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죽산안씨족보 간행을 주관했던 안병식(安秉湜) 어른이 1991년 9월에 『죽산안씨보사전말(竹山安氏譜事顚末)』의 역문 소책자를 만들었는데, 내용을 읽어봤더니, 제학공파 보성 택촌 동복공파문중의 죽산안씨 18세 서운헌(棲雲軒) 안호(安浩,1763~1822) 어른이 순흥안씨문중에 보낸 글을 이재공파 진보파문중(眞寶派門中)의 죽산안씨 15세 안행정(安行正) 어른이 중간 역할을 했고, 이 글에 대해 순흥안씨 문중에서 회유문을 보내온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순흥회유문의 번역이 안되던 곳을 하루 종일 뒤적여 보면서 생각해 봤습니다.
順興回諭文
右文爲回諭事夫事或幽鬱而終無不伸之理文或閥漏而竟有必闡之道西河之集出於僧井英憲之詩於女譫者是也。噫吾安氏冣初單卷譜不知何代何年之所失而三四次續修之際無由搜閱者閔推久矣是以貴宗之爲吾門一源之說質諸竹溪之誌牧隱之序不啻昭然而第以嘉靖譜以後竹城君名諱未傳雖或聞知而未取追述新譜竊以爲慨恨正如貴宗積世之憾矣今承宗人行正甫柚來辱諭奉覽舊譜一板竹城君之爲順城君仲氏明白無疑其曰移封故子孫之不載此譜云者果得譜家之體而始之吾宗之厥后修述未得傳襲者果因舊譜之漏失也百世遺憾一朝渙釋非但貴宗之幸實是吾安之大幸也雖未得合成一譜豈取曰異貫而不講誼乎此實僉宗之遠捜旁括一心用意之誠力也仍念竹城之竹必自竹溪之竹變而移之則不當貫之以竹山混入於古竹山之安也假使竹城爲竹山舊號而勝國移封之時不曰竹山而曰竹城則子孫之承襲竹城萬分至當雖不因順興舊貫而亦能守先世之封號僉宗其亦熱講而細量耶須以此意取以施行之則幸甚
辛酉 四月 十九日
順興 安必誠 安必晉 安必重 等 二十六人
(번역문)
순흥(順興) 문중에서 보낸 회유문(回諭文)
이 글은 물어주신 내용에 대한 회답입니다. 대저 일[事]은 간혹 막히더라도 끝내 펴지 못할 이치가 없고, 글[文]은 간혹 누락되더라도 결국 드러내는 길이 있는 법입니다. 서하(西河)의 문집[임춘(林椿)의 문집]이 스님들 우물에서 나왔고, 영헌[英憲, 김지대(金之岱,1190~1266)의 시호]의 시(詩)가 한 여인의 흥얼거림에서 나온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아! 우리 안씨(安氏)가 만든 최초의 단권(單卷) 족보가 어느 시대, 어느 해에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서너 차례에 걸쳐 잇달아 족보를 편찬할 때에도 찾아볼 길이 없었던 것은 오직 사라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귀 문중(貴門中)이 우리 문중과 근원이 동일하다는 설은 죽계(竹溪)의 지문(誌文)과 목은(牧隱)의 서문(序文)에서 확인해 보아도 매우 분명합니다. 다만 가정보[嘉靖譜: 병오보(丙午譜)를 말함, 1546] 이후부터 죽성군(竹城君, 諱元衡)의 이름이 전해지지 못하여, 비록 혹 들어서 알았다하더라도 감히 새로운 족보에 추가로 기술하지 못했으니, 저희들은 귀 문중이 오랜 세월동안 유감으로 여겼던 것과 똑같이 한탄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종인(宗人) 행정[行正, 죽산안씨 15세로 이재공파 부사공종중의 진보파(眞寶派)] 씨가 가지고 온 통유문(通諭文)을 받고 구보(舊譜) 1판(板)을 삼가 읽어보니, 죽성군(竹城君, 諱元衡)이 순성군(順城君, 諱元崇)의 중씨(仲氏)가 됨은 명백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봉지(封地)를 옮겼으므로 자손들이 이 족보에 실리지 않았다.…”한 것은 과연 보가(譜家)의 체통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 문중이 그 후 족보를 편찬하여 기술하면서 (죽성군을) 전해 이어가지 못한 것은 과연 구보(舊譜)에 빠졌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오랫동안 남겨진 유감이 하루아침에 밝게 풀렸으니, 귀 문중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 안씨의 카다란 행운입니다. 