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음-이학권-단편.
https://www.youtube.com/watch?v=5VrRB0iMgHo 이 혁
https://cafe.daum.net/rnjstlgur/9oZC/536 권시혁
다글로
오늘 다섯 번째 나눔 품음에 대해 함께 나눌 하나님 교회 이혁입니다. 혹시 그 아이들을 키우실 때 1번쯤은 다 경험하셨을 거예요. 요만한 아이들이 그 아빠가 집에 들어 언제 들어오나 창문에서 이렇게 보고 있다가 집에 들어오면 막 뛰어와 가지고 아빠한테 팍 안기는 그런 경험은 1번쯤은 다 해보셨을 거예요. 그러면 그 순수함 그리고 사랑스러움에 하루의 생각이 하루의 노고가 싹 사라지며 마치 무아지경이 되는 어떤 그런 것들을 한 번쯤 다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혹시 강아지를 사랑하는 아이들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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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때 모든 것으로 우리가 다 이렇게 품어주고 싶고 또 마음 다해도 사랑해 주고 싶고 또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어떤 그런 경험은 한 번쯤 다 해보셨을 겁니다. 최근에 그 손주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아마 더욱더 그런 마음들이 아마 더 많을 거라고 봅니다. 그것이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데 단 한 가지 유일한 진실은 NATING CHAPITY ECTIVE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나의 밖에 있는 것들은 내가 내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의 애리튜드 나의 자세입니다. 그 자세는 내가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품는 것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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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한다는 것은 내 중심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거든요. 그렇다고 세계는 재구성되지 않아요. 이 그냥 세계는 있는 그대로 그저 품는 거예요. 한 소년이 아침에 일어나서 숲에 나갔더니, 악어가 덧에 걸려있어요. 그리고 악어가 말하기를 나는 새끼들 밥 주기 위해서 아침에 나왔다가, 여기 덧에 걸렸다 내가 죽으면 내 새끼들도 다 죽는다 그러니 날 좀 구해달라 이제 그럽니다. 소년은 악어가 너무 안 되어서 그 덧에서 풀어줍니다. 이 풀린 악어가 바로 소년을 덥석 울었습니다. 소년이 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아니 내가 널 구해줬는데 어떻게 나를 잡아먹을 수가 있어 잡아먹으려고 이렇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악어가 세상은 다 그런 거지 그랬습니다. 소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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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른 데 한번 물어보자 그래서 다들 세상이 그렇다 그러면 할 수 없는 거지 그랬습니다. 그래서 딱 보니까 마침 늙은 당나귀가 요렇게 지나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나귀에게 자초지종 얘기를 하고 까 이럴 수 있느냐 이러니까 당나귀가 하는 말이 어 그럴 수 있지 나를 봐라 내 주인이 평생 부려먹다가 이 늙어서 인제 힘을 못 쓰게 되니까. 짐승에게 물려가도록 이 숲의 나를 버리는 걸 봐라 그럴 수 있지 예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악어가 봐봐 들었지 그래도 이건 아니야. 우리 3번 3시 3번 해봐야 되지 않겠니 그래서 두 번째 옆에 나무 위에 있는 새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럴 수 있지 아침에 새끼들을 먹일려고 벌레 잡으러 갔다 오니까 뱀이 와서 내 새끼들을 다 먹어버렸다 그럴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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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이후 소년은 이번에는 세 번째 똑같은 답이면 나 인제 죽는데 어떻게 하지 근데 갑자기 옆에서 토끼가 한마디 껌충 뛰어나왔어요. 그래서 토끼한테 물어봤더니, 토끼가 아 이건 굉장히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야 그냥 생각해선 안 되고 원래 상태 상황대로 다시 한번 해봐 그래서 소년이 악어를 다시 덧에 묻고 원래대로 해놨어요. 그러자 소년에게 아니 뭐해 빨리 뛰어가 빨리 도망쳐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소년을 보고 동네에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서 오늘 저녁에는 이 악어 고기로 잔치를 해 그랬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마을로 뛰어 들어갔는데요. 그때 그 소년이 기르던 이 개가 사람들보다 먼저 덧에 걸린 악어에게 왔더니, 그 곁에 토끼가 있는 거예요. 