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에 가장 현금이 잘 도는 지역 중의 하나이며 활발한 상권이 형성된 곳은 수인역에 위치한 미군부대 주변으로 이곳은 내항의 철도와 연결되어 제물포역을 돌아 부평의 캠프 마켓으로 이어 지는 전용 철도가 있다. 지금도 미군 들은 많은 대형 물량은 철도를 이용하기 때문에 인천은 매우 중요했다. 지금은 부평도 없고 경상도 지역으로 물류 기지가 옮겨 져 있다. 그 당시 미군 부대에는 잡일을 하는 부류부터 다양한 종류의 엔지니어, 물류 관리 및 미군 업무 지원을 하는 등의 다양한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미군 부대 다니면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밖에 일반 회사보다 평균급여가 3 배 이상은 되었고 노조의 활동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용역 보안회사 같은 경우는 미군 기지 용역회사가 그 원조이다.
이 지역은 예전에 일정 때에는 하나마치(화정)라고 하여 일본인 들의 신규 정착지로 확장된 곳이고 미상 정미소와 창고가 즐비하였다. 30년도 이후에 가장 돈이 많이 흘러 다닌 곳이라면 단연 이 곳일 것이다. 해방이 되고 쌀 수출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봐 온 건 이 곳 창고의 이름 선경이었다. 그리고 그 맞은 편이 미군 부대 였다. 이 곳이 매립된 것은 다른 분들이 잘 알 것이다.
미군 부대 근처의 유흥가 음식점은 지금도 변함없이 미군 부대에서 울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좌악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걸어 나오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나오는 사람 등 우르르 몰려 나왔다. 특히, 월급 날이면 친구 들과 술 한잔 하는 모임도 있고 간혹 가족 들이 마중 나와 근처 또는 숭의동의 평양옥을 가서 불고기와 냉면을 먹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그 평양옥의 후손이 숭의동 로타리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럴 만 하다.
가끔 씨레이션 박스가 집에 들어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쩌다 미군 부대에 놀러 갈 수 있으면 영락 없이 초콜릿이나 치즈를 받아 올 수 있었는데 슬라이스 치즈 보다는 블록 치즈의 맛이 더 진하다. 이 곳의 근로자들을 보면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이북 출신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황해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 들이 많았다. 우리 집은 인천 출신하긴 하지만 추억과 입맛은 황해도에서 많이 가져 오게 되어 이 친구분들은 내가 거의 성함을 외우고 있었다. 아버지와 친구들은 가끔 가족 친목회를 근처에서 하기도 하여 온 가족들이 70년 대말까지는 모두 알고 지낼 정도 였다. 계절이 바뀌면 야유회를 갈 수 있었는데, 이 기지가 급속히 줄어 든 이유는 전략적 물류 기지 이전과 월남 전쟁이 확대되면서 미군 지원 근로자가 많이 필요하여, 이 당시 이 곳에 근무하던 미군 부대 한인 근로자의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기존에 미군 부대의 대우와는 엄청 차이가 나는 것이었는데 이는 위험한 환경에서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보상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이미 피난과 전쟁의 가운데 살아 온 사람들에게는 가족들의 안락을 위하여 그 정도 희생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요즘 전쟁터에 일하러 나간다면 대부분 미쳤다고 할 것이다.
닥쳐 보면 또 달라 진다.
난세 속에 영웅이 나오고 위기 속에 사업의 기회는 생긴다.
그러나 영웅이 필요한 세상이 만들어 지는 것은 그 만큼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한다.
월남에서 일하는 한국인 근로자는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되는데 미군 지원 인력과 한국 사업체 지원 인력으로 나뉜다. 미군 지원 인력은 대부분 영어 회화가 어느 정도 가능했고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체는 전쟁이 쓸고 간 자리의 부산물과 고물 등을 수거하는 일을 많이 했다.
군인만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목숨을 걸었다. 물론 위험은 예고치 않는데 기념 사진 속에 갑자기 뒤에서 폭탄이 터지는 모습도 담겨 있는 경우를 봤다.
월남 전에서 백마 부대, 맹호 부대, 청룡 부대 등이 월남 민간인 학살을 많이 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분명 사과를 하여야 한다. 미군도 예외는 아니지만 625 동란으로 전쟁을 경험한 한국군의 야수성은 베트콩이 싸우기도 전에 도망 가게 만들기 일쑤였다. 만약 싸우다 한국군 몇 명이 죽으면 한국군은 근처의 마을을 몰살하기도 했다.
그런 행위가 밉다는 것을 임진왜란 역사에서 배웠다. 그래서 위험한 일을 하면 "애비!"(귀)라고 했다. 왜군이 적을 베면 증거로 코나 귀를 베어 가서 그런 말이 나왔다.
월남전은 어쩔 수 없는 요구에 의했고 그 결과로 한국군 1 명이 죽으로 경부 고속도로 1m가 깔린다는 말도 있었다. 한국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그런 일을 했던 한국군은 한국으로 돌아 와 이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안고 살아야 했다. 전쟁 중에 그들은 미쳐 있었다. 당연 이런 것에 대한 보상은 어디서도 보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일은 미국도 예외가 아니라, 영화 '람보'에서 람보는 미국에 귀국해서는 국가를 위한 영웅으로 환영을 받지만 실제 생활을 하는데는 이방인이 되었다.
미국은 유일한 패전으로 이 전쟁을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