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룡리
伏龍里는 일로읍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4㎞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몽탄면 당호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영산강 가에 자리하고 있어 간척을 통한 농지가 많다. 본래 무안군 일로면 지역으로서 지형이 용의 형상이라 하여 복룡 또는 복룡천이라 하였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회산동 사교리 용호동 방산동 반곡동 등을 합하여 복룡동이라 해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양도는 1917년 영암에서 무안으로 편입되었다.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 노촌면 회산촌 복룡촌 동언목 사교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회산동 용호동 복룡촌 사교리로 표기되었으며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복룡리 회산동 사교리 용호동 복룡촌 방산동으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일로읍 복룡리 복룡촌 회산 용호동 사교 양두 두남리로 나오나 현재는 복룡촌 회산 사교 양도 두레미 용호동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복룡리 중에서 복룡촌과 사교 마을을 제외한 회산 두레미 용호동 양도 마을은 원래 섬이었다. 조선시대 지도에는 회산 또는 회도로 표시되기도 했는데 복룡리는 세 번의 간척을 통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첫 번째는 나주임씨에 의해서 사교마을과 학두리를 연결하는 천방둑의 건설이다. 두 번째는 용호동과 복룡마을을 잇는 선창목의 간척이다. 이어 세 번째는 복룡과 양도를 잇는 제3농장의 간척이다. 또한 개인적인 간척도 있는데 장군봉 간척이 그것이다.
회산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1500년대 중반에 들어온 장흥고씨이다. 이어 나주임씨가 들어오고 전주이씨 달성배씨 등이 들어왔다. 복룡마을에 밀양박씨 제각인 관란정이 있다. 양도마을에는 양호단과 영모재가 용호동 마을에는 관해정이 두레미 마을에는 장영재가 있다.
세 명의 인물과 세 명의 부자를 기다리는 마을 - 복룡1리 복룡촌
복룡촌 마을은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옛등과 본마을로 이뤄졌다. 일로읍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5㎞ 가량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우봉을 기점으로 몽탄면과 경계에 있다. 무안군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백련지 가꾸기 사업의 덕택으로 마을의 모습이 점차 새로워지고 있다. 여러 동의 한옥이 들어서면서 예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특히 다른 마을과는 달리 마을회관과 건강관리실이 각각 독립해서 있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일로읍 복룡1리 복룡촌 마을이다.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온다. 하나는 밀양 박씨 족보에 나오는 목동(牧洞)이라는 이름이다. 이는 마을의 뒷산이 황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황우봉(황우뫼, 황우산, 황골뫼)이라 부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소를 키울 수 있는 터란 의미다. 이와 관련된 지명으로 목문재[牧門峙], 독골[犢(송아지독)谷], 犢고지, 목골[牧谷] 등의 지명이 있으며 마을 앞의 조그만 산을 여막(소여물 담는 그릇, 소 밥그릇. 몽탄 당호리의 선산임씨 문중산)으로 부르고 있다.
또 하나의 지명은 마을의 앞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해서 안산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산의 지형이 困龍得水의 지형으로 마치 피곤에 지친 용이 영산강 물을 만나 승천하기 위하여 엎드려 있는 형국이어서 복룡으로 부르고 있다. 호구총수의 기록에는 목동이 아니라 지금의 마을 이름인 복룡촌으로 나온다. 참고로 우리 지역에 복룡이나 용산이란 지명이 많이 나온다. 이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산의 맥이 강이나 바다를 향해 뻗어있으면 붙여지는 이름이다.
또한 안산에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이 ‘저 봉우리로 인하여 이 마을에 세 명의 인물과 세 명의 부자가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주민들이 인정할만한 부자나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예전 이름인 목동(牧洞)에 걸맞게 소를 많이 키우고 있다. 퇴비공장도 있다.
원래 이 마을에는 정씨, 이씨, 오씨 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성씨들은 마을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떠났으나 뒤이어 들어온 밀양 박씨들은 일가를 이루어 번성하며 정착하였다. 첫 입향조는 朴世徵(1670-1750. 자-서경, 호-돈옹. 난정공의 손자이며 만연공의 아들)으로 본가인 금성(나주)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마을의 형성이 시작되었다.
박세징에 대해서 무안군에서 발행한 무안지망집에 ‘공은 용모가 청수하고 성격이 인자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여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출사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기를 수양하고 주변을 가르치기 위해 했을 뿐이다’고 적고 있다. 또한 碑文에 의하면 ‘몽탄강 어구에 한 마리 용이 잠복하였으니 심양(潯陽)에 자취를 찾아서 깊숙이 홀로 자청하여 天命을 즐기고 쌓인 것을 만끽하니 그 은덕 남아서 자손들끼리 누리도다’ 며 입향조를 찬양하였다.