비록 하나의 족보로 합치지는 못했지만, 어찌 감히 관향(貫鄕)이 다르다 하여 족의(族誼)를 꾀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실로 종인(宗人) 여러분이 널리 찾고 수집하여 오롯이 마음을 쓴 정성스런 힘 때문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죽성(竹城)의 죽(竹)이 분명 죽계(竹溪)의 죽(竹)에서 변천되었다면, 죽산(竹山)을 관향으로 삼아 고죽산안씨(古竹山安氏)에게 섞어 넣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설령 죽성(竹城)이 죽산의 옛 이름이라 하더라도, 고려조에 봉지(封地)를 옮길 때 ‘죽산(竹山)’이라 하지 않고 ‘죽성(竹城)’이라 하였다면, 자손들이 죽성(竹城)을 이어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비록 순흥(順興)의 옛 관향을 그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또한 선세(先世)의 봉호(封號)를 능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니, 종인(宗人) 여러분이 어찌 열성으로 강론하고 세밀하게 헤아려 볼 일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이 뜻을 취하여 시행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유년(1801) 4월 19일
순흥(順興) 안필성(安必誠), 안필진(安必晉), 안필중(安必重) 等 26인(二十六人)
1.『동문선(東文選)』제6권에 김지대(金之岱,1190~1266)가 지은「의성 객사북루(義城客舍北樓)」가 남아있다.
문소의 공관에 후원 깊은 곳 / 聞韶公館後園深
그 가운데 높은 누대 백 척이 넘는구나 / 中有危樓百餘尺
향기로운 바람은 십 리 멀리 불어와서 주렴을 걷고 / 香風十里捲珠簾
달밤에 한 가락 옥 피리 소리 들려오네 / 明月一聲飛玉笛
연기 옅은 속에 버드나무 그림자 가늘게 이어지고 / 煙輕柳影細相連
비 개니 산 빛이 짙어 물방울이 떨어져 내릴 듯하여라 / 雨霽山光濃欲滴
용황의 팔 부러진 갑지랑이여 / 龍荒折臂甲枝郞
안찰사가 되어 난간에 기대니 더욱 두려워지네 / 仍按凭欄尤可怕
龍荒折臂甲枝郞
용황은 흉노(匈奴)의 근거지인 용성(龍城)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팔이 부러졌다는 것은 절비삼공(折臂三公)의 고사로 고관이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짐을 일컫는다. 진(晉)나라 때 양호(羊祜)가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는데 마침내 삼공(三公)의 지위에 이른 일을 가리킨다. 《晉書 卷34 羊祜列傳》 갑지랑은 계수나무의 가지를 꺾은 사람이란 뜻으로,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자신을 일컬은 것으로 보인다.
2.『동사강목(東史綱目)』제11상의 병인년(원종 7, 1266) 기록에
춘2월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한 김지대(金之岱)가 졸하였다.
지대는 청도인(淸道人)으로,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구속되지 않았으며, 학문을 힘써 문장에 능하였다. 강동의 싸움[江東之役]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군대에 들어가 방패 끝에 글을 지어 붙였다.
그 시(詩)는 이러하다.
