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 시인>>
<<김진경 시인의 양력>>
*1953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남.
* 서울대 국어과 및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
*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 《5월시》 동인.
* 시집 : 『갈문리 아이들』 『광화문을 지나며』 『우리 시대의 예수』 『별빛 속에서 잠자다』 『슬픔의힘』.
* 장편소설 : 『이리』, 산문집 『스스로 비둘기라 믿는 까치에게』.
* 어른을 위한 동화 『은행나무 이야기』가 있음.
<<김진경 시인의 대표 시>>
아이들에게/김진경
너희들이 들고 오는 답안지의 ○×표 속에서
너희들이 한사코 따지는 1, 2점 속에서
나는 죽는다.
나는 죽었다고 간주하고 마음 편해진다.
아이들아, 미안하구나 이것은 나의 습관이다.
넘을 수 없는 비무장지대에서의 삼 년
견디는 법은 죽었다고 간주하고 마음 편해지는 것
여기 있는 것은 이미 내가 아니라고
마음 편해지는 것
제대를 한 뒤에도
넘을 수 없는 선을 만날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마음 편해지고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마음 편해지고, 철조망을 보았다.
넘을 수 없는 절망의 선을 무수히
어디에서나
아, 너의 시험지 위에도
여기에도 여기에도 우리의 살을 파고드는 날선 가시
너와 나 사이에도, 또 너와 나 사이에도
아이야, 미안하구나
너를 때린 것은 너를 때린 게 아니라
나의 비겁을 때린 것이다.
언제나 넘을 수 없는 철망 앞에서
날선 가시를 두려워하는
나의 비겁을 때린 것이다.
답안지의 ○×표보다도 악착 같은 1, 2점보다도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아무도 상처받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아무도 가슴에 철망을 박고 녹여 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이땅의 만남을 모르는 것이다.
보충수업/김진경
방학 때 보충수업은 하면 안된다고 떠들었는데,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는데,
어쩔 수 없이 시작되는 첫날
아이들도 나도 외면한 채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보았다.
이것은 분명히 타협이라고
혼잣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한 걸까
성식이도, 상훈이도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인다.
가르친다는 게
타협을 배우고 타협을 가르치는 걸까
아이들은 얼른 첫마디가 떨어져
어색한 침묵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어제 밤 늦게도, 새벽에도
피곤한 일이지만 어쩔 수 있겠냐고
늘 안스럽고 피곤한 표정의 교감이 전화를 하고
끈적거리는 동료들의 표정에 끌려 나서는 아침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눈이 내렸다.
어쩔 수 없지 않냐고
그렇게 우리들의 향그러운 흙 위에
불결한 발자국이 찍히고
어쩔 수 없지 않냐고
이 땅의 허리에 무거운 칼날이 내렸으리라
늘 익숙한 치욕 위에
치욕을 보태는 일이 사는 일이라면
아이들아, 구태여 너희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랴.
죽어 버린 글자들 속에
아이들아, 너희들과 나의 치욕을 묻는다.
죽어 버린 숫자들 속에
아이들아, 그리운 우리들의 얼굴을 묻는다.
죽어 버린 글자를 부수고 태어날
우리들의 살아 있는 분노를 위해
살아 있는 말들을 위해
이윽고 우리들을 값매기는 자가
묻히리라.
교사들을 위한 비나리/김진경
유세차 을축년(乙丑年) 삼월(三月) 초구일(初九日)
진달래들이 낮은 포복으로 높은 포복으로
포위해 올라오는 관악산 중턱
못난 교사는
몇 자 적어 하늘에 땅에 고합니다.
1960년 4월 19일 흰 이마에 손 얹어
멀리 인왕의 발치 아래로 행진해 가는 젊은 가슴들과
몇 발의 총성에 흩어지는 붉은 꽃잎 보았을
관악산 신령님
이땅에 사랑은 얼마나 더디게 오는 것입니까.
참으로 기나긴 세월이었습니다.
1960년 모처럼 이땅의 교사들 가슴에 살아났던
민주의 꽃이 무참히 짓밟힌 이래
우리들은 너무도 긴 세월을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이땅의 슬픔과 함께
시름시름 살다가 숨져간 선배 교사님들,
무침히 짓밟힌 민주의 꽃과 함께
입다문 돌멩이처럼 구르다가 외롭게 숨져간 선배 교사님들,
분단된 땅의 증오를 가르치는 교육의 제물이 되어
어린애답지 못한 말을 남기고 죽은 이승복 어린이
인간상품을 만드는 교육의 제물이 되어
점수라는 가격표시에 매달려 죽어 간 이땅의 아이들
이땅의 한 맺힌 모든 귀신들이여,
우리들과 함께 하소서.