예로부터 이 마을의 터가 ‘밥은 없고 손은 넘치는’ 터로 알려져 있어 박씨들의 자손은 번창했으나 크게 부자 된 사람은 없다. 한때는 옆 마을인 사교마을과 합쳐 500세대 4천여명의 대가족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박씨 이외의 성씨들은 손도 귀하고 재산도 늘어나지 않아 대체로 이 마을에 남아 있지 못했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사는 복합마을이다.
밥은 없고 손은 넘치는 터
마을에는 당산으로 모셨던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송진을 채취한다 해서 나무에 상처를 내, 끝내 말라 죽어버렸다고 한다. 소나무 당산이 있었을 때에는 매년 당산제 때 풍물을 잡으며 신명나게 치뤘으나 소나무가 없어진 이후로는 주민들이 검소하게 제를 모시고 있다. 현재는 새로운 당산나무인 느티나무를 심어 주민들이 보호하며 키우고 있다.
지난 시절 마을에는 장사로 소문난 인물이 있었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늘 농악대 앞에서 상쇠를 보며 꽹과리를 신명나게 쳤던 전문 씨름꾼 박이태(판동)씨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주변에서 열리는 각종 씨름판의 우승으로 36마리의 황소를 받아 오기도 했던 인물이다. 특히 회산방죽에 백련을 심었던 정수동씨와는 씨름에서 서로 호각을 이루었다. 당시 정수동씨는 앞무릎치기를 잘하는 씨름꾼이었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모정 앞에는 출향인에 의해서 세워진 천지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커다란 석장승이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며 안내판과 같이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영화농장이 들어서고 간척지가 농지로 변하면서 물이 귀해 농사철에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 친척 간에도 많았었다고 한다. 해서 원래는 현재의 백련 저수지를 중심으로 연꽃이 많이 자생하고 있었는데 물 때문에 연이 나오는 대로 주민들이 잘라 버려 없애버리다가 영산강이 막아지고 물이 풍부해지자 비로소 연꽃을 재배하고 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연은 성장에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농사지을 물도 없는 상황에서 기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의 오른쪽엔 1923년 밀양 박씨 문중에서 지은 관란정(觀瀾亭)이 있다. 황우봉 자락에 팔작지붕 5칸으로 지어진 이 정자는 밀양박씨 강학소로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정자 입구에 ‘밀양박씨난정금곡양세행적비’가 있으며 정자 안에는 현판기와 중수기 그리고 방명기가 걸려 있다. 관란정의 현판기에서는 이 마을의 옛 이름이 목동(牧洞)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회산백련지에서 연으로 한참 기세를 올릴 때 이 마을에서도 백련과 관련된 산업이 활발하게 유치되었다. 백련차 가공공장인 ‘다연’이 있었고, 연을 재료로 하여 생산하는 ‘연 맥주 공장’이 가동되었다. 여기서 생산된 연 맥주는 이번 백련축제 때 특산품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익이 나지 않아 지금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마을에 누가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이장을 비롯한 주민들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마을이 활성화 되고 있으며,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주는 등 번거로움보다 실익이 너무 많아 주민들이 오히려 좋아 한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지명으로 영산강을 막기 전까지 배들이 왕래하였던 선창목이 복룡교 주변에 있으며 연소골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영산강 물막이로 농지가 되어 있으나 물길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치 소드랑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소드랑섬이라 부르는 섬이 있으며, 안산 뒤에 있는 들로 장구의 목과 같다 해서 장구목들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뿐만 아니라 몽탄면 당호리 갈산에서 복룡촌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목문재[牧門峙]라 하는데 멍멍재라 하기도 한다.
마을에는 우물이 두개가 있으며 복룡주향교회가 들어서 있다.
회산백련지를 안고 있는 마을 - 복룡2리 회산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인 백련대축제가 열리는 회산백련지를 안고 있는 마을이 회산 마을이다. 이 마을은 불당봉과 왕해봉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앞으로는 10만평의 회산백련 단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일로읍에서 북동쪽으로 5㎞의 거리에 있는데 일로읍 복룡2리에 속해 있다. 원래는 용호동과 한 마을이었는데 주민수의 증가로 2007년에 분리되었다. 1789년에 간행된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回山村으로,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回山洞, 龍虎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回山이라는 마을 이름은 영암이나 목포 쪽으로 갈 때 섬을 돌아서 간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은 세상의 모든 기운이 이 마을에 다시 모인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이라고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원래 이 마을은 回島라 불리는 섬이었다. 그러다 조선조 말 현재의 백련지 중간쯤에 둑(구원둑이라 함)이 생기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그 둑이 있었던 자리(덕애마을 서순근씨 마당)에 둑을 막은 민병석씨의 공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백련지 조성 과정에서 없어졌다고 한다.
