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숨 쉬고 삽시다. (요한복음 20:19-23)
예수는 두려움에 떨며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이고 있던 제자들에게 불쑥 찾아오셨습니다. 아마 우리가 같은 상황에 처해있어도 주님은 그렇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잠긴 문조차도 예수의 들어오심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서, 우리가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하고 거부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셔서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이라는 평화의 인사는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인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평화의 인사가 오히려 무서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자지구를 공격하는 이스라엘 군대가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총을 들고 “살롬~”하고 인사를 건네면 얼마나 무서울까요? 한쪽에게는 평화이지만, 다른 쪽에게는 공포입니다.
주님을 잃은 슬픔과 자기들도 죽임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갑작스런 등장은 더 큰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화를 외쳐도 우리는 걱정근심과 불안과 공포 그리고 헛된 욕심과 분심에 사로잡혀, 평화의 인사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죄이고, 우리는 죄의 포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 앞에서 숨을 불어 내쉽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서 영적호흡을 못하는 우리에게 숨을 불어서 숨길을 트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꽉 막혀있던 숨이 터져 나오면서, 내가 움켜쥐고 놓아 보내지 못한 걱정과 욕심과 분노를 끄집어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주님은 내 속으로 성령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거룩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하는 일이 바로 주님이 불어 넣어주시는 숨을 내 속에 받아 숨 쉬는 일입니다. 내속에 가득한 썩은 숨을 내뱉지 않고서는 새로운 공기를 들이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자기가 움켜쥔 것이 “죄”인줄도 모르고, 그것을 더 붙잡게 해달라고 잘못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교회는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빌어주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움켜쥔 것을 내려놓을 때 찾아옵니다. 싸우려고 긴장하고 전투준비를 하는 마음자세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우리에게 “후~”하고 숨을 내쉴 때에 우리도 덩달아 “후~”하고 숨 쉬며 내 속마음을 다 비워내야 합니다. 숨을 참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혈압이 오릅니다. 하지만 숨을 내쉬면 마음이 편해지고 순간 여유로워 집니다.
들이쉬려면 먼저 내쉬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쉴 것은 걱정근심, 무한욕심, 분노지심 같은 것들입니다. 주님 앞에서 기도의 호흡을 하는 사람은 기도하면서, 걱정하거나, 욕심내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기도의 호흡은 우리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며,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즉, 영적호흡이란 용서를 숨 쉬어 들이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 본래의미가 “움켜쥔 것을 놓아주는” 것입니다. 놓아버리니 용서가 되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연습하다보면, 주님과 같은 호흡으로 사는 일이 얼마나 평화로운 것인지, 기뻐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걱정을 떠나보내면 안심이 들어오고, 욕심을 떠나보내면 만족이 찾아오고, 분심을 떠나보내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이, 어쩌면 그런 기쁨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2024.01.21.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