155마일 휴전선이 조용하더니
1마일이 철조망마다 1,550마일의 새끼를 쳐서
이땅을 가시철조망으로 뒤덮고 있습니다.
아, 이땅은 세계의 고난, 세계의 가시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가르치는 교과서는 우리들의 가시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우리들의 가시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교과서의 글자들마다 철조망의 가시가 박히고
글자들마다 증오의 총구가 번득입니다.
교과서 속에 죽어 있는 우리들의 어머니
한반도에 가시철조망들이 뿌리를 박고 양분을 빱니다.
교과서를 잡는 교사들의 손에
교과서를 잡는 아이들의 손에
가시가 박혀 피가 흐릅니다.
가르치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이땅의 한 맺힌 모든 귀신들이여
우리들의 눈을 크게 뜨게 하소서.
가시철조망이 우리들의 눈을 찔러 피가 흐를지라도
눈을 크게 뜨고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철조망을 헤치고 거기 쓰러져 죽어 있는 우리들의 어머니 한반도를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의 손에 박힌 가시를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의 손에 흐르는 피를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아, 매일매일 우리들에게 하달되는 명령들이
이땅을 칭칭 감고 있는 철조망의 실뿌리임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의 교과서가 증오를 가르치고 있음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증오에 길들지 못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있음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학교가 아이들을 늘 폭도로 대하고 있음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이 폭도를 진압하는 가시철조망의 하나임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이 가시철조망의 하나이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우리들의 밥그릇을 빼앗아감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이땅의 한 맺힌 귀신들이여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폭도들을 얽어매는 굵은 가시철조망임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을 질타하소서
순한 양으로 길들여져 있는 우리를 질타하소서
홀로 외로운 뜻 밝히려다
입 다문 돌멩이처럼 시름시름 살아가는 교사들의
고달픈 삶이 우리들의 비겁에서 비롯됨을 질타하소서.
새벽부터 밤까지 사지선다의 물음 속에서
썩어 가는 아이들의 고통이 우리들의 비겁에서 비롯됨을 질타하소서
점수에 묶여 목매는 어린애의 죽음이
우리들의 거짓 때문임을 질타하소서
우리들의 묵인 아래
155마일의 휴전선이 1마일마다 1,550마일로 새끼쳐서
이땅을 칭칭 감고 있음을 질타하소서
우리들의 묵인 아래
우리들의 어머니 한반도가 핵의 이빨 아래 죽어 가고 있음을 질타하소서
우리들의 묵인 아래
가시철조망이 우리를 칭칭 감고 있음을 깨우치소서
이제는 페퍼포그와 사과탄으로 눈 못 뜨시는
관악산 신령님
그해 5월 멀리 남녘의 땅이 울릴 때
안타까와 두 뺨에 피눈물 진달래로 흘렸을
관악산 신령님
진달래 송이마다 두견새 울음으로 머무는
이땅의 한 맺힌 넋들이여
그리하여 우리를 일으키소서.
저 모든 철조망의 질곡 아래로부터
우리들을 일으키소서
일어나 이땅의 고난을 영광의 가시면류관으로 삼아
매일매일 싸울 용기를 주소서
이땅에서 이제 민주통일의 싸움을 향해
민족의 힘살이 꿈틀거리게 하소서
저 백두산 천지의 노란 꽃망울로
우리들과 아이들의 눈망울이 빛나게 하소서.
천년설 아래 꿈꾸는 노란 풀꽃들의 강인한 뿌리로 견디게 하소서.
진달래 송이마다 두견새 울음으로 머무는
이땅의 한 맺힌 넋들이여
비겁한 저희들이 올리는 더러운 물건이라 욕하지 마시옵고
오랫동안 주린 배를 채우시고
노랗게 춤추는 꽃망울 곁 출렁이는 천지의 물결 속에
두견새 울음으로 잠기소서, 상향.
백두산 사진을 보며/김진경
백두산 천지에 노란 망초꽃이 피었습니다.
망초꽃 덤불 곁으로
시퍼런 천지의 물이 출렁이고
당신은 검은 치마 흰 저고리로
노란 꽃들과 함께 춤추고 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누이여
당신은 그 꽃들이 하나하나
먼 남녘에 사는
어린 누이들의 눈망울인 걸 아십니까.
봄이었읍니다.
온 산천에 진달래 지천으로 피어나는
그 봄에 저는 남녘의 시골학교 선생이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교실 게시판에
백두산 천지 사진을 붙였었지요.
