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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과학기술 정책 집행을 앞둔 조언 - (下) 과학기술 허약 체질론의 본질
권석준 필자의 3부작을 읽다 보면 세계 주요 국가들이 미중 패권 경쟁 이후 선도 기술 개발의 초경쟁 국면으로 접어든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미국 일극체제의 세계화에서 어렵잖게 기술을 구할 수 있던 시대는 지나갔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 속도는 소용돌이처럼 빨라지고 있으며, 국가 간 과학기술 장벽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속도와 장벽의 난제다. 이제 막 과학기술 분야에서 선진국 궤도에 올라탄 한국은 막바로 추락의 위험에 직면했으며 여기에 우회로는 없다. 직공으로 연구개발(R&D) 예산을 늘려도 시원찮을 마당에 예산 총액의 삭감, 기초과학 분야의 경시라는 악재가 돌출했다. 칼럼이 연재되는 와중, 일부 언론이 20일 "정부가 기초과학 R&D 예산을 다시 늘린다"고 대서특필했지만, 대통령실은 즉시 "사실과 다르다"는 해명 자료를 냈다. 현장은 정부가 과학기술 현장을 '카르텔'로 범죄화한 데 대한 불만이 최고조다. 이 때문에 예산 재조정을 검토할 수 있다. 분명한 건 갈질팡하는 정부다. 이번 R&D 예산에서는 기초과학 지원축소가 심각하다. “선택과 집중으로 단순화할 일이 아니다.” 더구나 반도체 소부장, 전염병 대응, 중소기업 R&D 지원을 대상에서 제외하다니! 걱정이 태산 같은 오늘의 과기 R&D 예산 실태와 문제점을 찾아가본다. [편집자 주]
✔ EUV 노광기, mRNA 백신 등은 기초 중시가 낳은 황금거위
✔ 감염병 대응 연구예산을 뺀다? 코로나19 또 오면 어쩌려고?
✔ R&D 늘려야 공급망 안정, 신산업 육성, 경제안보 가능
✔ 지금 세계는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신산업용 R&D 박차
산자부와 과기부, 특별법은 만들었는데
지난 8월 말, 정부는 2024년도 예산을 확정하면서 최근 30년 이래 역사상 최초로 기초과학 R&D 투자를 감축할 계획을 발표했다. 과기부의 감축 논리는 지난 몇 년간 과도할 정도로 증가한 예산을, 보다 적확한 곳에 쓰이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주요 실행 방안은 2022년에 발표된 첨단전략산업 및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 확대와 그간 임무를 다한 대형 과제를 정리하는 것이다. 정부는 2022년에 전략적 관점에서의 과학기술 R&D 정책의 변화를 두 건의 법안 입안으로 예고했다.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산자부)와 ‘국가전략기술 육성에 관한 특별법(과기부)’가 바로 그것이다.
산자부가 제시한 국가첨단전략산업이나 과기부가 제시한 국가전략기술 역시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개발 지원을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이는 앞서 언급한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R&R과도 정확하게 맞물리는 지점이다. 정부 R&D는 민간 R&D와는 달리, 조금 더 중장기를 내다본다. 개인 과제도 3년, 5년, 10년짜리도 있고, 집단 과제는 5년~7년, 10년 이상 되는 과제도 많다. KSTAR나 한국형 발사체 사업, 양자컴퓨터 기반 사업 등은 훨씬 더 긴 호흡으로 진행된다. 정부 R&D 과제가 민간 영역보다 더 먼 중장기를 내다봐야 하는 이유는 국가의 성장 경로가 매년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장의 모멘텀이 한 번 정해지면 관성이 생기고, 그 관성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를 넘어설 수 있는 또 다른 외부의 노력과 충격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부의 중장기 R&D 투자는 좋은 모멘텀은 계속 유지하고, 나빠지는 경로는 수정할 수 있는 새로운 모멘텀을 생성하는 것에 주안을 두어야 하며, 그래서 중장기 관점에서의 기획과 집행이 중요하다. 이러한 모멘텀으로서 첨단산업과 전략기술 분야를 육성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나, 그 과정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소홀해지는 것은 방지해야 한다.
