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평전에서 자다 (지리산 189차 - 블로그 기록 기준)
1. 일자: 2017. 07. 08 ~ 09 / 09:20 ~ 익일17:30 / 17-18차
2. 날씨: 산행 전부터 굵은 비, 오전 11시 그침, 오후 4시부터 가는 비 조금 뿌리다 그침
다음날은 대체로 맑음
3. 대상: 삼신봉과 불일평전 / 경남 하동군 청암면, 화개면 소재
4. 코스: 청학동~삼신봉~상불재~상불암계곡~불일평전~혜일봉능선~상불재~가는골~청학동
5. 주요지점 통과 시각 (약 16.5㎞)
09:20 청학동 공용 주차장 - 산행시작
10:40 참샘 - 물통 새로 채움
11:00 갓걸이재 - 낙남정맥
11:15 삼신봉 - 휴식
12:45 송정굴 - 점심 2시간 20분
16:30 상불재(생불재)
18:20 불일평전 - 1박/야영
[2일차]
09:45 불일평전 떠남
11:00 청학봉 - 휴식
12:30 묘지(891m) - 휴식
13:55 상불재 - 휴식
14:30 삼성궁사거리 - 남부능선
14:40 가는골 상류 - 늦은 점심 1시간 40분
17:20 삼성궁교
17:30 청학동 주차장 - 산행종료
□ 궤적
약 16.5㎞ / 청학동 기준 8자형 원점회귀
A: 불일암
B: 불일폭포
C: 하불마을터
891봉 = 묘지, 하동바위 = 하동독바위
변규화 옹
고(故) 석전 변규화(본명 변성배) 옹은 1978년 10월 불일평전 오두막에 정착하여 신선처럼 살다가 2006년 11월 새로 지은 토굴에서 ‘밤나무 가스 질식’이라는 믿기지 않는 변을 당한 뒤 병원 신세를 지다 이듬해 6월 타계했다. 오두막 당호는 봉명산방(鳳鳴山房)인데,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지었다. 나는 석전 선생을 세 번 뵈었는데 2005년 6월 쌍계사 아래 용강마을에서 하룻밤 묵고 세석으로 오르면서 반도지 옆 돌 의자에 앉아 40여분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음은 당시 나의 기록이다.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쌍계사 경내 금당 옆으로 나 있었다.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을 10여 분 올라가니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은 국사암 가는 길, 오른쪽으로 들어선다.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노닐었다는 전설이 있는 환학대(喚鶴臺)를 지날 무렵에는 첩첩 산중으로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500m 가량 더 올라가니 꽤 넓은 평원이 열리고 야영장이 조성돼 있다. 또 소담한 오두막과 연못, 소망탑들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다. 불일평전이다.
앞뜰에는 ‘불일평전의 신선(神仙)’ 변규화 선생이 노(老)부부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목례를 한 후 배낭을 내리고 수통에 물을 채웠다. 잠시 후 노부부는 내려갔고 선생 혼자만 남았다. “선생님 건강이 좋아 보입니다”라며 인사를 드리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20여 년 전 학창시절에 뵙고 처음이라고 말씀 드리니 빙그레 웃음으로 화답한다. 그리고 반도지와 소망탑 등에 대해 말씀해주었다.
선생은 자신의 모든 정성을 쏟아 오두막집 앞에 우리나라 지도와 똑같은 모습의 연못인 ‘반도지(半島池)’를 만들고, 많은 돌을 날라다 집 뒤편 언덕에 ‘소망탑(素望塔)’을 쌓았다. 반도지를 오두막 앞에 파놓은 것은 곧 선생의 집이 옛 우리 영토였던 만주 땅에 위치한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통일염원과 국가 부흥의 깊은 소망이 담겨있다는 것은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연못에는 산천어인 피리가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었고, 반도지 북쪽에는 키 큰 원추리가 무성하게 자라 오늘 아침에 꽃대만 남겨두고 싹 정리했다고 한다. 북한 김정일의 기를 꺾기 위함이란다. 1985년에는 연못의 물이 맑지 못하고 폐수처럼 변했는데 그 이듬해에 부인께서 타계했고, 1996년에는 연못 속의 피리들이 개구리에 잡혀 먹히는 등 다 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듬해에 IMF가 왔다며 이 연못이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이 너무 급하고 여유가 없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땅에 비해 인구가 많은데도 지도자들은 출산율 저조에 상당한 우려를 표하는데, 우리나라도 스위스처럼 특정분야(생명공학, IT산업 등)에 주력한다면 충분히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도 했다.