가끔씩 뻐꾸기 울음이 찾아와
천지의 푸른 물에 잠기는
양지바른 산 밑 시골학교였습니다.
장학사가 찾아왔다고 바쁜 토요일 오후
저는 교장실에 혼자 앉아 있었지요.
구겨진 백두산 사진이 책상 위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백두산 사진을 걸었으니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시말서를 쓰고 있었지요
저는 시골학교 선생을 그만두었습니다.
영문 모르는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먼 산길을 따라왔습니다.
글썽이는 아이들의 눈망울에
뻐꾸기 울음이 찾아와 잠기고
저는 천지에 피는 풀꽃이
꼭 글썽이는 아이들의 눈망울 같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누이여,
그곳에도 교실의 한 구석에
한라산 백록담 사진을 거는 선생이 있겠지요.
걸다가 혹시는 혼구멍이 나는 선생이 있겠지요.
우리들의 그리움이 이땅의 힘살로 일어나
모든 가시철조망을 부수는 날
맨 먼저 그이를 만나고 싶습니다.
손을 맞잡고 우리가
얼마나 바보 같은 세상을 살았던가 이야기할 것입니다.
질문/김진경
이제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영어를 모르는 게 까막눈이라고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한 셈이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
선생님이나 우리나 모두 까막눈이 아닌가요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2강이니 3강이니 4강이 모여
우리나라가 통일을 해야 된다는 둥
서로 머리를 맞대고 수군댄다는데
선생님이나 우리나 까맣게 모르잖아요
세상을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라고
타이르시는 선생님
우리는 모두 색안경을 낀 것이 아닌가요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일본이 어떻다는 둥 얘기하는데
중앙청에 펄럭이는 일장기의 붉은 태양
그것이 푸르른 평화의 빛깔이라고
길거리에 서서 일장기를 흔들었잖아요
이것은 사랑의 매라고
종아리를 때리시는 선생님
우리들은 얼마나 더 사랑을 받아야 되나요
20만 동학군이 죽었다는 우금치
한 마을이 몰살당했다는 제암리
어린애까지 학살당했다는 거창군
아, 이루 다 헬 수 없는 마을과 도시
온 땅이 푸른 멍이 들었는데
우리는 얼마나 더 사랑을 받아야 되나요
남의 자유와 남의 평등을 위해
얼마나 더 맞아야 하나요
대답해 주세요 선생님
침묵만이 오래오래 눈처럼 쌓여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는데
쓸데없는 귀는 잘라 버릴까요
쓸데없는 눈은 덮어 버릴까요
살아 남아야 한다는 말만이 오래오래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는데
위험한 입은 막아 버릴까요
시끄러운 세상이 너무나 조용해요
대답해 주세요 선생님
풍뎅이/김진경
풍뎅이 한 마리가 유리창에 늘어붙어 날고 있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안타까이 다리를 버둥거린다. 그렇다.
우리들의 만남은 늘 벽이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모르는 선생과
선생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이 만나는 교실.
유리창에 늘어붙어 허우적거리는 풍뎅이처럼
우리들의 말은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안타깝게 더듬거리고
늘 그랬다. 추락해서 날개가 부러진 풍뎅이가 눈에 띄듯이
이미 피투성이가 된 마음으로 내 앞에 올 때
나는 비로소 너희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시험지를 훔쳤다는 둥
답안지 점수를 몰래 고쳤다는 둥
무거운 죄목들에 눌리운 날개를 늘어뜨릴 때
우리는 서로의 상처에 몇 마디 안 잊히는 말들을 새기고
헤어졌다. 너는 학교를 그만두고
나는 다시 지루한 일상에 빠져들고
그러나 늘 놀란듯이 일어나
어둠 속에 떨어져 퍼득이는 우리들의 날개를 보고
결국엔 우리 모두가 너와 같았다.
살아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유리벽, 닿을 수 없는 거리
버둥거리다가 땅에 떨어져 날개가 부러지고
모가지가 비틀린 채 빙빙 돌아가는……
그러나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날개는 유리벽 위를 날아 오르고
횟감은 신선도가 값이다/김진경
여수에서 한밤중에
서울로 떠나는 자연산 도다리 수송차
물탱크에
상인들은 작은 상어를 집어넣는다.
도다리들은 상어 때문에 긴장하여
흐물흐물 늘어질 새가 없다.
새벽 노량진 수산시장에 나가보라.
도다리는 바다에서 건져올릴 때처럼
펄펄 뛰고 있다.
북한 핵문제로 전쟁 가능성이 있다고
공습경보 싸이렌이 울고
조용해진 거리의 건물 입구마다
우리는 적당한 공포로 숨죽였다
자연산 도다리처럼.