나라의 근심은 신하의 근심 / 國患臣之患
어버이의 걱정은 자식의 걱정 / 親憂子之憂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봉사하면 / 代親如報國
충성과 효도를 함께 하는 것이네 / 忠孝可雙修
원수(元帥) 조충(趙冲)이 보고 불러서 진영(陳營) 안에 두고 기량을 부려보았다. 다음해에 충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1등으로 발탁하여, 예에 따라 전주사록(全州司錄)의 보직을 주었는데, 고아[孤]와 과부[寡]를 먹여살리고, 강하고 굳센 사람은 억눌러 적발하기를 귀신같이 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므로, 드디어 크게 현달해서 쓰이었다. 병이 들자 머리를 깎고 앉아서 죽으니, 나이 77이었다.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3. 이륙(李陸,1438~1498)이 지은『청파극담(靑坡劇談)』중에서 김지대(金之岱,1190~1266)가 지은「의성 객사북루(義城客舍北樓)」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의성(義城)은 옛날 문소헌(聞韶縣)이다. 고려(高麗)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1190~1266)가 일찍이 이 현의 누각에 시를 지어 붙이기를,
문소 공관 후원은 깊기도 한데 / 聞韶公館後園深
그 가운데 백여 척 높은 다락 우뚝 솟았네 / 中有危樓百餘尺
향기로운 바람은 10리나 깔렸는데, 주렴은 걷혀 있고 / 香風十里捲珠簾
밝은 달빛 아래 옥적(玉笛)의 외로운 소리 들려오네 / 明月一聲飛玉笛
가벼운 연기 버들 그림자 가느다랗게 연해 있고 / 煙輕柳影細相連
비 갠 산빛은 짙어 뚝뚝 떨어질 듯 / 雨霽山光濃欲滴
용황 절비 갑지랑이 / 龍荒折臂甲枝郞
난간에 기댄 채 더욱 애석하기도 해라 / 仍按憑闌尤可惜
고 하여 당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뒷날 현이 병화에 타서 재가 되고 시 또한 없어졌는데, 어떤 암행어사가 이 고을에 이르러 김지대의 시를 급히 찾으니, 고을 사람들은 어찌할 줄 몰랐다. 마침 고을 원의 딸이 장(張) 재상의 아들과 혼담이 있었는데, 재상의 아들이 멀리 다른 곳으로 장가드니, 그녀는 듣고 결국 심질(心疾)이 생겨 정신이상이 되어 미친 소리만 쉴 새 없이 하다가 문득 김공이 지었던 시를 읊었다. 고을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암행어사에게 써서 바쳤는데, 지금도 이 현의 누각 벽에 걸려 있다.
4. 남구만(南九萬,1629~1711)의『약천집(藥泉集)』의「영남 잡록(嶺南雜錄)」중에 김지대(金之岱,1190~1266)가 지은「의성 객사북루(義城客舍北樓)」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바로 본읍(本邑) 태수의 딸이 광증(狂症)이 나서 시를 외워 세상에 전해지는 것인데, 시구의 말이 깨끗하고 기이하니 참으로 귀신을 감동시킬 만하다.
뒤에 청도군(淸道郡)에 이르니, 고사(古事)를 적은 병풍에 영헌공의 일이 기재되어 있었다. 영헌공이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위하여 북방에 대신 수자리 살러 갔을 때 베고 있던 방패에 한 절구(絶句)를 썼는데,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할 수 있다.〔忠孝可雙全〕”는 시구가 있어 조충(趙冲)에게 칭찬을 받고 발탁되었다가 군대에서 돌아와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다고 하였다. 공의 〈문소각(聞韶閣)〉 시에 이른 바 “용황의 팔 부러진 갑지랑이, 인하여 안찰사가 되어 난간에 기대니 더욱 두렵다.”는 구절은 평소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용황절비(龍荒折臂)’가 수자리 살 때의 일을 가리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갑지랑(甲枝郞)’은 장원랑(狀元郞)이라는 말과 같으며, ‘인안빙란(因按憑欄)’은 본도의 안찰사가 되었기 때문에 와서 이 난간에 기댄 것임을 말한 것이다. 비록 이것이 과연 옳은지는 결코 알 수 없으나 애오라지 기록하여 질문의 자료로 삼는 바이다.
