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정암이 심어 놓은 도학 정치의 꿈은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중종 말인 1543년 최초의 서원인 주세붕의 백운동서원이 세워지고, 명종과 선조 대에 전국으로 서원 건립 운동이 일어난다. 그의 개혁은 조선 중·후반으로 가면서 사림의 정치적 입지가 강해지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결코 그의 개혁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1568년(선조 원년)에 영의정에 추존되고 문정공의 시호가 하사되었다. 1610년(광해군 2) 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정암은 1519년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은 후, 1650년(효종 1)에야 이 심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아마 후학들을 키울 시간적 여유도 없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선생의 공간을 마련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다. 정몽주가 배향된 충렬서원에 입향되었다가 이곳으로 옮겼다. 숙부 양팽손이 양산보를 정암에게 소개했다. 양산보는 스승이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하자 전남 담양에 내려와 소쇄원을 짓는다. 한국 정원의 으뜸이라 할 이 별서 정원은 스승이 못다 이룬 이상적인 정치의 꿈을 공간으로 완성한 곳이다. 소쇄원의 대나무 숲은 스승의 강직함을 은유한다.
심곡서원은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그의 강한 개혁 의지가 일직선으로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못다 이룬 개혁의 한을 공간에 육화해 놓았다. 정암의 개혁은 끝난 것이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천박한 자본 권력이 잉태한 질서없는 욕망에 저항하는 듯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홍살문에서 외삼문으로 들어가는 넓은 마당을 주차 공간으로 배치한 자본의 논리가 아쉽다. 토지가 권력이었던 부조리에 저항하여 토지개혁을 주창했던 그는 부동산 공화국인 한국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난무하던 사이비 종교를 성리학적 질서로 개혁하려고 한 정암이었다. 주술화되어 가는 한국 교회의 민낯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이다. 그의 개혁 정신을 오롯이 품고 있는 심곡서원은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개혁의 상징이다. 한국 교육제도가 잉태한 선민주의가 교육개혁에 집단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현실을 도심의 한가운데서 응시하고 있다. 단 한 번의 시험에 자신의 미래를 맡겨야 하는 주술적 풍토가 낯설지 않은 현실이다. 야릇한 정치 지형이 만들어 준 금배지를 가슴에 달고 쉰 냄새를 풍기는 현량(賢良)스럽지 못한 훈구(勳舊) 공신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이 미완의 개혁을 더 절절하게 그린다. 심곡은 그저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천박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다.
이 서원은 거대 자본이 만든 인공 도시 속에서, 그리고 조선을 멍들게 한 훈구와 사림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그대로 답습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 개혁의 고삐를 당겨주고 있다. 이곳을 자본의 논리로 칼질하는 것은 정암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못한 한을 자본 창출의 공간으로 벤치마킹하면서 풀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심곡(深谷), 골이 깊어 그만큼 더 한이 깊다.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정암의 한을 친구인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 곁에서 위로하고 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
심곡서원이 용인에 있네요.
38세에 좌절된 이상이 뒤늦게나마 이루어짐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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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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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