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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네팔 인도 여행 逸話/ 인도투어여행(8)최종회 Photo 에세이
벽송 추천 0 조회 116 07.07.23 10: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네팔 인도 여행 逸話/ 인도투어여행(8)최종회 Photo 에세이

*. 종교가 삶이며 목적인 나라
네팔은 세계 유일의 힌두교 국가이며, 인도는 국민의 82%가 힌두교를 믿고 있는 나라다. 그래서 힌두교(Hinduism)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도와 네팔을 여행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힌두교(Hinduism)란 주물숭배(呪物崇拜), 애니미즘(animism), 조선(祖先)과 우상 숭배, 범신론적 철학 등의 여려 요소를 포함한 종교다. 윤회의 업, 해탈의 길, 도덕적 행위, 경건한 신앙생활 등이 힌두교의 특징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힌두교(Hinduism)에서의 힌두(Hindu)란 '인디아(India)'의 어원이 되는 '인더스 강'을 산스크리트어로 이르는 '신드후(Sindhu)'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래서 힌두교를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넓은 의미로의 힌두교는 불교보다 먼저인 BC 2500년까지 소급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로 다신교(多神敎)다.
그러나 오늘날 인도의 힌두교는 300년 경 옛날의 바라문교(婆羅門敎, Baramana)가 인도 토속 민간신앙과 융합하여서 불교의 영향 하에 발전한 종교다. 우리나라 불교가 한국 토속신앙과 어울려 오늘날의 한국 불교가 된 것과 같다.
그 힌두교에서 섬기는 신으로 셋이 있다. 우주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n ), 질서유지의 신 비슈누(Visnu神), 파괴의 신 시바신(Siva神)이 그것이다.
- 브라흐마Brahman )는 대우주를 창조하는 최고 신격에 해당하는 신으로 네 개의 머리와 손에 베다(Vada) 성전과 물 항아리, 활, 작은 막대기를 들고 백조를 탄 모습이다.
-비슈누신(Visnu神 )은 질서를 유지하여 주는 신으로, 하늘에서 항상 지상을 살펴보고 있다가 질서가 흔들리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즉시 가루다(Garuda)라는 새[鳥]를 타고 내려와서 바로 잡아 주고 올라간다는 신이다. 얼굴과 다리가 검푸른 색으로 흔히 네 개의 팔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머리에는 높다란 왕관을 쓰고 두 손에는 철퇴[곤봉]와 원반[輪盤]을 들고, 나머지 두 손에는 나팔[法螺貝] 및 연꽃을 들고 있다.
-시바신(Siva神)은 파괴의 신으로, 비슈누신(Visnu神 )보다 힌두교 신자가 더 많이 섬기는 신이다. 그래서 시바신을 흔히 ‘위대한 신’이라는 뜻으로 '마하데바’라고 한다.
시바신의 머리에는 눈이 세 개에다가 이마에 반달을 붙이고 몸에 뱀과 송장의 뼈를 감은 꼴을 하고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세상에 출현한다. 우리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보던 눈이 셋 달린 스엠브나트 사원은 이 시바(Siva)의 신을 모신 곳이다.
인도의 힌두교 대종파에서는 세 신 중 비슈누(Visnu)와 시바(Siva)를 그중에서도 시바(Siva)신을 주로 숭배하고 있다.
흔히들 인도인은 힌두교에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위 세 신과 관계가 있는 카스트 때문이다.
네팔과 인도에 우리가 볼 수 있는 힌두 사원의 특징은 한 마디로 탑 형태로 나타난다.
그 사원 중앙에는 신을 모시는 곳이 있는데 그 신은 대개가 시바(Siva)신상이고 그 모습은 짧고 둥근 원기둥으로 시바의 남근(男根)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그 탑 입구에는 동물 조각상이 지키고 있는데 머리가 코끼리 모양의 신이다.
다음에서 그 코'끼리 신에 대하여 말하는 현지 네팔 가이드의 말을 들어 보자.
-시바신의 아내가 바르버티입니다. 코끼리 신은 시바신의 아내 바르버티 아들이 베네스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 드릴 께요. 시바신이 어디에 놀러갈 때 부인께서 심심해서 흙을 만졌더니 이쁜 아이의 모습이 들어났어요.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아들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아들 베네스에게 아무나 못들어 오게 경비처럼 문을 지키라 했어요.
어느날 갑자기 시바 신이 집에 들어왔어요. 집에 들어 가려니까 아버지인지 모르고 못 들어가게 하는 거에요. 시바신은 자기 아들인지 모르고 갑짜기 화가 났어요. 그래서 자기 아들 모르고 그 머리를 잘라 버렸어요. 그러니까 밖에 나갔다 들어오던 아내 바르버티가 아들의 머리가 없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그리고 남편 시바에게 어떻게든지 살려달라고 했어요. 시바신은 그제야 알고 부하들에게 빨리 뭐든지 머리를 가져 오라고 그랬어요. 부하들이 가니까 갑자기 코끼리가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코끼리 머리를 잘라서 붙이니까 그러니까 코끼리 신이 됐어요. 그래서 코끼리신은 언제든지 문 앞에 서서 손님을 환영하는 뜻으로 문앞에 있어요. 좀 이해가 되셨습니까?
인도에서는 귀한 손님을 맞을 때는 입구에서 금잔화로 만둔 화환을 목에 걸어주며 환영한다. 위의 코끼리신의 목에 건 것 같이. 