횟감은 신선도가 값이다.
눈물/김진경
하루 아침 추위에
은행 나무가 후드둑 잎을 떨어뜨린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한꺼번에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황망히 흘리는
황금빛 눈물
광화문을 지나며/김진경
광화문(光化門)을 지나며
국제극장의 입간판
지옥의 특공대라고 베레모를 쓴 거구의 사내들이
기관총을 들고 돌격해 나오는 밑에
너는 투구를 들고 서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서기 2054년 국제평화 시찰단들이
네가 서 있는 자리에서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거리를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 중의 한 늙은 생물학자는
네가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린 자리에서 꿈틀거리는
바퀴벌레를 집어들고 감격할 것이다.
우주 중계의 TV 카메라가 그것을 클로즈업하고
폭탄이 떨어진 지 60년 만에 드디어 새로운 생명체가 나타났다고
입에 게거품을 물 것이다.
그 중의 인류학자는 말할 것이다.
네가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린 자리에 떨어진 투구와 방패를 보며
이 민족은 특수한 민족으로 서로 증오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고
그 중의 역사학자는 이에 반박하여
이 민족의 멸망은 인류의 공동 범죄였다고
잠시 말다툼이 벌어지고
그들은 몇 송이 꽃을 재 위에 던지고 훌훌히 떠나갈 것이다.
혹은 서기 2054년 국제 평화 시찰단은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네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바퀴벌레가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네 방패의 그늘 속으로 기어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다/김진경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다
두려워하는 친구여
그것은 고약처럼 들러붙어
너의 삶을 가두어 온 작은 욕망의 끝일 뿐이다.
버려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삶이 시작되는 것
마을 밖에서
너는 네가 살아온 마을의 작음을 알 것이다.
갈라진 땅의 갈라짐이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갈라진 사람들이
갈라진 하늘들이
갈라지지 않은 것임을 알 것이다.
너는 이윽고 끝까지 움켜 쥐려는 욕망이
우리 모두를 서로 버려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이윽고
만날 수 없었던 우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두려워하는 친구여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다.
너는 그것이 구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의 침묵을 노래한다/김진경
나는 너의 침묵을 노래한다.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간
너의 쓸쓸한 눈망울을
너를 쓰러뜨린 총성을
너의 피를
우금치나 휴전선이나 그 어느 언덕배기
침묵은 너의 주검으로 썩어 흙이 되고
너의 침묵 위에 핀 진달래를
엉겅퀴를 산수유를 그 모든 생명을
나는 노래한다.
노래한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말해질 수 없는 것들로 모여서
세상 위에 한 세상을 이루는 것을
역사 위에 또 역사를 이루는 것을
노래한다.
침묵의 한 세상이 침묵하도록
우리의 가슴에 디밀어진 총칼을
노래한다.
그러나 말하는 침묵을
노래하는 침묵을
싸우는 침묵을
노래한다.
한마디 말도 못하고 사라져 간
너의 쓸쓸한 눈망울을
너를 쓰러뜨린 총성을
너의 피를.
눈/김진경
겨울 하늘에 마른가지가 박혀 있었다
나는 그 밑을 지나며 바람소리를 들었다
가지에서 반짝이며 부서져 내리는 눈
이 저녁에 눈을 품고 바람은 하늘로 떠나가고
소리만이 마른가지에 남아 울고 있었다
비오는 거리에서/김진경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마
비오는 거리에서
빗속에 너는 뿌옇게 흐려져가고
너의 이름마저
너의 머리칼마저
너의 떨리는 살갗의 접촉마저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라고 잊어버리라고
그들은 책갈피를 뒤지고
노트 위에 쓰여진 점 하나까지
전화통 속에서
눈 아프게 부신 백열등 너머에서
나의 귀를 눈을 찔러온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마
사랑하지 않는다고, 다 잊었노라고
너의 이름마저
너의 머리칼마저
너의 떨리는 살갗의 접촉마저 다 잊었노라고
그러나 사랑한다고
나는 책갈피에 노트 위에
매일 매일 점을 찍는다.
