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회 - 강릉 문화유산 답사
6월15일 서울의 어느 지역 향토사학회가 강릉의 문화유산을 답사한 바가 있습니다. 준비했던 자료와 사진을 올립니다.
1. 관물(觀物) - 「경포대중수기(鏡浦臺重修記)
만일 경포대에 올라 조선후기 강릉을 상상하고 싶다면 이만수의 「경포대중수기(鏡浦臺重修記)」가 옛날의 강릉과 순조대의 강릉을 현격하게 대비시킨 다음 순조대의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번영하는 강릉의 새로운 시작은 경포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를 원하는 내용이다. 아래는 「鏡浦臺重修記」다.
내가 일찍이 바다를 따라 동녘을 유람하며 원화동천(元化洞天)1)을 두루 구경하였다. [余甞遵海東遊(여상준해동유)。周覽元化洞天(주람원화동천)。]
구룡연(九龍淵)2)에서 갓끈을 씻고 삼일호(三日湖)3)에서 배를 붙잡았다. [濯纓九龍之淵(탁영구룡지연)。挐舟三日之湖(나주삼일지호)。]
왕명으로 떠난 일정이라 기한이 있어 아홉 고을4)의 여러 명승을 차례로 탐승(探勝)하지는 못했다. [王程有期。不能歷探九郡諸勝(불능력탐구군제승)。]
임영(臨瀛 강릉)의 경포(鏡浦)는 아홉 고을에서 으뜸이지만 이르지를 못해서 해 뜨는 지방을 한껏 구경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항상 마음속에서 맴돈 지가 또 10년이었다. [臨瀛之鏡浦(임영지경포)。甲於九郡。而遠莫之至。未窮扶桑之恨(미궁부상지한)。常往來于中者且十年。]
[關東伯趙公貽書于余曰鏡浦新經回祿(관동백조공이서우여왈경포신경회록)。府使尹令鳩材董工(부사윤령구재동공)。圖還舊觀(도환구관)。不佞捐廩以相其役(불녕연름이상기역)。] [是不可無述。子其記之。]
[余時屛居田間(여시병거전간)。蹶而起曰(궐이기왈)] [善乎公之爲政也。夫物之成毁。逌於數(유어수)。事之興廢。存乎人。] [善於政者。仍其舊而修明之而已(잉기구이수명지이이)。修明之得其宜則無適而不沛然(수명지득기의칙무적이불패연)。况於乎(황어호)。]
임영부는 아득히 대관령의 바깥 깊은 바닷가에 처해 있다. 백성의 풍속이 순박하고 시정과 여염이 부유하며 집집마다 덕행이 있었다. [臨瀛之府(임영지부)。邈然處大嶺之表窮海之澨(막연처대령지표궁해지서)。而民俗淳厖(이민속순방)。井閭殷富(정려은부)。比屋可封(비옥가봉)。]
예부터 예국(穢國)의 고도(古都)라 일컬었고, 땅이 교남(嶠南)과 접하였다. 풍기가 따사로워 소나무 천 그루, 감나무 천 그루, 대나무 천 그루가 자라고 메벼가 구름처럼 널려 있고 물고기와 게는 부르는 게 값이다. [從古稱穢國古都(종고칭예국고도)。壤接嶠南(양접교남)。風氣暄姸(풍기훤연)。千章松千樹柿千本竹(천장송천수시천본죽)。秔稻如雲(갱도여운)。魚蟹不論錢(어해불론전)。]
지방관이 풍속을 따라 다스리니 백성이 삼고(三古)5)의 세상을 만난 것처럼 스스로 만족해한다. 옛날 우리 두 임금님의 행차가 동쪽으로 와서6) 은택이 민간에 남아 있다. [長吏因俗而治。其民皥皥(기민호호)。若三古之世。昔我兩聖祖翠華東臨(석아량성조취화동림)。遺澤在民(유택재민)。]
또한 선정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이 땅에서 밝게 태어났다. 지금의 오죽헌(烏竹軒)이 이것인데 우리 정조(正祖)께서 발문을 붙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이 여기에 있다.7) [亦粤先正文成公降彩于是地(역월선정문성공강채우시지)。今之烏竹軒是也(금지오죽헌시야)。而我正廟御跋擊蒙要訣在焉(이아정묘어발격몽요결재언)。]
때문에 선비된 자는 대개 모두 몸을 깨끗이 하고 행실을 가다듬어 시례(詩禮)를 공부하여 왕왕 조정에 천거되어 나라의 기둥과 줄기가 되었다. [故爲士者率皆澡躬砥行(고위사자솔개조궁지행)。誦習詩禮(송습시례)。往往多賓于王廷(왕왕다빈우왕정)。爲國楨榦(위국정간)。]
대개 조종(祖宗) 400년 이래 전국에서 땅 좋고 사람 좋은 곳으로 유명하기가 임영 만한 데가 없으니 호수와 바다의 누대는 단지 그 한 가지였다. [盖祖宗四百年來(개조종사백년래)。樂土善俗之著於域中者(락토선속지저어역중자)。莫如臨瀛之美(막여림영지미)。則湖海亭之勝(칙호해정지승)。特其一耳。]
아, 지금의 임영은 옛날의 임영이 아닌지가 오래이다. 백성이 날로 더욱 초췌해지고 풍속이 날로 더욱 투박해진다. 비축된 물자가 날로 다하고 백성의 고혈도 날로 다한다. [噫(희)。今之臨瀛(금지림영)。非昔之臨瀛也久矣(비석지림영야구의)。民日益悴(민일익췌)。俗日益渝(속일익투)。儲胥日匱而膏澤日竭(저서일궤이고택일갈)。]