*. 술꾼의 지옥 인도
인도와 네팔의 힌두 문화는 술과 향락문화 등을 수행(修行)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나쁜 문화로 규정한 나라여서 외국인들이 술을 가지고 입국할 수가 없다고 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술꾼인 내가 어찌 보름 동안이나 금주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짐을 꾸리는데 가장 궁금한 것 중에 하나가 '회교국에서 금하는 술을 어떻게 가져갈 수 있는가?'였다. 여행사에 문의하였더니 가져갈 수 없다고 하며, 적발되면 벌금을 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만약 적발 되면 버릴 셈 치고 1.5 리틀짜리 파란 등산 물병에 소주를 담아가지고 큰 가방에 넣고 갔다. 인천공항에서 출국수속을 하며 짐을 붙이려는데 공항 직원도 화장품을 포함한 모든 액체류는 어떤 가방에도 넣지 말라는 말을 듣고 아내가 반색을 한다.
그러다가 인도 뉴델리 간디국제공항에 도착하였더니 출국수속을 할 때에 붙인 큰 가방까지 검색을 하지는 않았다. 조금은 후회가 났다. '소주를 더 가지고 올걸-.'
델리까지 직항하는 항공기였다면 8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우리들은 인디아 국적기를 타고 홍콩 거쳐서 오는 바람에 홍콩에서 1시간을 기내에서 유하는 시간까지 합쳐서 1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그 동안 기내에서 만난 인도 스튜어디스는 우리나라 젊은 처녀들과는 달리 40대 후반 이후의 여인들이었는데 생각과 달리 기내식을 주기 전에 황송하게도 술을 주었다. 아무래도 맥주가 분량이 많을 것 같아서 맥주를 시켰더니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한 병 더 준다. 상상해 보라, 그때 내가 얼마나 행복해 하였는가를.
일행 중 한 분이 기내식으로 주는 소형 포도주 한 병을 마시지 않고 무심히 배낭에 넣고 뉴델리 간디공항에 입국하다가 출입국 관리에게 적발 되었더니 묻는다. '여기 두고 가겠는가. 마시고 가겠는가?' 그래서 일행과 함께 나누어 마시다가 많은 외국 관광객들로부터 박수를 받기까지 하였다.
인도 여행 중 호텔에서는 병맥주를 5$에 팔았지만 시내에서 술을 파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중 자이푸르 Gold Palace 호텔 앞에 있는 구멍가게에 술을 살 수 있었던 것 외에는 우리 투어여행객들이 술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가져간 술을 마시면 이를 금하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식사 중에 하얀 물병에 넣고 몰래 마시곤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알겠더라, 'Korea는 술꾼의 천국이었구나!'를.