너의 표식으로 점을 찍는다. 비에 젖는 아스팔트 위에,
스레트 지붕 위에, 끌려가는 젊은이의 손목 위에
비에 젖는 포장마차의 불빛 위에, 일나가는 처녀애들의
파리한 얼굴 위에 그 모든 것은 너의 표식이라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사랑한다고
비오는 거리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는 나무/김진경
아버지는 나무를 심었다
향나무 가지를 잘라 둥그런 찰흙 덩어리에 꽂고
뿌리가 잘 내리도록 약을 넣고
묘판에다 줄을 맞춰 심었다
물은 더 줘도 덜 줘도 안된다
아버지는 이르고는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뿌리가 내리면 몇 만 원씩 나간다는 나무에
나는 때맞추어 힘들게 물을 주었다
기다려도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농약을 만지는 일에 물집 잡힌 어머니의 손처럼
썩기도 하고, 말라 죽기도 하고
돌아온 아버지의 피로한 모습은 어느덧 나무를 닮고 있었다
아버지는 불쑥 화를 내고
네가 물을 너무 많이 주었구나
나는 죄없이 줘 박히며 말했다
무슨 벌레가 있나봐요, 나무의 뿌리를 갉아먹는
아버지는 중얼거리는 나의 말에
거대한 벌레에게 뿌리를 잘린 듯 넘어져 울었다
ꡒ그래 무슨 벌레가 있는 모양이다ꡓ
나의 손을 잡고 나서는 아버지의 손은 따뜻했다
그게 무슨 벌레인지
아버지와 내가 무엇에 합의한 것인지
보리밭을 흔들고 오는 바람 속에서도 나는 알 수 없었다
뿌리 내리지 못하는 수천 그루 나무
아버지가 죽는 날
우연히 살아 자란 두 그루 향나무가 문 밖에 흔들리고
어머니는 문득 나에게 말했다
보기 싫구나, 저 나무도 마저 뽑아 버려라
산/김진경
가슴속에 있다
다 타버린
타버린
산
꿈꾸지 않는
꿈꾸지
않는
산
밟히다
분노하다
참다
외치다
고함치다
부르르 떨다
아―
타버린
산
꿈도 꾸지
않는
산
모든 것이
끝난
그곳에서
이글
이글
숯덩이로
타오르는
타오르는
산
아무래도 나는/김진경
이곳의 철없는 시인들이
자네를 만나서
북어를 안주삼아
가난한 소주라도 한잔
크―한다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자네의 출현은
재앙일세
어느 날 갑자기
자네가 나타난다면
나는 어쩌면 좋겠나
만약에 자네와 크―한다면
상기 피고인은 북괴가 반국가 단체이고 반국가 단체의 지령을 받는 자와 회합하는 것은 반국가 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넉넉히 알고 있는 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국가 단체의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하여……
소주(진로 2홉들이) 3병을
나발불었을 뿐 아니라
북어갈비를 씹는
무엄한 죄를 범하게 된다네
그러니 친구여
자네가 나타나지 않기를
오직 바랄 뿐이네
아니, 실은
어느 날 갑자기 자네가 나타날
가능성이 절대 없다는 걸 전제로
나는 자네를
마구 그리워하는 시를
대량 제작하여
민족시인이 되려고
음모를 꾸몄다네
여보게 어쩌면
우리의 시는
증오의 쓰레기더미 위에
피어난 한 무더기 독초일
뿐인지도 모르겠네
무성한 증오와
무성한 감격만이
길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이 시대에.
아이들에게/김진경
너희들이 들고 오는 답안지의 ○×표 속에서
너희들이 한사코 따지는 1, 2점 속에서
나는 죽는다.
나는 죽었다고 간주하고 마음 편해진다.
아이들아, 미안하구나 이것은 나의 습관이다.
넘을 수 없는 비무장지대에서의 삼 년
견디는 법은 죽었다고 간주하고 마음 편해지는 것
여기 있는 것은 이미 내가 아니라고
마음 편해지는 것
제대를 한 뒤에도
넘을 수 없는 선을 만날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마음 편해지고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마음 편해지고, 철조망을 보았다.
넘을 수 없는 절망의 선을 무수히
어디에서나
아, 너의 시험지 위에도
여기에도 여기에도 우리의 살을 파고드는 날선 가시
너와 나 사이에도, 또 너와 나 사이에도
아이야, 미안하구나
너를 때린 것은 너를 때린 게 아니라
나의 비겁을 때린 것이다.
언제나 넘을 수 없는 철망 앞에서
날선 가시를 두려워하는
나의 비겁을 때린 것이다.
답안지의 ○×표보다도 악착 같은 1, 2점보다도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아무도 상처받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아무도 가슴에 철망을 박고 녹여 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이땅의 만남을 모르는 것이다.
