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길을 걷고 있는 신이다.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신의 길'과 '인간의 길'을 모두 걷고 있다.
때로는 신의 길을 따라 걷다가 때로는 인간의 길을 따라 걷는다.
상황에 따라 다시 신의 길을 따르고 상황이 변하면 다시 인간의 길을 걷는다.
어떤것도 잘못되거나 틀린것은 없다.
그 두가지 길 모두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길이며 신을 향한 길이므로.....
모든 영혼이 제 갈길을 가게 하라.
개개의 영혼은 지금이라는 순간마다 자신의 더없이 고귀한 목적에 맞고,
가장 빨리 자신을 기억해내는 데 적합한 상황과 조건을 창조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걷는 업보의 길을 판단하려 들지마라.
우리는 타인영혼의 계산서 속에서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알지 못하니,
남들의 성공을 질투하지도 말고, 남들의 실패를 동정하지도 마라.
어떤 것을 재난이라 부르지도 말며, 기쁜 일이라고 하지도 마라.
그것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판단하거나 목격할 때까지는.
그러나 우리는 이런 판단조차 내리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남에게 충고하지 말며,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충고하게끔 내버려둬라.
세상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고 어떤 악당도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선택으로 내가 희생되는 일도 없다.
어떤면에서 보면 내가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들 전부를 나 자신이 창조해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선택한 것이다.
저절로, 그리고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건 아무것도 없다.
고통은 잘못된 생각의 결과다.
그것은 생각의 오류이다.
고통은 내가 어떤 것에 관해 내린 판단 때문에 생긴다.
그 판단을 제거해보라. 그러면 고통이 사라진다.
신의 세계에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는 건 없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라.
당신을 반영하는것, 당신 자신의 변형으로서 당신을 재표출해주는 일을 하라.
유감스럽게 느끼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심판하지도 비난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당신은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도,
어떤 식으로 끝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비난하는 것이 언제고 나를 비난할 것이며,
내가 심판하는 것이 언제고 나를 심판하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라.
그 모든 것이 다 신의 창조이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창조이기에.
신은 한번도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라"거나 "하지 마라"는 걸 설정한 적이 없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받은 최고의 선물, 즉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고 그 결과를 체험해 볼 기회와,
우리가 '참된 자신'의 모습과 닮은 꼴에 비추어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기회와,
또 자신의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더욱더 고귀한 자신을 만들어줄 공간이란 선물을 빼앗는 것이 되리라.
어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그르다"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나 자신을 금하는 것이다.
나를 금하는 건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며,
자신을 제한하는 건 '참된 자신'이라는 실체를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실체를 창조하고 체험할 기회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내가 나 자신의 규칙을 제정하고, 바로 내가 그 지침들을 설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잘해왔고, 지금 얼마나 잘해나가는지 판단하는 사람도 나다.
왜냐하면 나야말로 '자신이 참으로 누구이고 무엇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하는지'를 판단해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야말로 자신이 얼마나 잘해가는지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 이외에 어느 누구도 나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것은 완벽의 일환이자 완성의 과정일 뿐.
모든것과 모든이에게 완벽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길을 걷고 있는 신이기에
매 순간 우리가 선택하는 체험중에 어떤것이 작동하는지 어떤 것이 작동하지 않는지 잘 관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되고자 하는 자신이 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의 문제이다.
그런 효율의 관점에서 우리의 체험을 관찰했을때 어떤한 선택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관찰의 결과에 맞게 우리의 경로를 수정해 나간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곳에 더 빨리 도달하게 될것이다.
때문에 그런 의미로 본다면 악을 악이라 규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관찰결과에 대해서도 잘못됐다 판단하지 마라.
그것은 그냥 잘 작동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선택을 바꿔라.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틀렸다 심판하지 마라.
그사람은 그냥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어떤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 틀렸다 잘못됐다 심판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잘못됐다 판단하지 마라.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 완벽을 보듯이
그 상황과 그 사람에게서 완벽을 보라.
모든것은 내 영혼의 창조물이며
모든것은 있는 그대로 완벽하며 완성의 과정일뿐이다.
그 어떤 상황도 고통스럽게 느끼지 마라.
고통은 잘못된 판단의 결과이다.
모든 상황을 축복과 선물로 여기고 모든것을 축복하라.
그럴수록 천국이 가까워 지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당신이 인생이라는 장엄한 드라마에 빠져
어떤상황과 사람에 대해 잘못됐다 느끼거든 그 느낌을 허용하라.
그리고 그런 자신을 비난하지도 심판하지도 마라.
남을 비난하고 심판하는 사람에게서 완벽을 보듯이
그런 자신에게서 완벽을 보라.
모든것은 있는 그대로 완벽하고 완전하니
비난하고 있는 당신 자신도 있는 그대로 완벽하고 완전함을 알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완전한 자각에 이를 때까지
무엇이 잘 작동하고 무엇이 잘 작동하지 않는지 잘 관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체험을 바꾸고 나아가 우리의 세상을 바꾸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완벽을 보라.