고을의 사방이 텅 비어 마치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겪은 것 같다. 이 고을에 부임한 사람은 신음하는 백성들을 안도시키느라 겨를이 없으니, 귀인들 마냥 가죽옷에 넓은 띠 하고 문사들 마냥 거문고에 술동이 갖고 호수와 바다의 누대에서 노래하고 잔치하며 영랑(永郞)의 아득한 유적을 탐방하고 홍장(紅粧)의 옛 일을 이어가고 싶어도 어찌 마음껏 뜻을 세워 온전하게 즐길 수 있겠는가. [四境蕭然(사경소연)。如閱滄桑(여열창상)。蒞是邦者恤恤乎撫字殿屎之不暇(리시방자휼휼호무자전시지불가)。雖欲以裘帶琴樽(수욕이구대금준)。嘯咏燕敖於湖海亭臺之間(소영연오어호해정대지간)。訪永郞之遐躅(방영랑지하촉)。續紅粧之故事(속홍장지고사)。顧安得肆其志而全其樂乎(고안득사기지이전기락호)。]
지금 윤 영(尹令)은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개연히 이 대를 다시 빛내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고, 강원 감사도 또한 기꺼이 이를 돕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단지 경치 구경하며 즐겁게 노는 도구로 삼아 한 때의 사치스런 구경거리를 만들려는 것이겠는가. [今尹令下車未幾(금윤령하차미기)。慨然以斯之輪煥爲先務(개연이사지륜환위선무)。而東伯公又樂爲之助者。豈亶爲登臨遊衍之具(기단위등림유연지구)。侈一時之觀瞻哉(치일시지관첨재)。]
그 뜻은 성스러운 조상의 큰 의리를 드날리고 선대의 밝은 유풍(遺風)을 당겨서 경전을 강의하고 시(詩)를 현송하며 농경과 잠상을 일으키고 권하여 선비와 평민, 어른과 노인, 아녀자와 어린아이, 어민과 나무꾼이 모두 생업을 편안하고 즐겁게 여겨 임영부(臨瀛府)의 반짝반짝 달라진 모습이 이 대에서부터 시작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是其意將欲揚聖朝之德意(시기의장욕양성조지덕의)。挹先哲之遺風(읍선철지유풍)。講明絃誦(강명현송)。興勸農桑(흥권농상)。使士民父老婦孺漁樵(사사민부로부유어초)。咸得以安其生而樂其業(함득이안기생이악기업)。而臨瀛一府之煥然改觀。權輿於斯也(권여어사야)。]
이 대는 비록 작지만 세상운세의 오르내림과 다스리는 길이 성하고 쇠하는 데에 관계된 것이 크다. 운주계당기(鄆州谿堂記)에서 ‘옛날에는 이것을 무엇이라 하였고 지금에는 이것을 무엇이라 하는가?’라고 한 것8)이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이니 또한 좋지 아니한가. [斯雖小(사수소)。其有關於世運之升降治道之汚隆(오륭)。大矣。鄆州谿堂記所云昔謂斯何(운주계당기소운석위사하)。今謂斯何(금위사하)。此之謂也(차지위야)。不亦善乎(불역선호)。]
나는 늙고 병들었다. 이미 한 번도 이 누대에 오르지를 못했다. [余老且病(여로차병)。旣不得一登斯(기부득일등사)。]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보고, 물고기와 용이 변화하는 것을 보며, 연무와 구름, 물고기와 새가 표표히 오고가는 것을 보아서 때 묻은 흉중을 쓸어내고 묵은 빚을 갚아 버리는 것은 다행히도 계로(谿老)와 녹옹(鹿翁)의 뒤를 따라 티끌을 보태어 이름을 의탁한다.9) 마침내 사양하지 못하고 글을 쓴다. [觀日月之出沒。魚龍之變化。烟雲魚鳥之容裔往來(연운어조지용예왕래)。以盪塵胷而酬宿債(이탕진흉이수숙채)。竊幸托名於谿老鹿翁之後塵(절행탁명어계로록옹지후진)。遂不辭而書(수불사이서)]
- 이만수(李晩秀), 「경포중수기(鏡浦重修記)」『극원유고(屐園遺稿)』 권20
1) 원화동천(元化洞天) : 일반적으로 원화는 천지의 조화를 뜻하고 동천은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한다. 조선시대 양사언(楊士彦)이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재임 중에 금강산 만폭동의 큰 바위에다 ‘蓬萊楓嶽元化洞天’ 여덟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이후 자연스럽게 금강산 일대의 명승을 연상시키는 말이 되었다.
2) 구룡연(九龍淵) : 금강산 구룡폭포 아래에 있는 연못이다. 외금강 구역의 절경의 하나로 꼽힌다.
3) 삼일호(三日湖) : 고성군에서 5리 쯤 떨어진 바닷가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이다. 신라 때 영랑(永郞), 술랑(述郞), 안상(安詳) 등이 사흘 동안 여기에서 노닐며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삼일호라는 이름이 생겼다.
4) 아홉 고을 : 관동팔경으로 이름난 고을들이다. 흡곡(시중대), 통천(총석정), 고성(삼일포), 간성(청간정), 양양(낙산사), 강릉(경포대), 삼척(죽서루), 울진(망양정), 평해(월송정)이다.
5) 삼고(三古) : 삼황(三皇)시대를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로 구분한 것을 말한다. 복희[伏羲, BC 3528 太虞儀(5대)桓雄의 아들] 때를 상고, 신농(神農 BC 3218 炎帝) 때를 중고, 헌원(軒轅 BC 2692 黃帝)의 시기는 하고다.
6) 옛날 …… 와서 : 조선 태조(太祖)와 세조(世祖)의 행차를 가리킨다.