우금치의 노래/김진경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무엇이 생긴 것은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가시덤불로 피어
넘을 수 없는 무엇을 넘기 시작한 것은
옛적에는 굶주린 사내들이 들어와
소도둑이 되었다는 좁은 고갯길
흰 옷 입은 동학군들이 죽어 산을 이루던
이곳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을 치던 것은
이곳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뿌리를 내려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을 넘기 시작한 것은
아, 그때부터였는지 몰라라
우리가 노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 그때부터였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 속에 빛나는 하늘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우금치여, 휴전선이여, 모든 철조망이여
우리들의 절망은 우리들의 희망
노예의 노래는 빛나는 하늘
진달래 뿌옇게 핀 좁은 고갯길
지금도 소리쳐 오는 함성은 우리의 것.
아직도 피가 뜨거운 사내들은
죽음처럼 새파랗게 날선 고개를 넘는다.
우리들의 새벽 출근길에, 책 위에, 식탁 위에
문득 문득 막아서는 우금치여, 휴전선이여, 모든 철조망이여
너를 넘는다. 우리들의 죽은 몸 위에 뿌리를 내려
넘을 수 없는 너를 넘는다.
이 땅에 산다는 것은/김진경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갈라진 사람을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
갈라진 나를, 갈라진 우리를, 갈라진 하늘을, 갈라진 땅을
네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이 땅이 그렇게 숨쉬고 있으므로
이 하늘이 그렇게 숨쉬고 있으므로
우리들이 그렇게 숨쉬고 있으므로
이 작은 하늘의 한 자락을 나누어 숨쉬고 있는 너는
이 작은 땅의 한 자락을 나누어 숨쉬고 있는 너는
보게 될 것이다.
네 삶을 바꾸어 놓고 말없이 사라져 가는 한 사람.
그렇다, 아이야
80년의 어느 봄날 내가 그를 보았듯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 속에서
벌거숭이로 피는 목련꽃 속에서
아, 두려워 숨죽여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한
한 사람을 너는 보게 될 것이다.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고, 우리들 모두이기도 하고
그 누구도 아닌 한 사람,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한 사람을 우리 모두로 사는 것이다.
네가 그리는 모든 선으로 그를 그리는 것이다.
노동하며 땀흘리는
분노하며 피흘리는
한 사람의 죽음이 모두의 죽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도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를 죽이고도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일매일 뽑고 낫질하는 땅에도
작은 풀꽃이 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김진경
원제 :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벗이여, 형제여, 사랑하는 사람이여 어서 오게나
지금은 우리가 고통으로 서로를 아는 때
지금은 우리가 상처로 서로를 확인하는 때
지금은 우리가
가슴에 박힌 가시 철조망으로 서로를 부르고
흐르는 피로 끈끈하게 하나가 되는 때
형제여, 그러니 어서 오게나
이제 밤은 너무도 깊어
우리 살아 있음의 표지조차 어둠 깊이 사라져가고
이제 고통만이 살아 있음의 유일한 척도이어라
오게나
이 밤엔 고통도 성스러워라
그것이 이 어둠을 건너
우리를 부활하게 하리니
첫 새벽에 그것이
우리의 빛나는 보석임을 알게 되리니
사랑하는 사람이여
형제여
어서 오게나
그대 움푹 패인 수갑자국 그대로
그대 고통에 패인 주름살 그대로
우리 어떠한 것에도 고개 숙이지 않고
오직 서로에게 고개 숙여 서로의 상처에 입맞추느니
이 밤엔 고통만이 성스러워라
어서 오게나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그것이 이 어둠을 건너
우리를 부활하게 하리니
지금 이 밤은/김진경
지금 이 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신열에 들떠 뒤척이는 소년수의 희미한 신음이 어둠에 뒤섞이고
해남이라든가 형벌처럼 가난한 고향을 떠나오던 날의 기억이
신열 속에 죽음처럼 떠오르는 이 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떠돌던 서울의 낯선 골목과 골목들
주린 배와 충혈된 눈을 찌르는 기나긴 노동의 기억에
가위눌려 소스라치는 사람아
긴 한숨 속에 떠오르는 불꽃, 이 불꽃의 밤은
이 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머나먼 서울길 잠깐 본 아들의 얼굴로는
차마 돌아설 수 없어 떠도는 타관의 밤
신기루처럼 찬란하게 솟은 빌딩 밑 가로등 아래
허리굽은 어머니, 어머니의 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둠의 바닥 깊이 거대한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서대문의 추운 이 밤은.