기초과학이 응용가능 기술 되려면 30년, 국가는 이걸 감내해야
미국이 NSF를 통해 70년 넘게 꾸준히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 비중을 가장 높게 가져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버니바 부시는 정권 교체에 상관없이 NSF 같은 기관이 국가의 과학기술 연구 지원의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 이유는 기초과학 연구와 산업 응용 사이에는 항상 꽤 넓은 시간 간격이 존재하고, 그 간격을 메꿔 산업적 성과로 만들기 위한 이른바 ‘Lab-to-industry(연구소에서 기업체로) 이어달리기’가 이루어질 수 있는 안정적 기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2대 전략과학기술 중 하나인 반도체 분야에서 현재 핵심 이슈 중 하나는 차세대 노광 공정이다. 현재 가장 앞선 노광기인 극자외선(EUV) 스캐너를 만드는 회사는 네덜란드의 ASML 한 군데뿐인데, 이로 인해 미국의 제재로 EUV 노광기의 수입이 불허된 중국은 ASML의 EUV 노광기를 대체할 방법을 찾지 못해, 현재 10 나노 이하급 고성능 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을 정도다.
ASML이 EUV 노광기를 처음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이때 EUV 대역의 초단파 전자기파에 의한 광화학반응에 대한 이론과 계산 데이터 등을 담은 고체물리학과 광학 기반의 기초 과학 연구 논문이 학계에 보고되기 시작했다. EUV 노광기의 잠재력을 확인한 ASML은 그 이후 독일의 칼짜이스와 20년 넘게 밀접하게 기초부터 응용까지 연구개발 과정에서 협력하여, 실제로 반도체 양산 라인에서 작동할 수 있는 EUV 노광기를 2010년대 들어 시장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최초의 개념과 시장으로의 등장 사이에는 대략 30년 가까운 시차가 있는 게 관례. EUV 노광기의 개념이 처음 제시된 80년대 당시에는 이러한 기술이 정말로 실현될 것이라 진지하게 믿었던 사람은 사실 거의 없었다. ASML는 사운을 걸고 여러 회사들과의 협력은 물론, 델프트 공대 등 네덜란드의 몇몇 이공계 중심 대학들과 꾸준히 산학협력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정부는 10년, 8년 단위의 장기 R&D 프로젝트를 계속 지원했다.
ASML은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세계 최대의 노광장비 제조사다. (사진: ASML 홈페이지)
EUV 노광기, mRNA 백신 등은 기초 중시가 낳은 황금거위
그 결실로서 이제 ASML은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는 이른바 판매자가 구매자에 비해 훨씬 더 우위에 설 수 있는 슈퍼 을로 불리는 기업이 되었고, 대당 가격이 5천억 원에 육박하는 2세대 EUV 노광기는 단일 반도체 장비로서는 역사상 가장 비싼 장비, 그리고 가장 확보하기 어려운 장비가 되었다. EUV 노광기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 중 몇 개는 미국의 대학과 기업이 개발한 것인데, 이들은 NSF의 지원을 받기도 했으며 기술실시권(sub lisence)을 기관과 정부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ASML의 EUV 기기 대중국 수출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확보했다.
첨단전략산업 중 하나인 첨단 바이오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코로나 백신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이제는 에이즈 백신이나 심지어 항암제로까지 고려되고 있는 mRNA 백신 같은 경우 미국의 바이오텍 기업인 모더나(Moderna)가 기술에 있어서는 최선두 주자다. 이 회사의 창업자는 MIT의 밥 랭어(Robert Langer) 교수다. 랭어 교수와 그의 동료들이 시작한 mRNA 백신 기초 과학 연구는 1987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2010년대 들어 그간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mRNA 백신의 대량 생산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랭어 교수와 동료들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와 NSF 등의 연구비 지원을 장기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수많은 대학원생들과 박사 후 연구원들이 학문적 훈련을 받은 것은 물론, 다양한 첨단 바이오 분야 스타트업을 세웠고 그중 하나가 바로 모더나가 되었다. 모더나 등이 양산하기 시작한 mRNA 백신은 코로나가 가장 위력을 떨쳤던 시점에 등장하여 더 많은 환자 발생을 막았으며, 코로나 종식 시점을 앞당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모더나 등이 양산하기 시작한 mRNA 백신은 코로나가 종식 시점을 앞당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사진: 셔터스톡)
반도체 소재 부품 혁신은 정부의 민간 R&D 지원에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정부가 첨단전략산업과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투자 강화 기조의 대가로서 기초과학 분야의 예산 삭감을 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정책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대량의 예산 삭감이 예고된 정부출연 연구소들의 기초연구사업이나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이른바 ‘반도체 소부장’), 감염병 대응, 그리고 기업 R&D 지원 등에 대한 투자 약화는 다음 해에 파종할 씨앗을 삶아 먹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반도체 소부장, 감염병 대응, 기업 R&D 지원의 세 분야는 단순히 일몰형으로 분류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의 연구개발 분야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크다. 우선 반도체 소부장은 한국 수출의 20% 가까이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에서 늘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되는 분야다. 지난 정권에서의 반도체 소부장 집중 투자는 일본의 대한국 화이트리스트 제재라는 국제정치적 이슈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러한 조치가 없었더라도 미-중 첨단기술 패권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반도체 산업에서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반도체 소부장 산업에 대한 정부 R&D 투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앞으로의 반도체 소재나 부품의 혁신은 그간 테스트해보지 못한 새로운 소재나 기술, 이론과 모델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서는 선행 기초과학 연구와 응용 개발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중소기업의 R&D 지원은 이러한 관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앞서 언급했듯, 한국의 경제 성장 경로에서 정부의 R&D 투자가 집중된 분야 중 하나가 바로 기업의 R&D 지원이다.