또 나보고 이곳 백두산에 앉아 보란다. 여기서 반도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스스로 마음이 열리는데, 우리 정치가들도 다양한 계층과 세력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며, 하루 이틀, 1~2년이 아니라 적어도 100년 이상을 생각할 수 있는 지식과 안목을 쌓고, 아울러 젊은이들도 배포를 크게 가지라고 당부하였다.
여러 가지 말씀이 끝난 다음 “선생님 모습을 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라고 말씀 드리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그리고 “내 모습이 인터넷 상에 보이곤 한다는데 내 의사와 관계 없이 슬쩍 담아갔다”며 도덕(예절)적인 문제도 언급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소중하고 유익했다. 진정한 도(道)를 깨우침은 일반인들과 똑 같은 삶을 사는 것이고, 삶의 본질을 알고 실천하는데 있다고 한 선생과의 소중한 만남을 뒤로 하고 불일폭포로 떠났다.
故 변규화 옹(2005년 6월 촬영).
첫날
이번 산행은 변규화 선생이 삼십 년 가까이 머물면서 지리산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불일평전에서 야영하는 것이다. 청학동을 등산구로 삼아 박 짐을 메고 남부능선을 넘나들었다. 불일평전과 불일암 등 그 일대만 돌아보는 탐방이라면 쌍계사나 국사암이 어울리지 싶다. 하지만 우리는 탐방보다 등산이 주목적이다.
덕산 모 식당에서 아우들과 만나 시원찮은 아침을 먹고 삼신봉터널(낙남정맥 묵계재)을 빠져나오니 차창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어차피 장맛비는 피할 수 없으니 그 속에서 즐겨야만 마음이 편안하겠지.
9시 20분, 청학동 공용주차장 내 천막이 둘러진 평상에서 산행채비를 마친 넷은 삼신봉을 향해 빗속으로 들어갔다. 청학교 아래서 <미산> 형님이 합류하여 이내 산속으로 들어서니 한결 낫다. 우거진 숲 덕이다.
산길은 줄곧 계곡을 왼쪽에 두고 이어졌고 계곡수의 힘찬 소리에 속진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미륵암터 갈림길 계곡 건너는 곳에 쉬면서 <하늘바위> 아우가 슬러시(Slush)한 막걸리와 <미산> 형님의 참외로 요기를 했다.
참샘에 이르러 물통을 새로 채우는데 창원에서 온 단체 산행팀이 우르르 몰려들어 물 한 모금씩 마시고 이내 사라졌다. 어떤 이는 “우리 창원 사람들은 전천훕니다”라며 우쭐대기도 했다. 속도와 무게의 반비례가 새삼스런 반면 우중에 집행부를 믿고 따르는 그들에게 마음의 갈채를 보냈다. 낙남정맥 등날인 갓걸이재에 올라서니 창원 사람들이 쉬고 있다. 산행에 나선 지 1시간 40분만이다.
청학동 공용주차장.
<미산> 형님과 합류한 지점. 솟대 뒤로 청학교가 보인다.
계곡 풍경.
첫 휴식. <하늘바위>와 <한작> 아우.
<하늘바위>는 지리산과 등산 전반에 대해 상당한 내공의 소유자이자 든든한 아우다. <한작> 아우는 전에 소개한 바가 있다.
참샘.
갓걸이재에는 창원에서 온 분들이 선 채로 쉬고 있다.
삼신봉 가는 능선 길엔 안개만 스멀스멀 피어 오르고 초목의 물 튐도 없다. 앞서간 창원 사람들 덕이다. 이정목이 선 너럭바위에 배낭을 두고 맨몸으로 삼신봉에 올랐다.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란 별칭이 무색할 정도로 조망은 꽉 막혔고 돌제단 주위는 많은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한 사람이 제단에서 내려오다 쌓였던 돌이 무너지자 머쓱해 한다. “돌은 쌓기 어려울 테니 절을 세 번 하십시오”라고 내가 말했다. 잠시 후 분위기가 차분해지자 나도 제단을 향해 절을 했다. 이 제단은 1980년대 중반 청학동 주민들이 만들었고 매년 곡우절과 10월경에 산신제를 올린다. 제단이 있는 곳을 오르내릴 때는 제단 앞으로 바로 오르는 것보다 좌, 우로 돌아서 다녀야 한다.
삼신봉은 지리산 북쪽의 삼정산과 더불어 이상적인 주능선 전망대다. 날씨가 맑다면 별칭에 걸맞게 서쪽 왕시루봉에서 동쪽 써레봉까지 장쾌하고 웅대한 지리산의 맥이 살아 꿈틀대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오늘은 상상으로 대신했다. 물론 제단 뒤에는 안내판이 서 있어 사진으로 주능선 감상이 가능하다.