까마득한 칠흑의 높이에서는 헛된 신기루의 무리
화려한 매음과 음모가 들끓는 허공
밑, 어둠의 바닥 찢기고 버려진 확실한 고통과 사랑의 골고다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인가 그곳은
그 새벽 어둠이 우리를 토해낼 언덕
뜨거운 불꽃이 우리를 단련하는 그때는 언제인가
우리의 절망과 버려짐, 상처와 고통들이 단단한 불꽃으로 타오를 그 언덕은 어디인가
깊은 고통의 성스러운 밤이여
파랑새/김진경
반 평짜리 독방
붉은 포승에 묶여 누우면
손목을 조이는 냉기
후― 수갑 위에 입김을 불면
하얀 입김의 끝에서 날아오르는, 날아오르는
아, 파랑새
파랑새, 벽 위를 푸득이며
부딪치다 파랗게 타올라 어둠을 사르는
거기 지울 수 없는 글자로
누군가, 아 손목을 파고드는
수갑의 고통으로 새겨 놓은
우리들의 노래여
뜨거운 남녘땅
가시덤불 위에 타오르다
서대문 구치소 붉은 벽 위에 칼바람으로 부서지다
법원 뒤뜰 반 평짜리 감방 벽에
푸득이며 타오르는 너를 새긴다
우리들의 입김 위에
피흐르는 날개로 살아 있는 파랑새
우리들의 새벽이여
편지/김진경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이제까지 쓰기는 많이 썼지만
봉투에 넣어 부치지는 못했습니다.
어린시절 저녁을 못 먹고 잠드는 밤
어머니는 몇 천 장 종이뭉치를 이고 오셨습니다.
한 장 한 장 일일이 풀칠을 하고
접어 붙이고 우리들이 지쳐서 잠든 뒤에도
어머니는 밤새워 편지봉투를 붙이셨습니다.
새벽에 만든 봉투를 이고 나가시고
한됫박 쌀을 사다 밥을 지었습니다.
밤을 새운 긴 노동 뒤에
상에 오른 한 그릇 밥을 보셨습니까.
밥알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보셨읍니까.
세상은 못 견디게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나날의 생활이 이렇게 사랑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세상은 너무도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배움이 부끄러웠습니다.
손가락이 다 해지도록 풀칠을 하는 어머니 곁에서
읽어 가는 교과서의 페이지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아, 어머니는 늘 나의 한계였습니다.
나의 말이 사랑이 되고 노동이 되어
한 장의 봉투에 배인 어머니의 눈물을 넘어설 수 없다면
나는 영원히 아무에게도 나의 말을 건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읍니다. 어머니는 늘 나의 결벽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노동을 넘어서지 못하는
나의 말들은 늘 나에겐 채찍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편지를 부칠까 말까 망설이며
몇 걸음 걷다가 깨달음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너의 말을 너의 것으로 가두는 한
영원히 사랑과 노동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내리는 눈발은 서로 엉기며 떨어져 한세상을 덮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이것은 사랑과 노동이 더이상 버림받지 않는
새 날을 향한 나의 노래입니다.
내가 나에게 내민 최초의 악수입니다.
아내여, 창밖엔 눈이 내리고
이 밤은 당신이 처음으로
서러운 이땅의 어머니가 되는 밤입니다.
빈집/김진경
무너진 토담 한 귀퉁이, 햇빛이 빈 뜨락을 엿보는 사이 작고 흰 꽃을 흔들며 개망초떼가 온 집안을 점령한다. 썩은 지붕 한구석이 무너진 외양간, 비쳐드는 손바닥만한 햇빛 속에도 개망초는 송아지처럼 순한 눈을 뜨고 있다. 개망초떼들이 방심한 채 입 벌린 빈집을 상여처럼 떠메고 일어선다. 하얗게 개망초꽃 핀 묵정밭 쪽이 소란하다.
혹시 집 앞길로 사람들이 흘러가다가, 잠시 멈추어 내리기라도 한다면, 개망초들은 시치미를 떼고 서서, 햇빛 속에 흔들리리라.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빈집은 숲에 묻히겠지.
문득 개망초꽃 하나가 내 어깨에 햇빛의 따뜻한 손을 얹으려 한다. 나는 완곡히 이 위안을 사양한다. 내가 지금 귀기울이는 건 다른 소리이다. 사람의 기운이 이제 아주 떠나려는 듯 사랑방에서 두런두런거리기도 하고, 쇠죽 끓이는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외양간에 쇠방울이 딸랑거리기도 하고, 누군가 쟁기며 삽날이 흙과 사람과 개망초꽃더미 사이에 내쉬고 들이쉬던 숨결을 가만히 어루만져 거두어들인다. 언뜻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뜨락을 스치고, 그의 헛기침 소릴 들었던가.
파랑새는 있다/김진경
붉은 벽돌의 옥사
내 방 창문의 한 귀퉁이는 늘 깨어져 있었다.