7) 정조(正祖)께서 …… 있다 : 강릉 오죽헌에는 이이의 친필 『격몽요결』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정조가 1788년 이를 가져와 열람한 뒤 제사(題辭)를 적어 다시 오죽헌에 보냈다.
8) 운주계당기(鄆州谿堂記) ……한 것 : 한유(韓愈)의 「운주계당시서(鄆州溪堂詩序)」에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였고 지금은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는가?’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당 헌종 14년 동평(東平) 지방이 평정된 후 동평의 핵심 지방인 운주(鄆州)의 인심이 이 곳에 출진(出鎭)한 관찰사의 선정(善政)으로 ‘옛날’과 ‘지금’ 사이에 크게 변하였음을 가리킨다.
9) 계로(溪老)와 …… 의탁한다 :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경포대기(鏡浦臺記)」와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의 「경포대중수기(鏡浦臺重修記)」를 참고하라는 뜻이다.
2. 김시습(金時習)에 대하여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 천재라는 소문을 들은 당시 세종임금이 그를 불러서 삼각산이란 시제(詩題)를 주자 겨우 다섯 살이던 그가 아래와 같은 시를 지으니, 세종이 탄복하고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삼각산 높은 봉우리 하늘을 꿰뚫었으니 三角高峰貫太靑(삼각고봉관태청)
올라가면 북두성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겠네 登可接撫北斗星(등가접무북두성)
산봉우리에 구름과 안개가 일 뿐만 아니라 非徒岳峀雲霧興(비도악수운무흥)
왕성의 번영을 만세까지 이어 가도록 하네 能使王都萬世榮(능사왕도만세영)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벼슬하지 않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했던 김시습과 같이 생육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도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홍유손(洪裕孫), 이총(李摠)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면서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남효온은 19세 연상인 김시습과는 망년(忘年)에는 벗이었다.
사육신과 생육신은 모두 절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지켜 스스로 유자(儒者)임을 자처하였지만, 특히 김시습의 삶은 노장과 불교 풍(風)의 삶이었다. 대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은 지식인들의 고뇌와 저항이 술과 객기,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표출되기도 하니, 김시습과 남효온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저항의 모습은 현실을 견디지 못한 천재의 일탈(逸脫)이었다.
김시습(金時習)이 죽자 친구인 소총(篠叢) 홍유손(洪裕孫 1431~1529)이 지은 제문(祭文)을 보자.
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인편에 전해 듣고 모두들 크게 놀라고 슬퍼 콧등이 시큰하고 눈물이 흐르려 했으니, 슬픈 심정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人傳公之蟬蛻(인전공지선태), 各驚悼而惻惻(각경도이측측). 幾酸淚之潸然(기산루지산연), 豈其情之有極(기기정지유극)!]
그러나 달려가 곡하려 해도, 가는 길이 너무도 멀기에 이렇게 제문을 보내어 멀리서 조문을 드리며 평생의 감회를 말하고자 합니다. [欲奔馳而一臨(욕분치이일림), 路江南其綿邈(로강남기면막). 故緘辭而遠唁(고함사이원언), 敍平生之幽懷(서평생지유회).]
아! 우리 공께서는 세상에 태어난 지 겨우 다섯 살에 이름이 크게 알려졌으니, 삼각산(三角山) 운운한 절구 한 수를 짓자 노사(老師) 숙유(宿儒)들이 탄복하였고 세상이 놀라 떠들썩하였으며, 사람들은 “중니(仲尼 - 孔子의 字)가 다시 태어났다.”고들 하였습니다. [嗟(차) 我公之生世, 造五歲而名恢(회). 詠三角之一絶(절), 使老儒而心灰. 擧世爲之譁駭(거세위지화해), 云仲尼之復生.]
그러나 공은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머리를 깎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여, 공맹(孔孟)의 밝은 도에 통하는 한편 천축(天竺)의 현묘한 학설을 공부하였습니다. [公不樂夫爲賓(공불악부위빈), 倚西敎以爲形(의서교이위형). 通鄒魯之昭道(통추로지소도), 究五竺之玄說(구오축지현설).]
그리하여 공무(空無)의 가르침에서 물아(物我)를 모두 잊고 일월(日月)과 같은 성인과 성정(性情)이 같은 경지에 올랐습니다. [渾物我於無家(혼물아어무가), 齊性情於日月(제성정어일월).]
이에 문하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과(因果)와 화복(禍福)의 설을 물었으나, 공은 이윽고 그 설이 허탄함을 싫어하고 술에 의탁하여 화광동진(和光同塵)하였습니다. [人依赴之益衆(인의부지익중), 詰因果與禍福(힐인과여화복). 公又厭其誕妄(공우염기탄망), 托烏程而光塵(탁오정이광진).]
이에 모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들 했지만, 그 내면에 온축된 참된 세계에 탄복하였으니, 많은 벼슬아치들이 공과 어깨를 나란히 벗하여 격식을 따지지 않고 흉허물 없이 지냈으나 공은 오연히 세상 사람들을 굽어보았습니다. [不知者之謂狂(부지자지위광), 然亦服其內眞. 軒冕靑紫之貴(헌면청자지귀), 皆朋儔之與肩(개붕주지여견). 相爾汝於形外(상이여어형외), 然腆鮮以傲然(연전선이오연).]
그리하여 우리 동방의 인물은 공의 안중에 드는 이가 없었으니, 마치 구름이 걷힌 하늘처럼 아무도 인정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眼扶桑其盡空(안부상기진공), 怳雲掃乎紺天(황운소호감천).]
저 명산대천들이 공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기암괴석과 빼어난 하천(河川)들이 공의 품평에 의해 그 이름이 더욱 알려지곤 했습니다. [彼名山與大川, 惟公迹之編著. 奇巖怪石勝水, 待公賞而增色(대공상이증색).]