창원 분들이 쌍계사를 향해 모두 떠나고 조금 뒤 우리도 그들 뒤를 따랐다. 삼신산정(三神山頂)이라 적힌 빗돌이 선 내삼신봉은 사진만 담고 곧바로 나타나는 밧줄 걸린 곳을 조심스럽게 내려섰다. 그리고 배낭을 내린 채 일행들을 기다렸으나 감감 무소식이다. 불안한 마음에 다시 올라가보니 모두 '잣이 가득 담긴 술독'에 빠져있었다. 내삼신봉 부근엔 잣나무가 제법 눈에 띄었고 점심 터로 계획한 송정굴은 500미터 남짓한 거리에 있다. 그들은 금년 말이나 먹을 수 있는 술독을 미리 비우고 있었던 것이다.
12시 40분, 임란 때 송정 하수일 선생의 피난처였다는 송정굴에 도착했다. 이 굴은 관통된 데다 북쪽으로 약간 경사져 있어 잠시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겠으나 하룻밤 유하기엔 좀 그렇다. 산길에서 우측으로 10여 미터 벗어나 있다. 굴 앞에 붉은색 타프를 치자 바람도 따라 멎었다. 우리들 산정에 날씨도 호응하는 느낌이다. 먼저 알파인 스타일로 소맥을 돌리면서 오찬이 시작되었는데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한작> 아우의 사자후.
삼신봉.
삼신봉 정상석.
내삼신봉 정상석.
밧줄 구간.
송정굴.
점심 후의 송정굴.
점심 후, 25분쯤 진행하자 거대한 바위가 가로막았다. 쇠통바위다. 북쪽에서 맨몸으로 암벽을 타고 올랐다. 마침 시야가 트여 발아래 박단골을 비롯해 청학동 일대와 묵계저수지를 조망하고 일행들의 멋진 포즈도 담았다. 당연 첫날 산행의 하이라이트였다. 이 바위는 두 개의 큰 바위가 머리를 맞댄 채 비스듬히 서 있는데 내려올 때는 그 사이에 난 구멍으로 빠져 나왔다. 청학동 인근 열쇠바위로 쇠통(자물통)바위를 열면 세계평화가 온다는 전설이 있지만 황당하기 짝이 없다.
하동독바위 갈림길을 지날 때 다시 빗방울이 떨어져 윗도리만 챙겨 입었는데 금세 아랫도리가 축축해지고 등산화에 물이 스며들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 상불재 사거리를 지나 상불암계곡 길로 접어드니 돌밭길의 연속이다. 약간의 지루함이 느껴질 무렵 나타난 소폭이 무척 반가웠다. 2005년 이 폭포 앞에서 잠깐 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기억 때문이다. 통나무다리가 놓인 마지막 본류를 건너 오른쪽으로 난 지류 두세 군데를 더 지나자 골짜기가 넓어진다. 잠시 후 불일폭포 갈림길에서 100미터쯤 평탄한 길을 따라 불일평전에 들어서니 쌍계사 쪽에서 올라온 <도솔산인> 형님과 그 일행들이 ‘광거정’을 짓고 있었다.
광거정은 열 명 이상 숙식이 가능한 가장 큰 젤트로, 오늘밤 연회장으로 이용된다. 우리도 서둘러 젤트 한 동과 텐트 두 동을 세운 뒤 반도지와 몸을 섞었다가 연회장에서 도합 열 명이 다양한 술로 산정을 나누었다.
쇠통바위에서 일행들.
쇠통바위 열쇠 구멍.
박단골과 청학동, 묵계저수지.
쇠통바위와 진행할 남부능선.
뒤돌아본 풍경.
선유동계곡과 지네능선(左).
다양한 포즈.
쇠통바위 구멍.
하동독바위 갈림길.
상불재계곡 소폭.
우측 지계곡 풍경.
불일평전.
다음날
누군가 아침 먹으라는 소리에 눈을 떴지만 몸이 제대로 반응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물 한 컵을 들이키고 밖으로 나오니 지난밤 숙취가 사라지는 듯 머리가 맑아졌다. 밥그릇과 술잔만 들고 큰집(광거정)에 가서 된장국에 밥을 말아 안동소주 두어 잔 곁들이는데 주꾸미 볶음밥이 바로 나왔다. 상당히 매웠지만 땀을 내며 맛있게 먹고는 큰집이 있어서 참 좋다는 말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지난밤에 이어 오늘 아침에도 나에게는 수저와 술잔, 밥그릇 뿐이었다. 앞으로 만회할 기회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귀곡산장처럼 방치된 오두막은 보기가 안쓰러웠다. 옛 주인장의 자연과 지리산에 대한 숭고한 정신이 훼손되거나 잊혀지지 않도록 봉명산방이 복원되길 기원해본다. 응당 공단이 나서야 할 일이다. 지리산을 참으로 사랑한 이로는 우천 허만수 선생을 비롯해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 선생과 연하반산악회의 우종수님, 그리고 이곳의 옛 주인장 정도가 아닐까. 굳이 한 분을 더 보탠다면 치밭목을 30년 이상 지켰던 일정 민병태님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리산에 건설된 수많은 다리나 시설물 중 어느 하나 그 분들 이름이나 정신을 딴 것은 없다. 이게 공단의 한계이자 국립공원 지리산의 현주소다. 나는 반달가슴곰보다 그 분들이 훨씬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소망탑.