용호동과 한 마을이었을 때 무안군에서 발행한 무안유래지에서는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온 성씨는 나주 임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회산마을에는 신씨가 제일 처음 들어왔으나 지금은 없고 다음에 장흥 고씨, 나주임씨, 전주 이씨 순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장흥고씨 입향조는 1500년대 중반에 들어온 고만희(명종대 출생. 자-자성, 호-돈쌍)씨이다. 공은 무과에 급제하고 문화현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던지 이임할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유임을 간청할 정도였다. 공에 관한 송덕비가 그곳에 있다. 후일 모략을 피해 이 마을로 들어왔다. 아랫 마을인 두래미 마을에 장흥고씨 제각인 장영재가 있다.
전주 이씨의 입향조는 이정(李禎. 초명-헌방, 호-사현. 1654-1715.)이다. 자료(무안향토문화자료)에 따르면 조부는 호조참의를 지냈으며 왕족인 근령군 ‘농(農)’의 후손으로 이정은 원래 나주 죽암에서 세거하다가 주변 환경이 좋고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좋은 이 마을에 영조 때에 터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정은 문장이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뛰어났으나 靑雲을 꾀하지 아니하고 구원(丘園)에 덕을 갖추어 후진을 양성하고 청검(淸儉), 효제(孝悌)로서 전가의 요법을 삼았다 고 한다.
원래 이 마을은 농지가 없었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거나 뻘밭에서 개바라지를 하며 생활 했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영화농장이 만들어지면서 생활의 여유를 갖다가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잘 살게 되었다.
회산 백련지(또는 복룡지라고도 불렀음. 하지만 유리온실 부근을 제외하곤 산정리 소유의 땅이었다)는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에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축조된 저수지로 의산리의 돈도리에서 양도로 이어지는 원둑이 쌓아지고 영화농장이 만들어지면서 간척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막아놓은 방죽이었다. 주민들이 회산 방죽으로 불렀던 이 방죽은 몽탄면의 당호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 사용하였는데 면적은 10만여 평으로 두 개의 저수지가 합하여져 인근 250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농작물의 젖줄 역할을 하였으나 1981년 영산강 하구 둑이 건설된 후 사실상 농업용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꿈에 학을 보고 백련을 심어
이 방죽에 처음 백련이 나타난 것은 구원둑이 막아지면서인데 지금은 없어져 버린 저수지 옆 덕애 마을 주민들이 가꾸어 오면서 현재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백련이 없어졌다가(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백련이 나갔다고 표현함) 상당기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민의 이야기로는 백련이 ‘자라는 지역은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부정을 타면 백련이 모두 죽어버리고 만다’고 한다. 실지로 오래 전에 다른 마을 사람들이 방죽 주변에서 개[狗]를 잡는 등 부정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백련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에 덕애 마을에 살았던 사람은 정수동 고팔월 서순근 임양호 임양호씨 형 서준열 등 7가구가 살았었다.
특히 오늘날의 백련단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40여 년 전에 별세한 덕애 마을의 정수동씨 때문이었다 한다. 꿈에 학을 보고 백련과 인연을 맺었다는 정수동씨는 주민들의 오해를 받을 정도로 엄격하게 연꽃을 관리해 현재 동양 최대의 백련단지를 만드는데 초석이 되었다. 당시 정수동씨는 복룡마을의 박판동씨와 함께 앞무릎치기를 잘 하는 일로의 이름난 장사였다.
마을 앞에 10만평의 넓은 백련단지를 안고 있으면서도 주민들은 행복하지가 않다. 주민들이 갖고 있었던 농지는 축제장으로 대부분 들어가 버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농지마저 값이 너무 올라 버렸다. 게다가 외지 사람들이 상당부분 소유하고 있다. 축제장이 들어서면서 한때는 주민들이 기대를 하기도 했다. 마을에 오폐수공사가 먼저 이뤄지고 나아가 축제장에 이 마을 주민들의 고용이 이뤄질까 해서다. 하지만 소득은 없고 쓰레기와 소음 등 불편만 가득 안겨주는 축제행사가 되어버렸다.
이 마을에는 특이한 자랑거리가 많이 있다. 구정 전에는 마을 청년회에서 주관하여 마을 어른들을 전부 모시고 목욕탕에 가 1년 동안의 묵은 때를 밀어드리고 씻겨주며 새해에는 더욱 잘 모시겠다는 경로사상을 키운다고 한다. 또한 정월 보름에는 마을 회관 앞에서 당산제를 지내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할 뿐 아니라 어버이날에는 공동으로 마을 어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려 어버이의 고마움을 표시한다고 한다. 또 마을에 상사(喪事)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밖에 나가있던 이 마을 출신의 젊은이들이 모두 돌아와 함께 일손을 거들고 어려움을 나눈다고 한다.
지명으로는 구언장, 신언장, 땅골(관란재 아래, 지금은 연방죽에 편입되었음), 인세(유리온실 앞), 뿔장재, 선창목(용호동에서 복룡1리로 가는 다리) 불당너머 등이 남아 있다.