만년에는 추강(秋江)과 서로 뜻이 맞아 지극한 이치를 유감없이 담론하였으며, 그리하여 함께 월호(月湖)에서 소요하였는데 헤어지고 만남이 언제나 약속한 듯 변함이 없었습니다. [晚秋江之相遇, 談至理之無隱. 共月湖而逍遙, 離合不遺其信.]
그러다 추강이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공은 그만 둘도 없는 지기(知己)를 잃고 말았습니다. [杏雨先公而廢(행우선공이폐), 令伯牙而絶絃(령백아이절현).]
슬프다! 오늘 공이 시해(尸解)1)하심은 어찌 황천(黃泉)으로 추강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哀今日之尸解(애금일지시해), 盍欲追乎玄泉(합욕추호현천)?]
생각건대, 구천(九天)에서 두 분이 어울려 맘껏 시를 창수(唱酬)하고 너울너울 춤도 추면서, 필시 이 티끌세상을 굽어보고 손뼉을 치며 껄껄 웃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想遊戲於九天(상유희어구천), 恣唱酬而蹁躚(자창수이편선). 必俯視乎塵寰(필부시호진환), 亦撫掌而大噱(역무장이대갹).]
평소 저자 거리에서 공과 함께 술을 마시던 술꾼들이 다들 곡하며 몹시 슬퍼하고 있습니다. [素市飮之酒徒, 咸哀哭而痛切.]
아! 다시는 공과 만나지 못하다니, 길이 유명(幽明)을 달리하시고 말았습니다. [喟不再夫邂逅(위불재부해후), 憫幽明之永隔(민유명지영격).]
생각하면, 공의 말씀은 그저 심상하여 전혀 색은행괴(索隱行怪)2)를 하지 않았으니, 비록 내면의 온축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들 평소의 깊은 수양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念公言之尋常, 不怪行而隱索(불괴행이은색). 雖不講其內蘊(수불강기내온), 誰不知夫素賾(수부지부소색)?]
공은 비록 세상에 숨어 살았어도 그 마음은 실로 오묘했나니, 공을 알기로는 우리만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公雖隱而心妙(공수은이심묘), 知公者莫吾曹若(지공자막오조약).]
아아! 공이 이렇게 멀리 떠나신 것은 어쩌면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 사람들을 미워해서가 아닐는지요. [嗚呼公之遠逝, 無乃惡夫人詐(무내악부인사)?]
그러나 죽음이 오히려 삶보다 나으니, 만세(萬世)의 오랜 세월도 찰나에 불과합니다. 공이야 세상을 떠나고 세상에 머무는 데 조금인들 연연하겠습니까. [然如死之逾生(연여사지유생), 縱萬世其尙乍(종만세기상사). 公豈意於去住(공기의어거주)?]
마치 밤과 낮이 바뀌는 것처럼 삶과 죽음을 인식하여 조용히 받아들이실 뿐입니다.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공의 본모습을 뉘라서 보리요. [隨晝夜而從容. 恒不滅兮誰見(항불멸혜수견)?]
몽롱한 육안(肉眼)을 비웃을 뿐입니다. 환술(幻術)을 부려 기행(奇行)을 일삼는 것은 진실로 우리 공이 미워하던 바입니다. [笑肉眼之曚曨(소육안지몽롱). 現幻術而立奇(현환술이립기), 誠我公之惡斯(성아공지악사).]
공이 떠남이야 사사로운 정이 없겠지만 사람들이 슬퍼함은 사사로운 정이 있습니다. [公之去兮無私(공지거혜무사), 人之悲兮有私(인지비혜유사).]
애오라지 세상의 습속을 벗어나지 못하여, 다시금 멀리서 제문을 보내 길이 사모하는 마음을 올립니다. [聊未免夫世習(료미면부세습), 却遙薦其永思(각요천기영사).]
공의 정신은 허공에 두루 찼으니, 지금 이 작은 정성을 응감(應感)하소서! [公之神兮徧虛空(공지신혜편허공), 庶幾感微誠於此時(서기감미성어차시).]
- 홍유손(洪裕孫),〈祭金悅卿時習文(제김열경시습문)〉,《소총유고(篠叢遺稿)》
1) 시해(尸解) : 도가(道家)에서 수련이 깊은 사람이 육신을 남겨둔 채 진신(眞身)이 빠져 나가는 것으로, 여기서는 죽음을 미화한 말로 쓰였다.
2) 색은행괴(索隱行怪) : 《중용》에 나오는 말로 일반적으로 남들이 하지 않는 괴이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3.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호민론(豪民論)
허균(許筠:1569~1618)은 선조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활약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당시의 사회에서 허균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허균은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18년 역적혐의를 받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허균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홍길동전』은 인간의 본성인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것이 오늘날의 인류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라는 점에서 공헌한 바가 클 뿐 아니라 지금도 많이 읽히고 있다.
허균은 1569년(선조 2) 당시의 경상도관찰사 허엽(許曄)의 3남 2녀 중의 막내아들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맏형 허성(許筬)과 중형(仲兄) 허봉(許篈)은 그의 부친과 더불어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했으며, 성리학과 문장, 외교활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허균에게는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5세 위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있었다. 명문재사(名文才士)의 혈통을 이은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나면서 난설헌과 함께 중형의 벗인 이달(李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에 두려워 할 바는 백성뿐이다’라고 전제한 후에 백성을 항민과 원민, 호민으로 나누었다. 또 ‘국왕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고 하여 백성의 위대한 힘을 자각시키고 있는데 호민론(豪民論)의 내용을 보자.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天下之所可畏者(천하지소가외자), 唯民而已(유민이이).]