*. 인도 네팔 여행 준비물
네팔 인도 투어 여행에서 만난 호텔들은 국제적인 유명 체인호텔로 모텔 같던 푸쉬가르(Pshkar)호텔을 제외한다면 서구의 어떤 호텔에 손색이 없는 편안한 호텔들이었다.
네팔과 인도의 호텔에는 서구 호텔과 달리 치약, 칫솔, 빗은 없었으나 비누와 샴푸, 로션에 전기 드라이까지 있었다. 그래서 치약, 칫솔과 빗, 슬리퍼는 필수 준비물이었다. 그리고 어느 호텔에도 휴지가 없으니 준비할 일이다. 여기에 가트(Ghat, 화장터)의 냄새를 피하기 위해서 마스크는 필요하였다.
전기 소켓이 우리들과 달리 구멍이 셋이라서 처음에는 당황하기도 하였다. 아래의 두 홀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이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세 구멍 중 위의 홀을 볼펜 등으로 '꾹-' 찌르면 아래 두 구멍이 열리는 것이니 인도 네팔 여행 시에는 필히 사용에 유념할 일이다.
시간은 인도가 한국보다 3시간30분 빨랐고, 네팔이 3시간 15분 빨랐다.

*. 향신료 때문에 염려하던 식사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으려던 이유 중에 하나가 향신료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양에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어서 인도 특유의 향신료가 음식물을 부패로부터 보호해 주기 때문에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서 인도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배낭여행이 아닌 우리 같은 투어여행에서의 식사는 아침은 서구에서와 같이 주로 호텔에서 컨티넨탈 음식이 주였다. 그러다가 버스나 지프를 이용하는 장거리 여행 중처럼 부득이한 경우의 식사는 요리사가 동행하여서 나면 또는 밥과 김치를 준비하여 주어서 좋은 식사는 못되었어도 큰 애로는 없었다. 그보다 오히려 향신료가 포함된 인도 식사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불평할 지경이었다.
물은 식당에서조차 어디서도 식수를 그냥 주는 곳이 없어서 사 먹어야만 했다. 호텔에서는 미네랄워터를 주고 있지만, 그 이외의 물은 적응한 현지 사람과 달리 외국인은 마시면 배탈이 난다 하여 조심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를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는 말보다 금수강산(金水江山)이라 부르기로 했다.

*. 인도에서 보게 된 것들
인도는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고 와야 하는 곳이다. 신과 인간이, 자연과 인간의 삶이 하나가 되어 사는 인간의 순수성을 보고 느끼고 와야 하는 곳이 인도 여행이라 한다.
인도와 네팔 투어여행은 단순한 관광여행이 아니라 종교 순례 여행과 같았다.
우리는 여행사(보물섬투어)에서 말하던 대로 바라나시, 카주라호에서는 인더스문명[힌두문명]을 보았고, 아그라와 델리에서는 사라센[Saracen] 문명을, 자이푸르(Jaipur)에서는 회교의 영향을 받은 힌두문명을 보았다.
우리는 이보다 우리나라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Lmbini)와 최초의 설법지 사르나트[Sarnadth녹야원] 등에서 불교문화를 접한 것이 그중 행복하였다.
그보다 더 네팔과 인도 여행 중 가슴을 뭉클하게 할 때가 있었다.
우리가 13일 동안 그 먼 거리를 차에 시달리며 숙소였던 호텔 룸에 들어가 보면 거의 예외없이 대부분의 TV가 우리나라 Samsung 아니면 Daewoo의 것이었고, 네팔의 두메산골의 벽에서도 Krea의 상품 광고를 보게 될 때였다. 국민소득이 250불인 네팔이나, 700불이라는 인도도 그랬지만, 작년에 가본 중동 두바이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컸고 그 덕분에 나 같은 무명의 시인도 아내와 함께 이렇게 세계여행을 나서게 된 것이다.
국민소득 1만불 이상의 나라는 세계에서도 20여개국 정도라던데 우리는 금년 연말이면 2만불의 나라가 된다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세계의 모든 관광지에는 처음에는 서구인들이, 그 다음에는 일인들이, 그리고 지금은 한국인들이 누비고 다니고 있다 한다. 

