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학자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정인홍을 산림의 면모를 보인 최초의 인물로 꼽고 있다.
‘광해조 때 이이첨이 일을 꾸며 정인홍을 삼공의 서열에 두고 큰 일마다 서로 화합하여 유현(儒賢)의 논의임을 빙자하여
그들의 속마음을 실천하였다. 이로부터 당국자들이 추종하여 조정의 정국이 일변하였다. 문득 임하(林下)의 한 사람을
추대하여 영수로 삼고 비록 어짐과 간사함이 다르지만 산림에 갖다 붙이지 않음이 없었다.’ (황현, [매천야록])
그런데 정인홍이 산림학자의 면모를 보인 연원에는 스승인 조식의 출처관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세기 훈구파의
전횡이 계속될 때 사림파라는 비판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고, 사림세력 중에서도 현실비판의 입장이
강했던 처사들의 학풍과 사상을 체제 내에 흡수하려고 노력한 점은 조선사회가 가진 가능성의 측면이다. 정인홍은 선조대에
산림으로 발탁되어 사헌부에 재직할 때 ‘산림장령(山林掌令)’이라 불리면서 강직한 면모를 보여준 바 있었으며, 특히
광해군대에 대북과 연결되어 정계를 뒷받침하는 거물이 되었다. 그는 강력한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중앙정계에 큰 문제가 있을 때마다 경상우도 사림을 동원하여 북인정권을 지원하였다.
그는 시종일관 과격하고 강경한 주장을 폈고 상대당에 대한 독설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철과 성혼의 기축옥사 때의
행적을 비판하면서, ‘간악한 정철을 부추겨 고명한 선비를 죽이게 한 성혼은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清正)을
부추겨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유할 만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정인홍의 과격한
모습은 광해군대의 정국에서도 그대로 지속되었으나, 왕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었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광해군대에
이미 80세가 넘은 고령이라는 점 또한 정인홍이 쉽게 정치노선을 바꾸지 못한 요인이었고, 이이첨이 정인홍의 위세와
명성을 십분 활용한 점 또한 정인홍의 강성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광해군대 정국에서 정인홍은 주로 합천에 은거한 산림의 입지를 지켰으나. 그의 정치적 명성과 영향력은 그를 산림 그 자체의
존재만으로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정인홍은 비록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장수한 인물로,
국가에 대한 의리(의병), 왕에 대한 의리(광해군), 스승에 대한 의리(조식)를 일관되게 지켜나갔다. 특히 그의 삶에 있어서
스승 남명과 국왕 광해군은 그가 존재하는 목표이자 이유였다. 정인홍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언적과 이황에 대한 문묘
출향을 주장하고, 토역(討逆- 역적을 토벌함)의 논리를 전개하면서 궁중에 피를 부른 것은,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왕에 대한 의리와 충성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성과 과격성, 반대세력을 조금도 용인하지 않는 비타협성은
반대세력을 결집시켜주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그의 나이 88세가 되던 1623년 정인홍은 인조반정 직후 참형되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처형 이후 서인과 노론 주도의
정국이 전개되면서 정인홍은 조선후기 내내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의 궤적에서는 원칙과
신념을 위해 조금도 굽힘없이 살아간 조선조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으며 산림이 조선후기의 정치사·사상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단서도 제공했다. 정인홍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은 인조반정 이후 역사의 수면에서
사라진 북인의 정치적, 사상적 위상을 제대로 세우는데도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참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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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글에서) |
첫댓글 우리고장 남명조식의 수제자로써 의병장이며 선비입니다.
참고: 상기지도(의병활동) , 의병(義兵):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자위군.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북인의 실리외교는 승리했고 반정한 인조조(서인)의 외교는 패배하여 삼전도의 굴욕까지 갔지요
참 좋은 자료 잘읽었습니다.
역사자료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자료를 올려주십시요. 학교다닐때 다하지못했던 역사를 배우게 된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