백성은 물불이나 호랑이표범보다도 두려워할 만한데 윗자리에 있는 자가 업신여기며 길들이고 심하게 다루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民之可畏, 有甚於水火虎豹(유심어수화호표). 在上者, 方且狎馴而虐使之(방차압순이학사지); 抑獨何哉(억독하재)?]
무릇 성공을 함께 즐기면서 일상에 얽매여서 순순히 법을 받들고 윗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자는 항민(恒民)이다. [夫可與樂成而拘於所常見者, 循循然奉法役於上者, 恒民也.] 항민은 두려워할 것조차 없다. [恒民, 不足畏也.]
가렴주구에 가죽이 벗겨지고 뼛골이 부서지는데도 번 것은 모두 갖다 바친다. [厲取之而剝膚椎髓(려취지이박부추수), 竭其廬入地出(갈기려입지출),]
끝없는 요구에 괴로워하고 한숨 쉬며 윗사람을 헐뜯는 자는 원민(怨民)이니 원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以供無窮之求(이공무궁지구), 愁嘆吐嗟(수탄토차), 咎其上者(구기상자), 怨民也. 怨民, 不必畏也.]
백정이나 장사치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몰래 이심을 품고는 천하를 엿보아 시절이 어지러워지면 자신이 바란 것을 이루려는 자는 호민(豪民)이니, 무릇 호민이야말로 크게 두려워할 만한 존재이다. [潛蹤屠販之中(잠종도판지중), 陰畜異心(음축이심), 僻倪天地間(벽예천지간), 乘時之有故(승시지유고), 欲售其願者(욕수기원자), 豪民也(호민야). 夫豪民者(부호민자), 大可畏也(대가외야).]
호민이 나라의 분열을 엿보고 시절의 어지러움을 틈타서 밭도랑 가운데서 한번 치고 일어나면 저 원민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여서 모의하지 않고도 한목소리를 낸다. [豪民(호민), 伺國之釁(사국지흔), 覘事機之可乘(첨사기지가승), 奮臂一呼於壟畝之上(분비일호어농무지상). 則彼怨民者(칙피원민자), 聞聲而集(문성이집), 不謀而同唱(불모이동창).]
그러면 저 항민도 역시 살 구멍을 찾아서 몽둥이와 낫을 들고 따라 나서 무도한 임금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彼恒民者(피항민자), 亦求其所以生(역구기소이생), 不得不鋤耰棘矜往從之(부득불서우극긍왕종지), 以誅无道也(이주무도야).]
진나라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때문에 망했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또한 황건적 때문이며, 당나라가 쇠퇴해지자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기회를 틈타서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야 말았다. [秦之亡也, 以勝廣; 而漢氏之亂, 亦因黃巾; 唐之衰, 而王仙芝黃巢乘之, 卒以此亡人國而後已(졸이차망인국이후이).]
이는 모두 백성을 가렴주구 하여 자신만을 배불렸기에 호민이 그 틈을 탈 수 있었던 것이다. [是皆厲民自養之咎(시개려민자양지구), 而豪民得以乘其隙也(이호민득이승기극야).]
무릇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보호하라는 것이지, 임금 한 사람이 눈을 부라리며 온갖 욕심을 채우라는 것이 아니다. [夫天之立司牧, 爲養民也. 非欲使一人, 恣睢於上(자휴어상), 以逞溪壑之慾矣(이령계학지욕의).]
따라서 진한 이래로 나라가 망한 것은 당연지사이지 불행한 것이 아니다. [彼秦漢以下之禍(피진한이하지화), 宜矣(의의)! 非不幸也.]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땅은 좁고 사람은 적다. 백성은 비뚤어지고 악착스러워 기절이나 협기가 없다. [今我國不然, 地陿阨而人少(지협액이인소). 民且呰窳齷齪(민차자유악착), 无奇節俠氣(무기절협기).]
따라서 태평한 시대에 대단한 인물이 나서 세상에 쓰이지도 않지만, 난세라고 하여 호민이나 한졸(猂卒)이 나와 백성을 선동하여 국가의 근심이 되는 일도 없으니 이 또한 다행이다. [故平居, 雖無鉅人雋才出爲世用(수무거인준재출위세용); 臨亂(임난), 亦无有豪民悍卒倡亂首爲國患者(역무유호민한졸창란수위국환자), 其亦幸也.]
그러나 지금은 고려와는 다르다. [雖然(수연), 今之時, 與王氏時, 不同也.] 고려 때에는 백성에게 세금을 매겨도 한도가 있었다. [前朝, 賦於民有限,] 논밭을 제외하고는 산이나 강에서 나는 산물은 백성과 함께 나누었고 상인과 장인들도 먹고살 수 있도록 하였다. [而山澤之利與民共之(이산택지리여민공지), 通商而惠工,] 또 세금이 들어올 것을 헤아려서 쓸 것을 정하여 나라에 비축이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갑자기 전쟁이나 국상(國喪)이 나도 세금을 더 걷지 않았다. [又能量入爲出(우능양입위출), 使國有餘儲(사국유여저), 卒有大兵大喪, 不加其賦. 及其季也,] 그런데도 고려 말기에 가서는 오히려 나라의 곤궁을 걱정하게 되었다. [猶患其三空焉(유환기삼공언).]
조선은 그렇지 않다. 몇 안 되는 가난한 백성을 가지고 중국과 똑같이 예법을 차려서 귀신 섬기고 조상 모신다. [我則不然. 以區區之民, 其事神奉上之節, 與中國等.]
