴 임산부가 그 달빛을 안으면 총명한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다. 해서 똑똑한 아이를 낳으려는 아낙네들은 의도적으로 보름달이 뜨는 때면 몸을 정히 하고 속옷은 입지 않고 겉옷만 입은 채 바위 곁으로 갔다. 이런 사실이 소문이 나자 주변 마을의 청년들이 음심이 생겨 바위 주변에 몰래 숨어 있다가 달맞이 하러 온 아낙네들을 괴롭히곤 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하여 달바위 주위에다 대나무를 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읍동은 읍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일로읍의 중심마을로 마을의 지형을 보면 풍수적으로 쇠스랑 형국인 세 개의 골짜기 중 하나이다. 골짜기는 일로읍사무소 뒤 여내기산을 축으로 갈라지는데 첫 번째 고랑은 일로초등학교로 가는 줄기이고, 두 번째 고랑은 일로제일교회로 가는 고랑이며 세 번째 고랑은 소전원을 포함한 강남산으로 뻗어 있는 고랑이다. 이 마을은 제일교회로 뻗은 골짜기의 마을이다. 또 다른 사람은 그물 형국이라고도 한다. 해서 이 마을에서는 돈을 벌고 명예를 가꿀 수도 있지만 마을을 벗어나면 모든 복들이 넘쳐버리기 때문에 대부분 실패한다고 한다.
일로읍의 중요기관이 몰려 있어
이 마을은 1913년 일로역이 개설되면서 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여러 성씨가 함께 하는 복합마을로 뚜렷한 역사나 문화는 없다. 예전에는 일로읍의 중심지로서 대부분의 기관이 이 마을에 있었다. 그러나 1990년도에 5리 강남산 마을과 分里가 되면서 남아있는 기관으로는 일로읍사무소 무안사회복지관 일로소방서 목포교도소 일로제일교회 새마을금고 의원 학원 등 중요기관이 몰려있다.
1980년 12월에 일로면이 일로읍으로 승격되었는데 일로면사무소는 원래 죽산리 당월촌에 있었다. 이후 월암4리인 월암마을의 보해상사 자리로 옮겼다가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목포교도소는 1989년에 목포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이 교도소는 수형자와 형이 확정되지 않은 1심 미결수 및 대법 상고수를 수용 관리하고 성폭력사범 집중교육기관 시설로서, 법질서 확립을 통하여 사회 안정을 도모하고 수용자의 성공적 사회복귀를 지원하는 국가 중요시설이다. 무안사회복지관은 1999년에 개관하였다.
예전 시외버스가 다니던 시절 이 마을에는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처음엔 일로약방 옆에 있었는데 좁아서 일로의원 자리로 옮겼다. 일로역과 터미널이 있는 마을이라서 여인숙도 있었고 술집도 많이 있어 흥청거리기도 했다. 또 터미널 뒤에는 일로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한 관사도 있었으며 제일교회 아래 아트전자 뒤에는 극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