근데 개가 그 토끼를 물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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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얘기가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 안 되시죠. 우리의 삶에 모든 것은 이해가 안 됩니다. 내가 왜 이런 부모 밑에서 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그리고 지금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 있는지 하나도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우리는 본질적인 것보다 우리의 이해로 우리끼리 만든 그 세계 안에 규정하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거짓됨에서 점점 진리를 누리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품음은 그러한 섭리를 누리는 유일한 길이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하나님이 인도하신 세계 실재계를 누리는 유일한 길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보통 매트릭스라고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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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적인 어떤 그런 세계라고 하는데 그 평면의 논리로 우리가 만든 그 세계를 살고 있지만 실제로 그거는 실제가 아니죠. 그러므로, 섭리를 누리는 길은 생존 세계는 알 수도 살 수도 없어요. 자유는 여러분이 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늘과 땅은 있는 그대로 모든 걸 다 품잖아요. 그것이 섭리의 길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이 들의 백합화 그러한 것을 보라 그렇게 말하듯이 생명은 죽음을 품어 참 생명이 되게 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어 우리 중심에 있는 십자가이죠.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품으셔서 부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월된 것처럼요 또 이 품음은 실제로 만날 때 저절로 열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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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품어야지 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면 이 가족마다 어린아이가 새로 태어나면 기저귀도 갈아주고 아이가 콧물 질질 흐를 때 그런 콧물도 닦아 주면서 거기에 같이 붙어있는 밥도 같이 먹어 주잖아요. 그러한 것처럼 그 어린 아이를 그냥 그 자리에 품듯이 심지어 핸디캡 아이가 태어나도 뭐 그렇다고 그 아이를 버립니까 더 아끼고 더 사랑해 주지 않았습니까? 근데 세상에 나가서 사람을 볼 때는 그 사람의 조건 상황 성격 이익 손해 그러한 것들을 따져서 보니까 쉽게 판단 정지하게 돼요. 그러니까 삶의 최고의 어리석음은 품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품지 않게 되면 다른 사람을 나에게 끼워서 맞추게 돼요. 그 삶의 모순을 품는 중요한 이유 하나가 그 품게 되면 굉장히 레디컬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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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혁명가가 스승을 찾아와서 아 우리에 흘린 피가 이런 민주주의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희생이 이런 혁명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 라고 그렇게 가르치는데 그게 맞습니까? 그러니까 스승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바람이 안 불어도 낙엽은 떨어지니까요? 그렇습니다. 세상을 우리가 만든다고 생각하면 이 한정적인 의미에서 그럴 수 있지만 굉장히 어리석은 것이에요. 인간이 만든다고 이 세상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어떤 유니버셜한 카세믹 관점 그러니까 우주적 관점에서 나를 보고 삶을 품기 시작할 때 실제 영원함의 누림을 그러한 삶이 조금씩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품음의 비밀은 생명을 피워 어울리게 합니다. 교회는 이 하나 된 사람들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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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나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품어야죠 서로 나에게 맞추려고 해서는 되지는 않는 거죠. 그 품음의 출발이 경청입니다. 이 경청은 세상에 없어요. 심지어 지금은 오래된 부부끼리도 서로 경청이 없어요. 거꾸로 말하니까요? 하고 싶은 얘기는 할 수가 없고요. 부르짖고 싶은 얘기는 정말 외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말해야 안전한지 또 어떻게 말해야 내가 좀 서바이벌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고 말해야 내가 인정받아야 할지 거꾸로 말하는 세상에서 이 세상의 말은 대체 통함을 모르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그 가슴에 통하게 됩니다. 