백성의 세금이 국가로 들어오는 것은 겨우 2할이고 나머지는 간사한 무리에게 낭자하게 흩어진다. [而民之出賦五分, 則利歸公家者(칙이귀공가자), 纔一分(재일분), 其餘狼戾於姦私焉(기여낭려어간사언).]
또 저축이 없으니 일이 생기면 일 년에 두 번도 세금을 거두는데, 수령은 이때를 빙자하여 빗자루로 쓸듯 싹싹 거두어간다. [且府無餘儲(차부무여저), 有事則一年或再賦(유사칙일연혹재부), 而守宰之憑以箕斂(이수재지빙이기렴), 亦罔有紀極(역망유기극).]
백성의 수심과 원성은 고려 말보다 높은데도 윗사람들이 편하게 앉아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故民之愁怨, 有甚於王氏之季(유심어왕씨지계). 上之人, 恬不知畏(념부지외). 以我國無豪民也(이아국무호민야).]
불행하게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몽둥이를 들고 일어나면 저 원망하는 백성이 낫과 가래를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不幸而如甄萱弓裔者出(불행이여견훤궁예자출), 奮其白挺(분기백정), 則愁怨之民, 安保其不往從(안보기불왕종):]
만약 그렇게 된다면 천하가 변란에 휩싸이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而蘄梁六合之變(이기량육합지변), 可跼足須也(가국족수야).]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이 두려운 작금의 형세를 분명하게 알아서 지금까지의 잘못을 고친다면 그나마 괜찮을 것이다. [爲民牧者, 灼知可畏之形(작지가외지형), 與更其弦轍(여갱기현철), 則猶可及已(칙유가급이).]
- 허균 (許筠, 1569~1618), 「호민론(豪民論)」,『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권11
4. 김시습의 『부도지』을 찾아라
가. 부도지(符都誌)란 - 신라정승 박제상(朴提上)이 펴내고(撰), 조선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이 다시 펴낸 기록이 있다. [징심록 15지 중의 하나]
내용 → 마고성(麻姑城)에 천인 마고(麻姑)로부터 궁희(穹姬) - 황궁(黃穹) - 유인(有因) 시대 약 3,000년을 거쳐 환인(桓仁)에게로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전하여 인간세계를 통치했다는 내용인데 그 원본을 찾으면 좋다. 그 이유는 가장 오랜 우리들의 조상이 인류문명의 뿌리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삼성기(三聖紀)란 - 上편은 신라승려 안함노(安含老)가 펴냈고(撰), 下편은 원동중(元董仲)이 펴냈다(撰)는 것인데 서기 1469년 9월 18일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국왕 세조가 전국의 관찰사에게 모조리 회수하라는 지시를 내린 역사서 이름이 나온다. 요즘 알려진 내용은 환인시대와 환웅시대 역사로서 안파견 환인(安巴堅 桓仁)에서부터 지위리(智爲利) 환인까지 일곱분이 알려지고 있다. 환인시대 강역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에 통틀어 환국(桓國)이라 하고 12개 종족정부를 구성하여 존속기간은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 했고 그 뒤에 桓雄시대 1,565년의 자세한 역사서이다.
다.환단고기(桓檀古記) - 1911년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했다는 것.
내용 → 삼성기, 태백일사, 소도경전, 단군세기 등 고전과 경전을 모아서 환국시대 이후 역사를 정리했고, 그 중에서 환국시대는 환인천황이 통치하였고, 환웅시대는 국호를 배달국(倍達國)으로 하고, 도읍지는 신시(神市)였다. 초대 환웅천황 거발한(居發桓)부터 18대 거불단(居弗檀)까지 역사이다.
라. 단군세기(檀君世紀) - 고려 1363년 홍행촌 이암(李嵒)이 펴냈다는 것.
내용 → 초대단군 왕검(王儉 BC2333년)부터 47대 단군 고열가(古列加 BC239년)까지 도읍지를 아사달로 하고, 존속기간은 2,096년, 치적과 사건을 정리하였는데 시조 단군 왕검이 신시개천 1,565년 되는 해 10월3일 백성들이 추대하여 천제 화신이라 하고 임금으로 받들었다는 것이다.
단군이라는 이름은 북부여 초대단군 해모수(解慕漱 BC239)가 인계받아 6대 고무서(高無胥 BC59)까지 존속하고, 고무서(高無胥)의 아들이 추모왕(高朱蒙 - 고구려 시조)이라는 내용이다.
마. 광개토호태왕비문(廣開土好太王碑文)- 앞부분 (고구려 시조 : 鄒牟王, 중국사서 : 高朱蒙)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剖卵降世生而有聖德鄒牟王奉母命駕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不樂世位天遺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罡履龍首昇天顧命世子
해석(解釋) - 아주 옛날부터 선조들이 비롯한 이 곳(之)에 추모왕은 나라의 기틀을 만들고 건국하였다. 추모 자신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나 하늘이 다스리는 단군조선의 자손이다. 어머니는 물과 강을 다스리는 하백신(河伯神)의 후예이다. 내려 주신 알을 스스로 깨고 세상에 태어나 성인의 덕망을 갖춘 추모는 왕으로써 천명을 받들어 어머니를 가마에 모시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남쪽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북부여 아무르강(奄利大水)을 만나니(由) 왕은 나루로 가서 말하기를 “나는 이곳을(是) 다스리는(皇) 하늘의 자손이고 어머니는 하백신의 여식이다. 내가 바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려거든 거북들이 나와서 태워 줄 뗏목을 만들어 이어서 내 목소리에 응해다오.” 하고 말하니까 바로 거북들이 떠올라서 갈대를 연결하여 강을 건너게(渡) 도와주니(造) 브이르 호수 골짜기(沸流谷) 홀본(忽本)에서 터를 닦고(於) 서쪽 산상에 성을 쌓아 도읍을 세우게 되었다.
