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7 나는 찾고 있다 그 사람을[눅17:11-19] 22.11.6 추수감사절설교
예수님의 일생은 사람을 찾는 생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죄인을 찾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의 말씀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 병 고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네 병이 나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사람들이 병을 고치고 돌아갔고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갔지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신 사람은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진정한 만남은 흔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만나고, 선생을 만나고, 직장을 만납니다. 그러나 부모를 만날 때 부모로 만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만나야 됩니다. 선생을 만날 때 선생으로 만나면 안됩니다. 인격을 감동시키는 스승으로 만나야 됩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도 돈 버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주님의 소명을 이루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지나셨습니다. 한 촌에서 나병환자 열명을 만났는데 그들은 멀리서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을 만나러 가다가 몸이 깨끗해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돌아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그에게 놀라운 축복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이방인은 단순히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구원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예배만 드리고 가면 안됩니다. 찬양만 하고 가면 안됩니다. 기도만 하고 가면 안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의 이 심정 속에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병을 고치러 온 사람이 아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병을 고치면서 구원받기를 원하고 문둥병에서 완전히 깨끗함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받는 것이 나를 만나는 목적인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이렇게 찾고 있습니다.
열 사람 모두 믿음은 좋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면 병이 낫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큰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예수 선생이여” 이들은 예수님이 병 고치는 선생, 문제를 해결하는 선생인 줄은 알았습니다.
또 “네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 할 때 순종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제사장을 만나라는 말은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원래 문둥병자는 제사장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로부터 형제들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사장을 만나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낫게 하시겠다는 약속이구나’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병 고치는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에게는 한가지 믿음이 없었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홉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찬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구원적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돌아온 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와야 됩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것은 예수님과 연합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예배할 수 없습니다. 찬양할 수 없습니다.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 돌아오는 사람
저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침을 받았지만 아홉 명은 돌아오지 않고 한 사람만 돌아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돌아와서 큰소리로 주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내 믿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그 믿음이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됩니다. 열 사람이 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은 돌아온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자만이 구원받은 자요, 예수께 돌아온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께 돌아온 자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우리 마음과 몸이 예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몸은 왔는데 마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입술은 돌아왔는데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몸은 돌아왔는데 물질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은 돌아왔는데 행위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예수께로 돌아왔는지 자기 자신을 성찰하십시오.
은혜를 받으러 온 사람은 많습니다. 소원을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돌아온 사람은 적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돌아온 사람을 찾으십니다.
한 사람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유의하셔야 됩니다.
이 사람은 문둥병자 열명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 그는 혼자였습니다.
우리는 무리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무리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유행 따라 살아갑니다.
관광시즌이 오면 꽃구경 가고, 단풍놀이 갑니다.
우리도 주일이 오면 교회 가는 날이라고 교회에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서야 합니다. 영광은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십니다.
그래서 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홀로 돌아올 때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나병환자 열 명은 공동 운명체입니다.
버림받은 사람들끼리, 신세가 같은 사람끼리 한탄하고 눈물을 지으면서 떼지어 다니던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유대인 아홉 명과 사마리아인 한 사람은 평소에 건강한 사람들하고는 상종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 신세나 네 신세나 같은 처지인데 인종 차별이 있겠습니까? 불쌍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함께 살자고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열 명이 다 나았는데 그 가운데서 한 사람만 빠져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동 운명체인데 거기에서 “나는 이럴 수 없다. 나는 결코 예수님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 은혜를 은혜로 보답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아홉 사람과 결별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인 것입니다. 남이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내 신세가 어떻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빠져나온 것입니다.
가난해도 하나님께 영광은 나타나야 됩니다. 병들어도 영광은 나타나야 됩니다. 외로워도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야 됩니다. 그래서 영광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열 명이 다 병 나았다고 '아 저 사람이 예수님한테 가더니 병 나았구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고백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 발아래 엎드리는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겸손인데 겸손은 인격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예수님 발아래 자기 존재를 둔 것입니다.
“주님 나를 밟으시옵소서. 내가 주님의 발등상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미 세상이 다 나를 버렸고, 가족도 버렸고,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고 천벌을 받았다고 버린 나를 살려주셨으니 주님 나는 주님 발 아래 살겠습니다”
이것이 인격입니다.
인격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것은 인격이 아닙니다. 공부하면 지식은 늘어납니다. 돈 벌면 겉이 화려해집니다. 출세하면 지위는 높아집니다. 그러나 인격은 공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앎으로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박사학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모르면 불효자요, 부모의 은혜를 알면 효자가 됩니다. 인격은 학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문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사랑하면 인격자요, 사랑하지 못하면 인격이 안된 것입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잘 모시면 인격자요, 시어머니도 며느리에게 잘해주면 인격자입니다.
예수님은 인격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고 사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람 대접했습니다.
애국자는 이 땅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는 사람이 애국자입니다.
예수님은 인격자를 찾으십니다. ‘네가 이제야 사람이 되었구나!’