모든것은 우리 영혼의 선택이자 창조물이니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기대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며 심판하지 말라.
기대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의 속성이며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에게 오직 천사만을 보내주었다",
"모든것은 완벽의 일환이자 완성의 과정이다"라는 신의 메세지로
모든 체험을 포장하려 든다면 우리는 삶의 장엄함과 체험의 참된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천사만을 보내주었지만
문제는 그 천사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달려 있다.
마음속으로는 악마라 느끼면서도 입으로 또는 머리로만 천사라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자기부정이고 오만이다.
그런식으로 체험을 이해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런 행위를 하는 상대를 위해서도 올바르지 않다.
아니 그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체험을 지속하는것은 결국 우리가 되고자 하는 자신이 되는데 걸림돌이 될뿐이다.
타인에 대한 무제한적인 허용만이 무제한적인 사랑의 표현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자신이 그런 상황을 진심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천사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자신을 위해서 좋은 일이며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깨달음의 경지에 거의 도달한 사람일것이다.
때문에 당신이 진정 그렇게 느낀다면 그렇게 하라.
하지만 당신이 그런 상황을 기쁨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선택을 바꿔라.
영성의 출발은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고
영성의 나침반은 내 가슴속에 느껴지는 기쁨이다.
가슴속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이 아무리 거창하고 숭고한 일이라 할지라도,
설령 그것이 신의 길이라 할지라도
한낱 무의미한 몸짓에 지나지 않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과 모든 상황에서 완벽을 보라.
우리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된다!
때문에 우리가 모든것에서 완벽을 본다면
우리는 그 완벽이 될것이다!
우리가 타인을 천사로 본다면 우리도 천사가 될것이고
우리가 타인을 신으로 본다면 우리도 신이 될것이다.
바람을 숙고했던 람타가 결국 바람이 된 것처럼....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두가지의 관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존재의 관점과 관계의 관점이다.
존재의 관점이란 신의 관점, 절대적 관점이다.
모든것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존재에는 목적이 없다. 그것은 그냥 존재한다.
존재의 목적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거기에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선과 악이라는 관념이 존재할 수 없다.
신, 의식, 사랑, 생명, 생각, 사람, 세상.....
모두 순수한 있음이 있을 뿐이다.
관계의 관점은 상대적 관점, 인간의 관점이다.
관계에는 목적이 존재한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관계를 갖는 이유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그 관계를 통해서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 있다.
때문에 관계에는 잘된 관계와 잘못된 관계, 좋은 관계와 나쁜 관계, 잘 작동하는 관계와 잘 작동하지 않는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의 삶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과 체험과 사건과 환경등의 모든 요소를
존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들은 모두 완벽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앞에 모습을 들어내지 않았을 테니까.
때문에 그 모든 체험과 사람과 환경은 모두 완벽의 일환이며 완성의 과정이 된다.
하지만 이것을 관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거기에는 분명 '잘 작동하는 체험'과 '잘 작동하지 않는 체험'으로 나뉘게 된다.
즉 우리가 원했던 체험의 목적과 얼마나 부합되는지를 살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약 그 결과가 우리의 원래 의도와 다르다면 얼마든지 관계를 조절하여 다른 체험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뜻이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존재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완벽하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나의 의식이 그것을 이해할 순 없다고 하더라도 그 교통사고가 일어난데는 분명 내 영혼의 숨겨진 의도가 있고
나의 영혼은 자신이 성장하는 그런 체험이 필요했다고 보았기에 그런 체험을 불러 드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건은 이미 나에게 일어났고 나에게 일어난 모든 체험은 모두 완벽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그 어떤 체험도 내 영혼의 의지를 거슬러 일어날 수 없으니까....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것이 좋던 싫던 내 영혼의 선택하여 내 앞에 나타났으므로 그것은 완벽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교통사고를 관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사건일까?
바람직하다는 말의 뜻은 그런 일이나 상황이 일어나는 바람을 갖을 만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로 그런 교통사고가 또 다시 일어나길 바라는가?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완벽한 체험이지만 그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때문에 당신이 그런 교통사고를 다시 경험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존재와 관계의 차이점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완벽하다.
우리가 관계하는 것에는 잘 작동하는 것과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때로는 체험을 존재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때로는 관계의 관점으로 이해한다.
그 어떤것도 나쁘지 않다.
그 모든것이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길이며 신을 향한 길이다.
우리가 이런 경로를 따라 삶이라는 체험하는 신을 경험해 나갈 수록
두 가지의 상반된 길은 점점 가까워질 것이고
언젠가 완벽히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오직 하나의 길만을 가게 될 것이다.
오직 신-인간 하나의 길만을.....
- 작자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