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도당의 당당함은 선생을 닮았다. 1624년 4월 인조(仁朝)가 제사 축문에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어떻게 호칭할지 혼란스러워 사계에게 예법의 자문을 구했다. 이에 대해 사계는 인조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으로 그의 굳은 절의를 표한다. 물론 이 상소문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인조는 결국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한다.
"제왕(帝王)의 법통(法統)은 비록 형이 아우의 뒤를 잇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었다 하더라도,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 지금 성상께서는 선조(宣祖)의 대통을 이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성상의 사친(私親, 생부)을 끼워 넣어 위로 조묘(祖廟)를 잇게 한다면, 이것이 이른바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다 합친다고 하는 것으로, 윤리를 어지럽히고 예를 어그러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친을 고(考, 죽은 아버지)라고 칭한다면 상복도 반드시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어찌 대통을 이어받고도 사친을 위해 삼년복을 입는 이치가 있겠습니까?”(송의호)
사계는 1613년(광해 5), 그의 나이 66세 때 계옥축사에 연루된다. 7명의 서얼들이 서얼금고법 폐지를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노상강도를 하다가 모두 붙잡히는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난다. 여기에 사계의 서제(庶弟)인 김경순, 김평순이 연루되었다. 이 때문에 사계도 화를 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대신들의 건의로 화를 면하고 낙향한다. 1623년 인조반정(광해군 15)으로 서인이 대북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자 75세의 고령으로 조정에 다시 나아간다. 1627년(인조 5)에 형조 참판으로 재등용되었다가 한 달 만에 그만두고 낙향하여 1631년(인조 9)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연산(현재 논산)에 줄곧 머문다.
돈암서원은 평지에 서 있다. 강경의 죽림서원의 모형을 그대로 옮겼다. 죽림서원은 지형상 낮은 구릉에 전저후고의 규준을 따라 지어져 있다. 죽림서원을 찾은 날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서원의 배치이다. 이 서원은 인조 4년(1626) 지을 당시는 황산(黃山)서원이었다. 이후 현종 5년(1665)에 죽림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후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이 서원의 원래 이름이 황산인 것은 호서와 호남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이다. 충청과 전라의 경계선인 이곳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임리정(臨履亭)이 서 있다. 임리정에서 아래 죽림서원을 내려 다 보는 지세이다. 임리정은 1626년(인조 4)에 김장생이 짓고 유생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이곳 역시 처음에는 황산정이었다. 죽림서원이나 임리정 모두 그 당시의 지리적 여건을 따라 ‘황산’(논산의 옛 명칭)으로 불렀던 곳이다.
돈암서원은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질서를 따르지만, 전저후고의 규준을 따르지는 않는다. 이선기후(理先氣後)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리와 기는 평등한 관계이다. 사계는 이이의 입장을 따라 퇴계의 호발설을 비판한다. 호발은 이와 기를 두 개의 실체로 선후로 분리하는 형이상학이다. 그래서 사계를 배향하는 이 서원은 평지 위에 고저의 차이를 두지 않고 서 있다. 사계 자신이 서얼 차별 제도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적서(嫡庶)의 구분을 허물고 평등의 의미를 각인해 놓았다. 적서의 구분을 예의 정신으로 허물었다. 도산서원이나 도동서원과 같은 영남의 서원들과는 달리 고저의 차이는 거의 없는 평지에 서 있다.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에 충실한 평면 공간구성이다. 현실을 떠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지어진 도산서원이나 도동서원과 같은 남인 유림의 집과는 다르다. 현실을 떠나 마음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의 고저를 포기하고 공간의 이원화를 절제한다.
요새 같은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곳은 이 서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꽃으로 화장한 담장이다. 궁궐에나 있을 법한 꽃담이다. 도동서원의 담장이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답지만, 이 서원의 담처럼 색으로 화장을 하고 있지는 않다. 담장에 붉은색과 흑색으로 조합을 이루고 있는 전서체의 글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예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말하는 듯하다. 예(禮)의 한자는 예물을 풍성하게 차려 놓고 허리를 굽혀 제사를 드리는 모양이다. 남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인간의 행동이 있을까? 예가 꽃담으로 피어났다. 예는 궁궐이나 민가나 서원이나 모든 곳에 아름답게 피어야 할 보편적 규범이라는 의미를 전해 주는 꽃담이다.
이기 논쟁으로 야기된 사화와 임진과 정유 양란으로 훼손된 질서를 예로 치유하려고 예학을 확립한 자가 사계였다. 예는 현실에 적용된 보편적 규범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주조된 지식인 집단의 성리학적 규범을 해체하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이상적 건축인 응도당을 지었다. 현실을 떠난 이가 아닌 현실 속의 이, 즉 예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규범이다. 그의 예는 이(理)와 같이 추상적이지 않다. 상례(喪禮)와 같은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사회의 규범이다. 이 규범에는 이와 기가 경계를 짓고 다툴 공간이 없다. 서얼 출신의 스승 구봉(龜峯) 송익필로부터 사사한 사계는 스승이 차별을 받아야 했던 제도적 불합리성을 보편적 제도로 치유하려 한 예학의 종장이다.
첫댓글 _((()))_ _((()))_ _((()))_
감사합니다
돈암서원의 개방적이고 당당한 건물이 인상적입니다. 꽃담은 궁월의. 후원담처럼 예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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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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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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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