주체적이고 정체성을 갖춘 마을 - 복룡3리 사교
沙橋는 복룡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마을 앞으로는 백련로가, 옆으로는 다산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 뒤 元驪峰에는 수령이 백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의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沙橋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는 주민들은 없었다. 미루어 살펴보건데 지형적인 현상으로 모래둑이 쌓이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마을 앞 들의 지형이 소쿠리 형이다. 해서 비가 오면 들 주변에 있는 광암리 상신기리 산정리의 물이 마을 앞으로 모이게 된다. 이때 함께 몰려온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모래둑을 쌓았는데 이 모래둑을 이용해 건너 마을 학두리를 다니면서 사교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유래지에도 ‘마을이 형성될 당시 마을 어귀에 냇가가 있었는데 이곳에 많은 모래가 쌓여 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마을 이름을 沙橋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 이 마을엔 나주 임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으나 오래 전 앞 마을인 광암리로 이사 가고 현재는 한 가구도 남아 있지 않다. 뒷동산이라 부르는 곳에 나주 임씨 선산과 묘들이 남아 있어 예전 이곳이 임씨 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마을 입향조는 1700년대 중반에 들어 온 밀양박씨 박한용(1730 - 1792)이다. 박한용은 복룡1리 복룡촌 마을의 입향조인 박세징(1670-1750. 자-서경, 호-돈옹. 난정공의 손자이며 만연공의 아들)의 손자이다. 한때 밀양박씨들은 복룡촌 마을과 합하여 500세대 4,000여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후에 들어온 달성배씨는 달성배씨 복룡리 입향조인 배윤우(1691 - 1758, 호 - 晩軒)의 후손들이다. 이 마을의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사교리로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사교리, 1917년에도 일로면 복룡리 사교리로 나온다.
원래 마을 앞을 지나 광암 상신기 마을 앞까지 영산강 물이 들어왔다. 지금의 농지가 조성된 것은 조선시대에 세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형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교 앞 마을에서 학두리까지 천방둑이라 부르는 1차 제방을 쌓고 2차는 복룡촌에서 용호동까지, 3차는 양호도에서 선창목까지 제3농장이라 부르는 둑을 쌓으면서 현재의 넓은 들이 만들어졌다. 어른들은 ‘천방둑은 나주임씨 상주공 임타가 회산에 거주하면서 막은 것으로 인간이 막은 둑이 아니라 하늘이 막은 둑이라 해서 하늘 天을 써서 천방둑이라 했다’한다.
해서 마을 앞 들을 천방들이라 부른다. 이 들을 감싸고 있는 지형이 소쿠리 형이라 물길의 입구가 마을 앞 뿐이었다. 해서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비만 오면 들에 물이 가득 차 천방들이라 불렀으며 커다란 방죽이 형성되어 농사 짓는데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우리 지역의 마지막 선비라 일컬음을 받았던 면와 선생의 고향
이 마을에는 특이한 기록이 많다. 우선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 이 마을은 전국적인 시범 마을이었다. 주민인 박창표씨에 의해서 기획하고 추진하였던 이 마을의 새마을 사업을 본받기 위한 필수 코스가 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재건사업이라 해서 마을 자체적으로 환경정비사업을 시작으로 지붕개량을 포함한 도로 넓히기 하천정비 전기화 사업 그리고 잘 살기 의식 개혁 운동 등을 실시하여 왔기 때문이다.
또한 마을 자체적으로 마을 노래. 마을 기, 마을 훈, 마을 꽃 등을 제정하여 주체적이고 정체성을 갖춘 마을을 이루었다. 해서 지금도 집집마다 마을 기가 있고 마을 꽃인 동백나무를 가꾸었다. 마을 기는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삽과 붓을 그려 일하면서 배우는 마을 주민들의 기상을 새겼다.
독자적으로 마을 역사관을 갖고 있다. 새마을 역사관이라 이름 붙인 이 자료실은 아직 자료 정리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국적으로 보아도 자체적으로 역사관을 갖고 있는 마을은 드물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우리 지역 최고령의 이장이 마을일을 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젊은 사람들이 없이 노인들만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 마을은 몇 해 전에 별세한 우리 지역의 마지막 선비라 일컬음을 받았던 勉窩(면와) 배회두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생은 주경야독으로 깨우친 학문을 바탕으로 우리 지역 학문을 이끌었으며 무안유도회장과 무안향교의 전교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 지역 유림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면와선생미수시집추진위원회에서 발간한 ‘면와배회두선생미수시집’은 한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좋은 교본이 되기도 했다.
뒷동산이라 부르는 나주임씨 묘에 5기의 고인돌과 작은 돌 3기, 그리고 입석 2기가 있었다. 가장 큰 고인돌의 길이는 2미터 40 폭 1미터 90이었다. 또한 이 묘 주변의 경사면에서 유물들을 발견했다고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는 기록되어 있다. 발견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다.
