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 문학관과 펄벅 문학관을 다녀오다 (5월18일)
오월의 초록은 에덴동산 같다.
8년 동안 손주들을 돌보다가 올해부터 마음의 여유를 조금씩 찾기 시작했다.
새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은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얼굴은 햇살 닮은 미소가 가득이다.
8시 40분, 집결 장소로 속속히 모인 회원들은 두 대의 자동차를 나눠타고 수주 문학관으로 향했다 수주 문학관은 수주도서관 옆이다. 개관한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리 예약된 해설사의 안내로 변영로 시인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수주 변영로가 태어난 곳은 사실상 서울이지만 부모님의 직장으로 인해 성장 한 곳이 부천이기에 수주 문학관을 부천에 세웠다 한다.
수주 변영로 시인은 대한제국에 태어나서 일제 강점기를 지나 3.1운동까지 겪으면서 창씨개명도 하지 않고 힘들게 소신을 지켜온 몇 안되는 분이시다. 해방이 되고 성균관대 교수로 지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문학관에는 그의 자제분과 손주들이 많은 것을 기증해줬다는 해설사의 얘기도 있었다. 본래 수주라는 말은 고려 시대의 옛 지명에서 따 온 것으로 그의 첫째 형인 변영만의 여러 호 중에 가장 아끼는 호였지만 막내 동생인 변영로가 수주라는 호를 너무도 갖고 싶어 형에게 간청하여 받은 호라고 한다. 수주라는 호에는 형제간의 각별한 사랑이 녹아있는 호이기도 하다.
수주 변영로는 단순히 시만 쓰신 것이 아니라 산문도 쓰시고 언론인 번역가 영문학자 등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을 보이며 큰 발자국을 남겼다 단 한 줄이라도 친일 문장이나 일신을 더럽히는 글을 쓰지 않았던 수주 번영로는 늘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분이셨다고 한다
1920년대 한국 근대시가 이제 막 태동하던 시기, 수주 변영로는 첫 번째 시집 <조선의 마음 1924>은 당시 3,1운동의 실패로 좌절감을 맛보던 조선의 청춘 남녀에게 보내는 뜨거운 위로의 노래라고 한다. 특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논개는 일제의 탄압을 오히려 드높은 예술적 시혼으로 당당하게 맞선 한국 근대시의 백미 중 하나이다. 그만큼 수주 번영로의 문학세계는 암울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도 꼿꼿한 조선인의 정신을 잘 보여줘 후세들에게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린 수주문학관을 탐방하고 야외 정원으로 이동하여 수주 번영로의 시를 한 편씩 낭송을 했다
논개(論介)/ 변영로
이연옥 낭송
거룩한 분노는
종교 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情)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다음으로 간곳은 펄벅문학관이다. 펄벅은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오랫동안(38년) 살았으며 중국을 바탕으로 소설 <대지>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 받았다.
펄벅 여사의 회고록을 보면 수업에 참석한 독립군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면서부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한국 여행에서 만난 감나무에 몇 개 남겨놓은 감이며, 소달구지를 타지 않고 걸어가는 농부의 마음이며 등등의 참으로 많은 한국 사람들의 정신적인 세계를 좋아하셔서 한국을 보석 같은 나라라고 하셨다고 한다.
입양기관 웰컴하우스를 설립(1949년)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사업을 시작으로 하여 펄벅재단 한국지사와 소사희망원(1967년)을 설립하게 되는데 대지를 매입하는 과정서부터 아주 많은 도움을 주신 유한양행의 창업주이신 유일한 박사가 계셨다. (참고로 유한양행하면 투명한 기업주의 대표인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한 분이시다) 펄벅 여사가 한국소설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도> 속에 6.25 전쟁 고아들을 위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유일한씨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펄벅은 전쟁 고아 및 혼혈 아동을 교육하는데 심력을 기울였고 홀트아동복지회와 결연하여 전쟁 고아들을 미국가정에 입양을 위한 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7명의 고아를 자신의 호적으로 입양하여 사랑의 삶을 실천하셨고 박진주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기도 했던 것처럼 진주를 아주 좋아하셨다고 한다.
오늘날의 이 사회가 이뤄지기까지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한 선한 영향력을 끼친 발판들이 많았고 또 선한 영향력이 이 사회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안다. 문득 나는 이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있는, 내가 존재하는, 내가 관계하는 사회에서 아주 작은 일이라도 책임감을 갖고 더불어 산다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도 일종의 선한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라는 합리화도 해 본다.
일행은 시흥으로 넘어와 오리백숙, 파전, 도토리무침, 막걸리 한 잔으로 시원하게 목을 축이며 수주 변영로와 펄벅 여사에 대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소전미술관으로 이동하여 미술 전시가 있는 곳에서 차를 나누며 소소한 담소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첫댓글 눈에 선하다는 그날이...!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깔끔한 정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