이는 지난 70년간 꾸준히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연구개발을 지원해 왔던 미국 NSF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수많은 기업들은 정부의 다양한 지원 사업을 통해 전문 인력을 고용하고, 고가의 장비를 리스하거나 샘플을 분석하는 비용 등을 절감하고 있으며, 해외 시장의 개척이나 해외 기업과의 협력 단계에서도 정부 사업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기업의 R&D 보조를 통해 더 많은 고용인력이 창출될 수 있으며, 더 많은 대학들의 기초 연구가 스타트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국내 산업의 생태계는 더욱 다양해지고 건강해질 수 있다.
코로나19 또 오면 어쩌려고?
적어도 한국이 앞으로도 제조업 분야에서의 세계적 경쟁력을 온존하고 주도하기 위해서는 기초 과학에 대한 투자뿐만 아니라 기업의 R&D를 지원하는 투자가 지속돼야 한다. 따라서 이는 일몰형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성격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감염병 대응도 단순한 일몰형 과제로 분류되어 투자를 소홀히 하기 어려운 분야다. 지난 3년여 간의 집중적인 정부 차원의 COVID-19 대응은 예방의학, 백신 개발, 치료제 개발 등에도 투입되었는데, 이는 향후 더 다양해지고 심화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우려되는 글로벌 팬데믹 대응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투자가 된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글로벌 팬데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호흡기 바이러스성 질병은 SARS, MERS, COVID-19 등으로 계속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2020년대 중후반 이후 새로운 그리고 코로나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는 전염성 바이러스 질환이 유행할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코로나 초기 각국의 대응 과정에서 과거 NSF의 지원을 받아 mRNA 백신에 대한 연구 데이터를 축적해 온, 그리고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온 미국의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업그레이드한 사례를 한국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효과를 넘어, 한국이 새로운 신약 강국, 바이오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가장 중요한 마중물이 될 수도 있다. 감염병 대응에 대한 연구개발은 지난 감염병에 대한 정보의 추적과 활용, 그리고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더 빠른 시간에 더 효과적인 대응책을 준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공급망 안정·신산업 육성·경제안보가 한 수레의 바퀴
정부가 ‘첨단전략산업’과 ‘국가전략기술’이라는 키워드로 연구개발 환경을 새로이 조정하려는 주된 근거는 한국의 현재 산업 경쟁력 강화는 물론, 미래 성장 동력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서다. 특히 미-중 간의 첨단산업기술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현시점, 정부 주도의 R&D 프로그램에 ‘전략’이라는 키워드가 유독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저 수식 차원에서만은 아니다. 앞선 칼럼에서 이 방향의 의미를 되짚어 보기도 했지만, 재차 강조하건대 정부가 매진하는 ‘전략’이라는 키워드는 적어도 정부의 R&D 지원을 받는 과학기술의 성과가 국가의 거시적, 장기적 목표에 보다 실질적으로 부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동기에서 적용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목표의 주된 고려 사항이 공급망 안정(혹은 변동 대응 탄력성 강화), 신산업 육성, 그리고 경제외교안보라는 것이다. 글로벌 분업 체계와 가치사슬은 이제 각국의 보호주의와 산업정책이라는 새로운 변수들에 의한 함수가 되어 재조정되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제조업 및 지식산업 선진국들은 합종연횡하며 전략적 동반 관계 구축을 통해 잠재적 위기에 대응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바쁘다. 한국이 설정한 12대 국가전략기술이나 첨단전략산업은 미국, 일본, EU, 중국, 대만, 호주, 싱가포르 등의 그것과 상당 부분 오버랩되며 이는 앞으로는 더욱더 이들 국가들과 경쟁적 협력 혹은 협력적 경쟁의 전략이 매우 중요해질 것임을 암시한다.