5.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25권 > 경상도(慶尙道)의 의성현(義城縣)의 기록 중에 【누정】 문소루(聞韶樓) 편의 기록을 보면
○ 김지대(金之岱,1190~1266)의 시에, “문소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는 백여 척 되는 높다란 누정이 있네. 향기로운 바람 십 리(十里)에 구슬 발이 걷히고, 밝은 달 일성(一聲)으로 옥피리 날리네. 연기는 가벼워 버들 그림자가 서로 가늘게 이어졌고, 비는 개어서 산빛이 짙은데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 용황(龍荒 흉노(匈奴))이 팔을 꺾은 갑지랑(甲枝郞), 그냥 난간에 기대고 있는 것 더욱 애석하네.” 하였다. 지대의 이 시는 사람 입에 오르내리다가 시판(詩板)을 잃었다. 그 뒤 10년에 어떤 군수가 이 시를 몹시 찾으니 고을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시 현수(縣守) 오적장(吳廸莊)에게 딸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일(張鎰,1207~1276)의 아들 정하(廷賀)와 약혼했었다. 오(吳)가 딸을 데리고 임지에 간 동안 정하는 다른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오녀(吳女)가 듣고 미쳐서 함부로 지껄이다가 갑자기 이 시를 암송해내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를 베껴서 바치니 군수가 놀랐다고 한다.
6.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동인시화(東人詩話)』의 내용 중에
영헌(英憲) 김지대(金之岱,1190~1266)가 의성(義城) 관루(館樓)에 쓴 시가 당시에 회자(膾炙) 되었으나 그 후 10년 뒤에 누대가 병란에 불타고 현판도 따라서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수십년이 지난 뒤에 한 안찰사가 현에 들어와 영헌공의 시를 급하게 찾았으나 고을 사람들은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당시 고을의 현감 오적장(吳廸莊)에게서 딸이 있었다. 일찍이 상국 장일(張鎰,1207~1276)의 아들 장정하(張廷賀)와 혼인을 약속하였는데, 오적장이 딸을 데리고 임소로 가자, 장정하는 다른 짝을 맞아들였다. 이에 오적장의 딸은 광증이 나서 종잡을 수 없는 말을 마구 떠들어대곤 하였는데, 갑자기 영헌공의 시를 읊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채록하여 안찰사에게 올리니, 안찰사는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말을 전하여 “귀신도 시를 사랑하여 다시 세상에 전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7. 김지대(金之岱,1190∼1266)
고려 고종 때의 문신.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초명은 중룡(仲龍). 1217년(고종 4) 3만명의 거란병이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하였다. 모든 군사들이 방패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그는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 원수 조충(趙沖)이 병사를 점검하다가 이것을 보고 놀라서 그를 중용하였다. 1218년에는 조충이 시험관으로서 지공거가 되어 그를 일등으로 발탁하고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하였다. 그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함으로써, 이민(吏民)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그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을 맡았고, 1240년 전라도안찰사로 있을 때, 진도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만전(萬全)이 진도에 숨어 횡포를 부리면서 자기의 수하인 통지(通知)라는 사람을 지대에게 보내 그의 요구를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고 지대가 직접 만전을 만나 그의 요구를 즉석에서 들어주었다. 그러나 만전이 또다시 통지를 보내 여러가지를 요구하므로, 통지를 결박하여 강물에 던져버렸다. 만전은 원망을 하였으나 지대가 청렴하고 근엄하여 감히 해치지를 못하였다. 그뒤 1255년에는 판사재사(判司宰事)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진사를 뽑았고, 1258년에는 몽고병이 북쪽 변방을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당시 군무를 소홀히 하던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 홍희(洪熙)가 여색만 탐하고 군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자, 지대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시켜 파견하자 서북 40여성이 안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1258년 11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다시 한달 뒤인 12월에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승진하였으며, 나라에서 오산군(鰲山君)이라는 군호(君號)를 받았다. 1260년(원종 1) 12월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1261년 5월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였다. 그의 무덤은 청도에 있으며,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늘 존경합니다.
켁.
우리 죽산을 위해 헌신하시는 안재중 원장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개인의 유익을 위해 족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죽산 안문을 위해 수고하시는 일들은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공로상이라도 하나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이름없는 사람이라 그렇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깊이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일편단심입니다.
아이고 쑥스럽게 왜 그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