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더 와 물로 만든 척추를 가진 새가 거대한 날개를 털며 일어나는 게 보였다 작은 물고기들이 폭설처럼 쏟아졌다
쏟아지고 나니 다 은빛 티스푼인 물고기들이었다
1. 오지 않은 날들이여 2. 오지 말고 돌아가라 풍경에서 소리가 다 없어졌다
나는 포스트잇에 아빠 잘 가 라고 써야할지 아빠 가지 마 라고 써야할지 동지의 레시피를 적었다
하얀 동그라미를 빚어 뜨거운 팥죽 속에 000 자꾸 밀어 넣었다 나의 일부를 밀어 넣는 느낌 죽은 사람과 뭘 하며 밤을 보내지? 생각했다
살을 만지고 싶은데 흰 뼈의 풍경이었다
왠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날들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 국자 한 국자 눈밭에 팥죽을 던졌다
구속복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담임의 숨에서 나던 냄새 결혼식 날 주례의 숨에서 나던 냄새 나를 모욕하려고 쓴 글에서 나던 냄새
이 옷과 같은 냄새
내가 기록한 것은 내가 언제나 출발했음을 그러나 붙잡혀 돌아온 곳은 언제나 이 옷 속이었음을
토네이도를 묶어두는 것은 범죄야 끓는점에 도달한 액체를 가둬놓는 것은 재해야
나에게 우파에 좌파에 모더니스트에 친일파에 온갖 병을 뒤집어씌워도 나는 울지 않아 대신 내 콧물 가래나 받아
물고기에게 그물을 옷이라고 하다니 물고기에게 튀김옷을 외투라고 하다니
이 옷을 입으면 라디오 안에 들어간 것 같아 전 국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
사과할게요 전 국민이 사과를 바란다니 평생 사과할게요 앞으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새빨간 사과예요
왜 사과(내)가 사과(너)한테 사과를 해야 하나? 사과(너)랑 사과(나)랑 무슨 사과(상관)니?
두 손을 묶고 소매를 묶은 옷
단 한 벌
저절로 기도하는 자세가 된 내 두 손으로 찌른 내 심장에서 나는 냄새 빙 둘러앉아 갓 잡은 돼지를 나누던 소수민족 아낙의 손에서 나던 냄새
조명이 도수 높은 렌즈로 세례를 베푸는 방 그러나 아무도 옷을 입고 이 방에 들어올 순 없어
새들도 깃털을 벗고 물고기도 비늘을 벗어나야 해 나무도 물론 내 방에선 부조건 누드야
오래 낀 가죽장갑이 나에게 뻗어 올 때 훅 끼치던 화장실 냄새
때려봐 때려봐 새는 이미 날았어
네가 친 것은 그저 옷 입은 허공이야
옷 속이 훤하잖아
⸺월간 《현대시》 2019년 1월호 (재수록) ------------ 김혜순 /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어느 별의 지옥』『우리들의 陰畵』『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기계』『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잔의 붉은 거울』『당신의 첫』『슬픔치약 거울크림』『피어라 돼지』『죽음의 자서전』『날개 환상통』 등.