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학권- 단편
https://www.youtube.com/watch?v=gBYGB7WtlJ0 이정원
https://cafe.daum.net/rnjstlgur/9oZC/537 권시혁
다글로
두 번째 주제인 구원에 대해서 나눌 하나임교회 성도 이정원입니다. 구원을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이 되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그래서 요3:3절에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지 않았으니 새로운 차원이 보이지조차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 코스모스는 현상과 본질로 되어있습니다. 현상은 평면 즉 나타나는 것이고. 본질은 평면 밑에 숨겨져 있는 것 입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00:55
세계 | 현상:평면 | 본질:입체 | 구원 |
Cosmos | things 물질 | no-things 에너지 | 구원 |
| from 형상 | essence 본질 | to |
| phenomena 현상 | being 존재 | 본질계 |
그러므로, 현상은 things 즉 물질로 되어있고, 본질 세계는 no-things 즉 에너지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현상 세계는 폼 즉 형상으로 되어있고 본질 세계는 보이지 않는 에센스 즉 본질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 세계는 흔함이나 즉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고. 본질 세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존재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현상 세계에서 본질계로 전환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우리가 다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이 현상의 평면 세계를 살던 우리가 본질의 입체 세계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이 믿음에 대해서 보시면 보이지 않으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 선물에 우리의 삶이 붙들린 바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니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02:40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우리가 체험하고 맛보아 알 때 그냥 저절로 신뢰가 되는 것이지. 우리가 믿자 이렇게 결정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빌3:12절에도 “이는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바 된 그것.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갈등을 싫어합니다. 03:36
그래서 확신은 갈등을 회피하는 인간의 기재로써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선택했으니까 그 선택을 절대화시키고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과는 반드시 다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는 이러한 자기들의 확신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역사에는 보수적인 면도 진보적인 면도 필요한데 자기들의 확신을 절대화시키려고 보수와 진보는 서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깨어진 믿음은 가슴이 깨어져서 내 가슴이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는 것인데 종교적인 확신은 확신이나 또는 외부 주입의 결과가 아닙니다. 04:34
전도 받고 성경 공부하고 세미나를 하고 훈련 설교를 듣고 이런 것들은 모두 과정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들이 믿음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믿음을 내가 내 확신으로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인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내 확신이니까. 나의 선택이니까. 내가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확신은 에고를 더 강화시키고 우리가 가슴이 깨어지게 하지는 못합니다. 05:28
그러므로, 앞서서 이경철 성도의 나눔에서 보았듯이 성경과 종교의 나눔에서 이미 보셨듯이 예수님에 의하면 종교의 핵심 특징은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마23:5사람에게 보이고자 마23:28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그런 것들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특징입니다.
구원은 하나 됨이고 죄는 단절된 것입니다. 단절됐으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엡2:3은 이것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 본질상 진노의 자녀는 욕심과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06:24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구원으로 모두 하나가 된 것이죠.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 됨의 유기적입니다. 유기적이라는 뜻은 한 생명체같이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 뗄래야 뗄 수가 없다는 뜻이죠.