*. 목숨을 걸고 다닌 인도 네팔 여행
우리들은 비행기로 11 시간 30분을 날아 뉴델리에 왔다. 네팔에서 푸쉬카르까지나 자이푸르에서 카즈라호까지 하루에 9시간 이상을 지프와 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행복한 운이 따랐다면 네팔 페와호수에서의 보트를 타고 안나푸르나의 설산(雪山)을 볼 수 있다지만 우리는 그런 복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난생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황홀하게 코끼리를 타고 자이푸르 암베르성을 올랐고, 푸쉬카르의 일몰을 낙타를 타고 1시간이나 다녀오기도 하였다.
푸쉬카르에서 뉴델리까지 8시간 30분 동안 과거 영국제정시대에 영국의 귀족들이 타고 다녔다는 A/C 침대열차를 타기도 하였다.
이렇게 비행기, 버스, 지프, 보트, 코끼리, 낙타, 기차 등 인도의 모든 교통기관을 이용하며 행복한 여행을 하였다. 한 가지 빠진 것은 인도 대중교통의 총아라는 릭사나 오토릭사를 타 볼 기회가 없던 것이 못내 아쉽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인도, 네팔 여행을 하고 온 것이다.
우리가 탄 지프는 해발 1,400m의 네팔 사랑고트에서 전 속력으로 내려 달리고 있었고, 앞이 보이지 않는 굽은 길은 크락숀 한번으로 내닫기도 하는가 하면 우리들을 태운 인도의 운전사는 추월하지 말아야 할 곳에서도 아슬아슬하게도 추월을 일삼 았다.
나무 밑에 흰 팽키는 야간 조명을 겸한 것이라는데 고속도로에는 멋지게 치장한 트럭이 서로 마주 보며 달려오다가 1m 내에서야 아슬아슬하게 획 좌우로 비켜서곤 했다. 그 고속도로의 치장은 야간의 정면 충돌을 막기 위한 치장이라는데-.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인도 네팔 여행을 다녀온 것이었다.

처마 밑은 노숙자의 잠자리요,
담은 천막촌 사람의 보금자리라서
기를 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구태여 아등바등 노력할 필요가 있겠는가?

간난 자식과 장애를 미천 삼아
맨발에 검은 손으로 거리마다 넘실대는 거지가
인정을 두드리더라.
사람들은 모든 친절을 1달러에 팔거나
누구나 부끄럽지 않게 손을 내밀더라.
자존심은 어디에 버렸는가?
부자들은 어디에 숨었는가?
 


실을 만큼 싣고,
달릴 만큼 달리는 고속도로는
달릴 만하지 못하였고,
말수레, 소수레, 낙타수레에
오토바이와 릭사에다가
배회하는 소들까지 피하기 위하여
넘나들어야 하기 때문에
고속도로는 중앙선도 끊어진 실선일 뿐이더라.
교통법규는 있기는 있는가?

가로등도
중앙선도 없는 비포장도로에
같은 값내고도
목숨 걸고
지붕 위에나
버스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기만 하더라.

갠지스 강가 고트(Ghat)에서는
오늘도 시신을 태워 강에 버리고 있는데
거기서
미역 감는 사람, 물 마시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실례하는 사람
물고기를 잡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있더라.
'인도이기에 '
모든 것이 그렇고 그렇다고 하더라.
-인도이기에

*. 동물의 천국 인도
시내에는 어디서나 소가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고 있었고, 중앙분리대는 소들의 쉼터이기도 했다. 
인도인들은 왜 이렇게 소를 왜 숭앙시 하고 있을까?
소는 힌두교인들의 최고의 신 시바가 타고 다녔다는 성스러운 짐승이기에 그렇다고도 하지만, 농업국가인 인도에서는 수소는 쟁기를 끌고, 물을 긷는 기계를 돌리는 둥 농사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동물이다. 그 소똥은 말려서 연료나 밭에 뿌리는 거름으로 쓰거나 1루피씩에 팔기도 한다. 게다가 진흙 오두막의 벽과 바닥을 매끄럽게 바를 때에도 쓰이는 건축 재료이기도 하다.
한편 암소가 주는 우유와 밀크는 생명과 같은 양식이다. 이런 소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농사꾼이 농장기를 팔아먹는 것과 같다.
도심지를 배회하는 소도 밀림의 청소부 xxx처럼 거리를 더럽히는 과일 껍질이나 썩어 가는 화환, 심지어 종이조각들까지 말끔히 먹어치워 거리를 깨끗이 한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소를 성스러운 소(sacred cow)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동물로 친다. 유목과 농사는 가축 특히 소와 함께 생계를 유지하여 왔기 때문에 소는 라크슈미의 화신으로 신성시 되었다. 라크슈미는 '부의 여신'이자 '대지의 어머니'로 숭앙 받은 신이다. 그래서 인도에서 소를 죽이는 것은 사람을 살해하는 것과 같은 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소가 논이나 밭 등 경작지에 들어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야채가게에서 시금치를 먹으려면 인도인들은 어떻게 할까? 했는데 직접 보니 돌과 막대기를 이용해서 내쫓고 있었다. 아무리 신성한 소라도 어떤 한계가 있는 것이다.
거리와 유적지에는 소와 함께 개도 어슬렁거리거나 장소를 불문하고 편히 누워 쭈욱- 다리를 마음대로 뻗고 자고 있다. 그래서 지프차를 타고 오는 여행 도중 수없이 차에 치어 죽은 개를 보게 되었다.
인도의 개들은 임자가 없는 것 같았다. 길에서 자고 쓰레기를 뒤져서 음식을 먹고 살기 때문에 더러워서 대부분 피부병에 걸린 듯하여 나같이 개를 좋아하는 사람도  만지기를 꺼리게 되었다. 인도인들은 우리나라 사람처럼 개를 사랑하지는 않으나 괴롭히거나 잡아먹는 사람들도 없는 곳이어서 개는 순하고 그래서 으르렁 대거나 짖지도 않았다.
개뿐 아니라 우리나라 멧돼지 같이 등에 털이 난 인도의 돼지들도 새끼를 대리고 거리를 맘껏 먹이를 찾아 쏘다니고 있었다. 
매어 있거나 울타리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우리나라 가축과 달리 인도는 동물의 천국이었다.