어느 겨울날 눈을 떠보면
머리맡에 흰 눈이 소복히 쌓여
손을 대면 온몸이 다 하얗게
새가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제는 구치소도 이사가고
세상의 밖으로 물러난 노인네와 아이들
그리고 비둘기들 한낮을 소일하는 독립공원.
나도 모처럼 세상의 밖으로 나와
옛날의 내 방 창문 앞에 서 보니
깨어져 있던 창문의 모서리가
여전히 깨어져 있다.
아, 그랬었군.
눈은 여전히 내려
머리맡에 소복히 쌓이고 있었군.
여전히 손을 대면 온몸이 다 하얗게
새가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았군.
하얗게 서리 앉은 벼들은
세상에도, 세상의 밖에도, 세상의 밖의 밖에도
내 몸 밖에도, 내 몸 안에도, 내 몸 안의 안에도 있었군.
아, 여전히 서리낀 벽에 하얗게 입김으로 그리는
파랑새는 있었군.
소식/김진경
서늘해지는 바람에서 그대 소식 듣습니다. 거리를 떠도는
걸 보았다고도 하고, 서릿발 일어서는 들판의 후미진
구석에서 길 잃은 고라니 새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고도
하고. 바람은 늘 거대하게 날개 편 풍문의 새와도 같습니다.
무사하신지요. 한때는 그대가 치자꽃 핀 울타리를 따라
걷고 있다 해서 온종일 치자꽃 향기에 휩싸이기도 했고,
한때는 그대가 서리 내린 들판을 걷고 있다 해서 칼날 같은
서릿발 위에 서는 것도 같았습니다.
참 많은 세월과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꽃 하얗게 핀
울타리를 따라 걷기도 했고, 맨발로 서릿발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수많은 내가 나일 뿐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또한 슬픔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렇듯이 당신에
관한 많은 풍문이 당신의 빈자리를 가리키고 있을 뿐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무한한 연민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덧없이 왔다 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란 말씀인
줄을 알겠습니다.
무사하신지요. 바람은 거대하게 날개 편 풍문의 새와도
같습니다. 저에게 치자꽃 향기를 한 번 더 보내주십시오.
이제 사랑하는 것들 위에 치자꽃 향기 하나 보탠들
어떻겠습니까.
키 작은 나무/김진경
시골 간이역
연착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철길 건너 들판이라도 볼까 해서
발돋움을 하는데
가지런히 잘라 놓은 전나무 울타리
너무 높아
잘 보이지 않는다
무슨 자갈밭이었던가
마침 울타리의 한 구석 잘 자라지 못한 전나무들이 있어
움푹 들어간 사이로 들판을 보다
들판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고
엷게 낀 아침 안개 속에
마을의 집들이 흐릿하다
참 사는 게 별 게 아니어서
이 작은 풍경들로 가득해지기도 하는 것을
나는 혹시 혼자 그득해지고자
키 큰 전나무 울타리처럼
남의 시선이나 가리고 살았던 건 아닌지
때로는 키 작은 나무들의 한 생애가
훨씬 커 보일 때가 있다.
우덜 경제/김진경
미치겄지유?
누구는 부동산으로 몇 천 억을 버는디
경제성두 없넌 인간덜이
콩 나와라 팥 나와라 허니께 미치겄지유?
경제적으루 봐서 없는 거이 난 농사를
부득부득 짓구 자빠져서
우르광 라운드 반대!
핵 폐기물 영구처분장 건설 반대!
콱 쥑이구 싶지유?
고로케 시상을 부정적으루만 보는 거이
바로 뿔갱이라고 말허구 싶지유?
허지만서두
잘난 분덜한테 잘난 경제가 있드키
우덜한테 우덜 경제가 있는규.
잘난 분덜 경제야 한탕 해갖구
물 건너루 널르믄 되넌 경제니께
우르광 라운드루 벌판을 폐허루 만들어버리구
고기다 핵폐기물 오염덩어리 묻어두 되넌 경제지만
우덜 경제넌
대대손손이 이 땅에 살아야 되넌 경제니께
도저히 고로케는 못허는규.
우덜 땅을 아예 사람두 살 수 없게 만들어버리믄
통일되넌 날 뭔 낯으루 북녘 동포들을 대할규.
조상님께 죄 되구
대대손손이 죄 되니께
도저히 고로케는 못하는규.
잘난 분덜 경제넌 미국놈덜 일본놈덜 경제니께
이웃두 없구 동포도 없지만서두
우덜 경제넌 대대소손이 이 따에 살아야 되넌 경제니께
이웃덜 낯두 보구 동포두 생각허는규.
도저히 고로케는 못허는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