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2:10~19절/권위와 형통은 어디에서?(208/350)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권력은 스스로 만들 수 있지만, 권위는 스스로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보면 권위만 스스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권력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은혜를 베푸실 때만 권력도 붙잡게 되는 것이다. 어째든 세상에서 권위는 스스로 만들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권위는 전적으로 사람들에 의해서 내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면 따라온다. 그러나 권위는 따라서 오지 않는다. 아무리 권력의 자리에 앉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존경과 사랑을 받지 않으면 권위는 따라서 오지 않는다. 형통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형통이라는 것을 우리는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형통은 그의 심령 속에 있는 기쁨과 감사와 만족이다. 그러기에 형통도 철저하게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권위와 형통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면서, 이웃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따라오는 부산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권위를 가지려고 애쓰고, 형통함을 만들려고 애쓴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1.유다 말기에 참으로 권위와 형통의 복을 누렸던 사람은 요시야 왕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권위와 형통의 복을 누리지 못했다(10). 여기에서 죽은 자는 요시야 왕이다. 요시야 왕은 철저하게 종교개혁을 일으킨 왕이다. 남쪽 유다만이 아니라, 이미 망해 버린 북쪽 이스라엘까지 가서 우상의 제단을 헐어버렸고, 온 이스라엘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그는 애굽과 므깃도 전투에서 39살인 젊은 날에 일찍 죽는다. 요시야가 죽임을 당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슬픔이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 요시야를 위하여 슬퍼하며 울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요시야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고, 때가 되어 부름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안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요시가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할 일이 아니라, 더 슬퍼해야 할 일은 정작 애굽으로 끌려간 요시야의 아들인 살룸 왕(여호아하스)다(11,12). 살룸은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애굽에 붙잡혀 끌려갔다. 포로가 되어 끌려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어야 할 것은 그가 그곳에서 고통을 당하고, 그곳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살룸은 애굽에서 떠나게 하신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음으로, 가나안에서 떠나서 애굽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수치와 멸시를 당하며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빠져 나온 애굽의 가치관을 청산하지 않으면 다시 그 땅으로 추방을 당하고 수치와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2.살룸(여호아하스)이 애굽으로 끌려 갈 때 애굽 왕은 유다의 왕으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을 앉혔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왕이 된 여호야김을 향하여 그의 악행을 고발하였다(13,14). 여호야김은 아주 양아치와 같은 왕이었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는 자’였다. 불의로 집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그 불의함이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은 것이다. 일꾼을 고용하고 일을 시키면서 품삯을 제때 주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이 일꾼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는 다는 것은 아주 파렴치하고 악한 짓이다. 그런데 이 일을 왕이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 나라의 권력을 잡은 자들이 어떻게 하겠는가? 왕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 나라의 권력을 잡은 자들도 다 그와 같이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꾼들의 노동력을 늑탈하고 품삯을 제때 주지 않는 자들은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고 그들을 헐벗게 하고 한지로 내보내는 것과 같다. 자기는 호화로운 궁전을 짓기 위해서 돈을 쏟아 부으면서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은 것은 공의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주 악한 양아치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호화롭게 왕궁을 새로 지었다고 해서 그가 참으로 권위과 있는 왕으로 형통함을 누릴 수 있을까(15). 아무리 호화롭게 왕궁을 건축하고 새 집에 들어가서 산다고 해서 그가 존경을 받고, 권위가 세워지고, 형통함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이것인 것 같다. 기업주들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빼앗고 쓸모없다고 여겨질 때 한지로 내쫓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호화로운 궁정에서 권력자들과 노동자들의 한 달, 때로는 일 년치 품삯을 하루 밤에 날려 버리면서도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과연 이것이 정의롭고 공의로운 나라일까? 그것을 옹호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3.요시야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가장 존경 받는 왕으로 권위가 세워졌고, 또한 형통함의 복을 누렸다(15,16). 요시야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면서도 형통하였다. 재판관의 역할은 폭력과 강압을 저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가난한 자들이 불의에 희생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요시야는 이것을 잘 했다. 그럼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함, 행복을 누리는 자였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정직과 절제를 행해야 한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권력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들짐승처럼 심판하신다(17~19). 여호야김은 호화로운 궁정을 지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끌려나와 시체도 매장되지 못한 가운데 버려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