*. 우리들과 반대인 것들
-호텔은 1층이 0층 2층이 1층 지하가 -1층이다. 어찌 보면 그들의 생각이 우리보다 합리적인 것 같다.
-인도(人道) 좌측. 차도(車道) 우측인 우리나라와 반대였다. 오른쪽으로 가다가 추월하라고 오른쪽 깜빡이를 켜주면 우리는 기절하듯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도의 트럭 운전사들은 깜빡이 조명등 대신 손동작 활용이 많았다. 손가락으로 앞을가리키다가 손목 끝을 크게 돌리는 것은 '추월해도 된다'는 뜻이다. 손을 아래 위로 퍼덕이는 것은 속도를 줄이라는 뜻이고, 머리를 바깥으로 내미는 것은 우회전하겠다는 신호다.
-우리는 수저와 젓갈로 먹는데 그들은 불결하다고 하는 왼손은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 맨손으로만 그냥 먹는다. 음식 맛은 촉각 중에 하나인 미각이다. 손으로 주부들의 따뜻한 정성을 감지하며 먹는다는 것이 더 맛있는 것도 같지 않은가. 손으로 먹지 않고 수저와 포크로 먹는 것은 우비를 입고 샤워 하는 것과 같다는 현지 말도 있다.
-우리들은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한다. 바른 일에 쓰라고 바른손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왼손으로는 밥을 먹어서도 안 되고, 물건을 살 때 왼손으로 돈을 주거나, 손가락질을 하여서도 안 된다. 왼손으로 대변을 해결해서 그런가 보다.
-호텔이 아니면 어느 화장실에 가도 휴지가 없었다. 대신 아래쪽 벽에 수도꼭지가 있고 그 아래에 손 씻는 그릇이 있었다.
-힌두교인들은 쇠고기를 먹지 않으나 양고기 닭고기를 먹고, 이슬람인(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우리들은 개고기까지 먹는 사람들인데.
-인도의 일부에서는 좋을 때 머리를 젖고, 싫을 때 끄덕이는 곳이 있었다. 거기는 좋은 것이 더 많은 모양이다. 옆으로 흔드는 것이 더 힘드니까.
- 60회 생일을 맞은 사람은 인생에서 결혼 다음으로 경사스러운 날이다. 80세의 생일을 맞이하는 것은 100살에 이르는 것과 같이 더욱 축복을 받아야 할 경사다. 오늘의 한국에서는 장수가 자손들에게 걱정거리가 되는 일인데.