마침내(焉) 세상의 지위를 즐기지 못하고(不樂世位)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영접하니 왕은 홀본 동편에서 반짝이는 북두성(罡) 같이 용의 뒷머리를 밟으시며(履龍首) 세자에게 뒷일을 당부해 맡기고(顧命) 승천(昇天)하였다.
해설(解說) -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비문(碑文)이 비록 한자(漢字)로 새겨진 것은 우리조상들이 한자(漢字)를 보편적(普遍的)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어(現代語)로 번역(飜譯 - lnterpretation)할 때는 두 가지 방식(方式)이 발생(發生)할 수가 있다. 하나는 한문식(漢文式) 번역(飜譯)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식(詞文式) 번역(飜譯)이다. 여기에 일역(日譯)은 논(論)할 대상(對象)조차 되지 않는다.
한국(韓國) 중국(中國) 일본(日本)은 고대사회(古代社會)에서 한자(漢字)를 공통(共通)으로 사용(使用)했는데 한국 및 일본은 중국과 문장의 어순이나 구조가 달랐다. 우리는 지금 고유한 문자인 한글을 쓰고 있으나 일본(日本)은 한정된 고립어 문자(文字)를 한자(漢字)와 병행하지 않으면 말씀방식[사문식(詞文式) – 소리로 나타나는 방식)은 담아낼 수 없다. 중국(中國)은 한자(漢字)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관념적 문장문화로 변형되면서 고대문은 버렸고 조선사회는 어정쩡한 입장에서 출세하려는 사대주의자들이 한문문장을 새문화로 받아들였지만 맞지 않아서 고집스럽게 옛글을 사용해 왔는데 이것이 말씀식이다. 말씀식 한문은 신라에서 이두 표기식으로 발전했다.
태왕비문(太王碑文)이 한문(漢文)으로 쓰여 있지만 중국(中國) 측에서는 정확히 해독할 수가 없어 고구려 전승기록문(戰勝記錄文)으로 보았을 뿐 한문의 관념적 구조에는 전혀 맞지 않다. 그러나 말씀식(詞文)인 점에서 고구려(高句麗)를 뛰어넘는 잃어버린 고대(古代)를 회복(回復)하는 역사(歷史)이다.
여기서는 1898년 M. Courant의 해독, 1903년 榮禧筱峰(영희소봉)의 해독을 왕건군(王健群)이 보완한 것(好太王碑硏究 附錄), 1988년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해독(국학총서 제2집), 水谷悌二郞의 해독(1973 한국사대계 제2권 부록자료) 등을 비교하여 미판독 탈자는 영희소봉의 최초해독으로 보완하고 정인보(鄭寅普)의 해독(1930년 조선문학 원류고)문도 참고하여 번역하였다.
惟昔始祖 鄒牟王之 創基也
中國 王健群 번역 : 옛날이 [우리들의]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건립할 때에
말씀식 번역문 : 아주 오래도록 선조들이 비롯하였으니 추모왕은 이 곳(之)에 나라의 기틀을 만들고 건국하였다.
<惟> 아주, 오로지, 한결같이 등의 의미사, 도모하다, 벌려놓다.
<昔> 옛, 오랜, 부사로 오래도록, 명사로는 오랫동안,
<始祖> 처음 비롯한 조상, 개국시조를 뜻하나 추모왕과 반복의미가 필요 없으므로 “선조들이 비롯하였다“가 맞다.
<惟昔始祖(유석시조)> ”아주 오래도록 선조들이 비롯함“이다.
<鄒牟王之(추모왕지)> 추모왕은 이곳(之 : 지시대명사) 조선의 옛 땅을 기리킨다. 之는 조사(助詞)가 아니고 대명사인 주어(主語)이다. 잃어버린 이 곳 고대의 땅에서 나라를 새롭게 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다.
<創基也(창기야)> 기틀을 새로이 한다는 것은 선조들이 비롯한 이 땅에서 앞 문맥의 의미로 볼 때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단군조선인 고조선이 한조(漢朝)에 의하여 멸망하고 허수아비정권 기자조선을 세웠으나 선조들은 언어와 어순이 다른 허수아비 통치자를 인정할 수 없었고, 산발적으로 저항과 투쟁을 하여 오랫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만들었다는 의미를 서두에 담고 있다.
出自北夫餘天帝之子
中國 王健群 번역 : 그의 부친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며,.
말씀식 번역문 : 자신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나 하늘이 다스리는 옛 조선의 자손이다.
중국 번역은 북부여가 天帝의 나라이며 추모는 부여왕의 아들로 묘사되어 추모의 존재를 격하시키고 언어파괴식 번역을 했다.
말씀식 번역에서는 비록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나 본래의 조상은 하늘의 자손인 단군조선의 후예라는 의미가 <之>라는 그 곳, 즉 대명사에 담겨있다.
天帝之子 : 천제(天帝)의 아들은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임금과 옛 조선(朝鮮)의 단군(檀君)임금이다. 천제(天帝)는 皇帝나 黃帝, 天皇보다 으뜸자리 하느님의 후손이다.
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
中國 王健群 飜譯 : 왕이 나루에 이르러 물을 보고 말했다.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말씀식 번역문 : 왕은 나루에 가서 말하기를 “나는 이곳을 다스리는(是皇) 하늘의 자손(天之子)이다.....”