정부가 발표한 12대 국가전략기술 경쟁력 신장 목표. (사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신산업을 위한 R&D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국가의 핵심 전략으로서의 과학기술 연구개발 투자는 이미 70여 년 전부터 미국 NSF가 2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이벤트와 냉전 시대를 관통하면서 운영되어 온 기조이며, 그 기조의 방향은 결국 우수한 연구자들, 엔지니어들이 새로운 과학기술 연구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고 그 성과를 전략적으로 민간 부문에서 산업 응용을 함으로써 국부 창출에 기여하고, 나아가 국가 간 경쟁에 있어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지렛대로 삼는 것일 뿐이다.
현재 각국이 다시 꺼내 들고 있는 산업정책은 과거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자국 내 생태계의 건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추진된 1세대 정책과 일견 비슷해 보이나 현시점에서는 그 결이 다르다. 1세대 정책은 기존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국민의 삶의 질 개선에 집중한다. 기존 산업의 경쟁력 강화는 이미 자리 잡은 자국의 산업 중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가 높거나, 쇠퇴하는 단계에 접어든 산업의 체질을 개선하거나 아예 변신시키고, 필요하다면 그를 위해 다른 국가와 협력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내세운다.
그러나 업그레이드를 넘어 아예 새로운 변신이나 창조에 가까운 산업의 출현을 위해서는 이른바 ‘산업정책 2.0’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새로운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이 정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경제안보와 공급망, 그리고 미래 성장 동력을 육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경제안보는 심화되는 국가 간 기술패권 경쟁의 바둑판 위에서 선수를 둘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지식과 기술의 확보를 의미하며, 공급망 확보는 기술주권 확보와 직결되는 자급화 가능한 재화와 기술 확보를 의미한다. 미래를 위한 환경 조성은 이러한 지식과 기술의 확보를 위해 마련되는 시스템의 개선과 정책 강화를 의미한다.
‘전략’의 필요성과 경계 : 새로운 산업 생태계·취약 구조 고려해야
경제안보나 공급망 안정화, 미래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환경 모두 이제는 ‘전략’이라는 키워드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게 되었으며, 종국적으로 이러한 산업정책 2.0은 기술패권이라는 종착점으로 이어진다. 각국이 바라보는 기술패권 카드는 차세대 반도체와 통신, 양자컴퓨터, 안정적 에너지 공급원(배터리, 수소, 차세대 원자력, 신재생에너지 등), 첨단 바이오(신약, 백신, 의료장비 등), 그리고 인공지능(자율주행차, 첨단 제조로봇, AI 가속기 등) 등으로 좁혀지는데, 결국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들이 계획하는 국가 R&D 프로그램 역시 이러한 분야에 쏠리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의 첨단전략산업 혹은 국가전략기술은 시작부터 기술패권 카드 혹은 기술주권 확보 차원에서 필수적으로 입안될 수밖에 없는 정책적 환경과 글로벌 기조에서 비롯된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부가 작년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전략산업이나 전략기술은 시의적절하다고도 볼 수 있다. 관건은 이러한 ‘전략적’ 정부 연구개발 투자가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도로 단순화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반도체 소부장, 전염병 대응, 중소기업 R&D 지원 등은 정부의 플랜에서 제외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첨단전략산업과 국가전략기술에 모두 속할 수 있도록 고려해야 하며, 오히려 일련의 위기와 이벤트 속에서 재차 확인한 이들 분야의 한국의 국가적 취약성을 보완하고 강화하는 방향에서 기술주권과 기술패권의 정체성을 포괄적 방향으로 맞출 필요도 있다. 또한 전략산업과 전략기술은 큰 틀에서 분리되어 고려되고 있긴 하나, 이들이 만들어 낼 새로운 산업 생태계에 대한 영향 역시 고려해야 한다.