*.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
13일간을 함께 하며 지낸 우리들은 인천공항에서 처음 만난 11명이었다.
부부 2쌍, 언니 동생 올케 1쌍, 씽글 남자 3 분이었다. 여수에서 왔다는 부부는 여행 내내 부부가 딱 붙어 다니는 금실이 좋은 부부였지만 우리 남정네와는 전혀 어울려 주지 않는 분이어서 아쉬움도 있었다.
여행 중에 71세의 생일(음력 1월 XX일)을 맞은 내가 가장 최연장자라고 하였더니 그게 실수였다.
알고 보니 갑장 H사장의 생신이 음력 1월 1일이었던 것이다.
그분과 같은 룸 메이트였던 S사장은 업무관계 차 여행을 온 것 같았는데 나는 그 두 분에게 여행 중 많은 빚을 진 것 같다.
S 사장은 술이 떨어져 시무룩한 나에게 어디선가 술을 구해 주기도 하였고, 뉴델리에서 업무차 서로 작별을 할 때에는 현지 직원을 시켜서 구한 인도 양주와 인도차 한 박스를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6월에 있다는 따님 혼사 때에 사진과 축시(祝詩)로나마 보답할 예정이다.
이 열 분들과 헤어지면서 부탁 받은 이야기가 있어 몇 번 망설이다가 여기 쓰지만 이 부분의 글은 좋은 내용이 아니라서 공개적 발표에서는 지워버릴 생각이다.
한 사람이 집안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가정적인 차원에서 끝나겠지만 이런 분이 계속 세상에 나가서 떠들고 다닌다면 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기 때문에 익명으로 쓰기로 하였다.
-일행 중 한 분 중에 유머가 많은 분이 있었다. 살아 있는 은어 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풍부한 변말을 알고 있는 자칭 서울대학 출신이라는 머리와 재치가 뛰어난 분이시다.
그러나 아뿔싸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는 말 같이 적당을 요하여야 하는 농담이 항상 그 도를 넘어서는 일이 많았다. 그분이 자고 있을 때가 아니면 우리는 그런 야한 이야기를 되풀이 해서 들어야만 하였다. 그 영리한 두뇌로 자기가 없을 때 일행들로부터 그 많은 험담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왜 눈치 채고 자중하지 못하였을까? 식자우환(識者憂患)이라는 말이 그런 분을 위해 생긴 말 같다.
여자분들끼리도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누가 그 분 머리 위에 이불을 씌워 놓아 주기만 한다면 "펑펑" 때려 주었으면 속이 풀리겠다.'는 말이 들릴 정도의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학벌을 자랑하면서도 그 언행이 너무나 저속하였고, 스스로 돈을 크게 자랑하면서도 지날 칠 정도로 인색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 앞에서의 그분의 언행 중에는 우리들이 보기에 민망스럽고 부끄러울 정도의 말이 너무 많았다. -중략-
 여행은 만나고 헤어지는 나날들이다. 그때 만나는 사람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때 받은 인상은 다시는 고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각별히 언행을 조심하고 예의를 지켜야 하는 법이다.
투어여행을 떠날 때 이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어떠한 가이드를 만날까 하는 것이다. 우리 같은 여행객들 하나 하나를 돈으로 보는 가이드를 만났을 때의 그 여행을 더 말하여 무엇 하랴.
한국에 와서 6개월 동안 서울대에서 어학연수를 받았다는 우리들의 29세의 총각 네팔 가이드는 그런 걱정이 필요없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훤칠한 키에 서양인과 같은 얼굴에다가 시원한 눈매부터 그의 선량한 마음을 알게 하여 주었다. 마지막 헤어질 대 만드라라는 네팔 가이드가 너무나 고마와서 한 사람을 빼고 1인당 10불씩을 거두어서 고마운 인사를 표하였다.

여행 중에 일행에게 내가 특별히 미안했던 것은 디카와 캠코더 촬영에 욕심내느라고 늘 늦어서 일행의 걱정거리가 되었던 점이다. 게다가 항상 물건을 잃고 찾으면서 다녔다. 물건을 잃었다는 것보다 흘리고 다니는 편이었다.
옛날 직장 다닐 때에도 그랬다. 항상 물건을 잃고 찾다가, 찾는 것이 무엇인가를 잊을 때가 나의 퇴근 시간이 되곤 했었다.
요즈음은 늙어서인가. 하루의 몇 분의 1은 무엇을 찾으면서 보낸다.
그래서 요즈음 나의 행복 중에 하나가 잃지 않고, 찾지 않고 사는 하루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긴 여행기를 쓰고 있었나 보다.

                    -인도, 네팔 투어여행기 Photo 에세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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