마을 왼쪽 가장자리에는 낛시가끔이라는 지명이 있다. 예전 영산강 물이 들어왔을 때 낛시를 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지역이다. 또한 옆으로는 잘 자란 소나무들이 마을의 해풍을 막아주는 방풍림처럼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다. 개굴이라는 지명이 있다. 지형이 개꼬리 같다는 말도 있고 철도가 계속 나가다가 굴이 하나 있었는데 굴의 크기가 어중간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도 했다. 그 옆으로 몽탄 당호리로 넘어가는 재를 개골재라 한다.
마을회관 앞에는 사교마을 회관기가 있으며 마을 중간에 통샘이라 부르는 공동샘이 있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달성배씨 집성촌 마을 - 복룡4리 양도(두)
양두 마을은 영산강을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양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섬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달성배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회산 백련지에서 동쪽으로 2㎞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행정 구역명으로는 일로읍 복룡4리에 해당된다.
이 마을을 부르는 이름이 세 가지가 있다. 양도, 양두, 양호도다. 원래의 이름은 섬의 지형이 염소를 닮았다 해서 붙인 羊島이다. 그러나 주민들이 즐겨 사용하는 羊頭라는 지명은 지형이 염소의 머리를 닮아서 지은 이름이 아니라 발음에서 파생한 이름이다. 즉 양도로 발음하는 것보다 양두로 발음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 양도보다 양두로 주민들의 의식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또한 양호도는 일제강점기 이 섬의 행정구역명이 영암군 시종면 羊湖里였는데 무안에 철도길이 열리고 해로보다 오히려 이 지역 육상의 교통로가 좋아지자 1917년 9월에 무안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때 불렀던 지명이 양호도였다.
복룡리 중에서 복룡촌과 사교 마을을 제외한 회산 두레미 용호동 양도 마을은 원래 섬이었다. 이 섬은 조선시대 지도에는 회산 또는 회도로 표시되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양도와 의산리 돈도리가 막히고 복룡촌 마을로 이어지는 선창목 아래에 둑이 막혀지면서 육지가 되었다.
현재 마을의 터는 와우봉(臥牛峰) 자락을 배경으로 영산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원래는 신기동으로 불려졌던 곳이다. 80여년 전부터 섬인 양도에 살고 있던 30여 가구의 주민들이 하나 둘 건너 와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어느날 마을에 불이 났다. 남자들은 대부분 고기잡이 나갔고 여자들만 있어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좁은 지역에 초가집들이 밀집되다 보니 금방 마을 전체로 번져서 집을 새로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많이 건너오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 앞에는 윤전개라는 개웅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위로 나무다리가 있어 건너다닐 수 있었다. 이어 영산강 물길이 막히면서 현재의 시멘트 다리가 되었다.
이 마을에는 고려 때에는 成씨가 살고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섬의 북쪽에 당호리 선산 임씨가 살고 있었으며 섬의 남쪽에는 달성배씨들이 살았다. 그러다 성씨와 임씨들은 전부 떠나고 현재는 배씨 들 집성촌이 되었다. 현재도 양도 곳곳에는 선산 임씨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달성 배씨의 입향조는 배윤우(1691-?, 자-도경, 호-만헌)로 1700년대 초에 영암 시종에서 거주하다 이곳으로 와서 터를 잡았다. 만헌공은 동몽교관을 증직 받은 분으로 경전에 전심하여 후진을 양성하니 주변의 많은 선비들이 그의 뜻을 받들었다고 한다.
원래 양도는 영산강 하구점으로 뱃길을 재는 기점이었다. 즉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나주, 영암, 무안의 땅금이 되고 있는 이 섬 앞 영산강 수로의 중간지점을 일제가 하구점으로 삼은 것이다. 해서 영산강의 길이를 115,8킬로미터로 알려 ‘영산강 삼백리’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영산강 하구언까지 영산강으로 인식해 ‘영산강 삼백오십리’라 한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이곳에는 50여척의 중선배가 드나들 정도로 성시를 이뤘다. 봄이면 이 배들이 서해안 연평도와 백령도까지 올라가 조기를 잡아왔다. 배들이 다니면서 고기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이 마을은 풍족하게 살았다. 특히 조기철이 되면 인근 마을의 아낙네들이 농산물과 고기의 물물교환을 위해 선창가에 바구니 등 용기를 늘어놓는 모습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흥청거림이 목포의 돈줄 노릇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 작은 목포로 불리기도 했다. 물론 목포항보다도 더 큰 파시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물러나고 배를 잡는데 필요한 각종 어구들이 일본으로부터 들어오지 않으면서 활력을 잃었다.