R&D 국가의 역할…기초과학에서 시작한 이어달리기 관점
각 산업의 발전 속도는 산업마다 다르며, 따라서 반드시 어느 한 산업은 병목현상을 야기하는 분야가 될 수도 있다. 또한 특정 산업의 성과가 다른 산업의 발전을 자극할 수도 있고,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산업들이 융합되어 새로운 산업으로 변모되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최근 들어 산업 전 분야로 확장되어 활용되기 시작한 인공지능은 정보과학기술 관련 산업뿐만 아니라, 첨단 바이오, 신재생에너지, 첨단제조로봇 등의 발전을 가속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정부의 전략적 관점은 이러한 산업들의 상호연결과 영향을 주고받는 구도에 대한 이해를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전략산업과 전략기술은 기초과학으로부터의 이어달리기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몇 가지 사례처럼, 이러한 이어달리기는 일정한 시차가 항상 따르며, 이 시차를 메꾸는 것은 정부의 기초과학 연구개발 지원이다. NSF가 정권과 상관없이 그 독립성을 보장받으며 수십 년간 안정적인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한 덕분에 노벨상급 연구 성과 창출은 물론, 산업의 다양한 분야로 응용되는 성과들이 창출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정부의 전략적 관점은 바로 이러한 미래의 동력이 기초과학의 장기적 호흡에 있다는 것에도 맞춰져야 하며, 정권의 교체와 상관없이 미래의 성장 엔진이 식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의 개선도 정부의 전략적 고려 요소에 포함되어야 한다. 전략산업과 기술 모두 숙련된 연구자와 엔지니어를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 그리고 우수 성과 창출에 대한 인센티브 강화는 더 유능한 연구자와 엔지니어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며, 나아가 한국이 국제적으로도 더 많은 유능한 연구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정부가 매달리는 전략의 범위는 연구개발 주제에 대한 옥석 가리기라는 좁은 영역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이렇게 포괄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기획이 되어야 한다.
과거 어느 시점 안 그랬던 적이 있었겠냐마는, 현시점은 특히나 한국에게는 더 어려운 시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각국은 이제 첨단 산업을 국제적 협력과 분업의 대상, 그래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시스템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이기적일 정도로 자국우선주의를 내세워 보호하고 상대를 견제하며 그룹을 지어 다른 국가(들)를 통제하려고도 한다. 자국의 기술을 보호하고 엔지니어를 보호하며 내국인은 물론 외국의 우수한 학자를 먼저 유치하려고 경쟁한다. 협력의 기조였던 과거의 정책들은 이제 자국 우선 보호와 안보 우선 정책으로 바뀌고 있다.
각국의 산업정책은 박물관의 유물이었다가 다시 속속 현업으로 복귀하고 있고, 선진 각국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바탕으로 더 전투적인 연구개발에 나서고 있다. 그간 한국이 이런 나라들 사이의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어쨌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이었던 연구개발의 동력의 재편이 전략적 관점에 이루어진다면, 그 전략은 선택과 집중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반도체든, 배터리든, 바이오든, 양자컴퓨터든, 일단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와 지속적 연구개발을 보장하는 시스템이 확립되어야 한다.
전문 고급 인력들을 유치하고 내부에서도 주니어급 연구자들이 안정적으로 배출되어 생태계가 계속 돌아가야 만드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물리학자가 우글거렸지만, 그 맨해튼 프로젝트를 관장하는 OSRD의 총책임자 부시는 엔지니어였다. 그런 부시였지만 그가 대통령에게 보고한 전략 보고서는 응용 기술에 대한 강조에만 그치지 않고 기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천명한 것으로 결론이 구성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다음 세대의 먹거리와 성장 동력을 고민하는 한국 입장에서, 전략산업과 전략기술의 보호와 육성은 가장 중요한 과제일 수 있으나, 그 과제의 솔루션을 찾기 위해서는 혁신의 맹아를 품고 있는 기초과학에 대한 전략적 투자가 필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글쓴이 권석준은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마치고 MIT 화학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 책임연구원을 지냈고 차세대 반도체 소재 및 광(光) 컴퓨터, 양자 컴퓨터 등의 차세대 IT소자 원천 기술 등을 연구 중이다. 현재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금까지 60여 편의 논문을 해외 저명 학술지에 게재했다. 최근에 한·중·일 반도체 산업에 관한 저서 <반도체 삼국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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