저희 공주와 달님 얘기는 많이 아실 겁니다. 그 공주가 병이 들었어요. 그래서 왕이 장군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공주가 닭을 갖고 싶어서 병이 들었대 어떻게 하면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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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달은 우리 궁궐과 성의 10배나 되고요. 뭐 얼마나 멀고 안 됩니다. 막 그럼 학자에게도 그다음에 물었습니다. 학자가 말하기 임금님 아이 궁궐과 성이 아니고 달은 우리 나라의 몇 배예요. 그리고 얼마나 너무 멀어 가지고 그 갖는다는 건 뭐 말도 안 됩니다. 세 번째로, 궁중 광대에게 인제 물었어요. 그랬더니, 광대가 아 네, 알겠습니다. 세 번째로, 아니 제가 제가 공주님에게 물어보죠. 그랬어요. 공주님에 가서 공주님 달님이 갖고 싶으시다면서요 그러니까 그래 그러니까 공주님 달님은 뭘로 만들어졌을까요? 아이 광대는 참 바보야 금으로 만들어졌지 밤에 보면 노랗게 빛나잖아. 아 그래요. 공주님 달은 얼마나 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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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그러니까 아 이제 정말 광대는 바보구나 내 엄지손톱보다 조금 작아 내 엄지 손톱을 딱 대 보면 거기에 살짝 가리잖아. 그러면서 공주님 달님은 그럼 어떻게 생겼나요? 그러니까 달님은 달님은 여러 가지 모습인데 나는 반달달님이 제일 예뻐 그래서 광대가 반달금목걸이를 만들어서 공주에게 갖다 드렸더니, 공주님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 이 얘기는 뭐죠 장군이나 학자는 어떤 그 객관적인 말을 했습니다. 객관적인 것으로 보고 근데 그 객관적인 것은 실제는 아니에요. 이 실제는 뭐죠 정말 공주의 가슴 속에 있고 그 가슴이 통하는 그것을 만나는 거죠. 이와 같이 품는 사람은 그 사람의 가슴에 그 사람의 가슴에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죠. 이것이 품음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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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 나는 나의 얘기예요. 그러니까 바깥에 나타나 있는 내가 뭐 어떤 사람이냐 학력이냐 경력이냐 머리가 있느냐 없느냐 얼굴에 수염이 있느냐 없느냐 그런 게 아니 이런 것이 아니고요. 내가 보이고 있는 현재 이 안에 깊이 흐르는 혁면 밑에 흐르고 있는 나의 얘기예요. 여러분 저에 대해서 정말 아시나요? 아시나요라는 그 아이스크림은 아시겠죠. 그래서 그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성공보다 실패해서 더 빛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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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만나의 그 실패 얘기를 들을 때 저는 거기에서 너무나 가슴이 많이 닿았는데요. 태어나 죽을 때까지 뭐 성공만 했다. 뭐 그런 얘기 누가 듣습니까? 전혀 안 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겨냈다 그럴 때 참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워졌던 것처럼 이케 이야기와 그 이야기와 있었던 나와의 화해가 전체인 그 나예요. 그래서 이야기를 죽이는 것은 어떤 실패가 아니라 아니고 바로 거짓이에요. 그래서 이야기로 나누면 꿈도 피어나고 적도 품고 이야기에서 적과 우리가 되게 됩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올 코아일 온 더 웨스턴 프론토 애리마리아 마르크스의 소설인데요. 이 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독일인 관점에서 본 전쟁 얘기인데요. 1차 세계대전 전쟁을 그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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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쟁의 광기와 거짓과 허무와 잔인함을 고발한 것인데요.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독일인들은 전혀 이해가 안 됐습니다. 어찌 그렇게 유대인 600만 명을 막 죽이고 온 유럽을 전쟁터를 만들어 가면서 젊은 아이들에게 마음의 허상을 심어주고 무참하게 죽여가면서 어떻게 저렇게 히틀러에 미치는 저게 제정신으로 정말 가능한가 그랬었는데요. 그 영화를 보고 독일인들이 좀 정말 이해가 가고 좀 공감이 되구요. 그 독일인의 아픔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야기에서 적도 친구가 되는 거죠. 우리가 그동안 쭉 나눠왔던 교회는 이야기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죽음의 이야기 속에 나의 죽음 그러니까 나의 십자가를 쥐고 그걸 품어서 죽음 지난 생명을 피워내는 것이 교회입니다. 삶에는 두 기둥이 있죠. 첫째는 호흡과 둘째는 머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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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고. 