유기적은 즉 생명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조직이나 규칙이나 합의나 약속이나 어떤 제도로 되는 것이 아니고 생명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07:08
고린도전서 12:12에서 말하듯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그러니까 몸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가 다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시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우리가 한 몸이기 때문에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것은 하나 된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08:00
자식이 힘들거나 아프면 부모가 자식의 아픔을 어떻게 해서든지 대신 짊어지고 자식을 좀 편안하게 해주고 그런 마음이 있듯이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부모와 자식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인은 지금 구원으로 하나 되어서 남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또 엡4:13절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에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 됨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고 함께 그리스도에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08:57
그래서 구원의 증거는 반드시 세상을 거스릅니다. 산 고기는 물결을 거스르고 죽은 고기는 물결에 떠내려갑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면 그 변화의 시작은 나 됨의 회복입니다. 세상을 거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원은 사랑하고 희생함으로 그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는 그런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세상 따라 세상에 떠내려가니까 오히려 우리가 원치 않는 삶을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09:41
그래서 구원을 받으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구심력이 강화되어서 그 삶을 사는 나의 원심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세상을 거슬러 살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으로 구원과 함께 받는 열매는 코이노니아입니다. 구원은 하나 됨이고 하나가 되었으면 통하고 나누는 게 당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만으로서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10:22
인간의 일로는 이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구원의 열매인 코이노냐의 모습을 보면 서로 교제하고 떡과 잔을 나누고 오로지 기도하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고, 마음을 같이 하여 먹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쁨과 순전한 마음일 때에 이 나눔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나타나는 것이며 이것은 법이나 조직체계나 그런 것들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1:19
이런 모습은 하나가 안되어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머리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런 모습이 매우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머리의 계산으로 큰돈을 내고 코이노니아에 같이 참여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나눔은 머리의 계산이고 진실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한계 또한 또렷했고 결국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회개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심판을 받게 되고 그리고 종교의 비극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12:08
구약의 제사는 그 절기에 모든 백성과 그리고 객과 종까지 다 함께 나와서 함께 즐거워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고 하는 공동체 한 가족의 잔치이지 절대 종교에 제사 의식이 아닙니다.
종교의 제사는 창세기 22장에서 이미 끝이 났습니다. 고대 종교에서 가장 귀한 재산은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12:39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 해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순종했는데 하나님이 이삭 대신에 여호와 이래로 숫양을 준비하시고 너희는 이제 이런 종교 제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으로 사는 것이 너희의 삶이라고 하시는 것으로 창세기 22장에서 종교 제사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도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유다 후기까지도 므낫세 왕이 자기 아들 아몬을 몰렉에게 바치려는 종교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종교의 세금이나 의무나 법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같이 잔치를 하라는 것입니다. 13:34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모였을 때 같이 기쁘고 즐거운 잔치를 하고 다음 잔치까지 너희 가운데 굶는 자가 없어야 한다. 다 같이 먹고 살다가 또 기쁨으로 나아오라. 이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항상 소산을 얘기합니다. 소산은 무엇입니까? 소산은 먹거리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십일조는 3년마다 성읍별로 그것을 모아서 성읍 안에 있는 레위인이나 객이나 고아나 과부나 가난한 자를 그것으로 먹게 하고 너희 중에 굶는 자가 없게 해라.
함께 먹고 즐거워하고 배부르게 하라고 하는 말씀이 십일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본문마다 계속 나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함께 나누는 기쁨이 생명의 기쁨이며 구원의 열매입니다. 14:44
우리가 부모가 되면 안 쓰고 열심히 절약해서 그것을 우리 자식들과 나눌 때 그것이 내가 혼자 쓰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되고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기쁨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가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은 큰돈이나 힘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장 강한 사람들은 함께 이런 기쁨을 나누며 하나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히11:38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15:29
신15:4-5에서 보면 이렇게 십일조 잔치로 함께하는 사람들이 되면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자가 없다는 것은 인간 세상 역사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행4:34에 와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고 한마음 한뜻으로 모은 물건을 통용하고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새로운 차원의 삶인 코이노니아를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조적인 해체는 피할 수 없는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실제는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우리가 실제를 말할 때는 서로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16:24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1: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하였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보시면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이렇게 해체하는 것이 건설하며 세워 이렇게 새롭게 하는 것의 2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어지는 것은 새로워지는 것보다 2배가 더 어려운 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몫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고. 17:23
우리의 몫은 깨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다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교를 허락하신 것은 종교로도 안 되는 우리가 깨어지는 것이 그 목적이시고 우리의 가슴 깨어짐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의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몰랐던 소크라테스를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소크라테스가 질서의 파괴자라며 독약을 마시고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를 보면 이 세상 체제 수호자 권력의 아부꾼들 돈의 시녀들이 되어서 오히려 세상에서 정말 유능한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18:23
ego의 깨어짐은 없이 세상살이에 도가 터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재주를 부리는 종교인들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우면서도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