이 마을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 한때는 수산물 소득으로 무안의 제일 부촌으로 알려졌다. 또한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로읍내에서는 소문날 정도로 학생들이 많았다. 예전에는 일로 기관장의 대부분이 이 마을 출신들로 채워질 정도였다. 특히 공무원과 교사가 많아 주변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는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대부분 좌익으로 몰려 주변마을에서 처형 당한 인사가 가장 많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양두 꼬락 젓은 그저 주어도 안 먹는다
이 마을에는 ‘회산 양두 꼬락 젓(꼴뚜기 젓)은 그저 주어도 안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각종 수산물을 비롯한 꼴뚜기가 많이 생산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 마을에 살았던 일본인 구로다가 셈 파다 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마을에는 물이 귀했다. 해서 이 마을의 어느 가정이나 물을 담아두는 옹기들을 얼마 전까지 갖고 있었다.
이 마을의 특산물은 숭어와 장어이다. 특히 숭어는 주민들의 말을 빌리자면 ‘개웅에서 막대로 물을 치면 숭어가 놀라서 튀어 오르는데 그때 갈대 엮은 발을 밑에다 두면 우두둑 고기들이 떨어 진다’할 정도로 많이 그리고 쉽게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양도 섬의 주산이 두남산(일명 덕두산, 떡두산)이다. 이 산은 제비 형국(연소등)이라 무덤에 석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산 자락에 효부각과 양호단 그리고 원모재가 있다. 1989년에 세워진 효부각은 면와 배회두 선생의 부인인 전주 최씨의 효행을 그리는 비각이다.
羊湖壇은 현재의 마을에서 보면 맞은편 두남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1975년 11월 15일에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세운 달성 배씨의 문중단이다. 이 단에는 배운용(달성군, 달성배씨의 수관조)과 배윤우(입향조, 권수암 선생의 문인)를 모시고 있다. 두 분의 충의, 문장,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단이며 매년 3월 5일에 제사를 지낸다. 양호단 안에는 1987년에 세운 ‘동몽교관만헌배공사적비’가 있다. 또한 원모재는 4칸 팔작지붕으로 1957년에 세웠으며 1986년에 중수했다. 재각 안에는 15개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몸채를 빙 둘러서 마루를 깔았다. 재각 바로 아래에는 납따바위가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용당 끝이 있다. 용의 꼬리로도 알려진 이곳은 와우봉 끝 자락을 돌아오는 모퉁이를 말하는 지명이다. 용당 끝과 의산리 돈도리 마을간 1,700미터가 연결되면서 비로소 주민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되었다. 또한 어장터가 있다. 어장터의 흙은 둑을 막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마을 앞 개웅을 윤전개라 하며 마을 뒤의 개웅은 모릿개라 한다.
이 마을은 몽탄면 당호리의 갈산 마을과 상관관계가 있다. 이 섬의 형상이 염소와 같다 해서 양도라 했는데, 몽탄에는 염소의 먹이인 칡넝쿨을 의미하는 갈산(葛山)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두 마을이 서로 바라보는 관계여서 한 곳이 흥하면 다른 곳은 빈약해지는 관계이다. 마을 앞에 1988년에 세운 달성배씨만헌공파세거비와 1989년에 세운 면와거사배회두공적비가 있다.
협동과 양보 단합이 잘 이뤄지는 마을 - 복용5리 두레미
두레미 마을은 와우산을 주산으로 하고 인의산을 바라보고 있다. 마을 앞은 넓다랗게 형성된 영화농장의 간척지가 있으며 무안의 대표적인 축제장인 회산백련지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형성은 100여년 전 이웃 마을인 회산에서 한 가구 두 가구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한다. 현재는 37세대에 16개 성씨가 어울려 살고 있다. 이처럼 마을에 타성 받이가 많은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영화농장의 간척지를 조성하면서 일을 하러온 주민들이 그대로 눌러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영화농장 주변의 돈도리 농장 연화동 마을 등은 모두 간척지 조성으로 형성된 마을 들이다. 실지로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고 1987년에 가서야 두남리로 나온다(참고로 섬이었던 양도의 주산이 두남산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는 지명과 관련된 유래가 많다. 마을의 역사가 짧고 여러 성씨의 사람이 어울러 살다보니 각자 편의적으로 해석해 사용해버린 탓이다.
첫 번째로 頭南里다. 1987년에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이 형성될 당시 마을 앞에 있는 바닷가에 두루미가 많이 모여 들고 있었는데 그 자리가 남쪽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頭南里라 했다’한다. 이는 마을 주민들이 이야기하다시피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마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름으로 행정관서에서만 쓰여지는 이름이다.
두 번째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두레미’이다. 이것은 마을 형국을 간척지 농장의 나락 묶음[斗]들이 이 마을을 향해 오는[來] 쌀[米]들로 본 것이다. 해서 붙여진 ‘두래미’가 ‘두레미’로 바뀌어 졌다는 이름으로 현재 마을 사람들이 쓰고 있는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일로읍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풍족한 마을이기도 했다.