복은 감사할 때까지는 복이 아닙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 때 행복도 있고, 인격도 바로 되고, 사람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의 발 밑에 엎드려 “주여,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 발아래 엎드립니다. 주여 나는 이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 발아래 엎드려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자기 존재가 발 아래 놓일 때에는 인생 전체를 주님 발 아래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자리가 어디입니까?
회전의자도 좋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릴 때 그 자리가 좋은 자리입니다. 돈 버는 자리 좋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돈 가지고 주님 발아래 엎드리면 그 자리가 복 받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돈 벌고 주님을 몰라보면 그 자리는 망하는 자리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할 때 주님을 볼 수 있다면 그 눈물이 찬란한 천국의 이슬로 자기를 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주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나병환자는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께 감사하는 사람
나병환자는 주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함으로 행복한 존재가 됩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행복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므로 인격이 바로 되고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박국 선지는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하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기쁨과 축복입니다.
감사는 은혜와 일치하는 것이며, 행복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라는 단어 eujcaris(유카리스)와 은혜라는 단어 cavriti(카리티)는 헬라어 뜻이 같습니다.
선한 자가 누구입니까? 감사하는 자는 선한 자요, 불평과 불만하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한 사람을 찾습니다. 감사하는 한 사람을 찾습니다.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럽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아홉은 어디 갔느냐 어찌하여 너 혼자 왔느냐”고 물을 때 이 사람이 할 말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예수님, 못된 놈들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예수님께 가자고 사정했는데도 병 나았으면 끝났지 예수가 무슨 소용있냐고 했습니다. 이러면 안된다. 같이 가자 하고 간청했는데도 저들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는 끝까지 함구합니다. 자기 형제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니까 세상을 다 잊어버린거에요.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만나서 너무 좋으면 과거는 다 잊혀집니다.
현재가 좋으면 과거의 슬픔도 다 화려해지듯이 현재가 복되면 과거의 고생도 아름다운 추억이 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미래에 천국의 약속을 현재 받은 사람은 땅 위에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큰 하나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니까 그 형제들이 무슨 말을 했든지 불평하는 말이 안나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비난할 것이 많습니까? 욕할 것이 많습니까? 불평할 것이 많습니까? 누구탓할 것이 많습니까?
아직 은혜를 덜 받아서 그럽니다. 아직도 구원에 대한 확증이 없기 때문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것은 최고의 복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땅의 축복은 하늘로 이어집니다. 땅에서 감사는 천국으로 이어집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기에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너는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
이중의 축복을 그에게 안겨주신 것입니다.
[예화]
미국 조지아주에 말터벨이라는 여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너무 가난한 시골학교라 학교에 피아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당시에 미국 최고의 부자였던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에게 1000불만 보내달라고 간곡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헨리 포드는 그 편지를 받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헨리 포드에게 돈을 요구해서 받아갈 때는 사정해서 받아가지만 대부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것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일거라 생각하고는 그냥 거절할 수가 없으니까 10센트를 보내주었습니다. 1000불을 달라고 했는데 1달러도 아닌 10센트를 보냈으니 이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선생님은 그 돈을 감사히 받아서 10센트만큼의 땅콩을 사서 운동장 한 구석에다 심었습니다. 얼마 후에 땅콩을 수확해서 얼마 정도의 이익금을 냈습니다. 그는 그 돈에서 얼마를 떼어서 헨리 포드에게 감사의 편지를 담아서 보내주었습니다. 또 다음 해에도 더 많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5년 만에 피아노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헨리 포드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헨리 포드는 여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너무 기뻐서 선생님이 요구한 천불의 10배나 되는 만불을 보내면서 거기에
“당신이야말로 내가 미국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이오. 나는 당신에게 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보내오, 나는 당신을 만나므로 감동을 받았소.”라는 편지를 동봉했습니다. 그 선생은 10센트를 받고 불평과 불만을 심은 것이 아니라 적게 주었다고 원망한 것이 아니라 감사의 씨를 심어서 엄청난 하늘의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땅콩의 수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수확한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부모님을 보고 감사하는 자는 그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아내를 보면서 감사하는 남편은 그 아내가 예수님의 신부인 것을 알게 되면서 주님을 만납니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죄가 크지만 아내를 구박하고 학대하는 죄는 불효하는 죄보다 더 큰 죄입니다.
예수로부터 구원받은 확증은 예수를 만나는 것인데 예수를 만나는 신부를 학대했으니 벼락맞을 짓을 한 것입니다.
또 남편에게 학대하고 잘못하는 아내도 똑같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보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담아 보십시오.
그러면 하늘이 준 독생자의 은혜를 담아주실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는 말은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교리적, 신앙적, 신학적 고백이 아니라 “너는 이미 천국을 이루었다.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하늘을 보는 신비의 사람이 되었으니 네가 가는 곳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길거리나, 일터나 성지요, 네가 사는 곳이 천국이요, 네가 이르는 곳이 하늘나라라”라고 하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굻은 그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하는 그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바로 그런 날 입니다.
다같이 찬양 – 모든 것이 은혜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