한문식 해독에는 시(是)를 종결어미인 조사(助詞)로 해석했지만 추모는 옛 조선의 땅이 이미 하늘과 같고 이 땅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다스림 대상임을 앞에서 천명한 만큼 是는 이곳을 지칭하고 옛 조선의 땅은 하늘이 다스린다(皇天)는 뜻이다. 옛 조선의 땅은 역사가 진행하는 존재감을 천명할 뿐 아니라 옛 단군조선의 후손은 모두가 하늘의 자손(즉 天孫民族)임을 천명한 가장 확실한 실증사료(實證史料)이다. 반면 중국의 천자사상(天子思想)은 임금이 아닌 자가 천자를 사칭하면 반역으로 처형되는 백성일 뿐이다.
奄利大水 : 엄리대수(奄利大水)는 아무르(Amyp)강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추정하는 엄리대수(奄利大水)의 위치(位置)로 보아서도 아무르강과 일치한다. 엄리(奄利)의 음운구조(音韻構造)와 아무르의 음운구조가 완전 일치하는데 아무르(Amyp)를 한자(漢字)로 전사(轉寫)한 것이 엄리(奄利)이다.
沸流谷忽本 : 추모왕(鄒牟王)은 BC 37년, 흘승골(紇升骨) 비류수(沸流水)에 흘본부여(紇本扶餘 - 삼국사기에는 卒本扶餘)를 개국하였다. 서기 3년 제2대 유류왕(儒留王)은 도읍(都邑)을 흘본성(紇本城 또는 卒本城)에서 따뜻한 남쪽인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다. 흘승골(紇升骨)은 지금의 동몽골(東蒙古) 도르너드아이막의 ‘할힝골’을 한자(漢字)로 표기한 것이다. 비류수(沸流水)나 보술수(普述水)도 할힝골의 ‘부이르’호수(한자로 적음)를 말한다. 흘본부여를 오녀산성에서 개국한 것으로 보는 가설은 전혀 맞지 않다. (2012.10.24. 蒙古 울란바타르大學校 總長의 講演에서)
바. 정사(正史)인 삼국유사(三國遺事)
내용 →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서자라는 벼슬을 가진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탐구하는 뜻을 아버지가 알았다. 삼위와 태백을 살펴보니 가히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할 만 하였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었다. 무리 3천을 거느리고 가서 태백산 정상에다 신단을 만들고 그 아래 도읍지를 만들었으니 이름을 신시라 하고 이를 일컬어 환웅천왕이라고 한다.
[원문 - 昔有桓國...(석유환국...) 庶子桓雄(서자환웅) 數意天下(수의천하) 貪求人世(탐구인세) 父知子意(부지자의) 下視三危太伯(하시삼위태백) 可以弘益人間(가이홍익인간) 乃授天符印(내수천부인) 三箇(삼개) 雄率徒三千(웅솔도삼천) 降於(강어) 太白山頂(태백산정) 神檀樹下(신단수하) 謂之神市(위지신시) 是謂(시위) 桓雄天王也(환웅천왕야)]
1911년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 고서를 모아서 30부를 만들었다는 환단고기는 지금 전하는 것이 없고 추적결과 그는 1920년 작고했다는 사실이 확인될 뿐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에는 “환단고기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출판됐다”는 점과 1911년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 30부는 없고 그의 제자라는 이유립이 환단고기가 인쇄되어 나오기 3년 전에 일본에 주어서 먼저 환단고기가 나왔다는데 거꾸로 일본판 환단고기 한자원문을 베끼고 일문을 번역하여 한국에 널리 퍼져있다는 내용을 언론과 학계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세조 3년(1457 정축) 5월 26일(戊子) 3번째 기사, 예종 1년(1469 기축) 9월 18일(무술) 3번째 기사, 성종 즉위년(1469 기축) 12월 9일(무오) 6번째 기사 등에서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여러 사서들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내고 숨기는 자를 참형한다고 까지 했으나 환단고기를 구성한 삼성기 대변설 조대기 고조선비사 등 상당부분 실증사료가 당시에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말살의 원조가 세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물론 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가장 악랄한 역사말살이 있었지만 실존사료가 존재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 내용 중에는 오성취루(五星聚婁 13대단군 홀달 무진50년 BC 1733), 일식 등 상당부분 과학적 사실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쓴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가 붙은 ‘환단고기’가 1982년 ‘역사와 현대사’에서 출간된 것과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를 비교하니 한자 원문이 국내에서 나중에 출간된 원문과 똑같다는 사실을 신동아 기자가 확인했는데 놀랍게도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神道)에 접목시켜놓았다는 것이다. 가지마는 일본 신도의 원류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환단고기를 출판했다고 밝혔다. 그는 머리글에서 위서 시비가 있는 일본서기의 일부 내용을 부인하며 환단고기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신도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보다도 약탈문화 사료임을 떳떳이 밝혀야 했다.
일본은 메이지(明治)시절 엘리트들이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 등 자료를 조작하여서 천황 숭배를 강화시켰다. 그 결과는 결국 주변국에 침략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성노예 등 반인륜적 패악을 저지른 쓸모없는 인간을 양산했다. 일본의 최고 정치지도급이라는 자들이 천황과 1급 전범위패가 있는 신궁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반인륜 범죄에 대한 반성은커녕 지금도 후손에게 침략과 반인륜 행위가 정당하다고 교육하는 만행을 일삼고 있으니 반인륜 범죄자는 인류사회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1989.10.25.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처형(處刑). 2006.12.30. 이라크 후세인 처형(處刑). 2011. 2.11. 이집트 무바라크 사망. 2011. 5. 2 파키스탄 빈 라덴 사살. 2011.10.20. 리비아 카다피 피살(被殺) 등이다. 일본(日本) 왕(王)은 주변국 침략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성노예 등 반인륜적 패악을 저지른 쓸모없는 인간을 양산한 인류 최고 전범자(戰犯者)임에도 살려 두었다. 지금도 뻔뻔한 전범자의 후손과 졸개들이 제거되는 것은 인류문명사의 必然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