세 번째는 ‘두루미’마을이다. 마을이 영산강가에 있어서 학이 즐겨 찾는 위치이다. 마을 어른들의 증언이 요즈음에는 오지 않지만, 해마다 많은 학들이 날아와 와우산이 백산(白山)이 될 정도로 하얗게 앉아 있다 날아갔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형국이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려는 듯한 모습이어서 ‘두루미’라고 했다 한다.
네 번째는 마을공동체인 ‘두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마을 형성이 일제강점기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경향 각지의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당시 주민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양보와 협동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해서 마을 이름도 공동체를 뜻하는 ‘두레’에서 변형되어 두레미라 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마치 같은 여건에 있는 의산리의 돈도리 마을이 주민들의 화목을 강조하는 의미의 지명인 것을 생각게 한다.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소뎅이 나루에서 몽탄면 명산까지 마을 앞에 펼쳐진 뻘 밭은 맛과 양에서 최고의 수산물을 주민들에게 안겨주었던 곳이다. 이런 수산물은 마을 주민들에게 무한한 혜택을 주었으나 영산강 유역의 개발로 막히면서 황금어장을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아쉬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주민들의 아쉬움을 모아 마을 특산품을 생산하기로 해 흑콩, 연꽃, 연근, 연씨, 연잎 등을 이용한 제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즉 2006년도에 테마마을로 지정되어 마을 특산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단합이 잘 되는 마을
특히 간척지에서의 콩 재배는 풍작을 안겨주었다. 마땅한 농지가 없어 논두렁 재배를 통한 콩 수확은 웬만한 밭 작물보다도 많은 소득을 안겨준 것이다. 또한 이를 특성화시키기 위하여 소비자들이 제품의 생산과정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체험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체험장을 개설하기도 했다. 연근을 비롯한 연제품 생산만이 아니라 민박도 했었다. 그러나 요즈음엔 캠핑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민박은 잘 되지 않는다.
마을에는 소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주산인 와우산을 비롯하여 멍에자리 소머리 그리고 용당끝 앞의 구수개 등이 있다. 또한 용당끝에서 돈도리까지의 원둑은 소의 코뚜레를 연결하는 줄로 생각했다. 특히 원둑을 막기 위해서 소의 어깨에 해당되는 고씨 문중의 산을 헐어 흙을 파냈는데 소에게 상처를 줬다 해서 고씨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의 단합이 잘 되어 마을 공동의 일에는 한 가구도 빠짐이 없이 모두 참석한다고 한다. 특히 마을이 무안의 대표적 관광지인 백련지 입구에 있는 관계로 조경의 필요성을 느껴 마을 앞 소공원 조성에 대한 의견이 나오자 모두들 공감을 표시하여 공원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가구당 50만원이 넘는 많은 기부금을 출자하여 부지를 매입하고 가꾸어 소공원을 조성하여 마을 공동의 재산으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솔선수범과 화합이 잘 이뤄져 주변마을에서 모두 부러워하고 있다.
또 이 마을에서는 마을 축제가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마을 소득의 최대 수입원인 백련축제가 열리기 전 날이나 일정한 날 등을 택해 마을의 단합과 발전 그리고 백련 축제의 성공적인 진행을 위해 마을 축제를 계획하기도 했었다. 마을 왼쪽에는 장흥 고씨들의 제각인 ‘장영재’가 있으며 37세대에 11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에서 배출한 인물도 많다. 은퇴한 육군중장이 있었고 의사 등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인물들이 많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용당끝이 있다. 용의 꼬리로도 알려진 이곳은 와우봉 끝 자락을 돌아오는 모퉁이를 말하는 지명이다. 영화농장은 용당끝과 의산리 돈도리 마을이 연결되면서 비로소 주민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되었다. 나드리가 있다. 축제장과 마을로 들어오는 삼거리를 말하는데 예전에는 이곳이 개바라지를 하는 등 바다를 오가는 빈번한 길이었다.