머금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호흡할 때는 자신을 느낄 수 있어야 되고 먹을 때는 우리의 서로를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마치 가족이 그렇잖아요. 그것처럼 품어서 하나됨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도발은 그래서 떡과 잔을 얘기를 하면서 너희가 교회로 모일 때 이렇게 시작해서 너희가 먹으러 모일 때 이렇게 끝납니다. 이 사도 공동체의 교회는 2~3 가정이 함께 모여서 떡과 잔을 나누면서 주님의 얘기 속에 우리 얘기 자신의 얘기를 피워냈던 거죠. 그래서 떡과자는 얘기할 때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한 몸에 참여해서 우리가 한 몸이 되고 한 떡에 참여하며 새언약을 받는다. 그래서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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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실을 우리가 나눌수록 조건과 상황이 작아지고 나 자신과 나의 삶과 꿈은 커져 가요 자꾸 접근과 상황에 눌려서 거짓된 걸 보이고 거짓된 걸 나눌 때마다 나 자신과 내 삶과 꿈은 자꾸 자꾸 적어지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낳아일 수 있는 용기를 피워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야기 공동체인 교회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품는 것 중에 무엇보다도 고통을 품는 거 심지어 사망까지도 품는 것이 이 품음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품고 또 사망까지도 품을 수 있습니다. 이게 품음의 마술이에요.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기 때문에 이 고통은 물론 사망까지도 품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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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보통 우리가 원치 않기 때문에 피하고 유리하고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고통을 억누르게 되죠. 그러면 억누를수록 고통은 정말 강화가 돼요. 그런데 고통을 품고 인정해주면 증발해 버립니다. 마귀의 거짓은 뭐예요? 내가 이겨야 돼 이 고통만은 내가 이겨야 돼 그렇게 하지만 고통과 싸우면 싸울수록 고통이 실체로 더 강화되는 거죠. 어둠을 이기게 되고 어둠 속에서 방망이를 마구 휘둘리면 이 어둠이 더 짙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죠 근데 고통을 품는 사람은 고통을 품어서 고통 속에 생명을 느껴요 이 생명이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음을 다시 한번 우리 만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 고통을 우리가 품을 수가 있는데, 이 고통을 품는다는 말은 어 고통을 성찰할 수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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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고통을 성찰할 때 고통은 피해만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우리에게 블래싱 복이 되는 것이에요. 나의 아픔 때문에 내가 병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고 그리고 병을 고칠 뿐만 아니라 내 잘못된 생활 방식도 새롭게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이 육체가 있는 한 고통이 있는데, 우리를 육체 속에 보내신 이유는 이 고통을 품어 생명이 장성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품을 때 우리에게 자유가 열립니다. 그리고 내가 품은 모든 것과는 살롬 편강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그리고 편강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내가 우울증이 있다. 뭐 내가 품고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면 그 우울증에서 더 이상 내가 우울할 필요도 없겠죠. 또 내가 뭐 술 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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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분노가 있구나 그렇다고 화낼 필요는 없죠 내 안의 절망감이 있구나 뭐 그렇다고 절망감에 내가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품음의 매직입니다. 내 성격이 아 나는 정말 이렇게 나쁜 면이 있구나 인정하면 나쁜 성격을 더 이상 안 살면 되는 거죠. 내 과거에 이런 실패와 아픔이 있었구나 그렇게 인정하고 나면 과거의 실패와 아픔에 다시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새로운 오늘 이 시간을 살면 되니까요? 역시 나쁜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품음이 우리에게 주는 매직이요. 신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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