폐허가 된 오두막(봉명산방).
반도지.
9시 45분, 나는 일행 중 맨 마지막에 불일평전을 떠났다. <솔레이>님과 <산수담>님은 개인 사정으로 먼저 하산했고, 나머진 불일암으로 올라갔지만 남부능선을 넘어 청학동으로 갈 사람은 어제 넘어왔던 다섯이 전부다.
불일암 앞뜰 평상에 배낭을 두고 불일폭포로 갔다. 불일(佛日)은 보조국사 지눌의 시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명수씨는 부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 불교 용어인 ‘불일(佛日)’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고 그의 저서 <지리산>에 언급했는데, 삼정산 밑 상무주암에서 2년간 머문 지눌은 쌍계사나 이곳에 들렀다는 기록이나 행적이 없다는 것을 그 근거로 삼았다.
지리10경의 하나인 불일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학은 떠난 지가 오래고 몸집 불은 폭포수만 하염없이 쏟아진다. 음이온 가득한 청정 공기는 상큼할 뿐 아니라 내 기분을 고조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한참 동안 머물고 싶지만 청학동 넘을 길이 아득하다. 내원골 거슬러 남부능선 넘을 것인지 아니면 혜일봉능선 타고 상불재 거쳐 갈 것인지 일단 청학봉에서 결정하기로 하고 불일암으로 되돌아왔다. <도솔산인> 형님과 둘은 백학봉 거쳐 협곡으로 내려갔는데 아직 무소식이다. 그들은 대은암터 챙겨보고 쌍계사로 하산할 터이니 급한 쪽은 오히려 이쪽이다. 스님은 뒤편 법당 안에서 수행 중이라, 가급적 조용하게 물통을 채우고 절집을 나왔다.
<하늘바위> 아우와 나는 하불마을터를 거쳐 청학봉으로 갔고 나머진 불일암 위에서 바로 계곡을 건넜는데 앞뒤 간격이 벌어지면서 발생한 일종의 헤프닝이었다. 청학동 가는 길은 혜일봉능선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정해진 데에는 어제 우중 산행과 광거정 연회의 후유증도 없지 않았다. 나는 혜일봉능선과 내원골은 각각 한 번 내려오고 올라보았다. 때문에 이번 산길에 초행 구간은 없었다. 코코넛으로 요기를 하고 청학봉을 떠난 것은 11시 정각이었다.
불일암.
불일폭포.
하불마을터 부근 계곡 횡단지점.
청학봉.
혜일봉 능선 오름 길은 산죽 일색에다 바람이 없었는데도 개운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능선은 왠지 낯설었다. 2012년 4월 청학이골로 올라 거사봉과 관음봉 거쳐 이 능선을 타고 하산한 적이 있지만 혜일봉(891m)의 벌거숭이 묏등만 기억날 뿐이다. 두 번이나 쉰 뒤 그 봉우리에 올라 또 배낭을 벗었다. 오는 도중 산길 바로 옆 나뭇가지에 앉아 몸 말리던 독사 두 마리를 뒤따라오던 아우가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는데 나는 이미 통과한 상태였다. 나도 모른 채 그 놈들을 건드렸더라면,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크기도 보통이 아니던데.
혜일봉.
혜일봉을 뒤로 한 산길은 한동안 굴곡 없이 이어가다 서서히 가팔라졌는데 바위지대를 간신히 올라 또 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오름 구간은 젖 먹던 힘까지 다했다. 죽을 맛이었다. 상불재에서 신과 양말을 벗고 퍼질러 앉아 있었다. 약과와 초콜릿 각각 한 개, 선식 두 모금으로 고갈된 에너지를 보충하고 겨우 일어났다. 터골 상류에서 늦은 점심을 지어 먹고 가는골 좌, 우골 합수점에서 알탕으로 더위를 충분히 식힌 뒤에 산문을 나섰다. 박 짐을 지고 남부능선 넘나들기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함께한 분들께 이 글로써 고마움을 전한다.
상불재.
남부능선 삼성궁 사거리.
터골 상류 점심터.
터골 횡단지점.
가는골 알탕소.
삼성궁교.
이 다리를 건너 청학동으로 들어가면서 1박 2일 산행을 마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