관해정이 있는 마을 - 복용6리 용호동
용호동 마을은 불당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는데 마을 앞으로는 10만평의 회산백련 단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일로읍에서 북동쪽으로 4㎞의 거리에 있다. 일로읍 복룡6리에 속해 있으며 복룡2리의 회산과 한 마을이었는데 2007년에 분리되었다. 1789년에 간행된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回山村으로,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回山洞, 龍虎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龍虎洞의 지명유래는 마을의 지형에서 비롯된다. 마을이 개발되기 전에는 마을 뒷산에서 발원한 길다란 맥이 마을 앞을 지나 복룡저수지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것을 龍이라 불렀다. 저수지 확장공사를 하면서 토사 채취를 하는 바람에 지금은 몇 그루의 소나무 동산만 남아있다. 또한 마을의 주산이면서 선창목의 뒷산이 되는 곳을 호랑이 산으로 불렀다. 이 산에는 바위가 많아 일제강점기 때 바위에 구멍을 뚫어 남포로 튀겨서 떨어져 나온 돌들을 백련지 확장공사에 사용하였다. 지금도 주민들은 선창목 주변을 남포갓이라 부른다. 이처럼 마을 앞의 용과 마을 뒷산에 해당되는 호랑이산을 이용해 龍虎洞이라 한 것이다. 다른 주민은 용이 비를 타고 승천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가운데 글자인 ‘虎’는 ‘壺’를 썼다 하나 한자가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나주 임씨다. 임씨의 입향조는 林 타(1593 - 1664. 자-실지, 호-몽촌)이다. 상주목사를 지내서 상주공이라 부른다. 공은 광해조에 生員 進士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계해년에 정사원종공신이 되어 상주 목사를 지냈다. 임타의 묘갈명에는 ‘공의 사람됨이 걸출하고 학문이 도저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주읍지에서는 공을 ‘호남 제일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말년에 그는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나주 회진에서 용호동으로 옮겨 와 경치가 좋은 이곳 회산에 정자 觀海亭을 짓고 소요하였는데 이후 후손들이 계속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상주공이 처음 터를 잡았던 곳은 현재 사당동(祠堂洞 - 회산과 용호동 사이)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관해정이 서 있는 자리이다. 관해정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무안군과 나주임씨 문중이 힘을 합하여 2007년에 복원한 것이다. 상주공은 아우 동리공과 더불어 이곳에서 당대의 文士들과 詩와 文을 교류하며 살았다. 관해정은 좋은 시절에 아름다운 곳에서 마음에 맞는 이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을 갖췄는데 상주공 형제의 지극한 우애를 나타내기도 한다. 관해정에는 솔대가 함께 세워져 있어서 당시에 이 마을에서 과거 급제자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관해정의 모습을 표현한 아우인 東里公 임 위의 시에 의하면
‘지경이 궁벽하여 塵世에 벗어나고
다락이 높아서 半天에 솟았도다
이미 능히 부인(符印)을 버렸는데
어찌 다시 초선(貂蟬)을 사랑하리오
앉고 누워서 몸에 따라 편안하고
흥에 따라 마음대로 배회하도다
묻노니 도원(桃源)은 어떠 하는고
파선(破仙 - 소동파)이 곧 번선(樊仙)이라네’ 라고 읊었다.
캠핑장의 피해가 많아
마을 앞에는 널따란 백련단지와 유리온실 그리고 캠핑장이 들어서 있다. 경관은 보기 좋지만 주민들의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캠핑장의 피해 때문이다. 캠핑카와 텐트촌이 어울려 있는 이곳은 주말이면 예약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있다. 해서 토요일 저녁만 되면 캠핑장에서 올라오는 관광객들의 고기 굽는 냄새로 온 마을이 곤욕을 치러야 한다. 즐거워하는 이들에게 뭐라 불평을 쏟을 수는 없지만 이런 상태가 하루 이틀이 아니고 자주 반복되다 보니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만 가고 있다. 덧붙여서 옆 마을인 복룡촌 마을의 퇴비공장에서 나오는 각종 오물 냄새 또한 주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원래 이 마을은 농지가 없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고기를 잡거나 뻘밭에서 개바라지를 하며 생활했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영화농장이 만들어지면서 생활의 여유를 갖다가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잘 살게 되었다.
회산 백련지(또는 복룡지라고도 불렀음. 하지만 유리온실 부근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산정리 소유의 땅이었다)는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에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축조한 저수지이다. 의산리의 돈도리에서 두레미 미을의 용댕이 끝으로 이어지는 원둑이 들어서고 영화농장이 만들어지면서 간척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막아놓은 방죽이었다. 주민들이 회산 방죽으로 불렀던 이 방죽은 몽탄면의 당호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 저장하여 사용 하였다. 면적은 10만여 평으로 두 개의 저수지가 합하여져 인근 250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농작물의 젖줄 역할을 하였으나 1981년 영산강 하구 둑이 건설된 후 사실상 농업용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신언장 구언장 땅골 인세 뽈당재 등이 있다. 선창목에는 복룡촌 마을과 연결되는 나무다리가 있었으나 1968년에 시멘트 다리로 바꿔지면서 복룡교라 부르고 있다. 또한 마을에서 회산으로 가는 길은 진등길이라 했으며 진등에는 당산골 사당골 등의 지명이 있었다. 사당골에 들어선 관해정 위에는 당골네가 살았던 점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이 마을 출신의 유명 인사로는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이론을 마련한 임춘식 교수와 행정고시 합격자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는 유능한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첫댓글 하구언이 없었던 어릴때 온갖 고기와 수산물이 많았지요
벼를 더 심어 식량을 얻을 요량으로 하구언을 막고 강을 간척해서, 농지를 확보했는데요
요즘 벼보다는 수산물을 얻는게 훨씬 소득이 많지요
목포 하구언을 일정하게 열어서 바닷물이 영산강에 들어오게 하여
고기를 많이 잡히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